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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3국의 불교 수용과 국가불교체제

3. 한반도 3국의 불교 수용과 국가불교체제

중국사회에 불교가 널리 확산되면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한국과 일본에도 불교가 전래되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중국과 교류하던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후반 왕실의 주도하에 불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하였고, 6세기까지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맺고 있지 않았던 신라와 왜(倭)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통하여 불교가 전해졌다.
고구려의 불교수용은 소수림왕한국사DB위키백과 때에 이루어졌다. 소수림왕 2년(372년한국사DB)에 전진(前秦)위키백과에서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한국사DB한국사DB한국사DB위키백과를 보내 불상과 불경을 전해주었고, 2년 후에는 다시 승려 아도(阿道)아도(阿道)한국사DB한국사DB위키백과가 중국에서 들어왔다. 이에 소수림왕 5년(375년한국사DB)에는 성문사(省門寺)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와 이불란사(伊弗蘭寺)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를 건립하여 순도와 아도를 머무르게 하고 불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하였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준 전진의 황제 부견(符堅)위키백과위키소스은 불교를 숭상하는 것으로 유명하였으며, 고구려에 순도를 보내 불교를 전한 것도 이러한 불교신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순도가 불교를 전해주기 이전에 고구려 사회에서는 이미 불교가 신앙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수림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고구려 출신의 승려가 있었으며 그가 당시 유명한 중국 강남지방의 승려 지둔(支遁)불교사전과 교류한 사실이 중국의 『고승전』에 기록되어 있다. 소수림왕대의 불교수용은 왕실에서의 공식적인 불교의 수용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이전에 민간에 이미 불교가 전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중국계 이주민들 중에 본국의 영향으로 불교를 수용하고 있었고, 그것이 고구려인들에게 전해졌거나 중국에 왕래하던 고구려인들이 불교를 수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소수림왕 때의 불교공인 이후 왕실을 중심으로 불교가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고국양왕한국사DB은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광개토왕한국사DB 때에는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설립하였다. 고구려 왕실은 국가체제의 정비를 위하여 중국의 선진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접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당시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전진과 후진, 북위 등의 왕조에서 황제를 중심으로 불교를 숭상하던 것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구려 불교의 전개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는 많지 않지만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에 각기 후진(後秦)위키백과의 승려 담시(曇始)위키백과한문전자대장경불교사전와 남조 제(齊)위키백과의 승려 담초(曇超)한문전자대장경가 들어와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였고, 5세기말 고구려 출신의 승랑(僧朗)한문전자대장경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북중국을 거쳐 남조에 들어가 중관위키백과불교사전사상을 연구한 사실이 전하고 있다. 이로보아 중국 남북조와의 불교교류가 활발하였으며 이를 통해 불교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국내의 불교발전을 배경으로 신라와 일본의 불교 수용에도 영향을 미쳤다. 5세기초부터 고구려 출신의 승려들이 신라에 들어가 불교신앙을 전파하였으며 6세기 중엽에는 혜량(惠亮)한국사DB불교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이 신라로 가서 승통이 된 후 백좌강회(百座講會)한국사DB위키백과불교사전, 팔관회(八關會)한국사DB위키백과 등의 의식을 실행하였다. 6세기 말부터는 혜자(慧慈)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한국사DB를 비롯한 여러 승려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초기 불교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고구려 말기의 승려 보덕(普德)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불교사전한국사DB한국사DB은 백제로 이주하여 『열반경』불교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고려대장경지식베이스위키백과 등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중국과 일찍부터 활발한 문화 교류를 하였던 고구려는 불교의 수용에도 선진적이었고, 이러한 고구려의 불교가 주변의 백제와 신라, 일본 등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6세기말 중국에 유학하였던 신라 출신의 원안(圓安)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한국사DB은 중국에 들어가기 전에 고구려 환도성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위치에 유학하였는데 당시 환도성 등을 중심으로 불교에 대한 연구가 번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출신 승려들이 중국을 비롯하여 백제와 신라, 일본 등에서 활약한 것으로 볼 때 고구려 국내에서도 다수의 승려들이 활약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구체적인 자료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백제의 불교수용은 침류왕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 때에 이루어졌다. 침류왕 원년(384년)한국사DB에 남중국의 동진위키백과으로부터 서역출신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가 오자 국왕은 그를 궁궐에 맞아들여 극진히 공경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수도 근처의 한산(漢山)에 절을 건립하고 10인을 출가시켜 거주하게 함으로써 불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하였다. 마라난타가 중국의 황제에 의해 파견된 것인지 아니면 개인 차원에서 백제에 온 것인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동진에서 불교에 대한 신앙이 활발하였고 백제가 동진을 통하여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려고 노력하였던 상황으로 볼 때 동진 황제에 의해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의 경우에도 중국출신의 이주민들이 있었고,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기 때문에 침류왕 때의 공식수용 이전에 민간에서 불교에 접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구체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공인 이후 왕실의 후원으로 불교가 일정하게 발전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5세기까지 백제불교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6세기초 이후 불교는 급속히 발전하면서 국가의 중심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고구려의 침공으로 한반도 중부지역을 상실하고 남쪽으로 피난하였던 왕실은 6세기초 이후 양 무제의 숭불정책을 모델로 한 다양한 불교장려정책을 시행하면서 이를 토대로 왕권의 안정과 국가체제의 정비를 도모하였다. 성왕(聖王)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한국사DB은 527년 웅진에 최초의 대규모 사찰인 대통사(大通寺)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위치를 창건하였고, 사비로 천도한 이후에는 도성 중앙에 정림사(定林寺)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문화재청위치를 건립하면서 그 안에 대규모 사리탑을 봉안하였다. 이후 사비 도성과 인근 지역에는 많은 대규모 사찰과 사리탑이 건립되었고 왕실은 전륜성왕불교사전 등의 불교 정치이념을 내세워 국가를 운영하였다. 중국 남북조에 유학하고 돌아오는 승려들도 나타나면서 중국의 불교학에 대한 이해도 심화되었다. 이러한 국내의 불교발전을 토대로 하여 6세기 후반에는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었고, 이후로도 다수의 승려와 사찰 및 불상전문가를 파견하는 등 불교를 매개로 한 일본과의 교류협력을 강화하였다.
한반도 3국 중 불교의 수용과 이후의 발전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신라이다. 신라에는 5세기초부터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전해지고 있었지만 상류층의 반발로 쉽게 수용되지 못하다가 6세기 전반에 이르러 비로소 공식적으로 수용되었다(527년한국사DB). 불교수용에 관한 전설들을 통해 볼 때 민간에 전래된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지배층 내부에 적지 않은 갈등을 겪다가 왕실의 주도하에 불교를 공인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의 불교공인과정에 갈등이 있었던 것은 신라가 6세기초까지도 국왕권이 확립되지 못한 연맹체적인 정치체제를 탈피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신라의 불교공인은 귀족세력에 대하여 국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정비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 때에 율령우리역사넷과 관료체제의 기본 구조가 갖춰지고 있다. 한편으로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시기가 백제 성왕의 숭불정책이 본격화 되는 때와 겹치는 것으로 볼 때 백제의 숭불 정책과 신라의 불교공인 사이에는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신라의 왕실이 불교장려 통해 국가체제를 정비한 백제를 모델로 하여 불교수용과 국가체제 정비를 시도하였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백제 역시 일본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불교를 매개로 신라와의 교류협력을 추진하였다고 생각된다.
불교의 공식수용은 늦었지만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불교는 급속하게 발달하였다. 왕실에서는 대규모 사찰을 연이어 건립하였고, 불교공인 직후부터 중국의 남조에 유학승을 파견하여 중국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하였다. 이를 통해 경쟁국인 고구려나 백제 불교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독자적인 불교문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신라 왕실은 또한 전륜성왕이념주 093
각주 093)
전륜성왕은 본래 인도의 전설에 나타나는 이상군주로서 통치방식에 따라서 금륜부(金輪)과 은륜(銀輪), 동륜(銅輪), 철륜(鐵輪) 등으로 구분되며 이들이 지상에 출현하면 분열된 나라들이 하나로 통합되고 평화로운 세계가 건설된다고 믿어졌다. 그런데 석가 입멸 후에 북인도에서 아쇼카왕이 출현하여 분열된 나라들을 통합한 후에 덕德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자 그를 전륜성왕 중의 철륜성왕에 해당한다고 하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도덕과 법에 의한 통치를 강조한 아쇼카왕이 불교의 가르침에 공감하여 불교교단을 보호하고 주변지역에 불교의 포교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그를 모델로 하여 불교적 전륜성왕의 이상형을 만들어 내었다. 『아육왕경』불교사전 등의 경전에 묘사된 불교의 전륜성왕은 불법에 의거하여 세상을 통합하고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며 불법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널리 불법을 전하고 노년에는 출가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존재였다. 또한 전륜성왕이 출현하여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졌을 때 내세불인 미륵이 지상에서 성불하여 중생들을 구원한다고 이야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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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진종(眞種)의식 등의 불교 이념을 활용하여 왕실의 우월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라 법흥왕을 계승하여 왕위에 오른 진흥왕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은 전륜성왕의 이념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군주였다. 그의 아들들의 이름은 전륜성왕의 이름을 딴 동륜한국사DB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금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한국사DB이었고, 그가 창건한 황룡사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문화재청위치의 장륙불상한국사DB불교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원래 인도의 아쇼카왕위키백과한문전자대장경이 불상을 만들기 위하여 발원한 철과 금을 사용하여 주조한 것이라고 이야기되었다. 진흥왕이 이처럼 전륜성왕이념에 관심을 가진 것은 가야를 병합하고 한강유역과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영역을 넓혀가던 그의 팽창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자신의 정책을 단순한 정복전쟁이 아니라 분열을 통합하고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으로 위치 짓고, 이를 불경에 묘사된 아쇼카왕의 통치와 동일시하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 진흥왕은 자신이 정복전쟁을 일단락지은 후 새로 개척한 영토를 순행하면서 도덕에 의한 통치로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며 새로 편입된 지역의 백성들도 차별없이 대할 것을 선언한 순수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치위치위치위치들을 세웠는데 이것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아쇼카왕이 새로 개척한 지역에 건립한 아쇼카 법칙(法勅)위키백과의 돌기둥위키백과들과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진흥왕은 넓은 영토를 개척하고 안정된 통치기반을 확립하였으며, 불교를 적극적으로 신앙하였다는 점에서 불경에 나타난 전륜성왕에 부합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륜성왕 이념은 신라 불교에 영향을 미쳤던 백제 성왕에 의해서도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왕이라는 왕호 자체가 전륜성왕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일 뿐 아니라 불교를 장려하고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다는 점에서 전륜성왕과 비슷한 점이 있다. 웅진으로의 천도 이후 위축되어 있던 국가체제를 재정비하여 백제의 부흥을 도모하고자 한 성왕에게 있어 전륜성왕은 이상적인 모델로 비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전륜성왕이념과 함께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용된 진종의식은 신라 왕실이 일반 백성들과는 구분되는 신성한 혈연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진종이란 말은 본래 불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의 의미는 인도의 네 계급 중 석가족이 속하는 크샤트리아위키백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크샤트리아를 한문으로 옮길 때에 발음을 따서 찰제리종(刹帝利種)불교사전이라고 하거나 참된 종족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진종(眞種)이라고 번역하였으며, 여기에서의 종(種)은 신분이 아니라 혈족으로 이해되었다. 신라의 왕실은 이러한 한문 번역어에 기초하여서 진종을 석가족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자신들도 진종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불경에 묘사된 석가족의 신성함을 이용하여 왕실이 자신들의 혈통을 일반 백성들과 구별되는 신성한 혈통으로 내세우려 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진종의식은 신라의 국가적 신성함을 보장해주는 논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즉 지정학적으로는 중국의 변경에 위치하고 있지만 왕실이 신성하기 때문에 크게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진흥왕 이후 진덕여왕에 이르는 중고기(中古期) 왕실에서 진(眞)이라는 글자를 붙인 왕호를 빈번하게 사용한 것도 이러한 진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왕실을 진골(眞骨)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이라고 하여 두품(頭品)을 갖는 일반인들과 구분하는 의식도 이 시기에 생겨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 역시 진종의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라 왕실의 진종의식은 불교에 대한 신앙이 심화되면서 더욱 발전되었다. 즉 자신들을 석가족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부처의 가족과 동일시하고 나중에는 국왕을 부처와 같은 존재로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진평왕의 이름은 불경에 부처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오는 백정(白淨)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한국사DB백정(白淨)이었으며 진평왕의 형제들도 부처의 삼촌들 이름을 따서 백반(伯飯)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반(國飯)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으로 이름하였다. 또한 진평왕의 왕비 이름 역시 부처의 어머니의 이름인 마야(摩耶)부인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으로 불리었다. 이러한 이름들은 국왕 일가가 자신들을 부처의 가족과 동일시하기 위하여 붙인 것으로서 이러한 가족에게서 부처와 같은 국왕이 태어나기를 기대하였다고 생각된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딸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녀의 왕호인 선덕여왕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은 불경에 나오는 동방세계의 부처 이름인 선덕여래(善德如來)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또한 선덕여왕의 사촌으로 왕위에 오른 진덕여왕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의 이름 승만(勝曼)은 『승만경』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불교사전고려대장경지식베이스의 주인공으로서 장래에 부처가 될 것을 약속 받은 승만부인의 이름에서 딴 것이었다. 이처럼 왕실 중에서도 특별히 국왕의 가족들을 부처와 그 가족과 동일시하는 관념이 생겨나면서 이들을 같은 진골 왕실 중에서 구분할 필요성이 생겨났는데, 성골(聖骨)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로 불리는 집단은 바로 이러한 제한된 국왕의 가족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진덕여왕 이후 성골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처럼 국왕의 가족을 부처의 가족과 동일시하기 시작한 진평왕의 가계가 끊긴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왕실에서는 불교의 사상이나 이론을 이용하여 국왕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특히 법흥왕에서부터 진덕여왕에 이르는 시기의 국왕들은 불교와 관련되는 왕호나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이 시기를 ‘불교(식) 왕명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 시기의 국왕들 중에도 자비(慈悲)왕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과 지증(智證)왕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한국사DB의 왕호RISS는 불교적인 이름으로 생각되는데 민간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일시적으로 왕실의 관심을 끌었던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신라와 같이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백제와 고구려에서도 불교적인 국왕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백제의 경우 성왕에서 법왕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까지의 국왕들의 왕호가 불교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성왕은 전륜성왕의 약칭이며, 위덕왕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은 불경에 보이는 위덕불(威德佛)에서 딴 것이고, 혜왕(惠王)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과 법왕(法王)은 불교의 가르침한국사DB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신라의 ‘불교(식) 왕명시대’와 겹치는 시기로서 비슷한 때에 백제와 신라가 국왕에게 불교적인 이름을 붙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국왕의 왕호나 이름을 불교적으로 한 사례는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죽은 국왕을 추모하여 만든 탑에서 발견된 금동판에서 국왕을 원각(圓覺)대왕한국사DB이라는 불교 용어를 사용하여 일컫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 각주 093)
    전륜성왕은 본래 인도의 전설에 나타나는 이상군주로서 통치방식에 따라서 금륜부(金輪)과 은륜(銀輪), 동륜(銅輪), 철륜(鐵輪) 등으로 구분되며 이들이 지상에 출현하면 분열된 나라들이 하나로 통합되고 평화로운 세계가 건설된다고 믿어졌다. 그런데 석가 입멸 후에 북인도에서 아쇼카왕이 출현하여 분열된 나라들을 통합한 후에 덕德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자 그를 전륜성왕 중의 철륜성왕에 해당한다고 하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도덕과 법에 의한 통치를 강조한 아쇼카왕이 불교의 가르침에 공감하여 불교교단을 보호하고 주변지역에 불교의 포교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그를 모델로 하여 불교적 전륜성왕의 이상형을 만들어 내었다. 『아육왕경』불교사전 등의 경전에 묘사된 불교의 전륜성왕은 불법에 의거하여 세상을 통합하고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며 불법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널리 불법을 전하고 노년에는 출가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존재였다. 또한 전륜성왕이 출현하여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졌을 때 내세불인 미륵이 지상에서 성불하여 중생들을 구원한다고 이야기되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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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3국의 불교 수용과 국가불교체제 자료번호 : edeah.d_0002_0020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