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현세력 유입과 고구려·삼한
Ⅲ. 중국 군현세력 유입과 고구려·삼한
우거왕(右渠王)의 조선(朝鮮)이 한군(漢軍)의 공격으로 붕괴하자, 그 자리에는 4개의 군(郡)이 들어섰다. 낙랑·현토(玄菟)·임둔(臨屯)·진번(眞番)의 한4군이다. 중국 지역으로부터 대량의 한인이 조선 지역으로 들어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정복지를 통치하기 위해 파견된 한인 관리와 병사들 그리고 교역의 이익을 얻기 위해 건너온 상인이 그들이었다. 이러한 군현 설치와 한인 유입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살펴보자.
이에 따라 조선 사회의 문화에는 한식(漢式)의 색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무덤에 부장된 유물을 볼 때, 재래의 유물이 감소하고 한식 유물이 증가하는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주 031한편 군현의 설치로 조선의 외곽에 있던 세력들도 한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이는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발견되는 한의 의책(衣幘)과 청동거울·비단·철제대도 등 각종 철기 등을 통해서 확인하여 볼 수 있다. 한의 물품은 군현의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을 넘어서 한반도 전역으로 유포되었던 것이다.주 032
그렇지만 한식 유물이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된다고 하여 혹은 그 문물을 모방하고 선호하는 풍조가 있었다고 하여, 그것이 조선·한 사회의 전체 구조를 뒤바꿀 정도의 것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 문물을 모방하고 선호한 이들은 군 중심지의 조선인에 한정되었고, 변두리 사람들은 여전히 예전의 식기를 사용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군현의 지배 아래 있던 조선 사회조차 이러한 상황이었다면,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한의 문물은 어떻게 전해졌던 것일까.
이 점에서 군현의 설치에 수반하여 중국에서 한인들이 건너왔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들에 의해 한 문물이 조선에 전해졌고, 그 한반도 남부 나아가서는 일본열도에도 전파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파동의 핵심이 될 낙랑군의 경우, 군현 운영에 필요한 관리가 중국에서 건너왔던 것은 군 설치 초기에 국한되었다.주 033게다가 중국으로부터의 조직적 이민(移民)이나 사민(徙民)의 조치도 내려지지 않았다.주 034결국 한인이 대량으로 이주했던 것은 군 설치 무렵의 짧은 기간동안이었고 그것마저도 군현이 들어선 제한된 지역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적어도 한의 동방지역에서 한 문물이 전파되고 그것을 사용하는데 한인의 집단적 이주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없으며, 이 지역이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일원이 되는 계기 역시 한인의 집단적 이주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군현의 설치에 따른 한인의 이주는 어디까지나 인접사회가 중국 문물을 접하는 하나의 계기가 될지언정 인접지역에 중국 문물이 정착하는 것과는 직접적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중국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이 아닌 군현과 인접지역 간의 교류로 눈을 돌려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군현민을 매개로 한 문물이 전수되었을 가능성이 찾아지는 것이다. 낙랑군의 사례를 보면 군현 지배가 장기화되면서 낙랑 군현민은 점차 군현 통치에 협력하게 되었으며, 군현의 속리(屬吏)층을 전담하는 등 군의 지배층으로 탈바꿈하였다.주 035또한 군현과 인접 지역 간의 교역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이를 담당한 이들도 군현민이었다.주 036특히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주목이 가는 것은 군현 지배 하의 낙랑 사회가 점차 한화(漢化)되어갔다는 사실이다. 한인에 의해 이적(夷狄)으로 간주되었던 낙랑의 백성들이 시서(詩書)를 암송할 정도로 유교문화를 향유하게 되었던 것이다.주 037
그러면 이들 군현민은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군현의 지배력이 군현 외곽지역에까지 미쳤다고는 볼 수 없기에 군현민이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에 관여하기 위해서는 무언가의 계기를 필요로 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점에서 군현과 그 바깥 지역의 여러 세력 간에는 평화적·폭력적 교섭이 빈번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에 관심이 간다. 이러한 교섭이 고구려를 비롯한 부여(夫餘)·삼한 등의 여러 세력에 영향을 주었고, 여기에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과 관련된 군현민의 역할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군현과의 교섭기록이 일찍부터 보이고, 그 내용이 비교적 풍부한 것은 고구려이다. 이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군현과의 교섭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려는 현토군과 접해 있다는 지리적 조건에 더하여, 한(漢)의 동방경영(東方經營)과 관련하여 주요한 통제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기원전 75년 한4군의 하나인 현도군이 그 중심지를 고구려의 서북(西北)으로 옮겨 고구려의 성장세를 가로막고 통제아래 두려 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하여 준다.주 039
그러면 빈번하였을 군현과의 접촉으로 달라진 고구려의 면모는 어떤 것이었을까. 위의 B 기록에 따르면 교섭 초기 현도군은 관리하던 명부(名簿)에 따라 조복의책을 수여하였다. 한은 군현 지배가 미치지 않는 주변 사회에 대해 조복의책을 소지한 자만이 호시교역에 참가할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분리조종책을 통해 주변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구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던 군현과의 교통을 고구려 국왕이 독점하게 되면서 조복의책은 5부(部)의 대가(大加)에 비해 결코 우월했다고 볼 수 없는 고구려 초기의 왕권(王權)이 제자리를 잡아나가는데 활용되었다.주 040‘책구루’의 설치에 대한 언급이 이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군현과의 교섭에 의해 나타난 변화상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주부는 한 군현의 주부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점이 적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대가와 함께 출정군을 지휘한다거나 공회시에 대가와 동급의 지위로 소가(小加)와는 신분적으로 구별되고 고구려 국왕과 더불어 오(吳)의 손권(孫權)으로부터 조서(詔書)를 받았다는 사실 등을 들 수 있다.주 044한의 주부는 군 태수부의 속관 즉 한 제국의 말단 관리에 불과했지만, 고구려의 주부는 고구려 초기의 관등 조직에서 중핵적 위치에 있던 관이었던 것이다. 이로 보아 고구려의 주부는 중국 관제를 그대로 습용한 것이 아니라 그 명호와 형식을 빈 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상가·고추가·우태’ 등은 고구려 고유의 관으로 보여진다. 이 점에서 고구려는 일찍부터 고유의 관제와 더불어 중국의 관료조직에 연원을 둔 관으로 관등조직을 편성했던 것이다.
또한 C-2 기록에서 ‘제가들이 가신처럼 임명한 사자·조의·선인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했다’는 것은 그 명단이 문서로 보고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한자(漢字)를 사용한 문서행정(文書行政), 한의 그것처럼 완숙한 단계의 것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구려가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한 관료행정을 시작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주 045한 군현과의 접촉에서 비롯된 자극과 필요성은 고구려 국내 통치체제에서 문서행정의 시행을 촉발하였던 것이다.주 046
그런데 이상에서 살펴본 변화상은 모두 한의 문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위신재(威信財)처럼 소유와 동시에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한 군현의 운영을 통해 주부 등의 업무분장과 문서행정의 필요성을 자각했다고 하더라도, 도입과 시행을 위해서는 군현제도를 이해하고 한자로 문서를 작성할 수 있어야 하였다. 앞서 살핀 한 문물의 수용에는 이러한 지식을 가진 식자층(識者層)의 보유가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는 한자를 습득하고 문서행정을 경험한 식자층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었을까.주 047
『後漢書』에는 122년 경의 일로서 고구려가 군현에 침입하여 포로로 데려간 군현민이 수천에 달하고 있다는 지적을 전한다.주 048고구려는 군현과의 군사적 충돌을 통해 군현민을 확보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현도군의 호구수(戶口數)는 후한시대에 들어서 급감하였는데주 049이 역시 고구려가 군현 영역을 잠식해 들어간 사정과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이로 보아 고구려가 필요로 하였던 한 문물의 식자층을 확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군현민들이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과정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고 보인다. 이들은 군현지배를 거치면서 한화되어가고 있던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고구려가 한자를 수용하고 문서행정과 관제를 도입하는데 필요한 최적의 매개자였던 것이다.주 050특히 한자의 수용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한자를 매개로 중국의 학술·문화·제도·사상을 배우게 되고 유교를 비롯한 정치제도로서의 율령, 한역불교(漢譯佛敎)를 수용하는 데까지 이른다.주 051이 점에서 고구려가 한자를 수용하고 초보적이나마 문서행정을 실시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구려가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일원으로 자리하게 되는 계기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한편 무제(武帝)의 사후, 한의 대외정책은 재정 부담이 과중하고 토착민의 저항을 받는 변군(邊郡)을 축소 또는 폐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에 따라 군현과 그 바깥의 세력 간의 관계도 형식적으로는 군현의 관할 아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책봉·조공의 외교관계로 변하였다. 이러한 양자의 관계 속에서 고구려는 관할 군의 변경을 요구하거나 자의적인 탈퇴와 복귀를 반복하였다.주 052이것은 고구려가 변군체제의 맥락을 간파하고 그에 걸맞는 대외전략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아닐까. 군현과의 교통을 국왕이 독점함으로써 한의 분리통제책을 무산시켰다는 사실이 이를 말하여준다. 뒤에 가서는 조위(曹魏)와 손오(孫吳)의 대결 국면 속에서주 053, 고구려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국가적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다각적인 외교가 전개되어야 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 시기 대중외교(對中外交)가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배경에도 군현민의 역할을 상정하여 볼 수 있다고 여겨진다.주 054
군 중심지의 조선인들이 한인 관리와 상인이 하는 것을 본따 같은 식기로 식사를 했다는 것은 전래된 한의 문물이 조선의 문화와 습속에 변화를 불러왔음을 보여준다. 중국에서 한인들이 건너옴으로 해서 조선 사회는 한의 문물을 대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접촉은 군현의 통치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직접적이고 전면적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사회의 문화에는 한식(漢式)의 색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무덤에 부장된 유물을 볼 때, 재래의 유물이 감소하고 한식 유물이 증가하는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주 031한편 군현의 설치로 조선의 외곽에 있던 세력들도 한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이는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발견되는 한의 의책(衣幘)과 청동거울·비단·철제대도 등 각종 철기 등을 통해서 확인하여 볼 수 있다. 한의 물품은 군현의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을 넘어서 한반도 전역으로 유포되었던 것이다.주 032
그렇지만 한식 유물이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된다고 하여 혹은 그 문물을 모방하고 선호하는 풍조가 있었다고 하여, 그것이 조선·한 사회의 전체 구조를 뒤바꿀 정도의 것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 문물을 모방하고 선호한 이들은 군 중심지의 조선인에 한정되었고, 변두리 사람들은 여전히 예전의 식기를 사용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군현의 지배 아래 있던 조선 사회조차 이러한 상황이었다면,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한의 문물은 어떻게 전해졌던 것일까.
이 점에서 군현의 설치에 수반하여 중국에서 한인들이 건너왔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들에 의해 한 문물이 조선에 전해졌고, 그 한반도 남부 나아가서는 일본열도에도 전파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파동의 핵심이 될 낙랑군의 경우, 군현 운영에 필요한 관리가 중국에서 건너왔던 것은 군 설치 초기에 국한되었다.주 033게다가 중국으로부터의 조직적 이민(移民)이나 사민(徙民)의 조치도 내려지지 않았다.주 034결국 한인이 대량으로 이주했던 것은 군 설치 무렵의 짧은 기간동안이었고 그것마저도 군현이 들어선 제한된 지역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적어도 한의 동방지역에서 한 문물이 전파되고 그것을 사용하는데 한인의 집단적 이주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없으며, 이 지역이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일원이 되는 계기 역시 한인의 집단적 이주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군현의 설치에 따른 한인의 이주는 어디까지나 인접사회가 중국 문물을 접하는 하나의 계기가 될지언정 인접지역에 중국 문물이 정착하는 것과는 직접적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중국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이 아닌 군현과 인접지역 간의 교류로 눈을 돌려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군현민을 매개로 한 문물이 전수되었을 가능성이 찾아지는 것이다. 낙랑군의 사례를 보면 군현 지배가 장기화되면서 낙랑 군현민은 점차 군현 통치에 협력하게 되었으며, 군현의 속리(屬吏)층을 전담하는 등 군의 지배층으로 탈바꿈하였다.주 035또한 군현과 인접 지역 간의 교역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이를 담당한 이들도 군현민이었다.주 036특히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주목이 가는 것은 군현 지배 하의 낙랑 사회가 점차 한화(漢化)되어갔다는 사실이다. 한인에 의해 이적(夷狄)으로 간주되었던 낙랑의 백성들이 시서(詩書)를 암송할 정도로 유교문화를 향유하게 되었던 것이다.주 037
그러면 이들 군현민은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군현의 지배력이 군현 외곽지역에까지 미쳤다고는 볼 수 없기에 군현민이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에 관여하기 위해서는 무언가의 계기를 필요로 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점에서 군현과 그 바깥 지역의 여러 세력 간에는 평화적·폭력적 교섭이 빈번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에 관심이 간다. 이러한 교섭이 고구려를 비롯한 부여(夫餘)·삼한 등의 여러 세력에 영향을 주었고, 여기에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과 관련된 군현민의 역할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군현과의 교섭기록이 일찍부터 보이고, 그 내용이 비교적 풍부한 것은 고구려이다. 이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군현과의 교섭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B. “한대에 ‘고취기인’을 내려주었는데, 항상 현도군에서 조복과 의책을 받았으며, 고구려현령이 그 명적을 주관하였다. 그 뒤에 점차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않아 동쪽 변경에 작은 성을 쌓아 조복과 의책을 그 가운데에 두니 매년 와서 가져갔다. 지금 호는 아직도 이 성을 책구루라고 부르는데, 구루란 고구려에서 성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三國志』 卷30 高句麗傳)주 038
그러면 빈번하였을 군현과의 접촉으로 달라진 고구려의 면모는 어떤 것이었을까. 위의 B 기록에 따르면 교섭 초기 현도군은 관리하던 명부(名簿)에 따라 조복의책을 수여하였다. 한은 군현 지배가 미치지 않는 주변 사회에 대해 조복의책을 소지한 자만이 호시교역에 참가할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분리조종책을 통해 주변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구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던 군현과의 교통을 고구려 국왕이 독점하게 되면서 조복의책은 5부(部)의 대가(大加)에 비해 결코 우월했다고 볼 수 없는 고구려 초기의 왕권(王權)이 제자리를 잡아나가는데 활용되었다.주 040‘책구루’의 설치에 대한 언급이 이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군현과의 교섭에 의해 나타난 변화상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위의 두 기록은 고구려 초기의 관제에 대한 정보를 전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C-1의 ‘주부(主簿)’에 관심이 간다. 그 명칭으로 보아 중국 관제의 영향에 의해 성립된 관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한의 군 태수부(太守府)에는 주부 등의 속리가 편성되어 태수의 업무를 보좌하였다. 이 가운데 문서와 기록을 관장하는 속리가 바로 주부였다.주 043
그런데 고구려의 주부는 한 군현의 주부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점이 적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대가와 함께 출정군을 지휘한다거나 공회시에 대가와 동급의 지위로 소가(小加)와는 신분적으로 구별되고 고구려 국왕과 더불어 오(吳)의 손권(孫權)으로부터 조서(詔書)를 받았다는 사실 등을 들 수 있다.주 044한의 주부는 군 태수부의 속관 즉 한 제국의 말단 관리에 불과했지만, 고구려의 주부는 고구려 초기의 관등 조직에서 중핵적 위치에 있던 관이었던 것이다. 이로 보아 고구려의 주부는 중국 관제를 그대로 습용한 것이 아니라 그 명호와 형식을 빈 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상가·고추가·우태’ 등은 고구려 고유의 관으로 보여진다. 이 점에서 고구려는 일찍부터 고유의 관제와 더불어 중국의 관료조직에 연원을 둔 관으로 관등조직을 편성했던 것이다.
또한 C-2 기록에서 ‘제가들이 가신처럼 임명한 사자·조의·선인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했다’는 것은 그 명단이 문서로 보고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한자(漢字)를 사용한 문서행정(文書行政), 한의 그것처럼 완숙한 단계의 것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구려가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한 관료행정을 시작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주 045한 군현과의 접촉에서 비롯된 자극과 필요성은 고구려 국내 통치체제에서 문서행정의 시행을 촉발하였던 것이다.주 046
그런데 이상에서 살펴본 변화상은 모두 한의 문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위신재(威信財)처럼 소유와 동시에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한 군현의 운영을 통해 주부 등의 업무분장과 문서행정의 필요성을 자각했다고 하더라도, 도입과 시행을 위해서는 군현제도를 이해하고 한자로 문서를 작성할 수 있어야 하였다. 앞서 살핀 한 문물의 수용에는 이러한 지식을 가진 식자층(識者層)의 보유가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는 한자를 습득하고 문서행정을 경험한 식자층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었을까.주 047
『後漢書』에는 122년 경의 일로서 고구려가 군현에 침입하여 포로로 데려간 군현민이 수천에 달하고 있다는 지적을 전한다.주 048고구려는 군현과의 군사적 충돌을 통해 군현민을 확보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현도군의 호구수(戶口數)는 후한시대에 들어서 급감하였는데주 049이 역시 고구려가 군현 영역을 잠식해 들어간 사정과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이로 보아 고구려가 필요로 하였던 한 문물의 식자층을 확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군현민들이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과정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고 보인다. 이들은 군현지배를 거치면서 한화되어가고 있던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고구려가 한자를 수용하고 문서행정과 관제를 도입하는데 필요한 최적의 매개자였던 것이다.주 050특히 한자의 수용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한자를 매개로 중국의 학술·문화·제도·사상을 배우게 되고 유교를 비롯한 정치제도로서의 율령, 한역불교(漢譯佛敎)를 수용하는 데까지 이른다.주 051이 점에서 고구려가 한자를 수용하고 초보적이나마 문서행정을 실시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구려가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일원으로 자리하게 되는 계기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한편 무제(武帝)의 사후, 한의 대외정책은 재정 부담이 과중하고 토착민의 저항을 받는 변군(邊郡)을 축소 또는 폐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에 따라 군현과 그 바깥의 세력 간의 관계도 형식적으로는 군현의 관할 아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책봉·조공의 외교관계로 변하였다. 이러한 양자의 관계 속에서 고구려는 관할 군의 변경을 요구하거나 자의적인 탈퇴와 복귀를 반복하였다.주 052이것은 고구려가 변군체제의 맥락을 간파하고 그에 걸맞는 대외전략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아닐까. 군현과의 교통을 국왕이 독점함으로써 한의 분리통제책을 무산시켰다는 사실이 이를 말하여준다. 뒤에 가서는 조위(曹魏)와 손오(孫吳)의 대결 국면 속에서주 053, 고구려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국가적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다각적인 외교가 전개되어야 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 시기 대중외교(對中外交)가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배경에도 군현민의 역할을 상정하여 볼 수 있다고 여겨진다.주 054
- 각주 030)
- 각주 031)
- 각주 032)
- 각주 033)
- 각주 034)
- 각주 035)
- 각주 036)
- 각주 037)
- 각주 038)
- 각주 039)
- 각주 040)
- 각주 041)
- 각주 042)
- 각주 043)
- 각주 044)
- 각주 045)
- 각주 046)
- 각주 047)
- 각주 048)
- 각주 049)
- 각주 050)
- 각주 051)
- 각주 052)
- 각주 053)
- 각주 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