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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년 평양 천도

 
 

2) 427년 평양 천도

 

427년 천도 이후의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의 구성에 대해 『북주서』 「고려전」에서 “성내에는 오직 식량과 무기를 쌓아두어 비상 시에 대비하였고 적이 처들어 오면 곧 성에 들어가 지킨다. 평상 시에는 거주치 않았다. 왕은 성 옆에 따로 집을 지어 거주하였다”고 하였다. 즉, 당시 고구려의 수도는 비상 시 방어성으로서 산성과 그 부근에 있는 왕성으로 구성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왕성이 어디를 가르키느냐에 대해 이를 청암동 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었다. 그런데 궁전 터로 추정하였던 곳이 1탑 3가람 식의 절터로 밝혀졌다. 그밖에 청암동 토성 내에서 안학궁 터에 비견될만한 넓은 대지의 건물 터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427년 이후 586년 장안성 천도 이전에 다시 평양 지역 내에서 왕실이 이거하였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안학궁이 427년 이후 주된 궁성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성산성과 안학궁은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안학궁 주변에 귀족들과 일반 백성들의 거주지에 대한 구획과 건설도 하여야 했을 것이므로, 천도를 위한 일련의 공사는 엄청난 대규모 역사였다. 자연 427년 이전부터 고구려 조정은 천도를 위해 장기간에 걸쳐 준비를 하였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평양과 관계된 사실들을 보면, 광개토왕 3년(393) 8월 평양 지역에 9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당시 불교는 ‘국가불교’ ‘왕실 불교’의 성격을 지녔으며, 절은 뒷 시기와는 달리 주로 수도와 주요 거점 도시에 세워졌다. 그런 만큼 한 곳에 절을 9개나 세운다는 조처는 평양을 정치적으로 중시하고 이를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어 이듬해에 “남부 지역에 7개 성을 쌓아 백제에 대비”하였는데, 이는 평양 지역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취한 조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락 9년(399)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백제 및 그와 연결된 왜의 동향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으니, 평양이 고구려의 남부 지역을 총괄하는 거점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광개토왕 18년(409)에는 동부 지역에 6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겼다. 이는 평양 지역의 토착 세력들의 일부를 옮겨, 평양 지역에 대한 조정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겠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이 모두 평양 천도를 전제로 행한 것이라고 추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상적인 면에서 보면 이미 광개토왕 대에는 평양을 정치적 군사적 거점으로 육성하는 조치가 취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내외의 상황이 조만간 천도가 논의될 수밖에 없는 정세였다. 고구려는 서로는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벌을 확고히 차지하였으며, 남으로는 백제를 압도하고 한강 유역에 깊숙이 세력을 뻗치었다. 이제 외침의 위험에 대처키 위해 수도가 산간에 위치한 방어 도시적인 성격을 띄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반면에 광대한 영역과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춘 나라에 걸맞게 물산이 풍부한 기름진 들판과 넓은 공간을 끼고 있고 교통이 편리한 그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수도가 요구되어졌다. 그간의 수도 국내성은 협착하고 교통이 불편하여 이미 수도로선 적합지 않게 되어갔다. 천도를 고려한다면 일단 두 방향에서 그 적합한 후보지를 생각할 수 있겠다. 하나는 요동 방면에서 이를 찾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반도 쪽에서 찾는 것이다. 전자는 곧 북중국 방면으로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는 의도를 동반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5세기 초 고구려 출신의 고운이 북연의 천왕으로 등극하였고, 북중국이 점차 북위에 의해 통일되어가는 추세였다. 이에 대해 광개토왕은 북연 천왕 고운에게 宗族의 우의를 표하였고, 북연을 북중국 세력의 동진에 대한 방파제로 여겨 우호 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런 면은 장수왕 대에도 이어졌다. 즉, 요하 이서 지역으로의 팽창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것이다. 이는 곧 천도의 방향을 남으로 정한 것을 뜻한다. 실제 장수왕 대에 들어서는 평양 지역으로의 천도를 염두에 둔 준비와 공사가 추진되었을 것이다. 장안성으로의 천도 사업이 착수되어(552) 실제 천도가 행해질 때(586)까지 34년이 걸린 것을 고려할 때, 장수왕 대에 들어서는 평양 천도를 위한 계획이 구체적으로 추진되었을 것으로 보아도 무리한 추정은 아니다.
427년 천도 이후 안학궁을 중심으로 평양의 시가지가 조영되었을 것이다. 당시 시가지의 면모는 일부 유적을 통해 그 편린을 찾아볼 수 있는데, 안학궁 남문 터에서 대동강 나무다리 터 사이의 청호동 일대에서 도시 구획 흔적이 “비교적 규모있게 드러났다”고 한다. 이런 도시 구획 흔적이 임흥동과 안학궁 서편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발굴 조사를 통해 보다 구체적인 면모를 밝혀내어야 하겠지만, 일단 안학궁을 중심으로 그 동과 서 및 남쪽 방향에 시가지가 조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도시를 북으로는 대성산성이 병풍처럼 둘러처져 북풍을 막아주고, 남으로는 대동강이란 해자를 앞에 두고 강변의 청호동 토성, 고방 산성, 청암동 토성이 외곽 방어를 맡았다. 강의 남쪽 지역과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청호동에 나무다리를 세웠다.
안학궁과 평양 시가지는 427년 천도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확충되어졌을 것이다. 이 시기 지방제도의 정비가 진전되고 있었는데 그와 함께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조세가 평양으로 수송되었을 것이며, 말갈 거란 등의 피복속 예속민 집단들이 바치는 공물 또한 이곳으로 운반되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반영하듯 몽골 고원의 유연, 북중국의 북위, 남중국의 남조 등을 향해 떠나는 고구려 사절단이나 그들 나라들로부터 오는 외교 사절단의 행열이 간간히 평양 시가지를 지나갔을 것이고 신라나 부여와 같은 인근의 국가들로부터 조공사가 안학궁을 찾았을 것이다. 남궁 서쪽 부근에 있는 정원 유적은 이러한 사절단들을 접대하는 연회장으로 활용되었을 법하다. 한편 고구려 고분 벽화의 교예도에서 보듯 온갖 놀이를 하는 놀이패들이 종종 평양을 찾아 와 정치 군사 도시의 엄숙하고 단조로운 분위기를 깨고 흥취를 돋우고는 하였을 것이다. 이들이 노는 춤과 노래와 악기는 서역에 기원을 둔 것이었으며, 실제 놀이를 실연하는 이들 중에는 서역인들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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