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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묘장과 사회발전

4. 묘장과 사회발전

死者를 매장하는 방식(葬法)은 문화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관의 종류에 따라 목관, 석관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옹관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등으로 나뉘기도 하고 시신을 묻는 방식에 따라서는 앙신직지, 측신굴지, 부신 등으로 나뉘기도 하며, 재장 여부에 따라 일차장, 이차장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관을 둘러싼 또 다른 시설(곽)의 유무에 따라 목관, 목곽, 석관, 석곽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동아시아에서 발견되는 무덤의 종류 역시 매우 다양한데, 기본적으로는 매장주체부에 돌을 사용했는지 여부에 따라 크게 토광묘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목관포함)와 석관묘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로 구분될 수 있다.
1) 중국
무덤의 형식, 즉 묘제를 살펴보면 중국 황하유역의 대부분 지역은 전시기 동안 토광묘가 주류를 이루며, 유아의 경우는 옹관묘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를 많이 사용한다. 신석기시대에 확인된 가장 이른 무덤유적으로는 초기단계에 해당하는 북경 동호림유적이 있다. 약 1만 년 전 무렵에 해당되는 이 유적에서는 몸을 구부려 묻은 굴장의 인골이 별다른 시설이 없는 구덩이에서 발견되었으며 조개목걸이와 석인(石刃)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을 박아넣은 골도(骨刀)가 부장품으로 확인되었다.
신석기 전기가 되면 각 지역 고고문화들 내에서 수많은 무덤유적이 확인된다. 대지만위치문화에서는 앙신직지의 토광묘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유아용 옹관묘도 확인된다. 묘지는 취락 가까이에 위치하며 규모는 크지 않다. 무덤은 일정 구역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주거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배리강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문화에서는 현재까지 700여 기 이상의 무덤이 조사되었는데, 대부분 토광묘이며 배리강유적에서 보듯이 배치가 규칙적이다. 부장품은 석산이나 석부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석겸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우리역사넷, 갈돌, 갈판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등이 주류를 이룬다. 북방지구의 흥륭와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문화에서는 토광묘 이외에 주거지 바닥에 매장을 하는 거실장(居室葬)이 확인되는 점이 특이하다. 이 중에는 돼지를 함께 묻은 것도 확인된다. 전기단계 장강유역의 팽두산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에서도 이미 취락과 분리된 공동묘지가 등장하는데, 토광묘 이외에 이차장의 양상도 확인되었다. 부장품은 소량의 토기가 대부분이다. 전기단계 무덤의 양상을 통해 볼 때 부장품의 격차는 별로 크지 않다. 반면 성에 따른 부장품의 차이는 두드러져 남성에게는 주로 석부나 석산 등의 농업관련도구, 여성에게는 갈돌과 갈판 등 식료처리구가 많이 부장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아직 사회적 위계의 분화가 두드러지지 않은 반면 성에 따른 노동분업은 분명하게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석기 중기의 앙소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관련 무덤은 이미 2,500기 이상 조사되었다. 대부분은 토광묘이며 옹관묘는 1/4 정도를 차지한다. 토광묘는 주로 성인, 옹관묘는 유아의 무덤으로 사용된다. 공동묘지는 취락 가까이에 위치하는데 앙소문화 반파유형위치의 대표유적인 강채유적위치에서는 환호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둘러싸인 취락의 바깥쪽으로 씨족 공동묘지가 174기 확인되었으며 북수령위치유적에서는 370여기의 무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무덤 부장품은 많지 않아 몇 개의 토기와 석기가 부장되는 것이 보통이다. 매장방식은 신전장, 굴장 등 다양하나 주로 신전장이 많다. 사가촌에서는 4~51인의 인골을 추려 재매장한 이차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후강1기문화의 서수파유적에서는 인골 좌우에 많은 조개로 용과 호랑이를 묘사한 무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무덤출토 인골 감정결과에 의하면 앙소문화 시기 성인평균수명은 약 30세 전후이며, 영아사망률은 40%에 육박하였고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산동의 북신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문화에서는 토광묘와 함께 석관묘가 유행하는 점이 특징적이고 발치풍습, 돼지부장 등의 특징이 나타나기도 한다. 북신문화에 이은 대문구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묘장은 2,200여 기가 조사되었는데, 왕인 유적 한곳에서만 900기 가까운 무덤이 조사되었다. 개인의 토광묘 위주이며 신전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다인장(多人葬)도 상당수 확인된다. 돼지머리와 개를 부장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부장품은 많지 않지만 대문구문화 후기로 갈수록 무덤간 격차가 두드러져 일부 무덤에서는 160건 이상의 부장품이 확인되고 순장이 확인되기도 한다. 요서의 홍산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에서는 적석총이 유명한데 우하량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유적에서는 세 지점에서 여러기의 원형 또는 방형 적석총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이 확인되었다. 예를 들어 우하량 2지점에서는 동서 150m, 남북 80m의 범위 안에 6기의 적석총이 축조되어 있다. 각 적석총에는 석관묘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가 복수로 확인되며 그 중 일부에서는 다량의 옥기를 부장한 인골이 확인되기도 한다. 우하량에서는 여신묘(女神廟)로 불리는 중심적 제사유적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도 확인된 바 있다.
장강유역에서는 대계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에서 1,000기 가까운 무덤이 조사되었는데, 토광묘 위주에 단인장 위주이다. 매장방식은 신전장과 굴장이 있는데 다양한 굴장의 유행은 대계문화의 특징이다. 굴가령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역시 토광묘 위주이나 신전장 위주이고 굴장은 소수라는 것이 특징이다. 일부 무덤에서는 옥기와 석기, 토기 등 100기가 넘는 유물이 부장되어 무덤간 격차가 확인된다. 장강하류의 마가빈문화 역시 토광묘 위주이나 시신을 엎어서 묻는 부신장(俯身葬)이 유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장강하류에서도 하모도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나 마가빈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에서는 빈부격차가 두드러지지 않지만 숭택(崧澤)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단계가 되면 무덤 부장품에서 격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용산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로 대표되는 신석기 후기가 되면 황하유역에서는 이전까지 보이던 다인합장묘는 사라지고 개인묘나 남녀합장묘가 증가한다. 대부분의 유적에서 무덤간 격차가 명확하여 대, 중, 소로 갈라지며 대형묘에는 호화로운 부장품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이 묻히게 된다. 산서 도사유적에서는 1,300여기의 무덤이 한꺼번에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일부 대형묘는 관과 곽으로 구성되어 있고 관내에 주사(朱砂)가 발라져 있으며 채회도, 채회목기, 옥석예기, 돼지 등 풍부하고 화려한 부장품 이외에 석경(石磬), 토제북[土鼓]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여타 무덤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악기가 부장되거나 순장의 존재도 확인되는 등 수장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일반 소형 무덤이 부장품이 거의 없는 것과 비교할 때 사회적 빈부 및 권력 격차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빈부격차의 존재는 이미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었다는 반증이며 전기이래 발달해 온 농업기술의 진전과 이에 따른 생산성 증가가 경제적 뒷받침이 되었다.
한편 용산문화 단계에는 황하유역에서 회갱 내에 마치 버려지듯이 묻혀진 인골이 확인되는가 하면(섬서 객성장 2기의 객성장유적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목이나 허리가 절단된 채 매장되거나 두피가 벗겨진 채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확인되는 등(예북 후강2기의 洞.유적) 전쟁이나 의도적 살해와 관련된듯한 흔적들이 증가한다. 이는 집단간 긴장관계의 고조, 즉 사회의 복합화에 따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신석기 후기의 장강 중류의 석가하(石家河)위치문화 묘장은 약 200여 기가 조사되었는데, 주로 토광묘와 옹관묘이다. 초가옥척(肖家屋脊)위치 유적 7호 무덤과 같이 100점이 넘는 석기, 다량의 토기가 부장된 대형묘들과 중소형 묘들이 명확히 구별된다. 옹관묘는 성인과 아동 모두에 사용된다. 일부 무덤에서는 머리가 없는 인골도 확인되어 전쟁 등 사회적 긴장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양자강 하류 신석기 후기를 대표하는 양저(良渚)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문화 묘장은 약 500기를 상회하는데, 인공적으로 쌓은 토대 위에 토광묘를 설치한 고대식(高臺式)과 평지에 설치한 평지식 토광묘가 있다. 무덤은 규모와 부장품 등에서 최소한 4등급으로 분류되는데, 최고위급 무덤은 고대식이며 제단과 무덤이 함께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무덤에는 다량의 미려한 옥기(琮, 璧, 璜 등)가 주로 부장된다. 고급무덤인 요산(瑤山)위치 7호 무덤에서는 148건의 옥기가 부장되기도 하였다.
차상위급 묘장은 최고위급 묘장과 유사하나 옥의 부장에서 종이나 벽이 주류를 이루어 간략화된다. 제3급 묘장은 고대식과 평지식이 모두 보이며 소량의 옥기만이 부장된다. 최하위급 묘장은 옥기부장이 없고 일상용 토기만이 부장된다. 양저문화의 최고위급 묘장에서는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다량의 옥예기(玉禮器)와 함께 군사적 권위를 상징하는 옥월(玉鉞) 등이 함께 출토되어 이들이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함께 가지고 있는 지배층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장강유역도 신석기 후기가 되면 사회 내부의 위계화와 사회적 긴장관계가 심화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도면 7 양저문화의 대형무덤(中国社会科学院考古硏究所, 2010)
2) 한반도
한반도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무덤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동북의 웅기 송평동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과 같은 토광묘, 남부지역 울산 처용리위치와 같은 토광묘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남해안 지역의 패총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유적들에서 주로 보이는 토광묘와 같이 주로 별다른 시설 없이 토광을 파고 시신을 안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최근 확인된 부산 가덕도유적의 경우는 50기 가량의 집단무덤이 확인되어 한반도 신석기시대 매장유적으로는 최대 규모를 보이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울진 후포리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에서는 다수의 마제석기를 함께 부장한 다인이차장(多人二次葬)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춘천 교동에서는 바위그늘을 무덤으로 전용한 사례도 확인된다. 동삼동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문화재청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동삼동 패총위치과 진주 상촌리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에서는 옹관묘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옹관묘는 주거지 근처에서 확인된다.
무덤들은 처용리나 후포리와 같이 독립적으로 주변이 잘 조망되는 구릉정상부에 입지하기도 하고, 연대도나 가덕도와 같이 해안가에 인접하여 공동묘지로 조성되기도 한다. 부산 범방패총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문화재청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치이나 통영 욕지도패총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문화재청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치 등과 같이 패총내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무덤은 기본적으로는 1인을 묻는 단인장이 주류를 이룬다. 이외에 전남 안도 유적과 같이 남녀합장무덤도 존재하고, 후포리와 같은 이차장의 형태도 보인다. 장법은 기본적으로 신전장이 우세하나 가덕도에서는 굴장이 다수를 차지해 차이를 보인다. 무덤의 부장품은 풍부하지 않은 편이다. 주로 토기와 석기가 소량 부장되며 일부 유적에서는 옥제 목걸이나 귀걸이, 조개팔찌, 상어이빨과 같은 장신구 등이 함께 부장되기도 한다. 옥제품과 조개팔찌 등은 일부 인골에서만 확인되어 일반적 장신구라기보다는 집단내 특수계층 혹은 상위계층의 사람들이 소유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는 아직까지 일부 해안지역을 제외하면 매장유적이 거의 확인되지 않아 자세한 양상을 알기 어렵다.
3) 일본열도
죠몽시대위키백과의 무덤은 크게 보아 땅을 파고 주검을 묻은 토광묘(土壙墓)와 돌을 이용해 무덤을 만든 조석묘(組石墓), 옹관묘(甕棺墓)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등이 있으며 개별적으로 산재한 무덤 이외에 일정구역에 묘역을 정하고 무덤을 집중 배치한 공동묘지도 존재한다. 폐기한 집을 무덤으로 전용하는 폐옥묘(廢屋墓)도 나타난다. 공동묘지는 죠몽시대의 전기에 등장하기 시작하며 중기의 환상취락에서 중앙 광장을 둘러싸고 위치하는 것이 전형적인 예이다. 나가노현 아구(阿久)유적에서는 직경 90~120m, 폭 30~40m의 범위에 약 300기에 달하는 조석묘가 축조된 사례가 있다. 이와 같이 취락의 내부에 축조되던 공동묘지는 후, 만기가 되면 취락의 외부에 만들어지게 된다. 동일본지역에 보이는 환상열석(stone circle)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에 축조된 무덤들이 그러한 예이다. 이외에도 홋카이도에서는 죠몽후기에 직경 수십미터의 지면을 움집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장서각디지털아카이브처럼 파내고 그 흙을 주위에 담장처럼 돋아올린 후 그 내부와 주위에 많은 무덤을 조성한 소위 환상주제묘(環狀周堤墓)도 확인된다. 이와 같은 환상열석이나 환상주제묘는 대규모의 노동력이 투여되는 시설로 당시 정착 수렵채집민이었던 죠몽인들의 인구규모나 사회구조가 매우 크고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장법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은 일반적으로 몸을 바르게 펴묻는 신전장과 인위적으로 시신을 굽혀 묻는 굴장이 모두 나타난다. 관동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폐옥묘의 경우는 모두 신전장을 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주검을 바로 묻는 일차장 이외에 뼈를 추려 묻는 이차장도 보이는데 이바라키현 나카즈마[中妻] 유적에서는 단일 구덩이 안에 100여구의 인골을 추려 묻은 예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옹관묘의 경우도 유아묘에 국한되지 않고 성인 인골을 추려 묻은 이차장의 사례가 확인된다. 화장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사례도 죠몽 중기 이후 츄부, 호쿠리쿠, 토카이, 긴키 등지에 확인된다. 이와 같이 죠몽시대의 무덤종류와 장법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지만 정착취락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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