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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저필자
    김정배

Ⅰ. 머리말

고구려연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불거진 고구려사 왜곡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출범 초부터 인접 지역 연구 기관과 공동 연구를 진행해 왔다. 여러 가지 중요 과제 가운데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사업이 북측의 고구려 관련 주요 유적을 남과 북이 공동으로 조사 연구하여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고구려연구재단은 이러한 취지에서 2004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북측과 공동으로 각종 학술회의 개최와 논문집 발간 및 유적 조사를 벌여 왔다. 이러한 가운데 2005년 남측과 북측이 공동으로 평양 일대의 고구려 벽화무덤과 대성산성 및 평양성을 조사한 데 이어 이번(2006년)에 안학궁을 조사하게 되었다.
안학궁은 북측의 김일성종합대학에 의해 1958년 이래 1971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사되었는데, 조사 결과 대성산성과 함께 고구려가 집안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던 때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북측의 이러한 조사 의견에도 불구하고, 주로 일본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안학궁이 고구려 평양 천도 당시가 아닌 고구려 말기 또는 고려 시대의 별궁이거나 기타 유적이라는 반론이 계속적으로 제기되었고, 최근에는 남측의 일부 연구자들 또한 일본 학자들의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거나 또는 그와 연계된 견해를 적극 표명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고구려연구재단은 정부와 북측 민족화해협의회의 도움을 받아 김일성종합대학과 사회과학원 및 문화보존지도국과 공동으로 안학궁을 조사하기로 합의하였고, 그 결과 2006년 4월 8일부터 4월 19일까지 안학궁을 조사하게 되었다. 이번 공동 조사에서는 안학궁을 파악하는데에 핵심이 되는 성벽, 건물 터, 무덤, 기와에 대한 지표·측량·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건물 터는 기단 부 안팎의 토층을, 무덤은 건물 터와 무덤 간의 관계와 정확한 측량을, 기와는 이른 시기 기와 류의 확인을, 성벽은 기존 성벽 단면 조사 지점의 정확한 위치 파악과 성벽의 구조 및 측량 조사를 하는데에 중점이 두어졌다.
이번 남북 공동 조사의 대략적인 일정은 다음과 같다.
· 4월 8일 : 남측과 북측 조사단 합류
· 4월 9일 : 공동 조사 일정 토의 외 동명왕릉과 진파리 고분군 등 답사
· 4월 10일 : 안학궁 조사 지점 토의, 식물원 구역 벽화분과 대성산성 남문 답사
· 4월 11일 : 안학궁 남궁 중심건물 시굴 조사, 안학궁성 남벽과 서벽 지표 및 측량 조사
· 4월 12일 : 안학궁 남궁 중심건물 시굴 조사, 안학궁1호분 조사
· 4월 13일 : 안학궁 남궁 중심건물 및 우측 건물 터 시굴 조사, 안학궁1호분 측량 조사
· 4월 14일 : 안학궁 남궁 건물 터 시굴 조사 및 측량 조사
· 4월 15일 : 안학궁 남궁 건물 터 시굴 조사 및 측량 조사(오전), 보현사 등 답사(오후)
· 4월 16일 : 공동 조사 일정 토의, 장비 점검
· 4월 17일 : 안학궁 동벽 시굴 조사, 안학궁 내 건물 터 지표 조사,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수장 기와 조사(오후)
· 4월 18일 : 안학궁 동벽 측량 조사(오전), 김일성종합대학 수장 기와 조사(오후)
· 4월 19일 : 공동 조사 종결(오전)
이번의 안학궁 공동 조사를 위한 남측과 북측의 조사단 구성은 아래와 같다.
△ 단장
김정배(남측, 고구려연구재단), 남일룡(북측, 김일성종합대학)
△ 조사원
· 북측 : 전제헌, 김유철(김일성종합대학), 리승혁, 리기웅(문화보존지도국), 리광희, 리영식, 정동철, 리경철, 정봉찬, 백용찬, 박준호, 김룡욱, 리재남(김일성종합대학), 김경삼, 강세권(사회과학원
· 남측 : 최병헌(숭실대학교), 노태돈(서울대학교), 이인철(고구려연구재단), 오강원(고구려연구재단), 양정석(수원대학교), 백종오(경기도립박물관), 배성환(고려대학교 박물관), 조태희(위더스테크)
이번의 안학궁 공동 조사는 남측과 북측이 공동으로 유적을 조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짧은 기간 동안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각각의 역할을 정하였다.
우선 남측의 김정배와 북측의 남일룡은 조사 전반을 책임지고 지휘 감독함과 동시에 조사 일정과 대상 및 지점 그리고 방식 등을 결정하였다. 남측의 최병헌과 북측의 전제헌, 김유철, 리승혁 등은 모든 조사에 대한 자문을 하였다. 남측의 노태돈·이인철과 북측의 리기웅 등은 조사를 참관하면서 역사적인 맥락을 분석하였다. 이외 성벽 조사는 남측의 오강원이, 건물 터 조사는 남측의 양정석이, 기와 조사는 남측의 백종오가 전담하되 북측의 조사원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하였다. 고분 조사는 남측의 김정배, 최병헌과 북측의 남일룡, 전제헌의 책임과 토의 하에 이루어졌다. 끝으로 측량 조사는 남측의 조태희가 전담하되 북측의 일부 조사원이 참여하였고 사진 촬영은 남측의 배성환이 전담하였다.
보고서는 크게 보고문 편, 논문 편, 도판 편 세 부분으로 나누어 구성하기로 하였는데, 이중 논문편은 북측이 전담하기로 하였다. 전체 보고서의 편집은 오강원이 하였다. 보고문 집필은 김정배, 노태돈, 이인철, 오강원, 양정석, 백종오가 목록에 예시된 바와 같은 부분들을 맡아 집필하였다. 측량 도면은 조태희(위더스테크)가 1차 도면을 작성하고 오강원(성벽, 고분)과 양정석(건물터)이 수정 완성하였다. 측량 도면 외 성벽과 고분 관련 도면은 오강원이 제도하였다. 사진 정리는 배성환이 전담하였고, 도판 편집은 오강원이 전담하였다. 이외 자연 환경과 성벽 부분에 삽입된 사진은 오강원이 촬영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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