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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중일한관계사료

유구(琉球) 사안 및 조선 관원들의 동경(東京) 시찰에 대한 하여장(何如璋)의 문서

1. 보도에 따르면 宍戶공사가 전 外務卿寺島宗를 방문하여 琉球사안을 세 시간 동안 논의했다고 합니다(報載宍戶訪前外務寺島宗, 則商球案達三小時之久). 2. 東京에 온 조선의 委員朴定陽등이 찾아와서 이번 행차는 오로지 政治, 稅關설립, 課稅등의 사안만 살피고자 하는 것이며, 7~8월쯤에 金宏集이 일본으로 와서 다시 상의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朝鮮來東委員朴定陽等來見, 此行專爲考察政治設關課稅事, 七八月間金宏集將來日本就商).
  • 발신자
    何如璋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1년 7월 3일 (음)(光緖七年七月初三日) , 1881년 7월 28일 (光緖七年七月初三日)
  • 문서번호
    2-1-1-25 (365, 509a-514b)
7월 3일, 出使日本國大臣何如璋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다.
 
이번 달 3일 제132호 서신을 올렸으니, 이미 받아보셨을 줄 압니다. 최근 근황은 모두 평범한 소식뿐입니다. 신문에 따르면, “宍戶공사가 며칠 전에 外務卿(寺島宗則의 집을 방문해서 외교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세 시간이 지난 후에야 돌아갔습니다. 宍戶공사가 귀국한 이후 대체로 출입을 삼가고 있었는데 이번에 외무경의 집에 간 것은 아마도 琉球문제 때문인 것 같다”고 합니다. 이번 달 9일(西曆7월 4일), 外務省은 워싱턴[華盛頻]으로부터 “미국 대통령(James A. Garfield)이 西曆7월 2일 자객의 총탄에 맞아 위중하다”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저희들은 미국공사관으로 가서 위문을 하였는데, 어제 미국 공사가 “지금 전보를 받았는데 대통령이 점차 회복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암살범은 변호사로서 정치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대통령이 올해 취임한 다음 뉴욕의 어떤 關稅長을 임명한 일 때문에, 그곳 국회의원이 불공정하다고 지목하였고 이로 인해 사직한 사람도 생겨 미국에서 여론이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이 일은 두 달 전에 있었는데, 들리는 말에 따르면 “이번 변고는 필시 이 일 때문”이라고 한답니다.
東京에 온 조선의 委員들을 누차 만났습니다. 동행한 수십 명은 군사·세무·광업·공업 등의 각 분야를 나누어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洪英植주 001
각주 001)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은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으로 서울 출신이다.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范) 등과 함께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187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관리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에 선발되어 주로 일본 육군을 시찰하였다. 귀국 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군무사부경리사(軍務司副經理事)가 되었으며, 임오군란의 수습에도 활약하였다. 1883년 6월에는 그 전해에 체결된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에 따른 보빙사(報聘使) 전권대신 민영익을 수행, 미국을 다녀와 11월에 그 결과를 보고하였다. 1884년 3월 27일에는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을 겸임하여 우정국을 세우는 데 전력하였지만, 정변 도중 박영교(朴泳敎)와 함께 국왕을 호위하다 청군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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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魚允中주 002
각주 002)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은 자는 성집(聖執), 호는 일재(一齋)로 충북 보은 출신이다. 20세에 칠석제(七夕製)에서 장원급제하고, 이듬해인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877년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았으며, 1881년에 일본 국정시찰단인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에 선발되어 박정양(朴定陽)·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이 시찰단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어윤중은 1881년 1월 유길준(兪吉濬)·윤치호(尹致昊) 등과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약 3개월간 일본 메이지유신의 시설·문물·제도 등 모든 부분을 시찰하였는데, 이후 어윤중은 천진(天津)에 가 있는 영선사 김윤식(金允植)과 합류하기 위해 청으로 갔다. 북양대신 이홍장과 회담한 다음 이 해 12월 귀국하였고, 귀국한 지 두 달 뒤에 문의관(問議官)에 임명되어 청에 다시 파견되었다. 청의 이홍장이 조·미수호조약의 체결을 강력히 권고하고 그 초안까지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해 문의하기 위해서였다. 천진에 머무는 동안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므로 청군과 함께 귀국했다가 난이 평정된 뒤 다시 청에 파견되었다. 이때 이홍장 등이 이미 초안해 놓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에 조인하는 역할을 맡았고, 1883년에는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임명되어, 1883년 3월에 청 측과 중강무역장정(中江貿易章程)을 협정하였다. 1894년에는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자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이 되어 재정·경제 부문의 대개혁을 단행하였으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되자 고향인 보은으로 피신하다가 경기도 용인에서 피살되었다. 저서로 『간독요초(簡牘要抄)』, 『종정연표(從政年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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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매우 개명하였고 외교를 몹시 원하고 있습니다. 어제 필담을 했는데 그들에 따르면 “그들은 국왕의 지시를 받아 오로지 外交의 利害를 探問하기 위해 왔으며, 지금 미국이 다시 외교를 요청한다면 예전처럼 국서를 거부하며 받지 않는 일은 결단코 있을 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앞으로 효과가 나타날 것 같습니다.
근래 서양인이 일본의 해군문제를 논하면서 『新報』에 실은 내용이 있는데, 서술한 내용이 매우 정확합니다. 논의한 방법 가운데에는 중국이 해군을 정비할 때 채택해서 쓸 만한 내용이 상당 부분 있습니다. 지금 특별히 번역해서 올려 보내니 살펴보십시오.
첨부합니다. 최근 관측된 혜성은 일본에서도 역시 나타났습니다. 해군 관상대의 추측에 따르면, “이 혜성의 빛은 天狼과 같으며 꼬리 길이는 7도입니다. 방향은 恒星서쪽 15도이며 적도와의 거리는 북위 70도 34분 43초”라고 합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만 줄입니다. 삼가 서신을 보내니 總理衙門에서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편안하십시오.
별지: 『橫濱西報』 논설 번역문(『橫濱西報』譯文)
 
첨부문서:「鈔單」초록
 
1. 「서양인이 본 일본의 海軍문제」(『橫濱日報』 영문판[橫濱西字日報]의 논설을 번역함)
나는 전에 東京에서 기차를 타고 橫濱에 갔는데, 기차에서 두 명의 승객이 『郵便新聞』 및 『朝野新聞』에서 일본 해군 책략에 대해 쓴 내용을 토론하고 있었다. 나 또한 자리에 앉고는 두 승객에게, “『郵便新聞』과 『朝野新聞』에서 논의한 내용은 모두 틀리지만, 둘을 비교하면 『朝野新聞』이 좀 더 나은 편입니다”라고 이야기하였다. 두 승객은 이를 듣고 내 견해를 청하였다. 나는 사양하면서 “외국인으로서 귀국의 지리·역사·풍속·외교·상무·정무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귀국의 중대한 일을 멋대로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하지만 두 승객은 재삼 간청하기에 나는 우선 사죄하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지금 사람들이 일본을 언급할 때 ‘일본, 일본은 어떻게 해군을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사람이 매우 많은데, 이들은 모두 시세를 모르는 무리이니 어찌 더불어 같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무릇 해군의 용도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변경 방어[守邊]”입니다. 두 번째는 “적을 괴롭히는 것[擾敵]”입니다. 세 번째는 “전쟁 중 식민지 및 본국의 상업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적을 괴롭히고 식민지 상업을 보호하는 일은 지금 말할 필요가 없으니, 그대와 변경 방어만 가지고 이야기 하겠습니다. 일본에는 네 개의 큰 섬이 있고 나머지 작은 섬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사면이 바다와 접하고 있어 곳곳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으니 방어해야 하는 지역을 도저히 거리 수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득이 해군을 창설하여 강하게 훈련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국·프랑스의 해군은 천하 최강입니다. 그들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大巡邏船이며 그 배는 견고하고도 빨라 공격도 할 수 있고 장기간 운행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연료를 아끼지 않고 大洋을 왕래하는 이유는 새로 개척한 지역과 부속된 항구가 전 세계에 걸쳐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방어할 수 없고 연락하기 힘들며 상업을 보호하기에 부족합니다. 따라서 프랑스와 영국에 大巡邏船이 있는 것은 애초에 식민지와 상업을 보호하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변경에 大銕甲戰艦을 준비해 놓았는데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배 가운데에는 거대한 포와 잘 숙련된 병사가 있고, 평소에도 범·표범처럼 마치 大敵을 만난 듯이 경계하는데, 그 이유는 서로 매우 경계하며 이 나라가 저 나라를 침범할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귀국에는 없습니다. 가령 프랑스·영국 두 나라가 모두 木船을 사용하며 포는 작고 병사가 약하다면 자연히 다투려는 마음이 없어지고 다른 나라를 시기하는 생각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 大國들은 대개 공격 무기들을 구비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가령 나와서 다투지 않더라도, 사태가 벌어진 다음에야 병사를 훈련하고 무기를 갖춘다면 제때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지금은 만국이 왕래하며 서로 사신을 파견하는데, 명목은 사신을 파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재물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만일 재물을 요구할 힘이 없다면 다만 외교적 평화를 구할 뿐입니다. 속담에 ‘강하면 도리를 내세우고, 약하면 달아나 피해야 한다’고 했는데 바로 오늘날을 가리킵니다. 지금 일본에게는 나라 밖에 식민지가 없고,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으로 千島[치시마]와 小笠原島[오가사와라시마] 등이 있는데 모두 요지가 아니므로 적국도 또한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반드시 유용한 재물을 가지고 銕甲巡邏船을 사서 이곳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귀국은 오로지 변경을 방어하는 전략으로도 충분합니다.”
두 승객이 물었습니다:“일본의 현재 해군 군함은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충분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일본 해군의 군함은 모두 25척입니다. 가령 중국과 같은 나라와 전쟁을 벌인다면 가용한 것은 10척을 넘지 않을 것이며, 扶桑·全剛·比叡·東艦·龍驤·築波·日進·淸輝·天城·磐城이 바로 이 10척입니다. 나머지 15척은 모두 쓸모없습니다. 중국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중국으로 간다면 군함 10척을 어떤 용도로 쓰겠습니까? 또 중국의 각 주요 항구에는 모두 가공할 포대와 매우 강한 炮船이 있습니다. 배는 견고하고 포는 거대하니 설령 포대와 수뢰가 없다고 해도 여전히 쳐들어가기가 어려운데 혹시라도 수뢰까지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 귀국의 방어 무기를 논한다면 죄를 짓게 될 말을 할 것이니, 저를 책하지 않으신다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귀국의 군함은 10척만 있습니다. 이외에 나머지 15척과 수뢰선이 중간에서 돕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가령 외국[어떤 나라인지 관계없이 수군을 보유한 나라]과 전쟁을 벌인다면 東京灣을 방어하는 것도 부족할까 의심되는데 하물며 全國은 어떻겠습니까? 혹자는 일본 백성이 용맹하여 생명을 가볍게 여기므로 아마도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귀국 백성이 용감하다면 용감하다고 하겠지만 巨艦을 막을 수 있습니까? 大砲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전략에 밝은 사람과 정밀한 기기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東京灣을 방어할 수 없다면 大阪[오오사카]·長崎·箱館[하코다테] 및 각지의 요지는 그 누가 방어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두 승객이 말하였습니다:“그대가 말한 각 지역은 포대로는 지킬 수 없습니까?”
나는 말하였습니다:“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견고한 포대를 건축하는 일은 그 비용이 매우 많이 듭니다. 귀국은 방어해야 하는 지역이 매우 많은데 곳곳마다 짓는다면 小炮船부대를 사서 배치하는 것과 비교해 더욱 많은 비용이 소요되므로 오히려 炮船을 사용하는 편이 낫습니다. 또 포대가 있으면 일반적으로 병사를 두어서 육지 공격을 방어해야 합니다. 따라서 병력을 증강하여 포대를 방어하는 일은 쓸데없는 소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릇 砲艦은 포대의 운용과 비할 바가 아니니, 배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어 움직이지 못하는 포대와는 다릅니다. 또 포대의 포는 임의대로 발사할 수 없고 반드시 적선이 특정 각도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공격할 수 있습니다. 배가 포대의 각도를 벗어나면 포대는 쓸모가 없습니다. 정리해보면, 배는 움직이는 물건이므로 움직이는 물건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때문에 포대의 포로 배를 공격하는 일은 선상의 포로 배를 공격하는 효과만 못합니다. 귀국이 현재 소유한 배는 양식을 바꿀 필요는 없고, 해군의 근간으로 만든 다음 官兵의 학습을 성취하는 바탕으로 삼아야 합니다. 배 몇 척을 골라 기함[旂船, 해군제독이 승선하는 배]으로 삼고 각지로 나누어 방어하게 합니다. 몇 척은 行船이라고 이름을 짓고 다른 나라를 왕래하게 하고, 몇 척은 港船이라고 명명한 후 항구에 나누어 배치합니다. 몇 척은 護船이라고 이름 지은 다음 美加多[國主를 가리킨다]가 항해하는 경우 이 배들이 따라가도록 합니다. 몇 척은 練船이라고 이름을 지어 해군 예비군 및 변방 방어용 의용군을 훈련시킵니다. 남은 배들은 선창[船塢]에 두고서 그곳에서 임의로 사용하도록 합니다.”
두 승객이 허탈해 하면서 말하였습니다:“당신 말에 따르면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닙니까?”
나는 말하였습니다:“그렇지 않습니다. 포대를 짓는 것과 비교하면 철갑선을 사고 木船을 많이 건조하는 것이 훨씬 저렴합니다. 다만 木船은 전쟁무기로 쓰기에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앞으로 군함 가운데 가장 쓸모 있는 것은 바로 가볍고 빠르며 원거리를 항해할 수 있는 巡邏船과 안은 비어 있고 밖이 튼튼하며 극히 빠른 鐵船혹은 鋼船입니다. 배 안에는 거포를 배치하고 석탄을 다수 저장하며 선상에서는 돛을 쓰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 뿐인데, 귀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종류의 배는 20~30년 지나면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스스로를 지키는 전략만 못합니다.
일본 해군은 마땅히 다섯 곳으로 나누어 방어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북쪽이고 두 번째는 동북쪽이며 세 번째는 가운데이며, 네 번째는 서남쪽, 다섯 번째는 북쪽입니다. 북쪽은 箱館을 방어하며 北海道[홋카이도] 및 久米島[쿠메지마]를 포함합니다. 동북쪽은 東京을 방어하는데 중심부와 그 부근 지역을 포괄하고, (東京에서) 동북으로 仙臺[센다이]에 이르고 서쪽은 鳥羽[도바]에 이릅니다. 가운데는 大阪[오사카]를 방어하며 중심부와 그 부근 지역을 포괄하며, 서쪽으로는 逸見峽[헨미쿄]과 富島[도시마]까지 동쪽으로는 若山[와카야마]까지 남쪽으로는 四國[시코쿠]에 이르며, 海內와 備后[빈고]을 포괄하고 북으로는 下之關[시모노세키] 海峽까지 이르도록 합니다. 서남은 長崎를 방어하며 九洲[규슈]와 對馬島[쓰시마] 및 沖繩[오키나와]을 포함합니다. 서북은 那那阿[나나오]를 방어하고 全岸와 安藝[아키]·佐渡[사도가] 두 섬을 포함하며, 依鴉那海灣(阿布喇尼港, 山口縣의 해안)에서 亞烏木慮[아오모리] 灣에 이르도록 합니다.
각 鎭마다 선창을 설치해서 배의 정비에 대비합니다. 일본이 현재 소유한 배 이외에, 중국에서 변방을 방어하는 砲艦類50척을 사서 배치하고, 각 배에다가 암스트롱(Amstrong, 亞木斯著朗)의 신식 35톤 후당포(后膛砲) 1문과 암스트롱의 신식 12톤 후당포 2문, 개틀링(Gatling, 加德林) 또는 노던펠트(Nordenfelt, 挪丹非次) 포 2문을 설치합니다. 이외에는 대체로 신식 무기를 설치합니다. 위에서 말한 포는 30죠(町), 즉 일본의 약 1리[중국의 약 7리에 해당] 떨어진 곳에서 8인치 철갑을 뚫을 수 있습니다. 배는 또한 쾌속으로 앞으로 가면 1시간에 10마일을 갈 수 있고 뒤로 가면 1시간에 9마일 반을 갈 수 있으니, 전·후방의 속도가 서로 비슷합니다. 배의 양단에는 活舵가 있어 사용할 땐 장착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분리시키니 장착과 분리가 그렇게 어렵지 않아, 일단 소식을 들은 다음이면 순식간에 다시 장착 공정을 완료할 수 있습니다. 포는 고정된 물건이고 배는 바로 포를 싣고 이동하는 수레입니다. 대포를 싣는 갑판이 견고하고 활기 있는 곳에 있어 진퇴 모두가 자유롭습니다. 각 배마다 관병 50인을 두면 응용하기 충분하므로 砲艦50척에는 2,500명만 필요할 뿐입니다.
東京을 ‘제1鎮’으로 부르고 扶桑戰艦을 總統旗艦으로 삼아 각지를 방어합니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배들을 별도로 보내 파견 임무에 보태거나 예비군 및 변경 방어용 의용군을 훈련시킵니다. 위에서 언급한 신식 砲艦12척을 추가하여 해안 방어에 사용하고 이외에는 水雷를 배치해야 합니다. 大阪또한 ‘제1鎭’으로 부르고, 金剛艦을 기함으로 삼아 각지를 방어합니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배들을 별도로 보내 파견 임무에 보태는 일은 東京鎭의 용도와 같습니다. 신식 砲艦 12척을 추가하여 해안 방어에 사용하고 이외에는 水雷를 배치합니다. 箱館을 ‘제2鎭’으로 부르고 龍驤艦을 기함으로 삼아 각지를 방어합니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배 1~2척과 砲艦 10척을 별도로 보냅니다. 이외에는 수뢰를 배치합니다. 長崎를 ‘제3鎭’으로 부르고, 比叡를 기함으로 삼아 각지를 방어합니다. 현재 소유한 배 1~2척과 砲艦8척을 별도로 추가합니다. 이외에는 수뢰를 배치합니다. 那那阿를 또한 ‘제3鎭’으로 부르고, 築波를 기함으로 삼아 각지를 방어합니다. 현재 소유한 배 몇 척과 砲艦8척을 별도로 보냅니다. 제1·2鎭에는 각각 2등 제독 1명을 배치하고 제3진에는 경험이 많은 선장을 배치해야 합니다. 砲艦이 거함보다 쓸모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믿지 못할까 염려되니 특별히 한두 가지 사안을 거론하여 증명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敵艦이 東京灣으로 들어오려고 한다면 일본에는 砲艦12척이 있으니 이 12척을 수뢰와 함께 잘 배치한 다음 제독의 지휘를 받습니다. 아울러 퇴로가 있으므로 전진해야 하면 전진하고 퇴각하려면 퇴각하며 주도권이 내게 있게 됩니다. 그러나 巨艦은 이렇게 민첩하지 못합니다. 砲艦은 작고 낮으니 적함의 포로 적중시키기가 어렵습니다. 적함은 크고 높으니 포를 담당하는 이가 조금만 머리에 조준하면 그 배를 맞출 수 있습니다. 또 하나 砲艦이 일단 많으면 敵艦은 방법이 없습니다. 한 척을 공격할 수 있어도 둘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砲艦은 쾌속하니 만 안쪽으로 되돌아가면서 포선에 있는 小砲도 사용합니다. 일단 만으로 들어가면 적함은 전진할 수 없으며 적군의 수뢰 또한 사용할 방법이 없습니다. 설령 砲艦이 한두 척 침몰해도 손해가 100명에 지나지 않아 쉽게 보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敵艦은 움직이면 300~500인이 탑승하므로 만일 한두 척을 잃는다면 강력한 적군도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승객이 물었습니다:“그대가 말하는 砲艦은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귀국에게 한꺼번에 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년 10척을 배치하면 5년 안에 모두 구매할 수 있습니다. 砲艦10척의 가격과 砲·彈藥까지 함께 계산하면 扶桑艦[扶桑艦은 洋銀967,500元이다]과 비교하여 비싸지 않습니다. 대략 扶桑艦6척의 가격이면 炮船 50척을 배치할 수 있습니다[砲艦1척은 115,000元이면 구매할 수 있다]. 砲艦4척으로 변방 방어에 쓰는 것이 扶桑艦1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면, 砲艦50척은 扶桑12척과 맞먹습니다. 扶桑6척의 가격으로 扶桑艦12척을 얻을 수 있다면 또한 즐겁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승객은 말하였습니다:“일본에는 사람과 돈이 없는데 어떻게 시험해 볼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답하였습니다:“일본은 사람이 없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훈련이 숙련되면 자연히 세계 해군과 서로 비슷해질 것입니다. 재정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토지에 의존하고 있는데, 과학기술이 정교해지고 농업·기술·무역이 활성화되면 서양의 金銀이 반드시 유입될 것입니다. 金銀이 유입되면 砲艦과 수뢰 및 적을 공격할 도구를 모두 사서 마련할 수 있습니다. 지금 천하의 바다에는 모두 일본 선박이 있고 각지 시장에는 모두 일본 상인들이 있습니다. 귀국에서 진실로 앞서 말한 배를 갖춘다면 천하제일의 自守之邦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란이 일어나지 않으며 외침을 받지 않으니 대일본의 위세는 이에 따라 떨쳐질 것입니다. 무릇 나라에 혼란이 있는 것은 바다에 파도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혼란이 끝나면 치세가 시작되고 치세가 극에 달하면 혼란스러워집니다. 각국의 역사서는 모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장기간 치세가 유지되고 오래도록 평화롭게 지내고자 하는 방법은 오직 전쟁을 대비하는 데 있을 뿐인 것입니다.”

  • 각주 001)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은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으로 서울 출신이다.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范) 등과 함께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187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관리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에 선발되어 주로 일본 육군을 시찰하였다. 귀국 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군무사부경리사(軍務司副經理事)가 되었으며, 임오군란의 수습에도 활약하였다. 1883년 6월에는 그 전해에 체결된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에 따른 보빙사(報聘使) 전권대신 민영익을 수행, 미국을 다녀와 11월에 그 결과를 보고하였다. 1884년 3월 27일에는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을 겸임하여 우정국을 세우는 데 전력하였지만, 정변 도중 박영교(朴泳敎)와 함께 국왕을 호위하다 청군에게 살해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은 자는 성집(聖執), 호는 일재(一齋)로 충북 보은 출신이다. 20세에 칠석제(七夕製)에서 장원급제하고, 이듬해인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877년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았으며, 1881년에 일본 국정시찰단인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에 선발되어 박정양(朴定陽)·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이 시찰단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어윤중은 1881년 1월 유길준(兪吉濬)·윤치호(尹致昊) 등과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약 3개월간 일본 메이지유신의 시설·문물·제도 등 모든 부분을 시찰하였는데, 이후 어윤중은 천진(天津)에 가 있는 영선사 김윤식(金允植)과 합류하기 위해 청으로 갔다. 북양대신 이홍장과 회담한 다음 이 해 12월 귀국하였고, 귀국한 지 두 달 뒤에 문의관(問議官)에 임명되어 청에 다시 파견되었다. 청의 이홍장이 조·미수호조약의 체결을 강력히 권고하고 그 초안까지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해 문의하기 위해서였다. 천진에 머무는 동안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므로 청군과 함께 귀국했다가 난이 평정된 뒤 다시 청에 파견되었다. 이때 이홍장 등이 이미 초안해 놓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에 조인하는 역할을 맡았고, 1883년에는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임명되어, 1883년 3월에 청 측과 중강무역장정(中江貿易章程)을 협정하였다. 1894년에는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자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이 되어 재정·경제 부문의 대개혁을 단행하였으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되자 고향인 보은으로 피신하다가 경기도 용인에서 피살되었다. 저서로 『간독요초(簡牘要抄)』, 『종정연표(從政年表)』 등이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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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琉球) 사안 및 조선 관원들의 동경(東京) 시찰에 대한 하여장(何如璋)의 문서 자료번호 : cj.k_0002_0010_0010_0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