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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외교 논의에 대한 비밀 사항을 이홍장(李鴻章)이 총리아문(總理衙門)에 상주(上奏)한 문서

조선 陪臣金允植이 조선의 외교 논의 상황을 비밀리에 알려온 것에 대해 상주합니다(具奏朝鮮陪臣金允植密陳該國議商外交情形).

 
  • 발신자李鴻章
  • 수신자總理衙門
  • 날짜1881년 12월 4일 (음) , 1882년 1월 23일
  • 문서번호2-1-1-29 (383, 537b)
12월 4일, 北洋通商大臣李鴻章의 문서[상세한 내용은 密檔에 보인다].

내용 요약:조선 陪臣 [주001]
번역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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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云養)으로 서울 출신이다. 1865년 출사하고, 1874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황해도 암행어사 등직을 역임하다 1880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었다. 정부의 개항 정책에 따라 영선사(領選使)로서 학도와 공장(工匠) 38명을 인솔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그들을 기기국(機器局)에 배치하여 일하도록 하였다. 한편,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위하여 북양대신 이홍장과 7차에 걸친 회담을 하고, 그 결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었다. 김윤식은 청에 체류 중이던 이때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문의관(問議官) 어윤중(魚允中)과 상의하여 청에 파병을 요청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결과 오장경(吳長慶)·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청군과 함께 귀국하였다. 임오군란이 수습된 다음 그해 9월 재차 청으로 가서 학도·공장들을 본국으로 철수시켰지만, 또한 각종 기기를 도입, 기기창(機器廠)을 설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김홍집(金宏集)·김만식(金晩植)과 함께 원세개(袁世凱)에게 구원을 요청, 그 결과 청군이 창덕궁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 정변을 끝냈다. 정변 이후 원세개가 새로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부임하자 그의 친청노선(親淸路線)은 한층 굳어졌다. 1886년 4월부터 반대파의 공격으로 어려운 입장에 처하다, 1887년 5월 면천(沔川)으로 유배되어 5년 6개월을 지냈고, 1894년 석방되어 갑오개혁에 간여하였고 독판교섭통상사무, 뒤이어 외무아문대신(外務衙門大臣)에 임명되었으나, 1896년 아관파천사건이 일어나자 면직되고, 을미사변과 관련해 탄핵을 받고 제주목(濟州牧)으로 다시 유배되었다. 1907년 10년 만에 해금되어 서울에 돌아왔다. 저서로는 『운양집』을 비롯해 『천진담초(天津談草)』, 『음청사(陰晴史)』, 『속음청사(續陰晴史)』 등이 있다.

이 조선의 외교 논의 상황을 비밀리에 알려왔는데, 기회를 보아 권고할 것임을 상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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