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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지역

 
 

2. 북방 지역

 

문헌을 기록하는 자들은 원칙적으로 자신의 지역과 사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그곳에서 벗어난 지역은 자연히 기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기록이 되더라도 자신들의 문제와 관련된 부분만이 기록될 수밖에 없다. 그 기록도 완전하지 못하다.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곳이었으므로 그들에 대한 정보도 정확할 리 없다. 구체적인 정보를 얻었다고 해도 기록자의 관심에 따라 취사선택되고, 또 이것들이 다시 주요한 몇 가지 특징으로 종합되면서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고대기록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이 동아시아 고대사는 거의 전적으로 중국의 문헌자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지만, 황하 중류를 중심으로 하여 성장한 중원 왕조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주변의 다른 정치 세력에 대해 매우 소략한 기록, 그것도 추상적이거나 부정확한 기록을 남겼다. 그들이 오랑캐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라고 일컬었던 이른바 북적(北狄)위키백과, 남만(南蠻)위키백과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 서융(西戎)위키백과, 동이(東夷)위키백과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가 여기에 해당된다. 예컨대 앞서 주로 양자강 지역에서 초기국가가가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문헌기록에는 이러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한편 중원의 화하문명과 크게 다르지 않은 환경과 경제적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춘추전국 시대 이후에는 중원 왕조의 영역 안으로 편입되었던 양자강 지역과는 달리, 북적과 서융에 해당되는 지역은 목축 혹은 유목위키백과문화가 발달한 곳으로서 중원과는 다른 지리적 환경과 경제적 생산양식을 발전시켰으며, 전국 이후 한대까지도 중원과 경쟁하고 대립하는 곳이었을 뿐 아니라 소위 유목제국을 성립시키기도 했다.
기원전 10세기경 중국 북방 지역에서는 기후 건조화라는 조건과 함께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목축 생산이 우위를 점한 혼합 경제에서 실질적인 유목 목축으로 진화하여 갔던 것이다. 특히 기원전 7~6세기부터 북방지구 전역에서는 마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와 장신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는데 이는 곧 경제적 혹은 상징적 영역에서 말이 지니는 가치가 커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철제 도구와 무기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가 다량으로 발견된다는 사실도 유목공동체의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북방 지구 전체가 동시에 변화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지역은 여전히 목축과 수렵 단계에 머물러 있는 반면, 어떤 지역에는 진정한 초기 유목생활의 중심지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바꾸어 말하면 농경생활자 혹은 목축과 농경 활동을 동시에 영위하는 반목축공동체가 유목 및 목축사회 사이에 존재했으며, 이들의 관계는 적대적이고 파괴적이기보다 공생적이고 건설적인 관계에 의존하며 발전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유목생활을 하는 공동체도 여러 종족 집단이 함께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가령 돌방무덤[石室墓]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과 움무덤[竪穴墓]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이 함께 확인되기 때문이다. 돌방무덤이 있는 초기 유목 유적이 움무덤만 있는 스키타이 양식 유적과 매우 가까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종족 집단이 나란히 생활했다는 것, 즉 아직까지는 그들이 새로운 사회 통합체 그리고 더 큰 정치적 단위로 융합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주018]
각주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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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디코스모 지음·이재정 옮김(2002), 『오랑캐의 탄생』, 황금가지.RISS


한편 기원전 4~3세기 고고학 유물을 보면 유목사회 내부의 계층 분화가 매우 급격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무덤 속에 극도로 화려한 금은 장식품이 부장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하층 주민들을 착취함으로써 얻어진 것이 아니라 교역을 통해 획득되었던 것은 북방 지역의 유목사회 사이에 직접적 접촉이 빈번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 최고위 계층을 위한 금제 장신구 및 위신재 등의 유물이 매우 광활한 초원지역에 넓게 공통적으로 공유되는데, 이렇듯 동일한 위신재가 널리 분포한다는 사실은 그것을 분배하는 상위의 정치권력을 상정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중국 북방지구의 서쪽부터 동쪽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목사회 유적이 주요한 문화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이 지역을 아우르는 크고 강력한 정치적 단위가 생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계층은 기존의 혈연 집단을 뛰어넘는 복잡한 정치 체계를 운영하였고, 종족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뒤섞인 사회를 통제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 단계에 들어오면 이미 ‘유목국가’, 즉 단순한 혈연 집단을 능가하는 정치체제가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소위 흉노위키백과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제국은 이런 고고학적 자료에 부합하며 출현하였다. 황하가 크게 구부러져 흐르는 곳 아래쪽으로 넓은 목초지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은 오르도스 혹은 하남(河南)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유목과 함께 농경생활을 하던 이 지역의 흉노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생활 거점지였다. 그런데 기원전 3세기 후반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그 기세를 몰아 몽염(蒙恬)을 시켜 30만 병사를 보내 오르도스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지역을 점령하고 이곳의 흉노인들을 황하 북쪽으로 몰아낸 뒤, 그곳에 장성위키백과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을 쌓았다. 이것은 흉노인들에게는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본래의 생활 터전을 찾기 위해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결집시킬 필요가 있었다. 즉 본래부터 불안정한 유목경제가 진시황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의 공격으로 생존의 직접적 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 위기로 말미암아 특정 종족을 중심으로 집권화된 군사조직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등장한 인물이 묵특선우(冒頓單于)위키백과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이다. 그는 동쪽으로는 동호(東胡)위키백과를 병탄하고, 서쪽으로는 월지(月氏)위키백과를 멸망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백양(白羊), 누번(樓煩)위키백과을 무너뜨려 북아시아 전 영토를 병합하였다. 이러한 여세는 전한시대 초기까지 이어졌다. 한 고조 유방(劉邦)위키백과은 기원전 200년 친히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에 맞섰지만 흉노의 묵특선우가 산서성 대동시(大同市) 지도 동쪽의 평성(平城)에서 포위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하면서 유방은 죽을 고비를 맞았고 결국 흉노와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된다. 평화의 조건은 공주를 선우에게 시집보내고, 관시(關市)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를 열고, 매년 옷감과 음식을 보내주는 대신 장성을 경계로 서로 침략하지 않는 것이었다. 흉노가 우위에 선 화친(和親)이었다. 그러나 흉노는 그 뒤에도 계속해서 변경 지역을 침범하였고 한은 이를 달래기 위해 다시 조약을 맺는 형태가 반복되었다. 흉노의 선우가 여러 유목부족들의 결집을 유지하고 그 위에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존의 차원을 넘어선 전략적인 약탈이 계속 이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중원왕조의 문헌기록에는 이러한 북방지역에서의 변화, 즉 유목 사회의 발생과 국가단계로의 발전에 대해 기본적으로 언급이 없다. 그것은 양자의 문화가 근본적으로 이질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 유목사회가 중원왕조와 별다른 직접적 접촉이 없었던 것이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중원왕조는 바로 인접한 융 혹은 적이라고 불리는 자들과 접촉했지만, 이들은 북방지역의 유목사회와는 다른 자들이었다. 물론 기원전 4~3세기 이후가 되면 유목사회가 중원왕조의 기록에 등장하게 된다. 특히 이들과 가까이 있었던 중원 주변의 국가, 즉 조(趙)위키백과·연(燕)위키백과·진(秦)위키백과과의 접촉이 주를 이루었는데,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위키백과이 호복(胡服)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을 채택했다는 기록은 유목사회와의 전쟁 등 빈번한 접촉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록도 기원전 4~3세기 시기 중원 왕조의 기록에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내용은 그보다 훨씬 시간이 지난 기원전 2세기말, 전한(前漢) 중기에 쓰인 『사기(史記)』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에 기록되었다. 그 까닭은 역시 중원 왕조의 현실적 관심이 이 때 증대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한과 흉노가 본격적으로 대립하는 시기였고, 그 적대 세력을 이해할 필요에서 그 기록이 남겨졌던 것이다.

 

주 018
니콜라 디코스모 지음·이재정 옮김(2002), 『오랑캐의 탄생』, 황금가지.R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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