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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국가의 발전

 
 

Ⅳ. 초기국가의 발전

 

하왕조위키백과, 상왕조위키백과, 주왕조위키백과로 알려진 초기국가는 기본적으로 신정(神政)국가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들 초기국가의 군주는 주술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함께 겸비한 자였다. 이 점이 비교적 잘 드러나는 상나라의 경우를 살펴보자.
상나라는 반경(盤庚)위키백과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이 은허위키백과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지도 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도읍을 다섯 번이나 옮겨야 했고, 왕위도 종종 형제 상속에 의해 이어지곤 했다. 그 이유는 왕권이 확립되지 못한 채 여러 부족들이 서로 경쟁하고 다투었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상나라는 조상신의 권위에 의지해 왕권을 유지하였다. 전체 부족의 제사장 기능을 담당했던 상나라 왕은 중요한 일이건 작은 일이건 모두 점을 쳐서 신의 뜻을 물었다. 이렇게 신이 모든 일을 결정하였던 만큼 신에게 융성한 제사를 바쳐야 했다. 갑골문위키백과위키백과에 보이는 상나라의 제사는 매우 다양했다. 상나라의 최고신인 제(帝)에게 바치는 제사에서부터, 산과 강 같은 자연신에 대한 제사, 그리고 조상신에게 바치는 제사에 이르기까지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었다. 그리고 각각의 제사에 바쳐진 희생물의 종류도 다양하였다. 희생물 명단에는 농사를 지어서 수확한 곡식은 물론, 목축과 수렵을 통해 잡은 짐승들의 다양한 명칭들이 보인다. 더욱이 사람을 제사의 희생물로 삼기도 했다. 또 신에게 바쳐지는 희생물은 청동기와 같은 특별한 그릇에 담겨져 정성스럽게 봉헌되어야 했다.
왕권 유지에 제사가 결정적이었으므로 제사장으로서의 상나라 왕은 신에게 바칠 제사를 위해 청동기 제작과 각종 희생물의 공급이 항상 가능하도록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것은 대규모 노동력을 조직하게끔 했고, 이 때문에 상왕의 권력은 외견상 매우 강대하게 보였다. 그런데 이들 희생물과 청동기의 재료는 상나라 왕이 살고 있는 수도 근처에서 모두 구할 수 없었으므로, 이것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멀리까지 찾아 나서야 했다. 제사에 필요한 희생물과 청동기가 상나라 왕권에 불가피했기에, 그들은 멀리까지 진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019]
각주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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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莉·陳星燦 지음·심재훈 옮김(2006), 『중국고대국가의 형성』, 학연문화사.


주나라는 상나라의 주술적 측면을 크게 혁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 무왕이 직접 상나라의 지나친 제사습속을 따라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지만, 금문(金文)이나 『상서』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주례』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 등과 같은 유가문헌 속에서 이러한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성격을 도출하였던 주요사료의 성격이 크게 다르다는 점을 잊어서도 안 된다. 왕의 점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행위에 대한 내용을 적은 상대의 갑골문에서는 종교적 내용이 많이 검출될 수밖에 없으며, 왕과 신하 사이의 정치적 주종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서주시기 청동기 금문에서는 제도적 측면이 강조되기 마련이다. 더욱이 서주위키백과를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생각했던 유가의 기록인 이상, 후에 유가적 입장에서 서주를 미화했을 것임에 틀림없으므로 그 내용을 그대로 신뢰할 수는 없다. 즉 상과 주 사이의 변화를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하지만, 그 변화의 정도를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실 금문이 기록된 청동기도 기본적으로는 제사 예기에 속한다. 따라서 금문에 적힌 천자위키백과와 신하의 정치적 주종관계도 예기를 사용하는 제례의식에 의해 비로소 맺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天子)가 그 천명을 제후에게 분여(分與)하는 방식이 곧 봉건중국위키백과이 담고 있는 중요한 함의였다. 또 금문의 내용에 의하면 청동기를 하사받은 제후는 천자로부터 예기를 사여 받았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이에 감사를 드렸으며, 마지막으로는 그 예기를 사용하여 자자손손 영원히 제사를 드리겠다고 다짐하였다. 또한 제후 역시 씨족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씨족의 영원한 존속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주왕은 제후의 내부 제사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천명을 분사(分賜)할 뿐이었다. 즉 수도에 거주하는 최고 지배자와 지방의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이 각각 지배적 씨족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초기국가의 또 하나의 특징을 말해준다.
그러나 봉건제(封建制), 종법제(宗法制)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료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와 같은 정치적 제도가 상대보다 더 발전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전체적 편성은 알 수 없지만 관명이 어느 정도 분화되어가고 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금문에 보이는 관명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주왕의 관제는 크게 경사료(卿事寮)와 대사료(大事寮)의 두 조직으로 나뉜다. 전자는 왕기(王畿)의 정치 및 제후와 관련된 정무를 관리하는 부서이고, 대사료는 왕조의 의례를 주로 담당했다. 그러나 관직에 대응하는 직책이 결정되어 있지 않는 등 관료제의 성격이 미성숙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주의 관제는 수도 주변 왕기(王畿) 지역에서의 왕조 권력을 어느 정도 증명해 줄 수는 있지만, 다른 씨족 지배질서를 배제하는 배타적 권력으로서의 왕권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하다.
주대에도 상대와 마찬가지로 영역의 확대는 자원의 확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상대에 비해 훨씬 적극적인 방식이 취해졌다. 그 방식이 곧 봉건제의 실시이다. 봉건제란 왕이 제후에게 땅과 백성에 대한 통치를 일임하는 대신, 제후는 왕에게 경제적 공납과 군사적 보호의 의무를 지는 통치제도를 말한다. 주나라는 자신의 종친들을 수도 가까이에 분봉하여 왕실을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하도록 한 반면, 공신들과 이전 왕조의 후예들은 멀리 옛 상나라의 영역 곳곳에 분봉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봉건제의 이념적 전제가 비록 주왕이 모든 토지와 백성을 소유한다는 이른바 왕토사상에서 출발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분봉된 제후가 해당 지역으로 가서 그곳을 점령한 뒤 점차 세력을 확대해 가는 군사적 식민화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각 제후국은 중심지 도성을 거점으로 가까운 주변에 영향력을 미치는 정도의 성읍국가(城邑國家)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였으며, 후대와 같은 영역국가가 아니었다. 점령 지역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의 습속과 전통에 맞추어 지배하는 형식이 채택되었는데, 서주의 영향력 범위가 상대에 비해 넓어진 것은 이러한 방식이 유효했기 때문이었다. [주020]
각주 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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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등(2007),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RISS



 

주 019
劉莉·陳星燦 지음·심재훈 옮김(2006), 『중국고대국가의 형성』, 학연문화사.
주 020
김병준 등(2007),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R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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