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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견해들에 대한 비판

4. 일부 견해들에 대한 비판

안학궁의 존재시기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들이 제기되고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안학궁이 고구려가 427년 평양에 수도를 옮기고 586년 장안성으로 옮겨갈 때까지 사용한 왕궁성이라는 견해를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남조선과 중국을 비롯한 외부 학계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일부 외국의 학자들 속에서는 다른 견해들도 제기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일부 일본학자들속에서 안학궁의 연대를 고구려 말이나 발해, 후기신라시기 심지어는 고려시기까지로 늦잡아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부당성은 안학궁터에서 발견된 기와와 질그릇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기와유물을 가지고 논박할 수 있다. 우선 ‘안학궁—고구려말’설을 보려고 한다.
안학궁에서 나온 기와들 가운데는 대성산성, 장안성들에서 나온 것과 같은 고구려 말기의 기와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외의 연구자들이 많이 연구하였지만 안학궁터에서 나온 암키와 막새 무늬 가운데는 채 발달하지 못하였거나 불길무늬화된 넝쿨무늬만 있을 뿐이지 강서중무덤의 벽화나 후 기신라의 암키와 넝쿨무늬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잎사귀가 활짝 피어난 넝쿨무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수키와 막새 무늬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안학궁 수키와 막새 가운데는 대성산성과 장안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말기 기와들에서 흔히 보이는 꽃잎사이에 사이무늬가 있는 기와막새가 매우 적으며 더욱이는 각종 회전무늬가 있는 막새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일반 수키와, 일반 암키와의 윗면에 새겨진 무늬를 보아도 장안성 기와에서들처럼 불길무늬, 꽃무늬, 새무늬 등 다양한 양상은 없고 잎갈나무잎무늬가 위주로 된 단순한 양상이다.
발해, 후기신라설도 성립될 수 없다. 다 아는 것처럼 발해 유적들에서는 암키와 막새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후기신라에서는 암키와 막새가 사용되었다. 후기신라의 암키와 막새 가운데서는 안학궁의 암키와 막새 같은 것이 발견된 것이 없다. 수키와 막새를 보아도 후기 신라의 것은 안학궁에서 발견된 것과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발해의 수키와 막새 무늬는 크게 2가지인데 하나는 고구려 말기의 기와의 전통을 많이 가지고 있는 회전무늬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두 쪽으로 갈라진 연꽃잎과 꽃잎들 사이에 십자형의 무늬가 있는 양식으로 된 것이다. 안학궁에서 발견된 암키와 무늬들 가운데는 이런 기와가 단 한점도 없다.
고구려 시기의 다른 유적들에서 암키와 막새 유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당시에 암키와 막새를 사용하였겠는가 하는 의심을 가지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안학궁터 주변에 있는 식물원7호무덤벽화에 암키와 막새 그림이 명백히 그려져있는 것을 보면 크게 문제로 될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벽화에 그려진 건물도를 자세히 고찰해보면 당시에 수키와 막새, 암키와 막새의 사용정형을 알 수 있다. 안악3호무덤 동쪽곁칸벽화에 그려진 건물들의 처마끝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원형의 물체를 그려넣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지붕 위에 씌운 골기와끝에 있는 수키와 막새를 상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식물원7호무덤 앞칸 동벽 윗부분에 그려진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처마끝에 넓은 형태의 물체가 연이어 그려져있다. 이것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원형물체를 그려넣은 수키와 막새 형상 그림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서 비교적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암키와 막새를 형상한 것으로 생각된다).
‘안학궁—고려’설은 더구나 허황하다. 개성의 만월대유적을 비롯한 지금까지 알려진 고려시기의 유적들에서 나온 막새들과 대비하여 보면 그것이 얼마나 거리가 먼 가설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고려시기 기와 막새들 가운데 흔히 보이는 잎이 활짝 핀 넝쿨 또는 퇴화된 연꽃잎이 있는 넓은 암키와 막새, 동심원들이 있는 수키와 막새(뱀눈막새) 등은 안학궁터에서 단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는 긴 설명을 피하고 최근에 발굴하고 있는 대화궁터에서 발견된 12세기 초에 해당한 기와막새 몇점을 대비자료로 소개하면 그림 4와 같다. 안학궁의 존재시기를 고구려 말 이후로 미루어 보는 견해의 부당성은 다음으로 궁전터에서 발견된 질그릇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붉은색, 붉은갈색 계통의 질그릇은 지금까지 고구려 시기의 유적들에서 많이 발견된 일반형의 고구려 질그릇들로서 ‘안학궁—고구려왕궁’설을 담보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된다. 특히 안학궁터에서 지금까지 단 한점의 고려자기 조각도 나오지 않은 사실은 ‘안학궁—고려설’의 허황성을 여지없이 증명해주고있다.
이상에서 안학궁의 존속시기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시간의 촉박과 지면의 제약, 필자의 과학적인 미숙 등으로 하여 논문은 많은 면에서 부족점이 있으리라고 본다. 앞으로 독자 여러분의 많은 의견을 받아 완성시키려고 한다. 이 땅에 통일의 새날이 밝아오고 북과 남이 우리 민족끼리의 구호를 높이들고 서로 힘을 합쳐 민족의 앞날을 개척해 나가는 이 자랑스럽고도 벅찬 시기에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많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림 1] 안학궁에서 나온 암키와 막새의 변천도
[그림 2] 안학궁에서 나온 수키와 막새의 변천도
[그림 3] 안학궁터에서 발견된 고구려 질그릇
[그림 4] 대화궁터에서 나온 기와 막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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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견해들에 대한 비판 자료번호 : cr.d_0006_0020_004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