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사상과 중관사상
1. 반야사상과 중관사상
주사행과 축법호 등의 구법활동 이후 대승경전, 특히 반야계 경전이 다수 번역되고 중시되었지만 그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실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야사상의 내용을 기존의 중국 사상의 틀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경전에 사용된 용어들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따라서 초기에는 비슷한 경향을 띠는 현학의 이론과 개념들을 이용하여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이를 ‘격의(格義)’불교라고 한다. 격의불교에서는 반야사상의 핵심인 ‘공(空)’을 현학의 용어인 ‘무(無)’로 번역하고 이를 현학적으로 해석하였는데, 현학의 이론이 다양하였던 만큼 ‘격의’의 방식도 동일하지 않았다. 특히 불교의 ‘무(無)’가 어떠한 의미인지를 둘러싸고 심무(心無)·즉색(卽色)·본무(本無) 등과 같은 서로 상이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불교인들의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격의’로 밖에 이해되지 못하던 반야사상은 4세기 후반에 활약한 도안(道安)에 이르러 비로소 불교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도안은 다양한 반야계 경전들을 상호 대조하며 종합적으로 연구한 결과 기존의 ‘격의’적 해석이 불교의 본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음을 비판하고 반야경전의 ‘무’는 현학의 ‘무’와 달리 현실의 사물들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하는 ‘성공(性空)’의 입장임을 주장하였다. 도안은 반야사상만이 아니라 당시 소개된 불교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반야계 경전은 물론 아비다르마 계통의 경전까지 포함하는 많은 경전들에 대한 주석서와 서문을 지었고, 당시까지 번역된 불경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번역자와 번역시기 등을 밝힌 중국 최초의 불경목록인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승려들의 불교적 생활규범을 확립하기 위하여 계율을 중시하였다. 서역 승려들이 가지고 온 계율문헌들의 번역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을 뿐 아니라 전해진 자료들에 기초하여 독자적인 승려들의 생활규범을 제정하였다. 또한 아직 중국에 전해지지 않은 율장(律藏)을 구하여 번역할 것을 촉구하였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들은 모두 석(釋)을 성으로 사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도안이었다.
도안의 사후 중국에 들어온 구마라집은 반야사상을 비롯한 대승불교의 이론을 보다 체계적으로 소개하여 중국인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한 단계 상승시켰다. 구자국출신의 구마라집은 처음에는 인도의 카시미르 지역에서 아비다르마 불교의 가르침을 공부하였지만 이후 서역의 사륵국[沙勒國, 카시가르]에서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접하고 대승으로 전향하여 아비다르마 불교의 가르침을 비판하고 대승불교 특히 반야경의 가르침에 기초한 중관(中觀)사상을 적극적으로 선양하였다. 401년에 장안에 들어온 그는주 094입적할 때까지 10여 년간 300권 이상의 불경을 번역하였는데,주 095그가 가장 중요하게 번역한 것은 반야사상 계통의 경전과 중관사상의 논서들이었다.주 096그는 또한 자신이 번역한 문헌들에 대한 강의를 통하여 중관사상을 널리 선양하였는데, 그 핵심은 진제(眞諦)인 공(空)과 속제(俗諦)인 유(有)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中道)와 실상(實相)의 가르침이었다. 한편 구마라집이 번역한 『성실론(成實論)』은 순수한 중관사상의 논서는 아니었지만 중관사상을 수용하여 부파불교의 법유(法有)설을 비판하였으므로 소승을 비판하고 대승의 중관사상을 이해하는 입문서로서 널리 읽혔다.
중관사상을 선양한 구마라집과 그의 문하에서는 부파불교의 가르침이나 선정 수행을 통한 신비적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5세기초에 남중국을 거쳐 장안에 들어왔던 불타발타라는 선정수행을 중시하고 신이한 능력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구마라집 문하와의 갈등 끝에 장안에서 축출되었다. 구마라집의 문하에는 3,000여 명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많은 제자들이 수학하였는데, 일부 제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제자들은 장안을 떠나 강남지방으로 옮겨가 활약하였다. 이는 북방민족에 의해 운영된 북중국보다 위진시대 이래의 귀족적 문화와 현학의 분위기가 지속된 남중국에서 반야사상을 발전시킨 중관사상이 보다 폭넓게 수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교인들의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격의’로 밖에 이해되지 못하던 반야사상은 4세기 후반에 활약한 도안(道安)에 이르러 비로소 불교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도안은 다양한 반야계 경전들을 상호 대조하며 종합적으로 연구한 결과 기존의 ‘격의’적 해석이 불교의 본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음을 비판하고 반야경전의 ‘무’는 현학의 ‘무’와 달리 현실의 사물들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하는 ‘성공(性空)’의 입장임을 주장하였다. 도안은 반야사상만이 아니라 당시 소개된 불교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반야계 경전은 물론 아비다르마 계통의 경전까지 포함하는 많은 경전들에 대한 주석서와 서문을 지었고, 당시까지 번역된 불경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번역자와 번역시기 등을 밝힌 중국 최초의 불경목록인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승려들의 불교적 생활규범을 확립하기 위하여 계율을 중시하였다. 서역 승려들이 가지고 온 계율문헌들의 번역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을 뿐 아니라 전해진 자료들에 기초하여 독자적인 승려들의 생활규범을 제정하였다. 또한 아직 중국에 전해지지 않은 율장(律藏)을 구하여 번역할 것을 촉구하였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들은 모두 석(釋)을 성으로 사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도안이었다.
도안의 사후 중국에 들어온 구마라집은 반야사상을 비롯한 대승불교의 이론을 보다 체계적으로 소개하여 중국인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한 단계 상승시켰다. 구자국출신의 구마라집은 처음에는 인도의 카시미르 지역에서 아비다르마 불교의 가르침을 공부하였지만 이후 서역의 사륵국[沙勒國, 카시가르]에서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접하고 대승으로 전향하여 아비다르마 불교의 가르침을 비판하고 대승불교 특히 반야경의 가르침에 기초한 중관(中觀)사상을 적극적으로 선양하였다. 401년에 장안에 들어온 그는주 094입적할 때까지 10여 년간 300권 이상의 불경을 번역하였는데,주 095그가 가장 중요하게 번역한 것은 반야사상 계통의 경전과 중관사상의 논서들이었다.주 096그는 또한 자신이 번역한 문헌들에 대한 강의를 통하여 중관사상을 널리 선양하였는데, 그 핵심은 진제(眞諦)인 공(空)과 속제(俗諦)인 유(有)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中道)와 실상(實相)의 가르침이었다. 한편 구마라집이 번역한 『성실론(成實論)』은 순수한 중관사상의 논서는 아니었지만 중관사상을 수용하여 부파불교의 법유(法有)설을 비판하였으므로 소승을 비판하고 대승의 중관사상을 이해하는 입문서로서 널리 읽혔다.
중관사상을 선양한 구마라집과 그의 문하에서는 부파불교의 가르침이나 선정 수행을 통한 신비적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5세기초에 남중국을 거쳐 장안에 들어왔던 불타발타라는 선정수행을 중시하고 신이한 능력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구마라집 문하와의 갈등 끝에 장안에서 축출되었다. 구마라집의 문하에는 3,000여 명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많은 제자들이 수학하였는데, 일부 제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제자들은 장안을 떠나 강남지방으로 옮겨가 활약하였다. 이는 북방민족에 의해 운영된 북중국보다 위진시대 이래의 귀족적 문화와 현학의 분위기가 지속된 남중국에서 반야사상을 발전시킨 중관사상이 보다 폭넓게 수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각주 094)
- 각주 095)
- 각주 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