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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대 불교와 불교대중화

2. 신라 중대 불교와 불교대중화

삼국통일 이후 신라에서도 불교의 성격에 변화가 나타났다. 불교의 정치이념으로서의 역할은 축소되고 신앙과 사상으로서의 측면이 강화되었다. 삼국시대의 불교가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수용되면서 국가체제의 정비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불교사상을 이용한 측면이 많았던 반면 통일신라 사회에서는 불교의 철학적, 종교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면서 세계와 인생의 가치에 대한 반성 및 불교 신앙을 통한 대중들의 삶의 위안 등이 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삼국통일을 주도한 중대왕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중대왕실에서는 이전과 같이 불교적 신성성을 이용하여 왕실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불교정치이념 대신 국왕의 실제적 능력과 백성에 대한 덕치(德治)를 강조하는 유교적 정치이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는 당나라의 유교정치이념의 강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춘추의 아들로서 통일을 달성하였던 문무왕이 ‘용은 미물로서 국왕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승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안정을 위하여 스스로 동해의 용이 되고자 했던 것은 불교적 신성함보다 국가와 백성에 대한 군주의 책임을 강조하는 중대왕실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대왕실이 정치운영에 있어서 불교보다 유교의 원리를 중시하였지만 불교에 대한 신앙을 중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은 사후에 자신의 유해를 불교식으로 장사지내라고 유언하였고, 고승들에 대한 왕실의 귀의도 여전하였다. 또한 선왕들을 위한 원찰 건립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무열왕의 원찰인 봉성사(奉聖寺), 문무왕의 원찰인 감은사(感恩寺), 신문왕의 원찰인 봉덕사(奉德寺) 등이 후대 국왕들에 의해 연이어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정치운영에 직접 이용하려는 모습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정치운영에서 불교정치이념 대신 유교적 원리가 강조되면서 불교계에 대한 운영방식도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통일이전에는 국가가 직접 불교계를 통제하기 보다 불교계의 자율적인 운영을 중시하였지만 통일이후에는 불교계의 자체적 조직 이외에 별도로 중앙에 불교계의 운영을 담당하는 정법전(政法典)을 설치하고 일반 관료들이 불교계의 운영에 관여하도록 하였다. 또한 왕실 원찰을 비롯한 주요 사찰의 건립과 운영을 담당한 사원의 성전(成典)들이 불교계를 운영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여기에도 최고 책임자들은 승려가 아닌 속인인 고위 관료들이었다.
정치이념으로서 불교의 영향력은 축소되었지만 불교의 사회적 비중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통일기에는 일반 대중들의 불교신앙에 대한 참여가 확대되어 불교가 사회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불교대중화라고 불리는 이와 같은 변화를 주도한 사람들은 통일전쟁기를 전후하여 활동하였던 일군의 승려들이었다. 이들은 왕궁이나 사찰이 아닌 시장과 마을을 다니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직접 서민적 신앙생활을 보여주었으며 이로 인하여 일반민들은 불교를 가깝게 접할 기회를 갖고 자신들의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진평왕대에 활동한 혜숙(慧宿)은 시골 마을에 숨어살면서 일반인들과 함께 수행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펼쳤고, 혜공(慧空)은 작은 절에 살면서 삼태기를 둘러쓰고 길거리에서 춤과 노래하며 일반인들과 함께 지냈다. 대안(大安) 역시 당시 불교계의 대표적인 학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궁의 초청이나 호화로운 생활을 거부하고 스스로 미친 행세를 하며 거리에서 일반민들과 어울려 지냈다. 이러한 불교대중화의 흐름을 계승하여 일반인들에게 불교신앙을 폭넓게 전파한 인물이 원효(元曉)였다. 중급관료 집안 출신인 원효는 출가하여 불교학을 깊이 연구한 이후에 세속과 출세간의 걸림이 없음을 직접 실천하기 위하여 환속하였고, 이후에는 광대들이 놀이하는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과 거리를 다니면서 노래와 춤으로써 불법의 가르침을 알리려 하였다. 그는 특히 모든 중생들이 염불을 통하여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정토신앙을 강조하였는데, 그의 교화에 의해 미천한 사람들까지 불교를 알게 되었고 곳곳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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