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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중일한관계사료

유구(琉球) 문제로 일본과 싸울 가치가 없다는 주장과 조선 어윤중(魚允中)의 필담(筆談) 초록

兩江總督劉坤一을 만났는데 琉球문제 때문에 일본과 싸움을 벌이는 것은 가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2월 1일에 수행원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가 새 임무를 시작하였는데, 아울러 上海에서 조선의 魚允中과 『筆談節略』을 초록하여 올립니다(謁南洋劉制軍, 諄囑以琉案不値與日本肇釁, 十二月初一日卽率隨員東渡履新, 並錄呈在滬與韓魚允中筆談節略).
  • 발신자
    黎庶昌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1년 12월 8일 (음)(光緖七年十二月初八日) , 1882년 1월 27일 (光緖七年十二月初八日)
  • 문서번호
    2-1-1-31 (387, 543b-547a)
12월 8일, 出使大臣黎庶昌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다.
 
11월에 삼가 서신을 초록하고, 동행할 수행원에 대해 상주하는 각 奏摺을 공문에 첨부한 후 文報局을 통해 발신했으니, 아마도 진작 받아 보셨을 것입니다. 곧이어 11월 4일에 長江輪船을 타고 南京에 가서 兩江總督劉坤一주 001
각주 001)
유곤일(劉坤一, 1830~1902)은 상군(湘軍)의 지휘관으로 활동하면서 출세한 청말의 관료이다. 자는 현장(峴莊)으로 호남성(湖南省) 신녕(新寧) 출신이다. 1855년부터 상군에 참여하여 태평천국군과 싸웠고, 1862년 광서포정사(廣西布政使), 1864년 강서순무(江西巡撫)가 되었다. 1875~1879년까지 양광총독(兩廣總督), 이후 양강총독(兩江總督) 겸 남양통상대신(南洋通商大臣)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1881년 탄핵을 당한 이후 1891년에 가서야 다시 양강총독에 복귀하였다. 원문의 제군(制軍)은 총독(總督)의 별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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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난 다음 전체 사안을 상의하였습니다. 劉坤一總督은 중국이 만일 琉球문제 때문에 일본과 전쟁을 벌인다면 정말 가치가 없을 일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며칠을 머문 후 輪船을 타고 서둘러 돌아와 15일 전에 上海로 귀환하였습니다.
처음에는 20일쯤 출발하려고 했었지만, 군함 馭遠號의 흘수가 비교적 깊고 18일 이후에는 조수가 점차 물러나 항구를 떠나기 어려웠습니다. 현재 12월 1일 수행원들과 함께 출항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정하였으므로 곧장 당일에 奏摺을 갖추어 이점을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공문을 갖추어 안건에 따라 總理衙門에 갖추어 올리는 것 외에도, 앞서 든 모든 奏摺은 현재 밀봉하지 않는 상태이므로, 삼가 살펴보신 후 봉인해서 대신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필요한 협판선[夾板]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제공하는 쪽에 대신 준비하도록 지시를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 수행원으로 선발하겠다고 아뢴 인원 중에 參贊郭慶藩주 002
각주 002)
곽경번(郭慶藩, 1844~1896)은 호남성 상음(湘陰) 출신으로 원명은 입훈(立塤), 자는 맹순(孟純), 호는 자정(子瀞)·호첨(岵瞻) 등으로 청말의 관료 곽숭도(郭嵩燾)의 조카이기도 하다. 1881년 黎庶昌이 일본공사로 갈 때 洋務參贊官으로 선발되었으나 모친의 병으로 가지 못하고 다음해 7월에 출발하였으나 이번에는 본인의 병으로 일본에 가지 못하고 귀가하여 관직을 벗어났다. 그는 청대 『장자(莊子)』 연구의 대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원문의 수(守)는 진대 군(郡)의 장관, 한대의 태수(太守)를 말하는데, 나중에는 지주(知州)·지부(知府) 등 지방장관을 가리키는 줄임말(省稱)로 쓰이게 되었다. 곽경번은 절강성(浙江省)에서 지부로 일한 적이 있으며, 당시 도원(道員) 직함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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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지난번 모친의 병환 때문에 2개월 간 휴가를 냈습니다. 또 黎汝謙주 003
각주 003)
여여겸(黎汝謙)의 자는 수생(受生)으로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 출신이다. 여서창(黎庶昌)의 조카이기도 한데, 1875년 거인(擧人)이 되었고, 1882년 여서창을 따라 고베영사(神戶領事)로 2년간 일하였으며, 1887년 다시 여서창을 따라 일본에 가서 橫濱領事로 3년간 근무하기도 하였다. 이후 무술개혁운동의 고취자이자 참여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원문의 령(令)은 마찬가지로 현급(縣級)의 지방장관, 즉 청대의 경우 知縣)을 가리키는 줄임말이다. 즉 이것은 해당 관원이 지현(知縣)의 직함·품급(정7품)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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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馬建常주 004
각주 004)
마건상(馬建常, 1840~1939)은 청말의 문관으로 원명은 마지덕(馬志德)이고 약슬(若瑟)·흠선(欽善)·건상(建常)·량(良)이란 이름도 사용하였다. 자는 사장(斯藏) 또는 상백(相伯) 등인데, 마상백 또는 마량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청말의 저명한 외교관 마건충(馬建忠)의 형이기도 하다. 주일 영사를 지낸 다음 1882년에 정부 기구가 개편된 후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에 와 통리군국사무아문의 참의(參議)가 되고, 후에 참찬으로 승진하여 나라의 기무(機務)와 권리를 장악하고 내정을 간여하였다. 이후에는 복단대학(復旦大學) 등의 창시자 등 교육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천주회 신부이자 신학박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중서(中書)는 중서사인(中書舍人)이란 관명을 말한다. 원래 선진시대부터 시작된 관명으로 군주의 가까운 속관으로 조명(詔命)의 전달을 관장하였지만, 시대에 따라 역할이나 비중은 크게 다르다. 청대에는 종칠품(從七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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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아직 상해에 도착하지 않았으니, 신년 이후에야 출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삼가 이상의 내용을 서신으로 알립니다. 또한 조선인 魚允中이 공소에 찾아왔기에 만났습니다. 필담한 종이를 베껴서 아울러 살펴보시도록 올립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삼가 평안하시길 빕니다.
별지: 出使日本大臣黎庶昌과 조선 魚允中의 필담(出使日本大臣黎庶昌與韓魚允中筆談)
 
첨부문서:
 
1. 『필담』 초록:辛巳10월 28일 조선 翰林院魚允中이 공소에 찾아와서 만나고 그와 필담을 나누었습니다
魚允中:“오래도록 명성을 우러러 보았는데 지금에야 뵙게 되었습니다.”
黎庶昌:“예전에 機器局의 李大人(李鴻章)께서 귀하에 대해 언급하신 이후 한 번 뵙기를 몹시 바랐습니다.”
어윤중:“제가 예전에 일본에 갔었을 때 何如璋大人및 黃遵憲參贊과 여러 차례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일본[東洋]의 時事는 예전과 달라, 서로 긴밀하게 뒤엉키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大人을 알현한 것은 사적으로 앙모하는 마음을 풀뿐만 아니라 공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바라건대 앞으로 모든 일마다 진심으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대인께서는 외국에서 오랫동안 지내시면서 이미 명성이 높으니, 저처럼 몽매한 사람은 앞으로 두터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黎庶昌. 이하 동일] 답변:“일본이 西法을 본받는 것에 대해 귀하의 생각은 어떻고, 조선 사람들의 의중은 또한 어떻습니까?”
어윤중:“저들을 위해서는 잘 바꾸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사이에 때로는 부적절한 경우도 있지만, 큰 윤곽만을 따지고 작은 실수는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웃나라의 강성함은 우리의 복이 아니니, 앞으로 힘써 부강을 추구해야 할 따름입니다.”
답변:“귀하의 견해는 정말 옳습니다. 일본의 變法은 너무 빠른 것이 조금 문제이고, 또한 반드시 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결국은 상당히 훌륭한 내용입니다. 조선은 저들과 이웃이므로 또한 힘써 부강을 추구하는 일을 첫째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富強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서는 얼마간 西法을 참고하여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목전의 급무는 아마도 각국과의 통상을 핵심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어윤중:“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만국과 교류한 이후에 부강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갓 빈말일 뿐입니다.”
답변:“富強이라는 두 글자는 모름지기 10~20년을 도모한 다음에야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각국과 통상을 하여 우선 싸우려는 마음을 멈추게 한 다음에야 부강의 방법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어윤중:“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방법은 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外人과 전쟁을 하고 있을 때는 먼저 싸우려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武備를 강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정에 힘쓰며 그 근본을 다지며, 겸하여 군사와 무비를 갖추어야 비용 소모를 피할 수 있습니다. 군수품이나 총포 등은 모두 재정을 소모하는 근원입니다. 헛되이 여기에만 힘을 쏟고 내정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또한 오늘날의 터키처럼 될 것입니다. 따라서 范蠡주 005
각주 005)
범려(范蠡, B. C. 536~B. C. 448)는 춘추시대 초(楚) 출신으로 춘추 말기의 저명한 정치가·군사가이다. 월왕(勾踐) 구천을 도와 월(越)을 부흥시키고 오(吳)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한 다음 다시 은거하였으며, 이후 이름을 바꾸고 세 차례 장사를 통해 거부가 되면서 스스로 도주공(陶朱公)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후세 재신(財神)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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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越의 巨富인) 計然의 정책을 써서 우선 그 나라를 부유하게 한 다음, 이후에 이를 이용하여 吳를 멸망시킨 것입니다.”
답변:“아주 타당하신 말씀입니다. 通商은 밖으로 대응하는 것이고 武備를 강구하는 것은 안으로 다스리는 바입니다. 오늘날 시세를 가지고 말하면 두 가지는 모두 당연히 겸해야 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서양에서 군비와 상업을 함께 발전시키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군비와 상업의 근본은 내정입니다. 내정을 제대로 닦지 않고서 대외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윤중:“지금 사람들은 모두 武備로 외국을 제압할 수 있음을 알지만, 商務로 제압할 수 있다는 점은 모릅니다. 商務를 잘 운영한다면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통상하러 왔을 때 우리가 商務로 대응하면 되고, 저들이 팔 물건이 없다면 우리가 전적으로 제압할 수 있습니다. 대인께서도 이러한 견해를 갖고 계시니 진심으로 흠모하여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조선의 修信使가 일본과 稅約을 맺고자 합니다. 예전에 何如璋大人께 부탁을 드렸었는데, 이미 작성을 완료하였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아직 완료하지 않았다면 훌륭한 가르침을 바랄 수 있을까요?”
답변:“상무를 잘 운영하면 힘을 들이지 않고도 외국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몇 년 동안 중국이 일본 및 다른 나라들이 조선과 통상하는 하는 것을 바랐던 것은 바로 이러한 뜻에서 였습니다. 다만 稅約은 아마도 귀국이 적절하게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何大人에게 부탁한 일은 어느 사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윤중:“대략 정해 둔 내용은 있지만 外務에 익숙하지 않아 대부분 제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혹은 저들이 승인하기 원치 않는 것도 있어 방법을 강구하여 적절하게 정해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답변:“귀국은 일본과 통상한지가 이미 몇 년이 되었는데 일찍이 조약을 정하지 않았습니까?”
어윤중:“조약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일본과의 통상은 皇明萬曆연간부터 행하기 이전에는 오히려 식량을 지급하되 세금은 없었습니다. 丙子年에 조약을 개정한 다음에는 응당 법대로 징세해야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港務가 완료되지 않았으니 3년 후에 세금을 논의하자고 하였으므로 또한 허락했고, 아직까지 징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외국 상황을 몰라 단지 저들이 현재 행하고 있는 5% 관세를 따르려고 하다가 다시 살펴보니 5% 관세는 매우 불공평한 것이라, 10% 또는 20%로 하려는데 저들이 필시 악착같이 버틸 것 같습니다.”
답변:“양국이 이미 통상을 시작하였으니 필히 서둘러 의논하여 정해야 합니다. 稅約에 대해서는 현재 근거가 있는데 5% 관세는 가장 공평하지 못합니다. 귀국에서 처음하는 통상이므로 상황에 맞추어 유리하게 이끌어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과 따로 논의하되, 가령 10%나 20%로 못할 수도 있지만 5%는 절대 시행해서는 안 됩니다.”
어윤중:“정말 그렇습니다. 10%를 일반 세율로 삼고, 酒類는 35%, 時計등은 25%, 洋織類는 20%, 금·은·보석과 귀중품은 50%, 汽機類는 5%를 징수하고자 합니다.”
답변:“이 일은 화물을 매매하는 것과 같아, 먼저 그 가격을 높게 불러놓고 일본과 상의하되, 화물 가격에 따라 등급을 정하면 그것으로 공평해질 것입니다.”
어윤중:“그러나 화물가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선은 위와 같이 하고, 稅務가 점차 자리가 잡힌 이후에 다시 논의할 계획입니다. 영국·미국 등의 稅則에 관련된 漢譯本을 보고 싶습니다.”
답변:“아주 좋은 견해입니다. 영국·미국 등의 稅則은 한 부씩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처음 조약을 맺을 때 외국 사정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정해 놓은 세칙 중 가운데 자못 손해를 보는 곳이 있어 추후에 반드시 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윤중:“중국의 현행 稅則은 이미 보았습니다. 보고 싶은 것은 영국·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稅則입니다.”
답변:“영국·미국의 稅則을 漢譯한 책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윤중:“조선과 일본의 교섭은 대부분 저들의 통역 및 상인들을 이용하기에 매우 불편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전에 2~3명의 士族자제들을 데리고 갔었는데, 그들은 현재 일본에서 그들의 문자·언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일본에 주재하는 사신이 없으므로 대인께서는 그들을 같은 나라 사람으로 봐주시고 때때로 배려와 지도를 해주십시오.”
답변:“조선과 中國은 당연히 한 집 안이니 응당 잘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윤중:“감격스럽고 또 감격스럽습니다.”
답변:“귀하께서 이번에 중국을 방문하여 여러 곳을 들르셨는데 지금은 어디로 가십니까? 예전에 李 中堂大人을 뵈었습니까?”
어윤중:“上海와 天津만 가봤습니다. 예전에 李 中堂大人을 여러 차례 알현했고 지금 귀국선을 타려고 합니다.”
답변:“언제 다시 일본에 오십니까?”
어윤중:“지금 일본 배를 타고 長崎로 갔다가 바로 귀국합니다. 다시 일본에 올지는 확실히 대답할 수 없습니다. 일본 각 항구의 理事官들이 모두 중국으로 귀국한다고 하는데 何如璋公도 여전히 일본에 주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답변:“일본 각 항구의 이사관은 제가 도착한 이후 당연히 교체될 것입니다. 그러나 후임자들은 전임과 차이가 없습니다.”
어윤중:“琉球문제는 어떻게 타결되겠습니까?”
답변:“琉球문제에 대해 서둘러 종결시키고자 않는 것은 바로 후환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어윤중:“저들은 이 일에 대해 아주 無理하였으며 크게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답변:“확실히 그렇습니다. 귀하께서 머무시는 곳은 어디 입니까?”
어윤중:“金利源帳房2층입니다.”
답변:“답례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어윤중:“내일 저녁 輪船을 타고 동쪽으로 향하기 때문에 아마도 귀하신 발걸음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금 뵐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보중하시길 바랍니다.”
답변:“훗날 일본에 오시면 반드시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羅星垣이 초록함.

  • 각주 001)
    유곤일(劉坤一, 1830~1902)은 상군(湘軍)의 지휘관으로 활동하면서 출세한 청말의 관료이다. 자는 현장(峴莊)으로 호남성(湖南省) 신녕(新寧) 출신이다. 1855년부터 상군에 참여하여 태평천국군과 싸웠고, 1862년 광서포정사(廣西布政使), 1864년 강서순무(江西巡撫)가 되었다. 1875~1879년까지 양광총독(兩廣總督), 이후 양강총독(兩江總督) 겸 남양통상대신(南洋通商大臣)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1881년 탄핵을 당한 이후 1891년에 가서야 다시 양강총독에 복귀하였다. 원문의 제군(制軍)은 총독(總督)의 별칭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곽경번(郭慶藩, 1844~1896)은 호남성 상음(湘陰) 출신으로 원명은 입훈(立塤), 자는 맹순(孟純), 호는 자정(子瀞)·호첨(岵瞻) 등으로 청말의 관료 곽숭도(郭嵩燾)의 조카이기도 하다. 1881년 黎庶昌이 일본공사로 갈 때 洋務參贊官으로 선발되었으나 모친의 병으로 가지 못하고 다음해 7월에 출발하였으나 이번에는 본인의 병으로 일본에 가지 못하고 귀가하여 관직을 벗어났다. 그는 청대 『장자(莊子)』 연구의 대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원문의 수(守)는 진대 군(郡)의 장관, 한대의 태수(太守)를 말하는데, 나중에는 지주(知州)·지부(知府) 등 지방장관을 가리키는 줄임말(省稱)로 쓰이게 되었다. 곽경번은 절강성(浙江省)에서 지부로 일한 적이 있으며, 당시 도원(道員) 직함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여여겸(黎汝謙)의 자는 수생(受生)으로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 출신이다. 여서창(黎庶昌)의 조카이기도 한데, 1875년 거인(擧人)이 되었고, 1882년 여서창을 따라 고베영사(神戶領事)로 2년간 일하였으며, 1887년 다시 여서창을 따라 일본에 가서 橫濱領事로 3년간 근무하기도 하였다. 이후 무술개혁운동의 고취자이자 참여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원문의 령(令)은 마찬가지로 현급(縣級)의 지방장관, 즉 청대의 경우 知縣)을 가리키는 줄임말이다. 즉 이것은 해당 관원이 지현(知縣)의 직함·품급(정7품)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4)
    마건상(馬建常, 1840~1939)은 청말의 문관으로 원명은 마지덕(馬志德)이고 약슬(若瑟)·흠선(欽善)·건상(建常)·량(良)이란 이름도 사용하였다. 자는 사장(斯藏) 또는 상백(相伯) 등인데, 마상백 또는 마량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청말의 저명한 외교관 마건충(馬建忠)의 형이기도 하다. 주일 영사를 지낸 다음 1882년에 정부 기구가 개편된 후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에 와 통리군국사무아문의 참의(參議)가 되고, 후에 참찬으로 승진하여 나라의 기무(機務)와 권리를 장악하고 내정을 간여하였다. 이후에는 복단대학(復旦大學) 등의 창시자 등 교육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천주회 신부이자 신학박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중서(中書)는 중서사인(中書舍人)이란 관명을 말한다. 원래 선진시대부터 시작된 관명으로 군주의 가까운 속관으로 조명(詔命)의 전달을 관장하였지만, 시대에 따라 역할이나 비중은 크게 다르다. 청대에는 종칠품(從七品)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범려(范蠡, B. C. 536~B. C. 448)는 춘추시대 초(楚) 출신으로 춘추 말기의 저명한 정치가·군사가이다. 월왕(勾踐) 구천을 도와 월(越)을 부흥시키고 오(吳)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한 다음 다시 은거하였으며, 이후 이름을 바꾸고 세 차례 장사를 통해 거부가 되면서 스스로 도주공(陶朱公)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후세 재신(財神)의 상징이 되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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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琉球) 문제로 일본과 싸울 가치가 없다는 주장과 조선 어윤중(魚允中)의 필담(筆談) 초록 자료번호 : cj.k_0002_0010_0010_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