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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시의 역사

 
 

2. 집안시의 역사

 

집안시는 자연 환경이 좋기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농업생산도 발전했다. 지금으로부터 3, 4천년 전인 원시시대부터 사람들은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 시기의 유적들이 집안경내 혼강 유역의 태상향(台上鄕) 황외자촌(荒崴子村), 두도향(頭道鄕) 동촌(東村), 이도외자촌(二道崴子村) 및 압록강유역의 유림향(楡林鄕) 주선구촌(朱仙泃村), 황백향(黃柏鄕) 장천촌(長川村), 교구향(郊區鄕) 승리촌(勝利村)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적들에서는 타제석기와 마제석기, 도기, 석기, 석구, 석호, 석부, 석촉, 어망추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유물들을 통해 볼 때 원시시대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농업을 위주로 하되 어렵을 보조로 하는 경제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원시적인 석제 생산공구를 사용하여 땅을 일구었다.
고조선이 성립된 이후 이곳은 그 지방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년)에 조선이 멸망하고 낙랑, 진번, 임둔, 현토의 4군이 설치되자, 집안지역은 현토군 관할에 속했다. 집안 지역은 요동지역과 동북 지역, 그리고 한반도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문화전파의 통로역할을 했다. 전국 시기 이래 중원에서 전란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동해왔기 때문에 집안경내에도 유이민의 유입이 많았다. 집안경내에서 전국시기의 화폐와 한대의 철제 생산공구, 왕망(王莽) 시기의 화폐 등 중원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유입된 문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적이나 유물의 성격상 지역의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 지역의 문화를 훗날 고구려를 건국한 맥족의 문화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한(漢)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군현을 설치한 기원전 2세기 초, 압록강(鴨綠江) 중류유역에는 ‘구려(句驪)’라는 명칭으로 기록된 정치 세력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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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卷28 地理志8 下1 玄菟郡條, 『後漢書』卷85 東夷列傅 高句麗條.

‘구려’ 는 현토군(玄菟郡) 개설 당시 ‘예맥(濊貊)’ 과는 구별되는 실체로서 별개의 정치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예맥(濊貊), 또는 맥(貊)이라 는 종족 명칭으로 포괄, 지칭되던 단계와 달리, 이제 이들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주변의 다른 나라와 성격이 다른 존재로 부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무렵부터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積石塚)이 압록강 중류유역과 그 지류인 혼강(渾江), 독로강(禿魯江) 유역 일대에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적석총은 독자성이 강한 묘제로 고구려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적이다. 적석총을 조성한 종족집단이 뒷날 고구려를 건국했다 해서 다른 예맥족과 구별 하여 ‘고구려족(高句麗族)’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구려족’은 당시 종족집단으로서 결속성을 가졌고, 다른 종족들과 문화적인 면에서 구분되는 차별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세력을 크게 강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국 군현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고구려족’ 은 내부 결속을 강화하게 되었다. 이는 곧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힘을 모아 현토군을 공격하여, 기원전 82년과 75년 사이에 옥저성(沃沮城)에 있던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축출해버렸다. 『삼국지』등에 현토군을 공격한 것으로 나오는 ‘이맥(夷貊)’이 바로 압록강 중류유역에 거주하고 있던 예맥족, 즉 ‘고구려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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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卷85 東夷列傳 東沃沮條, 『三國志』卷30 魏書 東夷傅 東沃沮條, 『漢書』卷7 昭帝本紀 元鳳6年條.


이때 현토군은 소자하(蘇子河) 연안에 있는 신빈(新賓, 지금의 영롱진고성(永陵鎭古城)으로 옮겨갔다. 이를 일반적으로 제2현토군이라 한다.
현토군의 이치(移置)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 있던 ‘고구려족’의 정치적 발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들은 각 지역별로 소국을 형성한 다음 연맹체를 결성하여 힘을 결집함으로써 현토군을 축출할 수 있었다. 이때 ‘고구려족’을 이끌었던 세력은『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송양왕(松讓王)의 비류국(沸流國), 즉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조에 소노부(消奴部), 또는 연노부(涓奴部)로 나오는 정치세력이었다.
현토군은 압록강 중류유역으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범위로 하고 있었고, 군치(郡治)는 옥저성(지금 함흥)에 설치되어 있었다. 압록강 중류유역의 ‘고구려족’ 이 힘을 모아 군현을 공격하니, 멀리 떨어져 있는 군치가 고립되고 현토군 자체가 동강날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에 한에서는 현토군치를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 ‘고구려족’ 을 감시, 통제하게 하고, 옥저성 일대는 낙랑군에 붙여 관리하도록 했다.
당시 고구려와 현토군의 관계에 대해 『삼국지』에는 “한시사고취기인(漢時賜鼓吹技人) 상종현토군수조복의책(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 고구려령주기명적(高句麗令主其名籍)”이라고 서술해놓았다. 고구려인으로 하여금 현토군에 와서 조복의책(朝服衣幘)을 받아가게 했고, 고구려 현령이 현토군에 와서 조복의책을 받아가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장부를 관리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 현이 ‘고구려족’ 이 이룩한 소국들 내부의 통치를 직접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고구려 현령이 고구려인들의 호적을 관리했다고 해석하여 통치의 증거로 보는 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사료의 앞뒤 구절을 함께 해석하면 ‘고구려족’ 전체의 호적(戸籍)이 아니라 현토군에 와서 조복의책을 받아간 사람들의 명단만 관리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또 조복의책의 사여라는 구절을 고구려 관리가 중국 관복을 입고 통치를 대행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도 역시 잘못된 이해다. 『삼국지』한전(韓傳) 에는 풍속에 의책(衣幢)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戸)들도 군(郡)에 가서 조알(朝謁)할 적에 모두 의책을 빌려 입었으며, 자신의 인수(印緩)를 차고 의책(衣幘)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당시 군현에 와서 외교나 무역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군현으로부터 의책과 인수를 받아 착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조복의책 사여가 군현의 직접 통치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삼국지』고구려전의 기사는 현토군이 구려의 서북으로 옮겨갔다는 『한서 (漢書)』의 기사와 더불어 당시 ‘고구려족’ 이 배타적인 거주공간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정치운영을 해나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漢)에서는 고구려 연맹체의 대표자를 통하지 않고, 여러 집단의 대표자들이 각각 개별적으로 현토군에 이르러 조복의잭을 받아가게 했다. ‘고구려족’ 의 결속이 강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집단별로 개별적인 교류를 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는 군현이 무역이나 외교를 통해 ‘고구려족’ 을 분리, 통제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방법이 주효했는지, 고구려는 한동안 군현을 공격하지 않았다. 고구려와 제2현토군이 당분간 평온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평온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고구려족’ 의 결속력은 더 강화되어 갔고, 중국측의 분리통제책은 점점 효력을 상실해갔다. 그 이면에 ‘고구려족’사회에서의 변화가 있었다. 즉 부여로부터의 유이민 세력과 결합한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비류국을 대신해 소국연맹체의 맹주가 된 것이다. 이것이 역사서에 나오는 동명성왕(東明聖王, 기원전 37년~기원전 19년)의 고구려 건국이다.
졸본부여 주도의 소국연맹체는 비류국이 주도할 때와 차이가 있었다. ‘고구려족’ 내부의 결속이 이전보다 더 강화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맹주국의 위상은 더 높아졌고, 그에 따라 소국들의 자율권은 점차 약화되 어 갔다. 중국 군현과의 관계도 변화되었다. 개별집단과의 물품교역을 통해 유지되던 안정상태가 깨지게 된 것이다.
유리왕대(琉璃王代, 기원전19년~기원18년)가 되면 이전과 상황이 많이 달라 졌다. 연맹체 맹주국의 위상이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었고, 이를 한(漢)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왕망(王莽)이 고구려병(高句驢兵)의 비협조에 대해 추(騶)를 처벌하라고 한데 대해 그것이 추의 잘못이 아니라고 한 엄우(嚴尤)의 말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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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卷99 中 王莽傅.

고구려는 한의 군사동원 요구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전적으로 따르지도 않고 있다. 비류국 주도의 연맹체와 달리 중국 군현에 대해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때까지의 고구려 수도는 졸본 지역(지금의 중국 요녕성 桓仁)이었다.
유리왕대까지의 고구려왕은 연맹체 구성집단 내부의 통치에 직접 간여할 수 없었다. 대외적인 일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현토군과의 교류나 접촉도 창구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유력 세력들이 개별적으로 행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주몽과 유리왕 모두 부여로부터의 이주민세력이었다. 이 유이민 세력이 졸본 지역 토착세력과 결합하여 고구려족을 주도하는 위치에 올라 고구려 건국을 선포했지만 자신들의 세력기반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국정을 운영하고 고구려족을 이끄는데 많은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이에 유리왕은 스스로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전렵과 순행을 거듭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수도를 새로운 지역으로 옮길 결심을 하게 된 것 같다. 이에 돼지를 앞세운 신탁을 구실로 재위 22년(기원3년)에 마침내 국내지역 즉 지금의 집안 지역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집안시대의 고구려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대무신왕대(大武神王代, 기원 18년~44년)에 이르러서는 부여와의 전쟁을 통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부여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왕은 고구려 내부의 여러 정치 세력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그리고 태조왕대(太祖王代, 53년~145년)에 이르러서는 압록강중류유역의 정치세력을 모두 통합한 후 외곽지역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했다. 동옥저와 예에 대한 복속이 우선적으로 행해졌다. 이는 고구려에 부족한 물산을 획득하기 위해 행해졌다. 이후 동옥저와 예는 예속민으로 되어 고구려 에 공납(貢納)을 바쳐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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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30 魏書 東夷傳 東沃沮條, 濊條.


태조왕대 고구려의 영역은 남쪽으로 살수(薩水), 즉 청천강 이북까지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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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卷15 高句麗本紀 大祖大王 4年 7月條, “拓境 東至洽海 南至薩水”.

태조왕은 또 중국 군현에 대한 공격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재위 53년(105년)에 한의 요동 여섯 현을 약탈했고, 가을 9월에도 재차 공격을 퍼부었다. 태조왕은 5나부의 군사뿐 아니라 예맥, 마한, 선비 등 다양한 집단을 동원했다. 59년(111년) 3월과 66년(118년) 6월에는 예맥과 함께 현토성(玄菟城)과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했고, 69년(121년) 4월에는 선비(鮮卑) 8천명과 함께 요수현(遼隊縣)을 쳤으며, 이 해 12월에는 마한, 예맥의 1만여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가 현토성을 포위하기도 했다. 70년(122년)에도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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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東夷列傅 高句麗條, 『三國志』魏書 東夷傅 高句麗條.


이런 과정에서 현토군은 다시 혼하(渾河) 방면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제3현토군이다. 태조왕은 5나부민 의에 주변 여러 종족집단과 정치세력들까지 결집하여 중국 군현과 투쟁했다. 현토군 축출 이후 전쟁 범위도 더 확대되었다. 태조왕 이후에도 고구려는 요동군, 낙랑군 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영토를 점차 확대해나갔다. 미천왕대(美川王代, 300년~331년)에 이르러서는 낙 랑군과 대방군까지 완전히 축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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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卷17 高句麗本紀5 美川王 14年條, 15年條.


집안지역은 이와 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가는 고구려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수도 집안의 역사가 언제나 승승장구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집안은 외적의 침입에 의해 세 차례나 크게 파괴되었다. 그 첫 번째는 산상왕(山上王, 197년~227년) 13년(209년)에 공손강(公孫康)이 쳐들어와 나라가 깨지고 읍락을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이에 산상왕은 갱작신국(更作新國)했다고 한다. 새로 나라를 만들어야 할 정도로 파괴가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동천왕대(東川王代, 227년~248년)에 있었던 위(魏) 나라 장군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이었다. 재위 19년(245년)년에 관구검이 보병과 기병 만인을 거느리고 수도인 국내성으로 쳐들어왔다. 동천왕이 몸소 보기 2만인을 거느리고 비류수(지금의 부이강 및 혼강)로 나아가 양구(梁口, 지금 태자하)에서 적을 맞이해 싸웠는데, 패하고 말았다. 이때 위의 군사는 적현(지금 집안 판차령 일대)까지 추격하였고 마침내 환도성까지 올라와 환도산성을 파괴해버렸다. 동천왕은 남옥저를 거쳐 북옥저로 달아났는데, 위나라 군사가 계속 추격하여 숙신남계에 이르러서야 돌아갔다. 동천왕은 이전부터 고구려의 영향을 받고 있던 숙신 땅으로 들어가 피신해 있다가 겨우 돌아와 나라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 뒤 안정을 찾은 고구려는 다시 영역확대에 나섰다. 그러다가 요서에서 일어나 역시 세력확대를 도모하던 전연(前燕)과 충돌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수 차례에 걸쳐 국경선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전쟁을 벌였는데, 마침내 진(晋) 함강(咸康) 8년(342년)에 전연의 모용황(慕容皝)이 남북 양로로 나뉘어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고국원왕은 이때 대부분 그랬듯이 대군이 넓고 평탄한 북도로 올것이라 생각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북도에 배치하고, 자신은 소수의 군사만 이끌고 남도를 지켰다.
그러나 고구려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고 있던 모용황은 그와 반대로 남도로 대군을 보냈다. 결국 허를 찔린 고국원왕의 군대는 대패했고, 적군은 순식간에 수도로 들어와 궁실을 불태우고 수도를 파괴한 뒤 남녀 5만을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다시 연을 공격할 수 없게 하기 위해 왕의 어머니를 사로 잡아가고 부왕인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수레에 싣고 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한동안 더 이상 서진(西進)을 꿈꿀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고구려는 남쪽으로 눈길을 돌려 남진경영에 주력하게 된다. 그러나 남쪽으로 진출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백제와 직접 충돌하게 되었고, 백제의 근초고왕 군대와 평양에서 맞붙었는데, 전쟁의 와중에 선두에서 지휘하던 고국원왕이 유시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국가 최대의 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부왕을 이어 즉위한 소수림왕(小獸林王, 371년~384년)이 내부 통치를 개혁하여 다잡고 국력을 강화시킴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켰다. 소수림왕의 내정개혁은 광개토왕(391년~413년)과 장수왕대(413년~491년)에 이룩한 영역확대와 국가발전에 중요한 밑받침이 되었다. 광개토왕은 즉위 초부터 대외전쟁을 활발히 벌임으로써 오랫동안 숙원이었던 요동지역을 완전히 차지했고, 거란, 백제와 왜, 가야, 동부여, 숙신 등을 쳐 영토를 대폭 넓혔다. 뿐만 아니라 내치에도 힘썼다. 관직도 늘리고 새로 편입한 영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애썼으며, 평양 일대에 대한 경영도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장수왕이 평양천도를 단행할 수 있었던 것도 광개토왕대의 평양지역 경영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장수왕은 광개토왕이 넓힌 영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했을 뿐 아니라 국제적인 위상도 강화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시대는 고구려의 전성기로서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중국, 일본, 유목왕조와 다른 고구려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를 이룩한 시기였다. 이때 고구려의 왕족은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하백(河伯)의 외손인 신성족이었다. 그 신성한 왕이 다스리는 고구려는 신성국가였고, 수도였던 집안은 그 중심지역이었다.
장수왕 15년(427년)에 왕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보다 넓은 터전에서 국가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부터 집안지역은 고구려의 별도(別都)가 되었다. 천도 이후에도 집안은 지역세가 유지되었고, 독자적인 문화를 계속 발전시켜나갔다. 6~7세기에 조성된 집안지역의 고분 벽화들은 평양과 다른 독특한 성격이면서 수준이 매우 높다. 이는 이 지역이 고구려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컸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보장왕 27년(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이 지역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집안은 가물주(哥勿州) 도독부로 편제되어 안동도호부 관할 하에 들어갔다. 이후 고구려유민들이 발해를 세우게 되면서 임강 일대에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를 설치함에 따라 집안은 서경압록부의 환주(桓州)로 편제되었다.
그 뒤 발해가 거란에 망하자 집안은 환주로서 요(遼)의 동경도(東京道) 녹주압록군절도(淥州鴨綠軍節度)에 예속되었다. 또 금이 요를 멸망시키고 난 뒤에는 파속부로(婆速府路) 관할 하에 들어갔다. 원대(元代)에 집안은 요양로(遼陽路)의 동녕부(東寧府) 관할에 속했고, 명대(明代)에는 노이간도사(奴爾干都司)가 관할하는 건주위(建州衛)에 예속되었다.
청대(淸代)에 집안은 지역상 길림장군(吉林將軍) 관할의 서남경(西南境)에 있었다. 단 주군(駐軍)과 행정 관리상에서 봉천장군(奉天將軍) 관할에 속했다. 청조 초기에 백두산 일대는 황족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되었다. 집안도 역시 금지(禁地)가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광서(光緖) 2년(1886)에 성경장군(盛京將軍) 숭실(崇實)이 주청하여 동변(東邊)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현치(縣治)를 설치했다. 노령산맥 남북에는 통화(通化), 회인(懷仁, 후에 환인으로 개칭) 2현을 두었다. 노령산맥의 앞부분은 회인(懷仁)에 귀속되었고, 뒷부분은 통화(通化) 관할에 귀속되었다. 청말기에 집안현성 부근은 통구(通泃), 또는 동구(洞泃)라 했다. 통(通)과 동(洞)은 같은 음의 전환이다.
광서(光緖) 28년(1902년) 봉천장군(奉天將軍) 증기(增祺)가 주청하여 노령 북쪽 통화현의 취자오보(聚字五保)(동함취(東咸聚), 서함취(西咸聚), 동취(同聚), 민취(民聚), 영취(永聚))와 노령남쪽의 회인현의 화자육보(和字六保)(충화(冲和), 융화(融和), 온화(蘊和), 상화(祥和), 치화(致和), 태화(太和))를 나누었다. 비로소 집안현을 설치했다. 무수안집(撫緩安輯)의 뜻을 취했다. 현성은 압록강 우안 통구평야의 국내성 옛터에 설치했다.
1911년 신해혁명 다음 해에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집안은 동변도(東邊道) 관할에 귀속되었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가 동북을 침공해 점령하여 위만주국을 건립하자 집안은 봉천성 관할이 되었다. 그리고 1945년 8·15 광복 후 11월에 집안은 안동성(安東省) 통화행정독찰공서(通化行政督察公署) 관할에 귀속되었다. 이후 1946년 2월에 길림성(吉林省), 1946년 8월에는 요동성(遼東省), 1948년 8월에는 안동성(安東省), 1949년 6월에는 요동성(遼東省), 1954년 8월에는 길림성 소속의 통화행정공서(通化行政公署) 관할로 바뀌었다. 1965년 3월 8일 에는 집안(輯安)에서 집안(集安)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88년에는 마침내 시로 승격되었다. 이후 인구가 점차 늘어나 1998년에는 20만이 되었고, 2004 년에는 23만 6천명으로 증가했다.
이처럼 집안은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면서 여러 왕조를 거쳤다. 집안의 긴 역사 가운데 이 지역이 가장 절정기에 올랐던 때는 역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시기였다. 따라서 현재 이 지역에 남아 있는 역사유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고 또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고구려 시기의 유적지이다.

 
『漢書』卷28 地理志8 下1 玄菟郡條, 『後漢書』卷85 東夷列傅 高句麗條.
『後漢書』卷85 東夷列傳 東沃沮條, 『三國志』卷30 魏書 東夷傅 東沃沮條, 『漢書』卷7 昭帝本紀 元鳳6年條.
『漢書』卷99 中 王莽傅.
『三國志』卷30 魏書 東夷傳 東沃沮條, 濊條.
『三國史記』卷15 高句麗本紀 大祖大王 4年 7月條, “拓境 東至洽海 南至薩水”.
『後漢書』東夷列傅 高句麗條, 『三國志』魏書 東夷傅 高句麗條.
『三國史記』卷17 高句麗本紀5 美川王 14年條, 15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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