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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들의 불교수용과 불교의 위상 강화

1. 통치자들의 불교수용과 불교의 위상 강화

4세기초 북방 유목민족의 공격으로 서진위키백과이 멸망한 이후 중국 북부지역에는 유목민족들이 통치하는 여러 국가가 출현하였고, 강남지역에는 북쪽에서 피난해 온 지배층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한족국가를 수립하였다. 백여 년에 걸친 5호16국위키백과-동진(東晉)위키백과 시기는 국가들 사이의 상호 항쟁이 거듭된 혼란과 불안의 시기였지만 불교는 이 시기에 사회 상류층으로 확대되면서 통치자들의 종교로 자리 잡아 갔다.
유목민족이 장악한 북중국지역에서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서역 출신 승려들의 활동에 의해 불교가 상층부에 퍼져나갔다. 특히 후조(後趙)위키백과에서 활약한 서역 출신 승려 불도징위키백과불교사전한문전자대장경위키소스(佛圖澄, 232~348)의 활동을 계기로 통치자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다. 서진 말년에 낙양에 들어온 불도징은 질병치료와 미래 예언 등의 신비한 이적을 보이며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벌였고, 전쟁과 혼란에 고생하던 사람들 사이에 많은 신자들이 생겨났다. 당시 낙양을 장악하고 있던 후조의 건국자 석륵(石勒)위키백과위키소스과 그 후계자 석호(石虎)위키소스는 그를 발탁하여 정치·군사적 자문을 받는 한편 그의 포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특히 석호는 불교는 이민족의 종교이므로 공인하여서는 안 된다는 한족 출신 관료의 반대에 대해 자신도 이민족 출신이라며 국가적 차원의 불교 수용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통치자들의 후원하에 불도징은 후조 전역에 893개의 사찰을 건립하였고 수많은 문도와 신자들을 양성하였다. 불도징 이외에도 단도개, 축불조, 기역 등의 서역 출신 승려들이 신이한 도술을 매개로 통치자와 일반인들에게 불교를 홍포하였다.
불도징 사후 후조는 곧 멸망하였지만 불도징의 가르침을 계승한 한족과 이민족출신 제자들은 북중국 여러 지역에서 불교를 널리 퍼뜨렸다. 후조를 이어 중원 지역을 장악한 전진(前秦)위키백과과 후진(後秦)위키백과의 통치자들도 불교를 크게 중시하였다. 불도징의 제자 중 승랑(僧朗)한문전자대장경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산동지역의 태산위키백과위치에 들어가 수행하면서 민간에 불교를 퍼뜨렸고, 도안위키백과한문전자대장경불교사전(道安, 312~384)은 교학연구에 힘쓰며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전진위키백과의 황제 부견(符堅)위키백과위키소스은 이들을 존숭하여 스승으로 삼고자 하였고, 마침내 도안을 수도 장안으로 초빙한 후에는 그의 제안에 기초한 불교장려정책을 시행하였다. 전진을 이은 후진의 통치자들도 불교를 존중하였는데, 특히 2대 국왕 요흥(姚興)위키백과위키소스 때에는 구자국위키백과위치[龜玆國, 쿠차]출신의 구마라집위키백과한문전자대장경불교사전(鳩摩羅什, 344~413 혹은 350~409)을 장안에 맞아들여 대규모의 경전 번역 사업을 전개하였다. 전진과 후진 통치자들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도안과 구마라집은 문도의 양성과 교학연구에 힘썼으며 이를 통해 중국불교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한편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던 서쪽 국경지대 양주(凉州)위키백과위치에 자리하고 있던 북량(北凉)위키백과위키소스에서도 불교 신앙이 성행하였다. 412년 이곳에 들어온 인도출신의 담무참한문전자대장경불교사전(曇無讖, 385~433)은 불도징과 비슷한 신이한 능력으로 북량 왕실의 존숭을 받으며 불교를 크게 퍼뜨렸다.
한족에 의한 새 왕조가 수립된 중국 남부지역에서는 불교의 형이상학적 측면에 관심을 가진 상층 사족들을 중심으로 불교가 급속히 퍼져나갔다. 3세기 후반 이래 한족 지식층들 사이에서는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와 그 현상 세계의 근원 및 세상의 변화원리, 인간의 본성 같은 철학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현학(玄學)위키백과과 그러한 주제들을 형이상학적으로 논하는 청담(淸談)이 유행하였는데, 이민족의 침입으로 남쪽으로 피난해 온 동진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증대되었다. 소수 문벌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고 그들 사이에 권력을 둘러싼 대립과 음모가 횡행하는 가운데 지식인들은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대신에 형이상학적 논의에 집중하였다. 현실세계의 허망함을 강조하고 근원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강조하는 불교사상 특히 현상세계의 불완전한 지식과 구별되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제시하는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은 현학 및 청담과 상통하는 점이 적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현학과 청담에 몰두해 있던 지식층들 사이에서 크게 중시되었다. 초기에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인물은 동진 초기의 실권자 왕돈(王敦)위키소스의 동생 축도잠(竺道潛, 286~374)과 승려 출신의 청담 전문가 지둔불교사전(支遁, 314~366)이었다.
축도잠은 남쪽으로 피난하기 이전 장안에서 출가하여 축법호위키백과불교사전한문전자대장경 계통의 인물들로부터 불교를 배웠다. 이민족의 침입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 온 이후에는 가문을 배경으로 황제 및 최고위층 귀족들과 교류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설하였다. 동진 초기에 황실을 비롯한 상층귀족들 사이에 불교가 급속히 퍼진 데에는 그의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지둔은 명문출신은 아니었지만 현학과 청담에 뛰어나서 최고위층 귀족들 청담 모임의 환영받는 참석자였다. 그는 불교이론과 노장사상을 활용하여 현학의 문제들을 논의하였고 불교사상을 현학적으로 정리한 많은 글을 지었다. 그의 논의와 저술은 상류층 지식인들의 모범이 되었고, 이를 통해 불교는 상층 귀족사회에 친밀하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축도잠과 지둔 이외에도 학문과 도덕 등의 측면에서 상층 귀족들의 존중을 받고 그들과 교유하는 승려들이 적지 않았으며 이를 통하여 불교는 동진의 상류층에 폭넓게 수용되었다.
수도에서 활동한 축도잠이나 지둔과 달리 여산(廬山)위키백과불교사전위치에 은거하며 수행에만 전념하였던 혜원불교사전한문전자대장경(慧遠, 344~416)도 동진에서의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 다수의 지식인들은 현실세계를 떠나 자연에 은거하는 은자의 삶을 추구하였는데, 산속 암자에서 수행하는 혜원과 그 제자들의 모습은 이러한 은자의 이상적 모습으로 여겨졌다. 도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혜원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여산에서 철저한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엄격한 계율불교사전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실천을 강조하였고, 여산에 정착한 이후 입적할 때까지 30년 이상 산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청정한 수행을 실천하였다. 그는 세속과 구별되는 불교적 세계의 독자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국왕이 통치하는 세속 사회와 세속에서 벗어난 승려 공동체의 대등한 공존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승려들이 부모나 군주들에게 예를 표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불교사전을 주창하였다. 혜원이 이끄는 여산의 승려 공동체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상적 집단으로 여겨졌고, 이에 따라 지식인들의 모범으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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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들의 불교수용과 불교의 위상 강화 자료번호 : edeah.d_0002_002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