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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불교 체제의 등장

2. 국가불교 체제의 등장

통치자와 상류층이 불교를 숭상하는 흐름에서 더 나아가 5세기에는 국가가 불교교단을 주도하면서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활용하는 국가불교체제가 등장하였다. 몽골 초원에서 일어나 북중국을 통일하게 된 북위(北魏)위키백과의 통치자들은 후진위키백과, 북량위키백과위키소스 등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이들 지역에 성행하던 불교를 수용하고 이를 중시하게 되었다. 특히 건국 초기 황실에서 중용된 승려 법과(法果)위키소스는 황제를 현재의 부처로서 예배할 것을 주장하면서 세속의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일체화하고 이를 통해 불교를 국교로 만들고자 하였다. 황실도 법과를 승려들의 총책임자인 사문통(沙門統)위키소스으로 임명하고 불교계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동시에 국가에서 교단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황실의 후원으로 불교 세력이 강화되자 한족 관료 최호위키백과위키소스(崔浩, 381~450)는 도사(道士) 구겸지위키백과위키소스(寇謙之, ?~448)와 손잡고 이민족 사상인 불교를 배척하고 대신 중국 고유 사상인 유교와 도교를 중시하고자 하였다. 구겸지는 민중들의 자율적 집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기존의 도교를 개혁하여 국가의 통치에 순응하는 성격으로 바꾸는 한편 황제를 도교의 최고신인 태평진군(太平眞君)으로 받들어 황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최호와 구겸지를 신뢰하게 된 3대황제 태무제(太武帝)위키백과위키소스는 446년에 사찰과 불상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숙청하는 대대적인 폐불정책을 단행하였다. 폐불정책위키소스은 매우 광범위하여 불교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최호와 구겸지, 태무제 등이 죽고 난 452년에는 다시 불교부흥의 조칙이 내려지고 불교에 대한 적극적 후원정책이 실행되었다. 전국에 대규모의 관립사찰을 건설하는 한편 불교교단의 안정적 운영을 위하여 사찰에 세금을 바치는 승기호(僧祇戶)위키소스와 범죄자들을 사찰의 토지에서 일하게 하는 불도호(佛圖戶)위키소스를 지정하였다. 한편으로는 국가에서 임명한 사문통[혹은 도인통(道人統)위키소스]이 전국의 승려들을 통괄하는 승려관리체제를 마련하였다. 불교계에서도 황제를 부처와 동일시하면서 교단의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다. 불교부흥 직후에 개착된 운강(雲岡)위키백과위치 석굴에 조성된 다섯 불상은 북위 초기의 다섯 황제를 상징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북위와 북위를 계승한 북조의 왕조들에서는 국가의 후원과 통제를 받는 국가불교가 발전하였다. 역대 수도인 대동(大同)과 낙양(洛陽)위키백과위치, 장안(長安)위키백과위치, 업(鄴)위키백과위치 등에는 도시의 중심부에 대규모 사찰과 대형불탑이 건립되었고, 황실 및 귀족, 일반인들이 후원하는 사찰이 전국에 분포하고 수많은 승려들이 그곳에서 생활하였다.주 092
각주 092)
북위의 전성기 수도 낙양과 그 교외에는 1,367개의 사찰이 있었으며, 북위 말년에는 전국에 3만여 개의 사찰과 200여만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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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사찰과 승려의 팽창으로 정부 재정이 위협받자 사찰건립과 승려의 출가를 규제하는 조치들이 취해지기도 하였지만 불교의 세력을 위축시킬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남쪽의 한족 왕조들에서도 국가와 불교의 관계는 매우 긴밀해져 갔다. 귀족과 지식인들에 대한 불교의 영향력이 심화되고, 불교교단의 세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통치자들은 정권의 정당성과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불교와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송(宋)위키백과위키백과위키소스을 건국한 유유위키소스위키소스위키백과위키백과(劉裕, 무제(武帝))는 불교계에서 자신의 즉위를 예언하였다는 이야기를 퍼뜨려 제위 찬탈을 정당화하였고, 제(齊)의 건국자들도 왕조가 개창될 때 당시의 고승 현창(玄暢)한문전자대장경이 제흥사(齊興寺)를 설립하는 등 불교계가 제나라의 건국을 축하하였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양(梁)위키백과위키소스을 개창한 소연위키백과위키소스(蕭衍, 무제(武帝))은 본래 불교에 대한 신앙이 깊던 인물로 즉위 후 스스로 보살천자(菩薩天子)로 자처하며 불교계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을 주장하고, 종묘의 제사에서도 고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수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법회를 수시로 개최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몸을 사찰에 바치는 사신(捨身)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그때마다 정부와 관료들은 막대한 재물을 모아 황제를 대속(代贖)하여야 했다. 그는 또한 불교의 이상군주인 전륜성왕불교사전의 행위를 본받아 대규모의 탑을 건립하고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였다. 진(陳)위키백과위키소스의 개창자 진패선위키백과위키소스(陳覇先, 고조(高祖))도 건국 직후 부처님의 사리위키백과불교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를 봉안하여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하려 하였고, 양 무제를 본받아 사신의식과 대규모 법회를 개최하였다.
남조의 황제들은 정치적 목적으로 불교를 존숭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불교교단과 승려들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도모하였다. 승려와 불교를 옹호하는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려들을 국가에서 심사하여 자격이 부족한 승려들을 환속불교사전시키고, 승려들이 군주의 앞에서 스스로를 빈도(貧道)불교사전라고 일컫는 대신 신(臣)을 칭하게 하였다. 또한 승려들이 군주에 대해 예를 표하도록 강제하였다. 스스로 불교에 조예가 깊었던 양의 무제위키백과위키소스는 자신이 스스로 승려들의 최고직위인 승정(僧正)불교사전이 되어 승려들을 관리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세속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율적인 승려 공동체를 주장하는 승려와 불교를 옹호하는 관료들의 반발로 국가의 불교교단 통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승려들을 호적에 등록하려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고, 중앙과 지방의 승려들을 관리하는 승정기구도 승려들의 책임하에 운영되었다. 북조와 같이 황제가 귀족들을 압도하는 절대적 권력을 갖지 못한 남조에서는 국가의 교단에 대한 통제에 한계가 있었다.
남북조 시대 말기에 북조에서 또다시 대규모의 폐불정책이 실행되었다. 부국강병과 유교적 정치질서를 추구하였던 북주(北周)위키백과의 무제위키소스는 불교와 도교를 폐지하고, 사찰과 도교사원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몰수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폐불정책위키소스은 무제의 사망으로 5년만에 중단되었지만 3백만 명의 승려가 환속하는 등 불교계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북주를 찬탈한 후 남조까지 멸망시켜 통일 제국을 수립한 수(隋)위키백과 왕조에서 불교는 다시 크게 번성하였다. 수의 문제(文帝)위키백과위키소스는 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국가가 불교교단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한편 남조 양나라 무제를 모범으로 삼아 수많은 사리탑을 건립함으로써 보살천자 혹은 전륜성왕으로서 민심을 수습하고 집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고자 하였다. 601년부터 604년까지 전국 백여 곳에 자신의 연호를 딴 인수사(仁壽寺)를 개창하고 이곳에 각기 하나씩의 대형 사리탑을 건립하였다.

  • 각주 092)
    북위의 전성기 수도 낙양과 그 교외에는 1,367개의 사찰이 있었으며, 북위 말년에는 전국에 3만여 개의 사찰과 200여만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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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불교 체제의 등장 자료번호 : edeah.d_0002_002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