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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괄적 검토

2) 개괄적 검토

● 북한 학계의 고구려 기와 연구 동향 ●
북한의 고구려 기와 연구는 남한보다 몇 년 앞서 시작되었고 연구 경향 역시 현지의 자료를 대상으로 실시하였기 때문에 같은 시기 남한의 연구보다 생동감있고 정밀한 연구가 가능하였다. 북한에서 처음으로 고구려 기와에 관심을 보인 것은 채희국으로 1964년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에서 1958년~1961년까지 진행된 대성산성과 안학궁성 등 평양시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와당에 대한 형식 분류를 시도하였다.주 112
각주 112)
채희국, 1964,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사회과학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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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글에서는 기와의 태토와 문양 구성의 차이·변화를 유적의 주요한 시기편년 자료로 사용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형식 분류에 사용된 와당 가운데는 안학궁성만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 포함된 것으로 보이므로 보다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1973년 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 및 민속학 강좌에서 『대성산의 고구려유적』을 발간하였다. 이 책에는 대성산성과 안학궁성 등 앞서 언급한 연구 성과와 이후 추가로 이루어진 조사 성과를 총망라하여 정리하였다. 그 간에 연구된 성과를 보다 진전시켜 기술하였는데 출토 유물 에 대한 사진과 도면, 유구와 유물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정릉사지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통해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5세기 고구려가 사용한 기와의 종류를 구별하였다.주 113
각주 113)
金日成綜合大學編, 1985, 『五世紀の高句麗文化』(雄山閣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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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와당의 문양에 대해 19종으로 세분하였고 평기와의 문양에 대해서도 주목하여 승문, 선문, 점문, 화뢰문, 화염문, 격자문, 능형문 등으로 분류를 시도하였다. 이후 김영진은 2002년 『고구려유물 편』에서 각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의 수치를 분석하여 궁전용 기와의 크기가 사원용 보다 큰 것으로 보았으며, 와당에 새겨진 무늬를 집계하여 식물문, 기하문, 환상문 등 크게 3종류로 분류하였다.주 114
각주 114)
김영진, 2002, 『고구려유물 편』(사회과학출판사)(2003, 백산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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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각 유적에서 출토된 와당의 문양을 비교하여 문양의 변화 양상을 파악하였다. 그는 또 암키와의 문양을 분석하여 승문, 석문, 격자문 등이 고구려 기와의 주요 문양임을 언급하였다. 최근에 들어와서 윤광수는 2004년 「기와를 통하여 본 삼국문화의 공통성」의 논고를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는 먼저 삼국에서 사용된 기와의 종류를 설명하였고, 삼국 간 와당 문양의 비교를 통해 고구려—백제, 고구려—신라 사이의 공통점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문양의 유사성이나 변화상으로 볼 때, 고구려의 선진 문화가 백제, 신라로 전파되었음을 밝히고 삼국 문화의 공통성을 이룩하는데 있어서 고구려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윤광수는 기와를 문화 양상 파악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 고구려 문화 중심의 삼국문화 형성을 강조하였다. 또 그 다음해 「안학궁터의 기와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 안학궁이 427년부터 586년까지 고구려의 왕궁이었다는 사실을 이 곳에서 출토된 기와 류를 가지고 고찰하였다. 대상은 일반 기와, 마루 기와, 지붕 장식물 등으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는데 이들 기와 류가 다른 유적에서는 유사한 예가 없는 독특한 양상을 띠게 된 점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사진 70]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 각종
이처럼 북한의 고구려 기와 연구는 남한의 연구와 비교해 볼 때 다소 평면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최신 발굴 자료가 연구 성과에 신속히 반영되기도 하였고 기와 문양의 시기적인 변천과 유적의 시기적인 변천 과정을 연결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남한 학계와 유사한 흐름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초기의 연구가 와당에 집중되어 있다가 최근 들어 기와에까지 연구 범위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남·북한 학계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 고구려 평기와의 변천 ●
· 국내성기
국내성기 평기와 문양 구성을 보면 성곽과 건물 터에는 격자문 계열의 기와인 세정격자, 세사격자, 태정격자, 태사격자 등 종류를 다양하게 하여 주요 문양으로 사용된 것에 반해 무덤에서는 승문기와 일색으로 지붕을 장식하였다. 이 격자문 계열은 전체 문양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평양성기 승문이 차지하는 비중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석문이 많은 비중을 구성하는데 평양성기보다는 훨씬 많은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또 그동안 관찰되지 않던 귀접이가 장군총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평양성 1기에는 귀접이가 암키와 조정에 많은 부분을 담당하게 된다. 즉, 끝암키와나 귀접이는 국내성기와 평양성기를 구분하는 독특한 속성으로 볼 수 있다. 측면 분할도 1~3회 정도 밖에 보이지 않고 세로 방향의 타날도 도성 중심에서만 이루어지고 주변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모골 너비는 2.5cm 내외로 비교적 정형적인 규격을 가지고 있으나 평양성기 유적인 용수산성에서는 4.5cm로 너비가 대폭 늘어나 제작 방법의 계기적인 변화 양상을 추측할 수 있다.
환도산성 궁전 터의 경우 명문이나 부호·그림 등이 수키와 하단 부에 집중적으로 시문하고 경우에 따라 양 측면에 시문하기도 한다. 이러한 특정 부위에 시문하는 방식은 물의 침습에 대한 일정한 배려로 여겨진다. 내면 흔적에 있어 종방향 연결흔, 융기 돌출흔, 모골와통 손잡이 흔적(棒痕迹) 등은 이미 국내성기에 형성돼 있었으나 내면 빗질이나 물손질에 의해 평양성기보다 뚜렷하게 남아 있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성형시 배면에 모래를 뿌리고 타날하는 방식은 이미 국내성기에도 성행하였으며, 후에 평양성기에서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는 보다 단단한 기와를 만들기 위해 사용된 방법으로 이 방법을 도입하면서 세로 방향의 가지런한 타날에서 여러 방향의 부정형한 타날 방법과도 일정 정도 연관된다고 하겠다. 그 만큼 기와 제작에 있어 단단한 점토 소성품을 만들기 위해 기술적 역량이 축적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수키와 배면에 승문이 시문되고 소문양화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국내성기 기와의 한 요소로 볼 수 있다.
· 평양성기
평양성기는 1기인 5~6세기와 2기인 7세기의 두 시기로 편년을 설정할 수 있다. 이들 기와의 시기별 특징을 보면, 1기는 배면에 시문된 문양이 繩文·格子文·鋸齒文·橫線文등 20여종으로 다양하게 구성된다. 승문 위주에 격자문 계열과 거치문이 주요 문양을 차지하며 橫線文·縱線文·蓆文등 선문 계열이 기타 문양을 이루는 문양 구성을 보여준다. 내면에는 모골와통의 종방향 연결법으로 생긴 세로 방향의 모골끈 연결 흔적과 볼륨이 심한 모골흔의 요철 현상 및 모골 사이의 각이 둥그렇게 돌아가는 융기 돌출흔, 모골와통의 손잡이 흔적 등이 명확하게 관찰된다. 두께는 평균값과 최빈수가 2.1~2.3cm로 두터운 편이고 단면과 측면이 만나는 양측 모서리를 삼각형으로 잘라내는 수법인 귀접이의 면을 크게 조성하였다. 단면의 상단과 하단 모서리를 삼각형 모양으로 비스듬하게 깎기 조정한 단면 조정이 다수 확인된다.
2기는 배면에 시문된 문양이 승문 일색으로 단순화되고 내측면을 정면하기 위한 내면 승문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내면에는 볼륨이 약하게 남은 모골흔이 정연하게 규칙성을 가지며 1기에서 보이는 모골와통의 여러 흔적은 관찰되지 않는다. 귀접이는 적은 수에서만 보이며 면을 작게 조성하였다. 두께는 평균값과 최빈수가 1.4~1.5cm 내외로 1기에 비해 0.7~0.8cm로 현저하게 얇아진다. 이렇게 1기에 비해 2기에는 제작 방법의 변화가 상당히 진행되는데, 그 결과 문양과 모골 흔적이 단순화되며 두께도 얇아지고 이에 따라 단면 조정과 귀접이 등은 약식화되고 있다.
다음의 〈표 1〉은 국내성기와 평양성기의 평기와에 나타난 문양의 변천을 간략하게 나타낸 것이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내성기와 평양성기의 가장 큰 변화는 무덤에 더 이상 기와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내성기 무덤에 사용되었던 기와는 승문에서 무문으로 변화하게 되지만 평양성기가 되면 승문 계열이 더 이상 무덤에서 사용되지 않고 성곽·건물 터에만 사용되며 그 비율 또한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국내성기 주요 문양을 이루던 격자문 계열과 무문은 감소하는데, 특히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격자문 계열이 1/4정도로 감소하고 있다. 또 국내성기에는 석문과 복합문이 기타 문양을 이루고 있는데 비해서 평양성기의 경우 거치문이 주요 문양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선문·석문·조합문 등은 기타 문양을 구성하고 있다. 이처럼 평양성기 고구려 암키와는 승문이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이고 이와 함께 격자문 계열과 거치문이 주요 문양을 차지하며 선문 계열은 기타 문양을 구성하는 것이 특징적이다.주 115
각주 115)
白種伍, 2005, 앞의 글, 124~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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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고구려 평기와 문양 변천
[사진 71] 평양성 출토 평기와 문양
● 평양 지역 고구려 와당의 변천 ●
평양 지역 출토 고구려 와당은 3기로 구분된다. 먼저 1기는 4세기 말부터 6세기 전반까지로 집안 지역의 유복선연화문 와당의 전통이 함께 이어지다가 퇴화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와당은 토성리 유적, 한왕묘, 대성산성, 금강사지, 청암리성, 정릉사지 등에서 출토된다. 유복선연화문 와당은 그 복선의 수가 집안 지역에서는 2줄 1조가 기본적으로 유지된 것에 비해 평양 지역에서는 1~3줄 1조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은 2줄 1조 중심의 집안 지역 양식이 평양 지역에도 함께 사용되다가 후에 1줄과 3줄이 추가되는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파악된다.
[사진 72] 평양성 출토 평기와 문양
[사진 73] 금강사지 출토 평기와 문양
유복선연화문 와당은 4엽과 6엽 그리고 8엽이 많은 수를 차지하는데 평양 지역 1기에는 앞서 언급한 토성리 유형을 제외하고는 3줄의 직선이 한 조를 이루다가 2줄의 직선이 한 조를 이루는 형태로 변화하고 이후 1줄의 직선으로 줄어드는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복선은 자방 부나 주연부와 서로 이어져 있지 않고 분리되는 양상이다. 따라서 이 시기 유복선연화문 와당은 직선의 숫자가 3줄부터 1줄로 줄어들면서 자방 부나 주연 부와도 서로 연결되었다가 떨어지는 양식 상의 변화를 보여주는데 이는 유복선 연화문의 퇴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기는 6세기 전반부터 후반까지로 무복선 연화문이 주종을 이루는 시기이다. 조합연화문과 복합 연화문이 발생하여 유행하며 그 종류에 있어서도 횡판연화문, 인동문, 용면문, 보상화문 등 가장 많은 종류의 와당이 생산되었다. 이러한 와당은 대성산성과 정릉사지, 평양성, 안학궁성 등에서 출토되었다.
먼저 유복선연화문 와당은 1~2줄 1조의 복선문이 시문되었는데 양 끝이 둥글게 뭉쳐져 마치 꽃술을 표현하는 양상으로 변모되었으며 연판은 바깥 부분이 뾰족하고 안쪽 부분이 둥글게 조성하였다. 반구 상의 자방 중앙에는 연자가 표현되고 있지않다. 그리고 무복선연화문 와당은 연판 사이에 삼각형이나 초형문, 연호문 등 여러 가지 모양의 간판문이 시문되고 있다. 이중 Ⅰ식은 5엽과 8엽에서 많이 보이며 세 변이 모두 남은 입체적인 형태에서 양감이 없어지는 평면 삼각형으로 변화하다가 주연부 쪽의 외변이 벌어지면서 퇴화하게 된다. Ⅱ식은 6엽이나 8엽 사이에 감꼭지 무늬와 나뭇가지 등의 초형문을 배치한 형태로 새로운 간판문을 보여주고 있다. Ⅲ식은 연판 사이보다는 판단부 쪽에 치우쳐 돌아가는 특수 형식으로 유정문, 연호문, 조각달 모양 등을 간판문의 소재로 채용하고 있다. 조합 연화문은 부조의 연판 사이에 선조의 꽃봉오리를 측면에서 본 모습으로 시문한 Ⅰ식과 부조의 연판과 선조의 연판을 모두 평면에서 본 모습으로 시문한 Ⅱ식이 있다.
[사진 74] 정릉사지 출토 연화문 와당
[사진 75] 정릉사지 출토 연화문 와당(내면)
[사진 76] 정릉사지 출토 연화문 와당(수키와 연결 부)
[사진 77] 정릉사지 출토 연화문 와당
[사진 78] 정릉사지 출토 연화문 와당(내면)
이 Ⅱ식에는 단판부조와 복판 선조를 교대로 배치한 형태도 포함되는데 8엽에서만 관찰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배치에 있어서 Ⅰ식의 경우 4+4의 기본 구도를 가지며 자방 중앙에 1과의 연자를 두고 주위로 1조의 원권을 돌리는데 전반적으로 자방 부가 연판 부에 비해 위축되어진다. Ⅱ식은 기본 구도에 5+5엽과 6+6엽으로 연판 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에 맞추어 자방 부의 연자도 중앙의 1과에서 벗어나 1+8과 등 여러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연판에는 화륜권이 형성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삼각형이나 주문 등의 간판문이 들어가기도 한다.
이와 달리 복합연화문 와당은 연화문 사이에 다른 계열의 단위 문양을 배치한 형태를 말하는데 연화문에 인동문이 4+4엽을 기본 구도로 하며 6+6엽, 8+8엽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때 4+4엽의 경우 인동문은 정제되고 섬세하게 표현되었으나 그 외 12엽과 16엽의 경우 중심 줄기의 좌우로 짧게 4줄 벌어진 변형 인동문이 자리하게 된다. 자방 역시 조합문 Ⅱ식처럼 다양하게 변화하며 주연 부와 연판부 사이에 연주문대가 돌아가는 새로운 양식이 출현하게 된다. 이러한 연주문대는 8엽과 12엽에서 나타나는데 12엽 중에는 횡으로 회전하는 모양의 변형된 연주문대가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요컨대 이 시기의 와당은 종류가 다양해지고 문양 자체가 정교하게 제작되고 있으며 주요 문양 이외에 보조성의 장식 문양도 복잡하게 발전하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사진 79]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
[사진 80]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내면)
[사진 81]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
[사진 82]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내면)
[사진 83]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문양 세부)
[사진 84]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연결 부)
[사진 85]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
[사진 86]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내면)
[사진 87]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문양 세부)
[사진 88]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연결 부)
[사진 89]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 세부(자방 부)
[사진 90]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 세부(연판 부)
[사진 91]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 세부(주연 부)
3기는 7세기 전반부터 후반의 멸망기까지이다. 복합연화문이 성행하며 전지문, 만초문, 와운문, 차륜문 등의 기하문 계열이 발달하는 시기로 평양성과 정릉사지 등에서 출토되었다. 복합연화문은 이전 시기에 비해 연판 부가 축소되고 간판이 넓어지거나 연판 부 주위로 권운문 와당에서 보인 연호 부가 도식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6세기말에서 7세기 전반의 문양은 자방 부나 연판 부, 기하문 등의 기본 구도가 연호 부를 기본적으로 채용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정치적으나 사상적으로 큰 변화가 생겨나고 있음을 문양의 변천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주 116
각주 116)
白種伍, 2005, 앞의 글, 151~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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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기와의 색깔이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 ●
평구려 기와의 색깔은 적색 계통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회청색과 황갈색 계통은 아주 적은 양으로 확인된다. 고구려 국내성기에는 성곽과 건물 터에 적색 계통이 올라가며 무덤에는 회청색 계통을 사용하는데, 평양성기 초기까지는 색깔 구분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성곽과 건물터에 회색 계통이, 무덤에 적색 계통이 뒤바뀌어 나타난다. 이런 색깔 구분은 당시 고구려 사회의 풍습과 제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사진 92]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 내면 1
[사진 93] 안학궁성 출토 연화문 와당 내면 2
[사진 94] 강소성 남경 출토 인면문 와당(東吳시대)
[사진 95] 강소성 남경 출토 인면문 와당(내면)
[사진 96] 안학궁성 지표 유물 1
그러면 어떠한 풍습과 제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것은 당시 사회를 풍미했던 음양 오행 사상에서 그 근원을 살펴볼 수 있겠다. 음양 오행의 기본색 중에 적색은 불과 태양, 왕권, 남방, 재생 등을 나타낸다. 가락국 수로왕 신화와 신라 혁거세 신화에서 적색은 태양과 불을 상징하여 태양에서 왕권이 연원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 중국에서는 紫微星, 紫禁城, 紫闕등 천제나 제왕이 거처하는 곳을 상징한다. 이와는 반대로 흑색(회색)은 물과 죽음, 북방, 어둠 등을 나타내는 색이다. 이 색은 단군 신화와 수로왕 신화에 등장하는 곰이나 거북 등과 같이 특정 동물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신격을 갖춘 존재로 우리나라 토템 신앙의 잔재형으로 보기도 한다.
고대 중국의 경우 주나라는 붉은 색, 진나라는 검은 색, 한나라는 다시 붉은 색으로 왕조의 색을 정했다고 한다. 진시황은 붉은 색을 상징하는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검은 색을 왕조의 색으로 정하였다. 이는 검정 색이 물을 상징하며 붉은 색은 불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긴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주 117
각주 117)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도서출판 까치, 1994, 『세계문화 상징사전』, 75~81쪽 및 동아출판사, 1995, 『한국문화상징사전』, 595~763쪽, 그리고 J.C. Cooper, 1978, An Illustrated Encyclopae-dia of Traditional Symbols(London : Thames and Hudson Ltd.,)을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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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마찬가지로 고구려가 전기와 중기에 적색 계통을 선호한 것은 중국과 동등한 입장에서 적색을 왕조의 색으로 택하여 건물 터에는 적색 계통의 기와를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 중국과의 마찰이 많게 되자 중국의 전통적인 붉은색과 대비되는 검정색을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진시황이 불을 이기기 위하여 물을 상징하는 검은색을 왕조의 색으로 정한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정권 찬탈의 혼란 속에서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한 후 전 왕조와 대비되는 검은색을 왕조의 색으로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겠다.
[사진 97] 안학궁성 지표 유물 2
[사진 98] 안학궁성 지표 유물 3
[사진 99] 안학궁성 지표 유물 4
[사진 100]안학궁성 출토 착고
이와 관련된 고고학적 자료를 살펴보면, 국내성기에는 중국 동북 지방의 성곽과 건물 터 유적에서 적색 계통의 기와 류가 주로 사용되었고, 무덤에는 회청색과 회흑색의 회색 계통의 기와가 많이 사용되었다.주 118
각주 118)
魏存成, 1996, 『高句麗考古』(湖巖美術館), 268~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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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집안 국내성과 동대자 유적, 환도산성, 길림 용담산성, 무순 고이산성 등의 건물 터에서는 적색 계통의 기와 류가 출토되며 태왕릉, 장군총, 천추총 등의 무덤에서는주 119
각주 119)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0, 『조선유적유물도감』4, 100~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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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청색이나 회흑색과 같은 회색 계통의 기와 류가 출토되어 그 색깔의 차이가 명확히 구분되고 있다. 그러나 평양성기의 안학궁성에서는 회색 계통의 기와 류가 출토되고,주 120
각주 120)
채희국, 1964, 앞의 책,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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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인 정릉사 터에서는 적색 계통의 기와 류가 나타나고주 121
각주 121)
金日成綜合大學編, 1985, 앞의 책, 128~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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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서 국내성기의 집안 일대와는 반대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 유적의 최하층 발굴에서도 집안 일대와 동일하게 안학궁에서는 적색 계통의 기와 류가 출토되었으며 정릉사터에서는 회청색 계통의 기와 류가 출토되었다. 즉, 유적에 따른 기와 색깔의 구별은 평양 천도 이후 어느 정도 전통을 유지하다가 정치 세력의 교체에 따라 상반되는 양상으로 색깔이 바뀌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게다가 후기에 정릉사 터의 상층에서 출토되는 적색 계통의 기와 류는 재생의 의미로 변화된 것으로 파악된다.주 122
각주 122)
白種伍, 2005, 「南韓地域高句麗기와 製作方法考察」, 『白山學報』72, 374~3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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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2)
    채희국, 1964,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사회과학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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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3)
    金日成綜合大學編, 1985, 『五世紀の高句麗文化』(雄山閣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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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4)
    김영진, 2002, 『고구려유물 편』(사회과학출판사)(2003, 백산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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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5)
    白種伍, 2005, 앞의 글, 124~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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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6)
    白種伍, 2005, 앞의 글, 151~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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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7)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도서출판 까치, 1994, 『세계문화 상징사전』, 75~81쪽 및 동아출판사, 1995, 『한국문화상징사전』, 595~763쪽, 그리고 J.C. Cooper, 1978, An Illustrated Encyclopae-dia of Traditional Symbols(London : Thames and Hudson Ltd.,)을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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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8)
    魏存成, 1996, 『高句麗考古』(湖巖美術館), 268~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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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9)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0, 『조선유적유물도감』4, 100~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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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20)
    채희국, 1964, 앞의 책,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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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21)
    金日成綜合大學編, 1985, 앞의 책, 128~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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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22)
    白種伍, 2005, 「南韓地域高句麗기와 製作方法考察」, 『白山學報』72, 374~3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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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괄적 검토 자료번호 : cr.d_0006_0010_0040_004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