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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평양성

 
     

    Ⅰ. 평양성

     

    평양(平壤)은 고구려의 수도로서 일찍부터 정치·경제·군사·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여왔다.
    고구려는 5세기에 들어와서 수도를 더욱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진 평양으로 옮기려 하였다. 그리하여 오래전부터 평양 건설을 진행해오던 고구려는 드디어 427년에 집안(集安)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처음에는 그 중심지역을 대성산성(大城山城) 일대에 정하고 있었다. 이때에 고구려의 수도성은 왕이 사는 평지성인 안학궁성(安鶴宮城)과 일단 유사시에 쓸 방어성인 대성산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427년 이후 대성산성 일대의 수도성에 160년간이나 수도를 정하고 있던 고구려는 오늘의 평양시 중심부에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586년에 수도를 그곳으로 옮겼다.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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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지리지4


    고구려 사람들이 대성산성 일대의 수도성과 같은 강력한 요새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새로운 수도성인 평양성을 쌓게 되었는가?
    고구려가 이 시기에 새 수도성인 평양성을 건설하게 된 것은 평지성과 산성으로 이루어진 종전의 수도성 제도에 일부 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폐단은 우선 도시와 왕궁이 있는 평지성이 그 방어시설인 산성과 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일단 유사시 적들이 수도 가까이까지 쳐들어와 전투를 벌이는 경우 수도의 주민들은 일상적인 거주지를 버리고 산성에 들어가야 했는데 이것은 거주지의 많은 파괴와 약탈을 초래하였다.
    실지로 고구려는 이러한 폐단을 전투과정에서 체험하였다. 246년과 372년 환도성이 함락되었을 때 산성 아래에 있던 주민 거주지역들이 피해를 입었으며 371년과 377년에 부수도 남평양(南平壤)에서 싸움이 있었을 때에도 견고한 산성(장수산성)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으나 평지에 있던 도시는 파괴를 면치 못했다.
    다음으로 고구려 통치계급의 중앙집권적 통치체계를 유지·강화하는 데에도 불편한 점이 많았다.
    왕궁인 평지성은 당시 토석혼축(土石混築)이었고 그 규모가 비교적 작았다. 따라서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에서 주민들에게 거두어들인 방대한 양의 조세와 공납을 저장하고 보관하는 것이 불편하였다. 또한 국가의 관청들이 있는 도시와 일반 주민거주지역 사이에 경계가 없고 창고들이 노출되어 불의의 습격받을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통치자들에게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종전의 수도성 제도는 또한 대외적으로 강대한 고구려 수도로서의 위풍을 갖추는 데에도 손상을 주었다.
    고구려가 이 시기 새 수도성을 건설하게 된 것은 당시 조성된 정세의 절박한 요구였다.
    6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북방에서 돌궐의 침입사건이 있었고, 남방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공격해옴으로써 한강유역을 상실하는 사태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로 인하여 수도성 방위의 강화가 시급한 문제로 부상되었다. 수도성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드는 동시에 주민과 가옥, 재산을 그대로 보존하려면 산성의 장점과 평지성의 장점을 다 같이 결합한 평산성을 건설해야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러한 요구에 맞게 모란봉(牡丹峰)과 대동강(大同江), 보통강(普通江) 등 평양 일대의 자연지세를 새 수도성 건설에 훌륭하게 이용하였다.
    평지성이 자리 잡은 평양은 서북지방의 중심부에 해당되며 군사적으로는 물론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낭림산(狼林山)에서 발원한 대동강은 평양의 중심부를 길게 흐른다. 강의 좌우 구릉지대 사이사이에는 보통강, 합장강(合掌江), 무진천(戊辰川) 등 지류들이 운반한 흙과 모래가 덧쌓여 충적지를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서 보통강은 멀리 평원군(平原郡)에서 발원하여 대동군(大同郡)을 거쳐 서평양(西平壤)을 지나서 평천구역(平川區域) 정평동(井平洞)에 이르러 대동강에 합류된다.
    평양성은 이 두 강이 합류된 지점인 대동강의 오른편과 보통강의 왼편을 잘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사진 1~4〉 평양성은 평양의 한가운데에 높이 솟은 모란봉과 을밀대(乙密臺), 만수대(萬壽臺)의 높고 험한 등성이를 북면으로 하고 동·서·남면은 대동강과 보통강의 언덕을 이용하여 쌓았다. 때문에 성의 둘레는 산과 강으로 막혀 있으며 성안의 대부분이 평지대이고 다만 중성(中城)에 안산(安山), 창광산(蒼光山), 해방산(解放山), 남산(南山) 등에 의하여 이루어진 구릉지대가 있다. 금수산(錦繡山)의 주봉을 이루고 있는 모란봉은 평양성의 최북단에 높이 솟아 있으며 그 높이는 96.1m이다.〈도면 1〉

    〔도면 1〕 평양성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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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면 1〕 평양성 평면도


    평양성의 윤곽을 보면 금수산의 모란봉(문봉, 최승대가 있는 봉우리)을 북쪽 끝으로 하고 서남쪽으로 을밀봉(을밀대), 만수대의 마루를 타고 내려가면서 보통강 언덕을 따라 뻗어나갔다. 보통강과 대동강이 합치는 목에 이르러 성벽은 대동강 기슭을 따라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 대동문(大同門)을 지나 청류벽(淸流壁)을 타고 전금문(轉錦門), 부벽루(浮碧樓)를 지나 모란봉에 이른다.
    이것이 평양성의 바깥 성벽이다.
    평양성 안은 성벽들로 가로막아 외성〈사진 1~63〉, 중성〈사진 64~119〉, 내성〈사진 120~193〉, 북성〈사진 194~231〉 등 4개 부분의 성으로 나누었는데 북성의 북쪽에 칠성〈사진 232~241〉을 두었다.
    내성은 을밀봉에서 만수대 남쪽으로 언덕을 따라 나가다가 지금의 신암동에서 동쪽으로 돌아 대동문 아래쪽에서 평양성 동쪽 벽과 합치면서 이루어진 지대를 차지하였다.
    중성은 내성 남쪽에 동서로 나란히 놓여 있는 안산, 창광산, 해방산 등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안산에서 대동교(大同橋)까지 동서로 긴 지대를 차지하였다.
    외성은 중성의 남벽을 북쪽 경계선으로 하고 그 남쪽부분을 포괄한 성이다. 그리고 북성은 을밀대에서 북으로 모란봉의 문봉(文峰), 무봉(武峰)을 감싸고 돌아 동남쪽으로 나가면서 부벽루를 거치고 전금문을 지나 청류벽 마루를 따라 동암문에 올라 을밀대로 되돌아간 성이다.
    이와 같이 평양성의 북벽은 모란봉의 산악과 만수대와 청류벽 등 절벽으로 둘러쌓여 막힌 험한 지형을 이용하였고 동·서·남 3면은 대동강, 보통강과 같은 큰 강들을 해자처럼 두르고 있으며 평지대의 유리한 지형조건과 절벽을 이룬 산지형의 자연조건을 종합적으로 이용하여 쌓았다. 그러므로 평양성은 남쪽에서 보면 웅대한 평지성이고 서북쪽에서 바라보면 높은 산성을 방불케 한다. 평양성의 둘레는 약 16km이며 성벽의 총 연장길이는 약 23km이다. 그리고 성안 총면적은 11.85㎢이다.
    평양성의 성벽기초를 쌓은 방법은 그 지형과 지질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것은 산지대와 평지대에서 기초를 쌓은 수법이 다른 데서 나타난다.
    산지대인 경우에는 기초를 서로 다르게 쌓은 경우가 있다. 만수대의 등성이와 같이 그 지반이 암반인 경우에는 암반까지 내려 파고 그 위에 기초돌을 밀착시켜 놓았다. 그러나 을밀대 칠성문(七星門) 일대와 같이 그 기초지반이 암반이 아니고 비교적 견고한 지질층으로서 그 바깥 경사면이 가파른 지형일 때에는 능선 바깥 면을 거의 수직으로 깊게 파고 바닥에 약 50~60cm의 두께로 자갈과 진흙을 섞어 다진 다음 좀 거칠게 다듬은 큰 장대석을 가로놓아 힘받이를 합리적으로 처리하였다. 한곳에 연결하여 놓은 4개의 기초돌 크기를 보면 하나는 길이와 두께가 60×40cm이고 다른 것은 60×39cm, 또 다른 것들은 40×39cm, 58×40cm이다. 그리고 그 위에 역시 다듬은 성돌로 면과 선을 맞추어 벽돌 쌓듯 정연하게 조금씩 뒤로 물려 쌓아올렸다. 이 경우에는 맨 밑바닥에서 첫 단의 성돌을 안으로 7cm 들여 놓고 둘째 단을 5cm, 셋째 단을 3cm, 넷째 단부터는 2~1.5cm씩 들여놓으면서 쌓아올렸다.〈도면 2〉 평천구역일대나 보통문(普通門)부근과 같이 대동강이나 보통강으로 말미암아 그 지반이 진흙으로 형성되어 있는 데는 약 6~7m 너비, 3~3.5m 깊이로 성벽이 놓이는 지반을 내려 파고 맨 밑에는 자갈을 깔고 그 위에 아름드리 돌로 바닥돌을 놓은 다음 다시 그 위에 다듬은 성돌로 면과 선을 맞추어 정연하게 쌓아올렸다.

    〔도면 2〕 평양성 내성 북문(칠성문)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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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면 2〕 평양성 내성 북문(칠성문) 평면도


    이와는 달리 같은 평지대이지만 안산 북쪽(평양체육관 서남쪽)과 같이 중성 안의 물이 흘러내리면서 진흙층을 이룬 부분에 쌓은 성벽의 기초는 약 4m 깊이에 6m 너비로 진흙을 들어내고, 거기에 직경 약 30cm, 길이 5~6m의 통나무를 1~1.5m의 간격으로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이보다 굵은 약 50cm 직경의 통나무를 마치 철길 모양으로 약 4m 간격을 두고 성벽이 나가는 방향으로 세로로 두 줄을 놓고 그 위에 자갈과 흙을 다진 다음 성돌을 쌓아올렸다. 평양성의 성벽을 쌓는데에는 그 기초뿐만 아니라 기초 위에 쌓아올린 벽체 쌓기에서도 여러 가지 합리적인 수법이 적용되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성벽을 쌓는 데에 지형조건에 맞게 양면쌓기와 외면쌓기를 적절히 배합하여 능숙하게 적용하였다. 내성의 을밀대, 만수대, 장대재(將台峴), 남산재(南山峴) 등 산등성이와 능선, 중성의 남벽이 통한 안산, 창광산, 해방산 등 언덕 경사면, 북성의 모란봉 경사면에서 전면적으로 외면쌓기를 하였으며 평천구역과 같은 평지대와 일부 강기슭의 평지에서는 양면쌓기를 하였다. 평양성의 성벽쌓기에서는 성벽의 높이와 너비의 비율도 지형조건에 따라 그에 알맞게 하였다. 즉 모란봉이나 만수대와 같은 산지대에서는 성벽의 높이를 4~5m, 밑부분 너비를 3~6m, 윗부분의 너비를 2.5~4m로 하였고 평지대에서는 높이를 7~9m, 밑부분의 너비를 6~8m, 윗부분의 너비를 4~6m로 하였다.〈도면 3〉

    〔도면 3〕 내성 모란봉 문터 실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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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면 3〕 내성 모란봉 문터 실측도


    평양성의 성벽면은 지형조건에 알맞게 쌓아올렸다.
    성벽면 쌓는 방법은 지형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성벽의 기초에서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같은 비례로 성돌을 조금씩 들여쌓음으로써 성벽면이 안으로 경사지게 쌓아올린 수법이고 다른 하나는 성벽 밑부분의 밑단을 마치 층계 디딤돌을 놓듯이 두드러지게 안으로 들여쌓다가 그다음부터 같은 경사를 주어 쌓아올린 것이다.
    계단식으로 쌓는 방법은 을밀대나 내성의 동·서벽 일부와 북성 남벽 일부와 같이 성벽 밖이 가파른 곳과 골짜기의 성벽에 적용되었는데 이 경우에 그 굽도리의 1~5단 성돌은 8~22cm, 6~9단 성돌은 5~7cm 안으로 쌓아올렸다.
    성벽은 균일하게 다듬은 성돌로 그 이음선이 가로 평행선을 이루도록 벽돌 쌓듯 정연하게 면과 선을 맞추어 쌓았는데 대개 성돌은 정확하게 6합으로 물리면서 뾰족한 뒷부분이 성심에 깊이 박히도록 하였다.〈사진 5〉
    평양성의 성벽 쌓기에서는 성벽의 견고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성심을 튼튼히 다지고 쌓는 데 힘을 들였다. 성심은 넙적넙적한 돌을 마치 구들 놓듯이 반듯하게 깔고 겹겹으로 쌓아올렸다. 그리고 성벽과 성심돌 사이에 길쭉길쭉한 돌로 서로 맞물려 누르고 그 사이에 짬이 없이 조약돌을 다져넣었다.
    평양성 성벽에는 성문과 여러 가지 시설물이 있다.
    외성에는 북문인 선요문(宣耀門), 서문인 다경문(多景門), 남문인 거피문(車避門), 동남문인 고리문이 있고, 중성에는 북문인 경창문(景昌門), 서문인 보통문, 남문인 정양문(正陽門), 남동문인 함구문(含毬門), 동문인 육로문(陸路門)이 있으며, 내성에는 북문인 칠성문(七星門), 서문인 정해문(靜海門), 남문인 주작문(朱雀門), 정동문인 대동문, 동북문인 장경문(長慶門)이 있다.〈사진 1~63〉 이 밖에도 내성에는 비밀통로인 동암문이 있으며 북성에는 북문인 현무문(玄武門), 남문인 전금문이 있다.〈사진 120~193〉
    옹성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었던 것으로 인정된다. 하나는 양쪽 성벽이 반달형으로 성문을 둘러막은 것인데 평지에 있는 대동문, 보통문, 경창문의 옹성이 그 전형적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문이 둘러막히지 않고 성문 양쪽의 성벽을 앞으로 내밀어 성문으로 들어오는 길을 좁혀놓은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옹성은 산지대에 있는 칠성문과 현무문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 옹성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칠성문은 북에서 남으로 나오는 성벽을 밖으로 직각으로 꺾어 어긋물리게 하고 그 사이에 성문을 냈다. 현무문은 성문 밖의 좌·우 벽을 안으로 휘어들게 하여 그 성벽이 옹성의 역할을 동시에 하도록 하였다.
    평양성에는 성가퀴가 원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일부 성벽 위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을 통하여 성벽(성심) 윗부분 바깥쪽에 약 1m 폭으로 담장처럼 쌓은 성가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쓴 돌들은 규격이 조금 작으나 그 형태는 성벽들과 같다.
    평양성의 성벽에는 치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 지형조건에 따라 성벽이 밖으로 돌출되었거나 성벽이 꺾인 곳에 설치되었다. 치는 대부분 허물어져서 없어지고 지금의 을밀대에서 칠성문 사이에 12개, 안산 서북모퉁이를 비롯한 몇 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사진 165〉 치의 형태는 성벽에서 약 8~10m이며 돌출시킨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다.〈도면 4〉

    〔도면 4〕 내성 치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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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면 4〕 내성 치 평면도


    평양성은 철성도 쌓았다.〈사진 232~241〉
    철성이란 성벽에서 성안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 또는 방어에 유리한 등성이를 확보하기 위하여 그 고지를 성안에 휘어넣고 쌓은 성벽부분을 말한다. 평양성의 북성 안에는 가장 높은 봉우리인 모란봉 외에 그 북쪽, 즉 북성의 최북단에 무봉이 있는데 이 봉우리는 모란봉(문봉)과 좁은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고지를 성 구획 안에 포괄시키기 위하여 모란봉의 중턱에서부터 북으로 약 120m나 성벽을 돌출시켜 철성을 쌓았는데 철성의 동벽과 서벽 사이의 거리는 10~15m로서 그 내부에는 홈을 파서 사람들이 통하게 하였으며 그 좌우에는 단애성벽을 쌓아 전투에 편리하게 하였다.
    평양성에는 황(성 둘레에 파놓은 큰 도랑)이 설치되어 있다.
    황은 해자를 설치할 수 없는 산지대에서 성벽의 안쪽과 바깥쪽을 깊이 파서 적이 접근하기 어렵게 한 방어시설인데 모란봉과 만수대에서 그 자리를 찾아볼 수 있다.〈도면 5〉

    〔도면 5〕 평양성 내성 북쪽 성벽 황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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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면 5〕 평양성 내성 북쪽 성벽 황 단면도


    평양성에서 해자는 인공적으로 판 것이 아니라 대동강이나 보통강을 천연적인 해자로 이용하였다.
    평양성에는 여러 곳에 장대가 설치되어 있다. 최승대, 을밀대, 만수대, 추양대(안산), 춘양대(청류정), 선승대(남산대), 초연대(남산재 동북 끝), 집승대(장대재) 등이 모두 고구려 때에 이용되었다고 인정되고 있는 장대들이다.〈사진 232~236〉
    평양성은 규모가 크고 지형이 단순하지 않으므로 성안의 물을 성 밖으로 뽑은 수구문도 여러 곳에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은 내성인 경상골에서 대동강으로 흘러내리는 돌수문과 외성 안에서 외성 서문(다경문)을 통과하는 남수구문, 중성 안에서 안산 북쪽을 통과하여 보통강에서 흘러내리는 서수구문 등이다.
    평양성의 내성은 왕궁이 자리 잡았던 궁성이고 중성은 중앙관청이 있었던 곳이며 외성은 일반 주민들의 거주지역이였다.〈사진 64~72, 166~174, 188~191〉
    내성과 중성에서는 고대, 조선시기에도 도시건설이 계속 진행되었으므로 고구려 때의 건축 유지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외성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는 폐성(廢城)이 되어 경작지로 이용되었으므로 고구려 때의 도시유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외성 안에는 살림집 구획이 가로세로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田’자 구획은 정방형이 아니고 가로 120m, 세로 84m이다. 이런 구획이 들어찬 가운데는 큰 도로가 나 있었다. 즉 중성의 정남문인 정양문과 동남문인 함구문에서 각각 남쪽으로 대통로가 나갔는데 이 길들은 외성의 동문인 고리문에서 서문인 다경문으로 통하는 큰길과 직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동서로 통하는 큰길은 도중에 남쪽으로 향한 큰길과 직각으로 연결되었는데 남쪽으로 향한 길은 나가서 외성의 남문인 거피문에 이르렀다. 이 큰길의 너비는 약 14m이다.〈도면 6〉

    〔도면 6〕 외성 도시구획 평면약도(16세기 말~17세기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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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면 6〕 외성 도시구획 평면약도(16세기 말~17세기 초)


    외성 안에는 또한 운하가 있었다. 운하는 외성의 서문인 다경문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중성의 남문인 정양문에 이르렀으며 그 길이는 약 3km에 달했다. 이 운하와 관련하여 『평양속지(平壤續志)』에는 “옛날 조수를 이용하여 많은 노선들이 다경문을 통과하여 중성의 남문인 정양문 밖에 정박하면서 성안에 물품들을 운반하였다고 하여 정양문을 일명 노문이라고 하였고 양명포는 일명 노문포라고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노선이란 갈대로 지붕을 이은 집을 세운 배를 말한다.
    이 기록에 따라서 옛날 여러 가지 물품들을 실은 배들이 대동강에서 다경문을 거쳐 중성에 직접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성 안에 살던 통치계급들은 수로를 이용하여 인민들로부터 조세와 공납을 받아들이는 한편 외국과의 교역도 진행하였던 것이다.
    외성과는 달리 내성과 중성 및 북성 안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시기 도시를 구획하였던 자리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내성의 만수대 남쪽 경사면에서는 고구려시기의 주춧돌들이 많이 드러났다. 만수대 남쪽 경사면은 양지바른 지대로서 그 지형과 지리적 조건이 궁전이 들어앉을 위치로서 가장 적당한 곳이다.
    만수대 서북 경사면의 내성 북벽 안쪽에서는 길이 36m, 너비 4m의 규모를 가진 건물터가 발견되었는데 궁성의 북쪽을 지키던 군사들의 병영터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칠성문 동남쪽 경사면(오늘의 모란봉극장 동남쪽)에서는 남북 7m, 동서 4.8m의 문터가 드러났는데 이 터는 궁전 뒷면에 있던 별궁으로 들어가는 문터로 인정된다.〈도면 7〉

    〔도면 7〕 내성 만수대 건축지 실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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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면 7〕 내성 만수대 건축지 실측도


    북성 안에서도 고구려시기의 건물터가 드러났는데 영명사(永明寺) 자리에서는 주춧돌과 부처, 돌사자와 많은 기와조각이 드러났다.
    지금까지 평양성에서는 4개의 ‘글자 새긴 성돌’이 알려졌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사진 134, 135〉


     
    ① “己丑年五月卄八日始役西向十一里小兄相夫若牟利造作”(기축년 5월 28일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서쪽으로 향하여 11리 구간은 소형 상부 약모리가 쌓는다.)
     발견지점: 평양성 외성 밖 오탄(烏灘) 아래
     발견연대: 1776년
    ② “己丑年五月卄一日此以下向東十二里物省小兄俳□百頭□節矣”(기축년 5월 21일 여기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12리 구간은 물성소형배 □백두□가 맡는다.)
     발견지점: 평양성 외성 밖 오탄 아래
     발견연대: 1766~1829년
    ③ “丙戌十二月□漢城下後部小兄文達節自此西北行涉之”(병술년 12월에 한성하후부 소형문달이 여기서부터 서북 방향으로 맡아서 진행한다.)
     발견지점: 평양성 내성 동쪽 벽(오늘의 옥류교 서쪽 어구 부근)
     발견연대: 1913년〈사진 136〉
    ④ “卦婁盖切小兄加郡自此東廻上□里四尺治”(괘루개절 소형가군은 여기로부터 동쪽으로 돌아서 □리 4자를 쌓는다.)
     발견지점: 내성 서남 모서리(오늘의 인민대학습당 뒤)
     발견연대: 1964년〈사진 137〉

     

    평양성은 성벽자리에서 발견된 글자 새긴 고구려성돌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 및 현지에서 나오는 유물 등을 통해 볼 때 대성산성에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축성된 성이 틀림없다.
    축성연대를 해명하는 데 중요한 고리는 ‘병술’과 ‘기축’이라는 간지다. 이는 평원왕시기에 해당하는 566년과 569년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양원왕 8년(552)에 “장안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글자 새긴 성돌’에 의하여 더욱 명백해지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552년부터 평양성 축성공사가 시작되었고 10여 년 뒤인 566년, 569년에 각 성돌이 나온 성벽이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성은 세 개의 축조 단위를 설정하고 쌓았다. 넷째 성돌과 셋째 성돌 사이의 구간과 넷째 성돌에서 칠성문 부근까지 구간을 쌓은 연대가 566년으로 밝혀진 것만큼 칠성문 부근에서 만수대를 지나 넷째 성돌에 이르는 구간을 쌓은 연대도 566년으로 보게 된다.
    내성은 3개의 축조단위 구간으로 나눠 566년(병술년) 12월에 시작하여 약 3년간에 걸쳐 쌓아졌으며 외성을 쌓기 시작하던 시기 즉 569년(기축년) 5월 전으로 다 쌓아졌다고 볼 수 있다.
    북성은 그 지형조건으로 보아서 궁성(내성)과 유기적 연관을 가진 하나로 연결된 성과 같다. 북성은 북으로 모란봉 줄기를 타고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는 제1선으로서 성 쌓는 제도상 내성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평양성의 궁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북성은 내성과 동시에 설계되었다고 생각된다.〈사진 216~218, 232〉
    평양성의 외성에서는 2개의 글자 새긴 고구려성돌 즉 첫째 성돌과 둘째 성돌이 발견되었다. 이 두 성돌에는 다 같이 ‘기축’이라는 간지가 새겨져 있으며 각각 동쪽과 서쪽 방향으로 쌓은 거리, 공사 감독자의 벼슬과 이름 등이 새겨져 있고 같은 지점에서 나온 것이다.
    김정희는 첫째 성돌에 대하여 말하면서 동시에 “동쪽으로 향하여 12리”라고 새겨 있는 둘째 성돌의 발견된 지점을 외성 오탄 아래라고 하였다.
    오탄은 옛날 양각도(羊角島)로 인하여 그 위에 생겼던 여울이다. 『평양지(平壤志)』에 따르면 “양각도는 둘레가 3리인데 구진익수(九津溺水) 위에 있다”라고 하였다. 또 같은 책에는 “구진익수는 보통 강 하류에 합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평양조에는 “구진익수는 일명 머터니라고 한다.”라고 적혀 있는데 근래까지 그 부락을 ‘머터니’라고 불렀으며 거기에 흐르는 개울을 ‘구진개’, 그 아래 언덕을 구진동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당시 양각도는 오늘의 낙랑구역(樂浪區域) 토성동 위의 ‘머터니’ 나루터가 있는 대동강 바닥에 있었으며 둘레가 3리에 지나지 않는, 즉 길이 500m를 넘지 못하는 작은 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1814년에 정다산(丁茶山)이 쓴 『대동수경(大東水經)』 패수(浿水)조에 따르면 “이암(狸岩) 아래에 양각도가 있다.”라고 하였다. 정다산이 말하는 ‘이암’은 지금 영제개가 대동강에 흘러드는 앞의 양각도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로서 그 위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고 보면 첫째 성돌과 둘째 성돌의 발견지점은 오늘의 ‘이암’ 아래에 있었던 ‘오탄’보다도 더 아래쪽인 외성 나루터부근 성벽자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성을 이루고 있는 성벽 가운데서 동쪽으로 12리, 서쪽으로 11리에 해당되는 긴 구간의 출발점은 위에서 해명한 지점밖에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첫째 성돌은 둘째 성돌과 같은 지점에서 발견되었으며 둘째 성돌을 통하여 그 발견지점에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12리 구간은 ‘기축’(569)년 5월 21일에 쌓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이 구간에 대한 공사감독자로서는 ‘물성소형배□백두□’가 임명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지점에서 서쪽을 향하여 11리 구간도 ‘기축’(569)년 5월 28일에 ‘소형상부약모리’의 감독 하에 쌓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시기 1리는 1,000자이며 오늘의 약 350m에 해당한다.
    둘째 성돌에 적혀 있는 12리는 그 발견지점에서 동쪽으로 성벽을 따라 내성 동남 모서리에 이어진 지점까지라고 인정되는데 실제 거리는 약 4.2km이다.
    첫째 성돌에 적혀 있는 서쪽으로 11리는 3,850m에 해당되는 거리로서 외성 벽을 따라 서쪽으로 적두산성이 있는 보통강 기슭에 이르는 지점으로 보인다. 나머지 외성 서북 벽과 중성 서벽 즉 적두산성 건너편에서 동쪽으로 안산을 거치고 북쪽으로 보통문을 지나 내성의 서북 끝에 이르는 구간을 또 하나의 축조단위 구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구간의 실측거리는 약 3.9km에 이르고 있다.
    이상과 같이 외성 및 중성의 동벽과 서벽은 같은 시기 즉 569년에 쌓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중성을 쌓은 연대는 언제인가? 외성과 중성은 내성을 쌓은 다음 제2단계로서 569년에 쌓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내성은 ‘병술’년에 착수하고 외성은 그보다 3년 뒤인 ‘기축’년에 착수하였다는 그 성벽에 새겨놓은 ‘글자 새긴 성돌’의 엄연한 기록이 내성을 먼저 쌓은 다음 외성(중성 포함)을 쌓았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성(북성을 포함하여)을 쌓는데 약 3년간의 기간이 걸렸다고 보면 그 공사량의 2.6배 이상에 달하는 외성과 중성 벽을 쌓는데 약 10년간이 걸려 대체로 570년대 말에 끝났다고 판단된다.
    이상 개별적 부분 성돌을 쌓은 연대를 종합하여 보면 평양성을 이루고 있는 내성, 중성, 외성, 북성 등 4개의 성이 모두 고구려시기에 쌓은 성이며 그 가운데서 내성과 북성은 566년에 쌓기 시작하여 569년경에 완성되고, 외성과 중성은 569년경에 시작하여 570년대 말에 완료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시기 돌에 새긴 것임을 말하는 것인데 42년간이나 걸려서 성 쌓는 공사가 진행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그것은 586년 평양성에 수도를 옮긴 이후에도 다시 작은 규모의 공사를 몇 해 계속하여 성을 보강한 것까지 모두 합쳐서 42년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사진 109~119〉
    『평양속지』에서 말하는 중성은 바로 고구려시기의 중성이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 『평양지』에는 중성이란 말이 없다. 여기서는 고구려시기의 중성을 내성 또는 부성(고을성)이라고 하였다. 그 후 1624년에 성의 범위를 좁혀 고구려시기의 궁성(내성) 성벽자리를 고쳐 쌓고 1714년에는 북성을 복구하였다. 1714년 이후에는 중성, 내성, 북성, 외성이 고구려시기와 같은 규모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외성과 중성은 방어용으로서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고려사』 세가와 병지에 922년에 고려 태조가 서경으로 가서 새로 관청과 관리 등을 두고 “처음으로 재성(在城)을 쌓았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이것은 고구려시기 중성의 남은 부분을 다시 복구한 것이라고 인정된다. 그것은 내성 안에는 관청들을 들여놓을 만한 여유가 많지 못하다는 점, 그리고 이전에도 평양성을 쌓았다는 기사가 있는데도 이때에 처음으로 ‘재성’을 쌓았다고 한 점으로 보아서 큰 잘못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려 태조 초년에 쌓았던 평양성이란 대체로 고구려시기의 중성에, 그리고 938년(태조 21)에 쌓았다는 평양라성(平壤羅城)은 고구려시기의 외성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사』 병지에 보이는 ‘서경왕성’, ‘서경황성’ 등을 그저 ‘서경성’이라고 하지 않고 ‘왕성’, ‘황성’이라고 밝히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역시 고구려시기의 내성(궁성)을 고쳐 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는 서경을 제2의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당시 개경(개성)과 마찬가지로 궁성과 중성, 라성(외성)을 다 보수하였다고 인정된다.
    『고려사』 지리지,『세종실록』 지리지에 보이는 982~997년(고려 성종시기)에 쌓았다는 ‘옛성’, ‘고을석성’도 중성을 가리킨 것이다. 이것도 거란의 침략에 대처하여 쌓았던 평양 ‘재성’, ‘라성’을 다시 복구하였던 사실과 관련되어 전해오는 말에 근거한 기록이었을 것이다.
    ‘고을석성’의 두리가 4,080보 즉 24,480자였던 만큼 그것은 『동국여지승람』의 ‘내성’,『평양지』의 ‘부성(府城, 24,539자)’과 같은 것이다.
    이 중성은 『세종실록』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그 뒤 1406년(태종 6) 또는 1409년에 보수한 일이 있었다.
    내성과 관련한 기록들은 그것이 1624년에 처음으로 쌓은 고구려시기부터 있었던 성인데 13세기에 와서 다시 복구하였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평양속지』에는 북성을 1714년에 처음 쌓았다고 하였다.『평양속지』의 기록은 이미 고구려시기에 쌓았던 평양성 북성은 1714년에 복구하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일본의 미시나 쇼에이 [三品彰英]는 『고구려왕도고』(『조선학보』 제1집)에서 고구려시기 수도성으로 완성되었으며 586~668년까지 고구려의 수도성으로 있었던 평양성의 존재를 부인하고 고구려가 586년에 수도를 안학궁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긴 사실을 부정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삼국사기』에 실린 “평원왕 28년(528)에 수도를 옮겼다.”라고 한 기록을 믿지 않고 427년(장수왕 15)에 고구려가 평양에 수도를 옮긴 이후 ‘평양성시대’(대성산성에 수도를 정하고 있던 시기를 말하고 있다)에는 다시 수도를 옮긴 일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세키노 타다시[關野貞]는 평양성을 고구려시기에 쌓은 성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종전의 수도성과는 달리 평지의 시가지를 둘러싸서 쌓은 성이기 때문에 중국 수나라 대흥성(大興城)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수나라 대흥성은 606~616년에 쌓은 성으로 552년에 축성공사를 시작한 평양성보다 훨씬 뒤늦게 쌓은 성이다. 그러므로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가 6세기에 새로운 수도성을 쌓고 586년에 도읍을 옮긴 평양성의 구조형식에 대하여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러나 종전에 평양성의 중성 서남 벽이 있는 안산에서 뻗어내려 보통강 기슭과 대동강 기슭을 따라 축조된 외성은 오랜 기간 흙에 덮여 있어 토성으로만 보았다. 평양성 외성도 고구려시기에 돌로 축조한 돌성벽이었다는 것은 지난 시기의 조사와 부분적인 발굴을 통하여 증명되었으나 외성의 세부적인 돌성벽 구조와 기초부분 축조형식까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못하였다.
    이번 조사로 현재 남아 있는 평양성 외성 성벽들에 대하여 조사하고 두 곳에서 부분적인 발굴을 진행하였다.
    외성은 평양성의 제일 남쪽 중성에 붙어 있는 외곽성이다. 외성의 북벽은 동쪽 끝이 중성의 서남 모서리 벽에 잇대어 있는데 서쪽으로 800m 정도까지 곧추 나가다가 남쪽으로 약간 꺾이면서 200m 정도 더 나아가서는 현재 유실되었다. 동쪽 끝에서 서쪽으로 300m 정도 되는 곳에 외성의 북문인 선요문자리가 있다.
    대체로 북벽의 성벽은 매우 높은데 북벽의 동쪽 끝에서 서쪽으로 150m 정도 되는 곳의 성벽의 크기는 바깥쪽에서의 높이 7.5m, 안쪽에서의 높이 6m, 밑너비 30m, 윗너비 4m 정도다. 성벽의 바깥면 경사도는 35°이고 안쪽 면 경사도는 25°다.〈사진 15~16〉
    선요문자리는 성벽의 중간이 잘려 없어진 것처럼 되어 있는데 그 너비는 14m다. 선요문자리에서 서쪽으로 50m 정도 되는 곳의 성벽은 앞의 것보다 더 높다. 성벽의 바깥 면에서의 높이는 8.7m이고 안쪽 면에서의 높이는 7.5m이며 밑너비는 21.3m, 윗너비는 3m이다. 경사도는 앞의 것과 비슷하다.
    북벽의 중간 부분과 서쪽 부분의 성벽 상태는 선요문 서쪽 성벽 상태와 유사하다.
    외성 서벽은 중간 부분과 남쪽 부분이 남아 있다.〈사진 21, 22〉
    중간 부분에는 약 50m의 길이로 성벽이 남아 있는데 그 높이는 5m, 밑너비는 16m, 윗너비는 4m 정도다. 중간 부분의 성벽은 북쪽 끝에서 남쪽으로 가면서 점차 그 폭이 좁아졌다.〈사진 23, 24〉
    남쪽부분에는 200m 정도의 길이로 성벽이 남아 있으며 높이가 4.5m, 밑너비는 10m, 윗너비가 2.5m이다.〈사진 25~27〉
    외성의 서남 벽은 서쪽 부분에 200~300m, 중간 부분에서 200~300m의 성벽이 남아 있다. 성벽의 높이는 6m이고 밑너비는 15m 정도이며 윗너비는 3m이다.〈사진 28, 29〉
    중간 부분에는 돌담들이 쌓여 있는데 거기에 고구려시기의 성돌들이 섞여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고구려성벽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흔적만 남아 있으므로 그 상태를 잘 알 수 없다.〈사진 51~53〉
    외성의 동남 벽은 충성의 다리입구에서부터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쌓여졌던 것인데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윤곽만이 보인다.〈사진 56~63〉
    외성의 성벽들 가운데서 서남 벽의 서쪽 끝에서 동쪽으로 100m 되는 곳과 북벽의 선요문 동쪽 10m 되는 곳의 성벽 바깥 면에 대한 조사발굴을 진행하였다.

     

    주 001
    『삼국사기』, 지리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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