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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적 학문불교의 발전

4. 종합적 학문불교의 발전

1) 삼계교
남북조시대 말기 북주의 폐불을 거치면서 불교계에는 불교의 가르침이 끝나고 혼란스런 시대가 다가온다는 말법(末法)의식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말법의식과 여래장사상을 결합하여 일반 대중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구제를 주장하는 삼계교(三階敎)가 6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크게 성행하였다. 삼계교의 창시자인 신행(信行, 540~594)은 말법의식에 기초하여 불교를 일승(一乘)의 시대, 삼승(三乘)의 시대, 보법(普法)의 시대 등 3단계로 구분한 후, 제3단계인 현재에는 특정한 가르침이 아니라 여러 경전에 이야기되는 모든 가르침을 가리지 않고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그는 여래장 사상에 근거하여 모든 중생들을 부처로 공경할 것을 주장하는 보불(普佛), 보경(普敬)의 사상을 주장하였다. 모든 중생들은 여래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부처와 다르지 않은 존재이므로 이들에 대하여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고 모두 다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신행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말세의 죄많은 중생이라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스스로 죄악이 가득한 말세의 범부라는 절실함에서 모든 사람들을 자신보다 나은 부처로 인식하고 공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행은 실제적으로 다수 대중에 대한 구제를 실천하기 위하여 경전에 나오는 비전(悲田)의 사상에 의거하여 신자들의 시주물을 한 곳에 모아 두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무진장(無盡藏)을 운영하였다. 신행의 가르침이 호응을 얻으면서 무진장에는 막대한 보시물이 모이게 되었는데, 삼계교도들은 이 재물을 이용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사회구호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삼계교를 지지한 사람들 중에는 고위 관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도시에 거주하는 하층민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삼계교는 대중들 사이에 폭넓은 지지를 얻었지만 이는 국가에 의한 교단 통제를 강조하는 정부에게는 불온한 움직임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수나라 때에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던 삼계교는 당나라에 들어와 다시 신앙이 허락되었지만 713년에 칙령으로 무진장이 폐쇄되고, 715년에는 삼계교 자체가 금지되고 말았다.주 101
각주 101)
삼계교는 모든 불교사의 기록에서 지워진 채 잊혀져 있다가 20세기초 돈황 등에서 『대근기행법(對根機行法)』 『삼계불법(三階佛法)』과 같은 문헌들이 발견되면서 그 모습이 새롭게 밝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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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교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하였고 정부의 금지를 받았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하지만 삼계교가 출현할 때 중국에 유학하였던 신라 원광의 일반민을 대상으로 한 교화활동 중에 삼계교와 상통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고, 그 제자 원안이 중국에서 삼계교 신자였던 소우(蕭瑀)의 원찰에서 머물렀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라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에 삼계교가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의 경우 쇼오토쿠 태자가 빈궁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운영하였다고 전하는 비전원(悲田院) 역시 삼계교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2) 천태종
대승불교의 중관사상과 불성·여래장사상 등이 불교계의 주류적 사상으로 자리잡아 가는 가운데 소승불교적 요소로 배척된 선정수행을 대승의 사상과 결합하려는 천태학이 등장하였다. 천태학을 체계화한 지의(智顗, 538~597)는 대승경전인 『반야경』과 법화경, 중관학파의 이론서인 『대지도론(大智度論)』, 소승의 선정문헌인 『차제선법(次第禪法)』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이를 종합할 수 있는 이론을 체계화하였고, 이후에는 중국 남부의 천태산에 들어가 직접 이를 체득하는 수행을 닦았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과 중관사상에 기초하여 삼제원융[三諦圓融: 일체의 존재는 공·가·중의 삼제(三諦)로 파악되며 다시 이 삼제는 서로 원융하여 상충되지 않음]과 일념삼천(一念三千: 중생의 한 마음에 모든 세계가 갖추어져 있음) 등의 이론을 제시하였고, 이러한 존재의 본래 모습을 체득하기 위한 실천수행으로서 지관(止觀)의 실천을 중시하였다. 대승과 소승을 종합하면서 수행을 체계화한 지의의 주장은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쳐 곧바로 그의 사상을 따르는 천태종이 등장하였다. 천태종은 강남지방을 지역적 거점으로 발전하면서 당나라 불교계의 주요한 학파로 존재하였다.
지의의 사상은 한국과 일본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 출신의 파약(波若, 562~613)은 천태산에서 지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통일신라 초기의 원효는 지의의 사상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하지만 종파로서의 천태종은 수용되지 않았다. 한국에 종파로서의 천태종이 등장하는 것은 11세기말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에 유학하여 천태종을 수용하면서부터였다. 일본의 경우 계사로 초청된 감진을 통하여 천태학이 소개되었다. 다른 여러 학파의 사상과 함께 천태학을 수학하였던 감진은 일본에 갈 때에 적지 않은 천태학 문헌을 가져갔고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천태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3) 법상종
여래장사상이 불교계에 폭넓게 받아들여지던 7세기 중반에 여래장사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법상종이 등장하였다. 법상종은 인도에 유학하여 유식사상을 수학하고 돌아온 현장(玄奘, 602~664)의 가르침에 기초하였다. 현장은 인도의 나란다사에서 수학한 유식사상에 기초하여 중생에게 불성이 본래적으로 내재해 있다는 여래장사상을 부정하였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실유불성(悉有佛性)의 이론을 부정하고 애초부터 성불의 가능성이 없는 무종성(無種姓)의 중생을 상정하는 오성각별설(五姓各別說)을 주장하였다. 현장이 전한 새로운 유식사상은 『성유식론(成唯識論)』으로 정리되었다.
현장에 의하여 새로운 유식사상이 소개되자 지론학과 섭론학이 주장하던 기존의 유식사상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여래장사상 및 실유불성설을 근거로 현장의 신유식학에 저항하였지만 인도에서 가져온 최신의 유식학 문헌을 앞세운 현장의 이론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중국의 유식사상은 현장 이후 그의 사상을 계승한 법상종으로 단일화되었다.
현장은 유식학자로서만이 아니라 불경의 번역자로서도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629년부터 645년까지 17년간 유학하였던 그는 인도 현지로부터 다수의 경전 원본을 가지고 들어와 총 75부 1,347권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그는 종래에 번역되지 않은 경전만이 아니라 기존의 번역이 불완전하다고 생각되는 경전들을 새롭게 번역하였다. 그의 번역사업은 분량의 방대함만이 아니라 원본에 대한 충실도에 있어서도 이전의 번역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가 번역한 경전에는 유식학 문헌만이 아니라 아비다르마 계통의 문헌과 다른 대승불교의 경전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그가 유식사상은 종래의 모든 불교의 가르침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실제로 그는 불교의 가르침을 소승·대승·일체승(一切乘)으로 구분하고 참된 불교는 소승과 대승을 모두 포괄하는 일체승이라고 주장하였다.
현장은 또한 구법여행 과정에서 견문한 내용을 정리하여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저술하였다.주 102
각주 102)
후일 삼장법사의 인도 구법여행을 그린 『서유기(西遊記)』는 현장의 활동과 『대당서역기』의 내용에 영향받아 창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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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7세기초 서역과 인도의 실정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당대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이들 지역에 대한 중요한 정보원으로 활용되고 있다.주 103
각주 103)
현장보다 약 50년 뒤인 671년부터 695년까지 바닷길을 이용하여 인도에 유학하였던 의정(義淨, 635~713)은 귀국 후 모두 56부 230권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그의 구법여행 과정을 기록한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은 『대당서역기』와 함께 당시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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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종은 현장의 제자인 강거국(康居國; 소그드) 이민자 집안 출신의 규기(窺基, 632~682)와 신라 출신 유학승 원측(圓測, 613~696)에 의하여 그 이론체계가 확립되었다. 『성유식론』 편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규기는 이 책의 내용을 해설하는 주석서들을 지어 유식학의 이론을 체계화하였고, 원측은 현장이 번역한 주요 유식학 문헌들에 대한 주석서를 지어 현장의 사상을 선양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법상종은 규기와 원측의 문하에서 크게 발전하여 불교계를 대표하는 사상체계로 자리잡아갔다.
새로운 유식사상인 법상종의 가르침은 곧바로 신라에도 전해졌다. 원측과 비슷한 시기에 현장의 문하에서 수학한 순경(順璟)이 귀국하여 현장의 가르침을 전하였고, 692년에는 원측의 제자 도증(道證)이 신라에 돌아와 원측의 사상을 전하였다. 국내에서 활동한 원효도 현장이 번역한 문헌들을 통하여 신유식사상을 연구하였다. 그는 신유식사상을 기존의 유식학 논서들과 대조하여 종합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주로 구유식의 입장에서 신유식을 이해하려는 입장이었다. 본래 섭론학의 전통이 강하였던 신라불교계는 법상종의 신유식사상 연구에도 적극적이었다. 7세기 후반 이후 법상종과 유식학 연구는 신라불교학에서 가장 주요한 흐름이 되었다. 의적(義寂), 경흥(憬興), 태현(太賢) 7세기 중엽에서 8세기 중엽에 활동한 대표적 학자들은 모두 수많은 유식학 관련 저술을 남겼고 이들 이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유식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일본에서도 7세기말 이후 법상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일본의 기록에는 이미 7세기 중엽에 일본 승려들이 현장과 규기의 문하에 유학하여 법상종을 전해왔다고 나타나고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들은 당나라가 아닌 신라에 유학하여 구유식사상인 섭론학을 배운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7세기말 이후 비로소 법상종의 신유식사상이 전하여지지만 이 역시 신라를 통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원효, 의적, 도증 등의 문헌을 통하여 신유식사상이 이해되었다. 717년부터 734년까지 당나라에 유학하여 규기의 제자 지주(智周)에게 수학한 겐보[玄昉, 691~746]가 귀국하면서 비로소 당나라의 법상종이 직접 전해지게 되었다. 겐보는 5천여 권의 일체경과 함께 중국 법상종 학자들의 문헌을 다수 가지고 귀국하였고 이를 계기로 신라를 통하지 않은 중국 법상종이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겐보는 귀국 이후 쇼무 천황과 왕비의 존숭을 받아 승정에 임명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 불교계에서 법상종의 위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나라시대 내내 법상종은 가장 강력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4) 화엄종
법상종이 대두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화엄경』을 최상의 가르침으로 내세우는 화엄종이 등장하였다. 『화엄경』은 처음 번역된 직후부터 깨달음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경전으로서 각별히 존중되었지만 화엄종을 전면에 내세우는 종파는 형성되지 못하였었다. 그러던 중 남북조말기의 지론학파 내부에서 『화엄경』을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밝힌 최상의 가르침으로 선양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였고, 그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화엄경』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여 독자적인 종파로 발전한 것이 화엄종이었다.
화엄종의 개창자인 지엄(智儼, 602~668)은 지론학파에서 제시한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화엄경』을 일체 사물들이 서로 무궁한 연기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상호 간에 무한히 포용하고 관통하는 법계연기(法界緣起)와 무진원융(無盡圓融)을 이야기한 최상의 가르침으로 파악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선양하였다. 지엄의 제자인 법장(法藏, 643~712)은 스승이 제시한 이론들을 더욱 발전시키고, 아울러 당시 현장 문하에 의해 촉발된 신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의 갈등까지를 포섭할 수 있는 교학체계를 수립함으로서 화엄종의 이론체계를 완성하였다. 그는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의 이론들을 세밀히 분석하여 이들에 대한 화엄사상의 우월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법장의 문하에서도 다수의 뛰어난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이를 기초로 화엄종은 불교계의 주류적 흐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법상종과 마찬가지로 화엄종도 중국에서 성립됨과 동시에 신라에 전해졌다. 신라 귀족출신의 의상(義相, 625~702)은 661년 중국에 유학하여 지엄 문하에서 화엄학을 배운 뒤 671년에 귀국하여 화엄학을 전파하였다. 처음에는 경주에 머무르던 그는 얼마 후 문도들과 함께 태백산으로 들어가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이곳에서 화엄학을 강의하며 지냈다. 의상은 불교의 가르침에 투철하여 발우와 가사 이외에 일체의 재물을 갖지 않았으며 국왕이 부석사에 하사한 토지와 노비도 거절하였다. 신분 구별 없이 제자들을 받아들였으므로 그의 문도 중에는 하층민 출신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의상은 스승 지엄의 가르침에 기초한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를 저술하여 화엄사상의 요체를 간명하게 정리하였으며, 또한 이에 입각한 수행방법을 체계화하는데 힘썼다. 그는 화엄학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거나 다른 불교이론과 비교하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의상의 제자들도 스승의 학풍을 계승하여 다른 불교이론들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화엄학이론에만 집중하여 연구하였다. 이는 의상의 동문인 법장과 그의 제자들이 화엄학의 이론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방대한 저술을 남기고 다른 교학과 화엄학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과 대조된다. 신라 화엄종에는 의상 이외에 법장의 사상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법장은 자신에게 배우고 신라로 귀국한 승전(勝詮)을 통해 자신의 저술들을 의상에게 보냈는데, 의상은 이를 검토하고 제자들에게 공부하도록 하였다. 황룡사에 주석하였던 표원(表員)의 저술에는 법장의 사상이 크게 중시한 반면 의상의 견해는 간단히 언급되는데 그치고 있다. 승전과 그 제자 가귀(可歸)의 화엄사상도 법장의 사상에 의거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의상과 같은 시대에 활약한 원효도 화엄사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의상을 통하여 지엄의 화엄학에 대하여 접한 후 이를 자신의 사상체계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그에게는 『화엄경소』와 『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 등의 화엄 관련 저술이 있었다.
법상종과 달리 화엄종은 8세기 중엽에야 일본에 전래되었다. 740년 신라에서 수학한 심상(審詳, 신죠)이 왕실의 원찰인 도다이지에서 법장의 주석서를 토대로 『화엄경』을 강의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왕실의 후원하에 화엄학에 대한 연구가 촉진되었다. 왕실은 방대한 세계관을 설하는 『화엄경』과 진리 그 자체인 『화엄경』의 주존 노사나불에 주목하여 화엄학을 중시하였다. 도다이지에 건립된 대불도 노사나불을 표현한 것이었다. 심상은 신라에서 공부하였지만 그의 화엄사상은 의상이 아니라 법장과 원효의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가 소지하였던 문헌 중에는 원효를 비롯한 신라 승려의 저술이 가장 많았지만 의상과 그 문도들의 저술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나라시대 일본 화엄종의 사상은 법장과 원효의 사상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다. 8세기 후반에 활동한 지케이[智憬]와 쥬레이[壽靈] 등의 저술에서도 법장과 원효의 사상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5) 원효의 사상
7세기 중엽에 활약한 신라 원효(元曉, 617~686)도 기존의 여러 불교사상을 종합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하였다. 그의 사상은 통일신라 불교학의 주요한 흐름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불교계에도 수용되어 후대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원효는 처음에 신라에서 연구되고 있던 중관사상[삼론학]과 구유식사상[섭론학] 등을 주로 수학하였지만 현장의 번역 문헌이 신라에 전래된 이후에는 신유식사상도 깊이 공부하였다. 이후 그는 이들 여러 불교사상을 종합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등의 사상에 의거하여 여러 이론들을 조화시키는 화쟁(和諍)사상을 주창하였다. 그는 서로 다르게 보이는 대승불교의 이론들은 진리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으로서 외면적인 차이와 달리 본질적으로 상호 조화되는 것이며, 불교의 근본 목적은 차별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가 곧 중생들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원효는 또한 화엄학을 수용하여 현상세계의 차별적인 존재들이 실제는 서로 대립하지 않고 원융무애함을 주장하였다. 즉 화엄학의 이론을 원용하여 크고 작음[大小], 영원과 찰나[促奢], 움직임과 멈춤[動靜], 하나와 여럿[一多] 등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동질적임을 이야기하고, 이러한 원융무애함을 밝힌 『화엄경』이야말로 최고의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존재들의 원융무애는 이들이 모두 일심(一心)으로부터 발현된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하였다.
원효의 불교대중화 노력은 이처럼 현상의 차별적 모습들을 일심의 발현으로 보면서 모든 존재가 본질적으로 동질적이라고 하는 그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중생들이 만물의 근원인 일심 앞에서 평등하므로 계급과 신분을 떠나 모든 중생들을 위한 교화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계율에 있어서도 승려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구(니)계가 아니라 출가자와 재가자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보살계를 중요시하였는데, 이는 불교계 내에서 출가와 재가라고 하는 차별조차도 초월하려 한 때문이었다. 원효가 스스로 환속하여 재가인으로서 생활한 것은 출가와 재가의 차별을 초월하려는 승속무이(僧俗無二)의 입장을 자신의 인생에서 직접 표현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원효의 사상은 신라 불교계에 폭넓게 영향을 미쳤다. 화엄학자인 표원과 명효(明皛)의 저술에 원효의 사상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태현을 비롯한 유식학자들의 저술에도 원효의 이론이 중요하게 인용되고 있다. 그의 사상은 또한 중국과 일본의 불교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나라 학자들은 원효의 『대승기신론』과 『화엄경』 해석을 크게 중시하였으며, 특히 8세기말 이후의 화엄학자들은 그의 일심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돈황에서 발견된 당나라 문헌들 중에도 원효의 저술이 확인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나라시대 불교의 주요 학파들 대부분이 초기에 원효의 저술을 토대로 자신들의 이론을 수립하였고, 이후에도 원효의 사상을 중시하였다. 특히 화엄종에서는 원효의 사상이 중국 화엄종 조사들의 이론 못지않게 중시되었다.

  • 각주 101)
    삼계교는 모든 불교사의 기록에서 지워진 채 잊혀져 있다가 20세기초 돈황 등에서 『대근기행법(對根機行法)』 『삼계불법(三階佛法)』과 같은 문헌들이 발견되면서 그 모습이 새롭게 밝혀지게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102)
    후일 삼장법사의 인도 구법여행을 그린 『서유기(西遊記)』는 현장의 활동과 『대당서역기』의 내용에 영향받아 창작된 것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103)
    현장보다 약 50년 뒤인 671년부터 695년까지 바닷길을 이용하여 인도에 유학하였던 의정(義淨, 635~713)은 귀국 후 모두 56부 230권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그의 구법여행 과정을 기록한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은 『대당서역기』와 함께 당시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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