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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남방 지역

1. 남방 지역

문헌에 남아있는 초기국가우리역사넷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면, 언제나 하나의 국가만이 등장한다. 그리하여 어느 나라이건 하나의 초기국가에서 출발하는 단일한 계보의 역사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는 하왕조위키백과가 그 시원이었고 이를 이어 상과 주라는 계보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계보는 오랜 기간 동안 반복적으로 기술되고 기억에 각인되었으며 그 결과 마치 역사에 기록된 단일계보 이외에는 다른 초기국가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되었다. 사실 역사기록의 기본적 목적이 역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복수가 아닌 유일한 기원을 찾으려는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역사기록의 결과일 뿐이며, 초기국가가 결코 어느 단일한 계보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고고학 자료에 의해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사실 고고학 자료가 활발해졌던 20세기 중반 이후에도 단일계보 인식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었다. 그 까닭은 그 당시 발굴이 대부분 계획발굴이었기 때문이다. 발굴지역을 선택할 때에는 그곳에서 일정한 발굴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을 기대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문헌에 초기국가의 근거지였던 황하 중심의 중원지역을 발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계획발굴의 결과, 중원지역에서 발굴된 각종 고고학 자료는 다시 문헌에 기록된 중원에 자리잡은 초기국가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증해주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중원에 위치한 초기국가의 우월한 지위가 재생산되었다. 그러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80년 대에 접어들면서 구제발굴이 중원 이외의 지역에서 진행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문헌에는 기록되지 않은 초기국가의 모습을 중원 이외의 지역에서 발견하였다. 초기국가가 황하 중류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다수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천성 광한현(廣漢縣) 삼성퇴(三星堆)위키백과위치 유적과 성도시(成都市) 금사(金沙)위키백과위치 유적이다. 삼성퇴 유적은 우선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그곳에서 사용되었던 청동기 문명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즉 초기국가의 물질적인 기본적인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중원 이외의 지역에서 청동기가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원과 다른 별개의 초기국가 성격을 제대로 인정받고 있지 못했던 까닭은 황하 중류 이외의 곳에서 발견된 청동기를 중원의 청동기가 전파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중원과 다른 특징은 지방색이 약간 덧붙여진 것뿐이라고 처리되어 버렸다. 그러나 삼성퇴 유적이 발견되면서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첫째, 삼성퇴와 금사 유적이 위치한 성도평원(成都平原)이 중원과 사뭇 다른 생태환경을 갖고 있었다. 사실 지금도 강우량 600㎜ 경계선을 중심으로 중원지역은 그 북쪽에 위치하고, 사천지역은 그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각각 밭농사와 벼농사 지역에 속하지만, 기원전 1300~1000년경은 지금보다 훨씬 상이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 증거는 삼성퇴와 금사에서 발견된 상아금사유지박물관이다. 금사 유지의 경우에는 아직 발굴이 완료되지 않아 그 전체 규모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수백여 개의 상아가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퇴적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삼성퇴 제사갱도 청동기를 매립한 뒤 그 위를 상아로 덮고 있었다. 또 상아를 가공해서 만들어진 각종 제품도 출토되었으며, 그밖에 코끼리를 형상화한 관식(冠飾) 등 다양한 청동기 장식에도 코끼리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곧 코끼리가 이곳에 서식했었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며, 따라서 사천지역이 지금보다 훨씬 온난한 기후였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상이한 생태환경을 갖고 있었던 곳이라면 이곳에서 성장한 문화와 역사 역시 크게 상이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둘째, 청동기의 조형 전통이 현저히 다르다. 중원지역의 청동기는 대부분 예기와 무기에 집중되어 있다. 사천지역의 청동기도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이지만, 사천의 경우는 중원의 청동기와는 달리 인물과 동물을 형상화한 입체적 조소가 주를 이룬다. 용기(容器)가 위주인 중원지역의 예기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청동으로 만든 인두상(人頭像)금사유지박물관위키백과이 수십 개, 전신(全身)과 대(臺)를 포함해 260㎝에 달하는 청동 입인상(立人像)위키백과금사유지박물관이 있는가 하면, 이처럼 사람들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눈과 귀, 입을 크게 과장해 표현함으로써 그들이 숭배하는 신(神)을 상징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대형 청동가면금사유지박물관위키백과, 그리고 우주목(宇宙木)으로 설명되는 높이가 4m의 거대한 청동 신수(神樹) 등이 이곳에서 출토된 대표적 청동기이다. 조형 전통만이 아니라 제작기술의 측면에서도 중원의 청동기와 크게 다르다. 연접(連接) 방식을 채용한 점도 특징적이다.주 017
각주 017)
김병준(1997), 『중국고대 군현지배와 지역문화』,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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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 이외에도 강서성(江西省) 신간현(新干縣) 대양주(大洋州)위치 등지에서 중원의 청동기문명과는 다른 독자적인 중심지가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상대 후기로 판단되는 480점 이상의 청동기가 출토되었으며, 그 청동기의 형태 역시 중원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 문화는 해당 지구의 전통을 계승하였던 것이며, 이후 월(越)위키백과문화의 전신으로 평가된다. 물론 중원지역의 초기국가에서 발견된 갑골문위키백과위키백과과 금문과 같은 문자자료를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 확인할 수 없지만 초기국가의 지표는 반드시 문자가 동반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도시와 청동기 등 초기국가의 지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중원의 청동기 문명 전통과는 상이한 이들 청동문화를 초기국가 단계의 정치세력으로 상정해도 좋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청동기문화에 선행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신석기문화가 다양하게 발생하고 독립적으로 발전해갔다는 사실과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중원지역의 초기국가 특히 하왕조와 상왕조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도시국가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호북성 반룡성위치에 그 군사적 거점을 확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상왕조의 중심지와 이곳 사이의 공간을 상의 영역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수도주변과 군사거점지를 제외한 그 주변의 넓은 지역에는 상과 다른 별개의 초기국가가 여럿 자리 잡고 있었음을 정확히 인지해야 한다.

  • 각주 017)
    김병준(1997), 『중국고대 군현지배와 지역문화』, 일조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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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 지역 자료번호 : edeah.d_0001_004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