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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 저필자오강원
 

Ⅴ.맺음말

 

이번의 남북 공동 조사는 짧은 조사 기간과 제한된 지점에 대한 시굴 조사만이 이루어진 것에 비해서는 성과가 적지 않았다. 성벽과 관련해서는 동벽 일부 구간의 경우 석축 최하단부가 북측에서 기왕에 확인한 것 보다 0.8m 이하까지 내려간다는 것과 동벽 바깥쪽의 붕적 상태를 확인하게 되었고, 기왕에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던 네 성벽의 단면 조사 지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었으며, 일부 구간에 대한 측량 조사와 기왕에 작성된 도면을 보정할 수 있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건물 터와 관련해서는 남궁의 중심 건물과 우측 건물 터의 생토면 이상의 현존 상황을 확인하였다. 또한 안학궁 1호분의 정확한 위치 파악과 함께 측량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끝으로 안학궁성 출토의 각종 기와 류를 직접 조사함과 동시에 기왕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비교적 이른 시기의 기와를 확인하게 되었다.
공동 조사 결과 남북이 공동으로 다시금 안학궁성이 대성산성과 함께 고구려가 장수왕 15년(427)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부터 평원왕 28년(586) 평양의 평양성(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의 기간 동안 고구려의 왕성이자 도성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사실 이번의 남북 공동 조사단이 내린 결론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간 1958~1970년 북측의 발굴 조사를 전후로 하여 이병도, [주123]
각주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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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丙燾, 1931, 「平壤の在城及び羅城」, 『靑丘學叢』3, 123~124쪽.

황욱, [주124]
각주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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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욱, 1949, 「고구려고도(평양성잡고)」, 『문화유물』1기.

채희국, [주125]
각주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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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국, 1964,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사회과학출판사).

김일성종합대학, [주126]
각주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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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 및 민속학 강좌, 1973, 『대성산의 고구려유적』(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최희림, [주127]
각주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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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림, 1978, 『고구려 평양성』(과학,백과사전출판사).

전제헌, [주128]
각주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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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헌, 1985, 「안학궁유적에 대한 연구」, 『고구려력사연구』(사회과학출판사).

민덕식 [주129]
각주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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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德植, 1993, 「高句麗平壤城의 築城過程에 관한 硏究」, 『國史館論叢』39.

등에 의해 안학궁 유적이 장수왕이 평양으로 남천한 첫 번째의 도성이라는 견해를 꾸준하게 제기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대성산성과는 달리 안학궁의 경우 이른 시기부터 장수왕 천도 이후 5~6세기 고구려 왕성이 아니라는 견해가 또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關野貞 [주130]
각주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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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野貞, 1928, 「高句麗の平壤城及び長安城に就いて」, 『史學雜誌』39—1.

을 필두로 永島暈臣愼, [주131]
각주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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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島暈臣愼, 1981, 「高句麗の都城と建築」, 『難波宮址の硏究』7(大阪市文化財協會).

千田剛道, [주132]
각주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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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田剛道, 1983, 「淸岩里廢寺と安鶴宮」, 『奈良國立文化財硏究所創立30周年記念文化財論叢』(東朋社出版).

田村晃一 [주133]
각주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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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村晃一, 1988, 「高句麗の城郭について」, 『百濟硏究』19.

등과 같은 일본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는데, 최근에는 남측의 일부 연구자들 또한 이들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주134]
각주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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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銀卿, 1988, 「高麗瓦當文樣의 編年硏究」, 『考古歷史學志』4.

이들 견해의 주요한 근거는 안학궁성 출토의 와당이 문양 구성과 태토 및 소성에서 국내성기의 것과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통일신라기 또는 고려 전중기의 것과 유사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안학궁에서 출토된 와당 가운데에는 대성산성이나 금강사지나 토성리 토성 등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대성산성 류의 5세기 대의 폭선이 있는 와당이 아직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다만 이번의 공동 조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회청색 승문 암기와 갈색 승문 암기와 및 6세기 중반 전후로까지 볼 수 있는 연화문 와당이 확인된 것을 통해, 적어도 안학궁성이 고구려 말기로부터 고려 전중기에 초축된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기와의 성격 상 일정 기간 마다 개와해 주어야 한다. [주135]
각주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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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德植, 2003, 「高句麗平壤城의 都市形態와 設計」, 『高句麗硏究』15, 123~124쪽.

따라서 기와 류만을 가지고 유적의 초축 시기를 논할 수는 없다.
최근에는 이러한 지적을 감안하여 기와 류가 아닌 안학궁 내 유구(무덤 — 건축) 간의 중첩 관계를 통해 안학궁이 고구려 왕성은 물론 고구려 유적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주136]
각주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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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中俊明, 2004, 「高句麗の平壤遷都」, 『朝鮮學報』190.

그 요지는 안학궁이 들어서면서 파괴된 3기의 안학궁 횡혈식 석실분은 구조 형식 상 상한을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볼 수 있는데, 안학궁이 이들 석실분을 파괴한 채 들어섰으므로 그 시기를 그보다 늦은 시기로 잡을 수 밖에 없고, 그 시기는 대성산성 자락의 고구려 귀족 무덤을 깨고 있으므로 고구려가 아닌 고려 시대이며, 규모와 유물이 궁궐 급이므로 서경의 궁궐 유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학궁의 횡혈식 석실분은 벽석의 첫 번째 돌 이하의 바닥만 남아 있는 것으로서 이것만으로는 그 시간을 딱히 어느 시점이라고 찍어 말하기 곤란하다. 더욱이 장방형 무덤칸에 동편재 연도가 딸려 있는 석실분(1호분)과 방형 무덤칸에 중앙 연도가 딸려 있는 석실분(3호분)은 뒤의 평면 구조가 앞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시간성을 보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나 일정 기간 동안(5세기 대) 병행하고 있었다. [주137]
각주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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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실과 전실 등이 부가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라도 방형 무덤칸에 중앙 연도가 달려 있는 평면 구조는 기원후 4~5세기 적석총과 봉토석실분에서 널리 확인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태왕릉, 환문총, 절천정총, 장군총, 마선구 1440호분, 남파동 140호분, 간평 10호분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의 것이 6세기로부터 성행하여 이후 고구려 석실분의 전형을 이루었다고 해서 이를 기원후 6세기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이외 안학궁 3호분 출토의 호형 토기가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반으로 편년되고 있는 [주138]
각주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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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潮, 1997, 『高句麗考古學硏究』(吉川弘文館), 409~410쪽 ; 東潮, 2004, 「土器からみた高句麗の整體性」, 『高句麗硏究』18, 848쪽의 그림 ; 최종택, 2004, 「남한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유산』, 491쪽의 삽도9.

우산하 3299호와 고산동 11호의 것과 유사한 형태적 속성을 보이고 있다든지, 안학궁 3호분의 병형 토기가 어깨에 귀가 없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다소 이른 편년안을 참고할 경우 4세기 말~5세기 초로 편년되고 있는 [주139]
각주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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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秉鉉, 1992, 『新羅古墳硏究』(一志社), 359~367, 374쪽.

황남대총 북분의 흑갈유 병형 토기와 기형이 흡사하다든지, 안학궁 내에서 수습된 태환이식이 5세기 초반 [주140]
각주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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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秉鉉, 1992, 위의 책, 374쪽.

또는 중반으로 [주141]
각주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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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藤秋男, 1972, 「耳飾の型式學的硏究に基つく韓國古新羅時代古墳の編年に關する試案」, 『朝鮮學報』64, 68~73쪽 ; 穴澤和光, 1972, 「慶州新羅古墳の編年」, 『古代學』18 — 2, 78~86쪽.

등으로 편년되고 있는 황남대총 북분 출토의 것과 형태 및 제작 수법이 동일하다든지 하는 점을 고려할 때, 안학궁 석실분의 연대가 그리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안학궁 3호분은 황남대총 북분에 대한 기왕의 편년을 안학궁 3호분의 연대로 환원한다고 하더라도, 다소 넓게 잡아 4세기 말~5세기 중반 안에 포괄된다. 이러한 점과 함께 안학궁에서 출토된 태환이식이 최근 제시된 늦은 편년안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주142]
각주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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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 2005, 「고구려의 장신구」, 『한국 고대의 Global Pride 고구려』(고려대학교박물관·서울특별시), 195쪽.

기원후 5세기 중반~후반이라는 점, 안학궁성과 궁성 내 건물지가 초축 당시 일시에 영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기왕에 일부 연구자들이 제시한 바와 같이 안학궁 1~3호분이 기원후 6세기 등으로 내려가지 않을 뿐만 더러 그 윗층의 안학궁이 기원후 7세기나 그 이후가 될 수는 없다.
다만 문제는 안학궁이 장수왕 천도 당시부터 곧바로 왕성으로 이용되었는가 하는 점인데, 채희국의 안학궁 출토 와당에 대한 적극적인 분석에도 [주143]
각주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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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국, 1964, 앞의 책, 56~60쪽.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유물 상으로 5세기 전반의 안학궁상이 쉽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체 길이가 2,488m에 달하는 궁성벽과 건평이 31,458m2에 달하는 궁궐 건축이 일시에 조성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점은 안학궁 성벽 각 지점의 축조 방식이, 물론 지형적인 조건이 상당히 고려된 것이기는 하지만, 각기 다르다는 점과 일부 건물의 방위가 다름과 동시에 적심석의 중복 현상이 확인된다는 것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게다가 안학궁성에 대응하고 있는 대성산성은 2005년 남북 공동 조사에서도 다시금 확인된 바와 같이, [주144]
각주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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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원, 2005, 「대성산성」, 『평양일대의 고구려유적』(고구려연구재단).

성벽의 축조 상태와 저수지 및 적석묘로부터 석실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덤의 존재 등을 고려할 때, 왕을 비롯한 귀족 계층의 일정 기간 동안의 생활이 가능하다. 이러한 여러 점을 고려할 때, 장수왕 천도 직후 안학궁성 자리에 왕의 평상시 거소가 현재 중심 건축군이 들어서 있는 잔구 상에 초축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동서당제에 입각한 [주145]
각주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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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석, 2005, 「安鶴宮南宮正殿廓의 構造를 통해 본 高句麗都城制」, 『고구려의 국제 관계』(고구려연구재단)

현재와 같은 평면 구조로 확대되어갔고, 그와 함께 안학궁의 네 성벽과 기타 시설 또한 완비되어 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안학궁은 위치 면에서 도성의 핵심인 왕성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는데, 안학궁 동북쪽 3.3㎞ 처의 삼석구역 노산동으로부터 서북쪽 1㎞ 처의 대성구역 식물원에 이르기까지의 해발 10~50m 등고선 상에 기단식 적석묘와 벽화분을 포함한 봉토석실분이 대규모의 무덤떼를 형성하고 있고, [주146]
각주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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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野貞, 1917, 「高句麗時代墳墓」, 『大井五年度古蹟調査報告』(朝鮮總督府) ; 關野貞, 1941, 「平壤附近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墳墓及繪畵」, 『朝鮮の建築と藝術』(岩波書店) ; 채희국, 1964,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 『유적발굴보고』9(사회과학원출판사) ; 김사봉·최응선, 1988, 「안학동, 로산동 일대의 고구려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4기.

서쪽 600m 처의 해발 10m 등고선 상에 고구려 기와 편과 함께 도로 유구가, 남쪽 0.8~1㎞ 처의 잔구 상에 역시 고구려 기와편과 함께 생활 유적이 밀집 분포되어 있다. [주147]
각주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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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호·리 호, 1991, 「안학궁터부근의 고구려리방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4기, 30~31쪽.

물론 안학궁 북벽 바로 위에는 국내성기 환도산성에 대응되는 대성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아무튼 이번의 안학궁 남북 공동 조사는 많은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의의는 남북이 공동으로 고구려 왕궁 유적을 조사하여 큰 틀에서 공통된 결론을 내렸다는 점 뿐만 아니라 기왕의 조사에서는 제시되지 않았던 새로운 도면이 작성되었고 또 기존 도면을 현재에 맞게 보정하였으며 기왕에는 알려져 있지 않거나 분명치 않았던 정보가 확보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번의 공동 조사는 과제 또한 남겨 놓았는데, 그것은 기존에 북측이 훌륭하게 조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부분도 있는 만큼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면밀한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주 123
李丙燾, 1931, 「平壤の在城及び羅城」, 『靑丘學叢』3, 123~124쪽.
주 124
황 욱, 1949, 「고구려고도(평양성잡고)」, 『문화유물』1기.
주 125
채희국, 1964,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사회과학출판사).
주 126
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 및 민속학 강좌, 1973, 『대성산의 고구려유적』(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주 127
최희림, 1978, 『고구려 평양성』(과학,백과사전출판사).
주 128
전제헌, 1985, 「안학궁유적에 대한 연구」, 『고구려력사연구』(사회과학출판사).
주 129
閔德植, 1993, 「高句麗平壤城의 築城過程에 관한 硏究」, 『國史館論叢』39.
주 130
關野貞, 1928, 「高句麗の平壤城及び長安城に就いて」, 『史學雜誌』39—1.
주 131
永島暈臣愼, 1981, 「高句麗の都城と建築」, 『難波宮址の硏究』7(大阪市文化財協會).
주 132
千田剛道, 1983, 「淸岩里廢寺と安鶴宮」, 『奈良國立文化財硏究所創立30周年記念文化財論叢』(東朋社出版).
주 133
田村晃一, 1988, 「高句麗の城郭について」, 『百濟硏究』19.
주 134
朴銀卿, 1988, 「高麗瓦當文樣의 編年硏究」, 『考古歷史學志』4.
주 135
閔德植, 2003, 「高句麗平壤城의 都市形態와 設計」, 『高句麗硏究』15, 123~124쪽.
주 136
田中俊明, 2004, 「高句麗の平壤遷都」, 『朝鮮學報』190.
주 137
이실과 전실 등이 부가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라도 방형 무덤칸에 중앙 연도가 달려 있는 평면 구조는 기원후 4~5세기 적석총과 봉토석실분에서 널리 확인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태왕릉, 환문총, 절천정총, 장군총, 마선구 1440호분, 남파동 140호분, 간평 10호분 등을 들 수 있다.
주 138
東潮, 1997, 『高句麗考古學硏究』(吉川弘文館), 409~410쪽 ; 東潮, 2004, 「土器からみた高句麗の整體性」, 『高句麗硏究』18, 848쪽의 그림 ; 최종택, 2004, 「남한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유산』, 491쪽의 삽도9.
주 139
崔秉鉉, 1992, 『新羅古墳硏究』(一志社), 359~367, 374쪽.
주 140
崔秉鉉, 1992, 위의 책, 374쪽.
주 141
伊藤秋男, 1972, 「耳飾の型式學的硏究に基つく韓國古新羅時代古墳の編年に關する試案」, 『朝鮮學報』64, 68~73쪽 ; 穴澤和光, 1972, 「慶州新羅古墳の編年」, 『古代學』18 — 2, 78~86쪽.
주 142
이한상, 2005, 「고구려의 장신구」, 『한국 고대의 Global Pride 고구려』(고려대학교박물관·서울특별시), 195쪽.
주 143
채희국, 1964, 앞의 책, 56~60쪽.
주 144
오강원, 2005, 「대성산성」, 『평양일대의 고구려유적』(고구려연구재단).
주 145
양정석, 2005, 「安鶴宮南宮正殿廓의 構造를 통해 본 高句麗都城制」, 『고구려의 국제 관계』(고구려연구재단)
주 146
關野貞, 1917, 「高句麗時代墳墓」, 『大井五年度古蹟調査報告』(朝鮮總督府) ; 關野貞, 1941, 「平壤附近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墳墓及繪畵」, 『朝鮮の建築と藝術』(岩波書店) ; 채희국, 1964,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 『유적발굴보고』9(사회과학원출판사) ; 김사봉·최응선, 1988, 「안학동, 로산동 일대의 고구려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4기.
주 147
한인호·리 호, 1991, 「안학궁터부근의 고구려리방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4기, 30~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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