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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후반 이후 안학궁

 
 

3) 6세기 후반 이후 안학궁

 

427년 천도 이후 날로 번성하던 평양이 6세기 중반 새로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545년 12월 안원왕의 병이 위중해지자, 다음 왕위를 놓고 귀족들 간에 심각한 갈등이 벌어졌다. 당시 안원왕에게는 3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첫째 왕비는 아들이 없고, 둘째와 셋째 왕비는 아들을 두었다. 각각 자파의 왕자를 옹립하려는 귀족들이 무리를 이끌고 안학궁의 성문을 향해 몰려들어, 궁문 앞에서 양파 간에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전투는 3일간 계속되었다. 사실상 시가지 전체가 쟁투의 무대가 되었다. 전투는 둘째 왕비 측의 승리로 돌아갔고, 패배한 측의 피살자가 2천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 와중에서 왕은 운명하였고, 어린 8세의 왕자가 이듬해 초에 즉위하니, 이 이가 양원왕이다. 양원왕 즉위를 둘러싼 분쟁은 수도에선 3일간의 전투로 일단락되었지만, 두 파의 정치적인 맥을 따라 전국 각지에서 난의 여파가 지속되었다. 난이 발발한지 6년이 지난 뒤인 551년 당시 남한강 유역의, 아마도 국원성(충주)의 사찰에 거주하던 혜량 법사가 진주해온 신라 장수 거칠부에게 “우리나라는 정치적 쟁란으로 언제 망할지 모르겠다(我國政亂 滅亡無日)”라고 하였던 것은 그런 사정의 일면을 말해준다.
한편 이런 고구려의 내부 사정을 틈타 백제와 신라의 동맹군이 551년 한강 유역을 공취하였다. 이어 이듬 해에는 서쪽에서부터 위협이 닥쳤다. 즉, 북제의 문선제가 奚族을 친정한 뒤 영주에서 사신을 고구려에 파견해 외교적 압박을 가하여, 북위 말기 혼란기 때 동으로 이주해왔던 유이민 5천호를 쇄환해 갔다. 그리고 북위 문선제는 이듬 해인 553년에는 다시 거란에 대한 대규모 친정을 하고, 요하 가까이에 있는 창려성에까지 직접 순시하였다. 작년에 이은 요하 선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었다. 한편이 무렵 몽골고원에서도 그간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에 있던 유연을 신흥 돌궐이 격파하였다. 그에 따라 고구려의 서북 방면의 국경선에 새로운 위기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런 내우 외환의 위기 상황에 대처키 위해 고구려 귀족들은 안으로는 실권자의 자리인 대대로를 3년마다 선임하는 형태의 귀족 연립정권 체제를 구축하여 그들 간의 내분을 수습하였다. 밖으로는 신라와 밀약을 맺어 한강 유역과 동해안의 영유권을 넘겨주는 대신 화평 관계를 수립하여, 신라와 백제 간의 전쟁을 유도하였다. 그 결과 남부 국경선의 안정이 확보되자 주력을 서북방에 돌려 북제나 돌궐의 위협에 대처하여 난국을 극복해 나갔다.
그런데 이번 위기 상황에서 수도 평양의 취약점이 노출되었다. 당시 평양은 궁성과 대성산성 및 시가지로 구성되었는데, 이들 셋을 모두 아우르는 羅城이 없었다. 만약 적군이 수도에 접근하면 왕성과 시가지를 포기하고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전을 펼쳐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이미 수도가 너무나 커졌다. 산성으로 모든 주민이 다 들어가서 장기간 방어전을 펼치기도 산성의 여건상 여의치 않다. 일부 주민만 산성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결국 방어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된다. 한편 수도에 대한 외적의 위협은 전에 비해 훨씬 심각해졌다. 백제나 신라군이 북진한다면 궁성과 시가지는 그대로 침공군의 예봉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궁성의 성문이 석축을 한 위에 문루가 올려진 형태가 아니라, 나무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형태인 만큼 화공에 취약한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였다. 이에 고구려 조정은 천도를 고려케 되었다. 양원왕 8년(552), 장안성을 축조하였다고 『삼국사기』에서 전한다. 그런데 당시 내외의 객관적 상황을 볼 때, 이 때 본격적으로 장안성 건설을 시작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이 때부터 장안성으로의 천도에 대한 계획이 발의되었고 그에 따른 준비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본격적인 축성과 시가지 조성에는 그 뒤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다.
장안성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산성, 궁성, 시가지를 모두 나성에 포괄한 평산성이라는 점이다. 이는 바로 안학궁을 중심으로 한 평양이 지닌 방어 상의 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586년 마침내 장안성으로의 천도가 단행되었다. 이어 수가 588년 남중국의 陳왕조를 멸하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였다. 이 소식을 접하자 평원왕은 곡식을 쌓아 모으고 병장기를 수선하는 등 방어책에 골몰하였다. 수 제국의 팽창에 따른 침공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실제 이후 수·당과의 전쟁에서 장안성은 수성전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한편 586년 이후 안학궁과 주변 시가지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해지는 바 없다. 그대로 두고 별궁으로 활용하였을 경우를 상정해볼 수 있겠다. 하지만 장안성에 모든 게 집중되는 상황에서, 특히 전쟁 기간 중에는 안학궁은 소홀히 될 수밖에 없고, 그런 가운데서 퇴락해져갔을 것이다. 주변 시가지 또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668년 장안성의 함락과 함께 고구려가 그 명운을 다함에 따라, 전란 속에서 폐허가 되어버린 안학궁 또한 그 내력조차 세월 속에 잊혀져 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노태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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