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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성의 성문형식과 성벽시설

 
 

3. 안학궁성의 성문형식과 성벽시설

 

성에서 성문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특히 왕궁성인 경우에는 왕궁의 위엄과 품위가 성문에서부터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안학궁성에서 성문은 남쪽에 3개, 동·서·북쪽에 각각 1개씩 있다. 안학궁성의 성문형식은 일반적으로 성벽자체에 문길을 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우는 형식이 아니라 성벽과 성벽사이에 직접 문과 문루를 세운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문을 내는 곳에는 성벽을 쌓지 않고 기초를 한 다음 기둥을 세워 문과 문루를 만든 형식이다. 발굴자료에 의하면 안학궁성의 모든 성문들은 성벽과 성벽 사이에 넓은 기초를 하고 문과 문루를 세웠다. 안학궁성의 성문들은 대단히 크고 웅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학궁 성문자료를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표 2] 안학궁 성문 실측자료
[표 2] 안학궁 성문 실측자료:1
구분기초석(개)칸수문터(m)기초시설(m)기초(m)비고
정면측면정면측면길이너비길이너비크기깊이
남문중문837245.61837.5103.351~1.7 
동남문8372461839103.51.2~1.5 
서남문7362361828.59.22.630.8~1.2 
동문6352301523.35.73~3.21 
서문63522914.621.68.630.6~0.8 
북문63522915.220.79--평기초

안학궁성에서 제일 큰 성문은 남문이었다. 안학궁성의 세남문(중문, 남동문, 남서문)은 그 크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정면에 기둥이 7~8줄로서 문터의 너비가 36~46m이고 측면기둥은 3개로 문터너비가 18m나 되는 매우 큰 문루가 있었다. 또한 성문기초는 너비 2.63×3.5m, 깊이 0.8×1.7m로서 대단히 큰 기초시설이었다. 이것은 안학궁성 남문이 성벽과 성벽사이의 길이가 약 50m, 너비가 약 20m나 되는 크고 웅장한 건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궁성문들은 성벽과 성벽 사이에 문을 내고 문루를 세운 것이 아니라 성벽에 문을 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운 형식이었다. 당시 북위의 평성성 왕궁 [주154]
각주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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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중국 산동산서의 도성유적』(일본 : 동명사), 36쪽.

과 남조의 건강궁 [주155]
각주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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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중국 강남의 도성유적』(일본 : 동명사), 37쪽.

성문들은 모두 성벽에 문을 내었으며 이후 시기인 명나라 때의 남경성 [주156]
각주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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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중국 강남의 도성유적』(일본 : 동명사), 43쪽.

성문들도 모두 성벽에 문을 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웠다. 이처럼 중국의 도성과 왕궁성들의 성문형식은 고구려 안학궁성의 성문형식과 달랐다.
궁성벽에 성과 성문을 보위하기 위한 시설을 설치하지 않은 것도 안학궁성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성에서 성문은 적들의 기본 공격대상이므로 그를 보위하기 위하여 성문앞에 옹성을 쌓거나, 성벽으로 공격하는 적들을 소멸하는데 유리한 치와 같은 시설을 만들었다. 특히 평지성인 경우에는 이와 같은 시설들을 설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나선다. 그러나 안학궁성의 성벽에서는 이러한 시설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왜 안학궁성에 옹성이나 치와 같은 방어시설을 설치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으나 중요하게는 당시 고구려의 막강한 국력과 수도성의 위치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5세기 초 고구려는 강대한 국력과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대외적 지위가 대단히 높았다. 고구려는 수많은 성곽들을 쌓아 전연성 방어체계, 연도성 방어체계, 위성 방어 체계를 형성함으로써 외래침략자들이 나라의 그 어느 곳으로도 쳐들어오지 못하게 나라의 방방곡곡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특히 안학궁성과 대성산성의 가까이에 청암동토성과 고방산성이 대동강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 수도방위의 튼튼한 보루 역할을 하였으므로 안학궁성을 쌓으면서 궁성 자체방위를 위한 특별한 성벽시설을 따로 설치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또한 그 어떤 침략자들이 달려들어도 쳐물리칠 수 있는 튼튼한 수도방위성인 대성산성이 왕궁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대성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고구려 시기의 전형적인 고로봉식 산성으로서 성벽에는 65개의 치와 20개의 성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성 안에는 물원천이 풍부하고 수많은 군민이 집결하여 오랫동안 싸울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갖추어진 방어력이 매우 높은 성이었다. 바로 이러한 성이 왕궁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일단 유사시에는 왕을 장수봉 부근 행궁으로 옮기고 적들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안학궁을 건설할 때 궁성과 궁전건축을 웅장화려하게 하였지만 궁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데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주 154
1988, 『중국 산동산서의 도성유적』(일본 : 동명사), 36쪽.
주 155
1985, 『중국 강남의 도성유적』(일본 : 동명사), 37쪽.
주 156
1985, 『중국 강남의 도성유적』(일본 : 동명사),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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