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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러시아의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은 중립을 지키라는 여론과 주선과 미국의 조약 체결에 대한 의견 문서

1.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만일 전쟁이 터지면 일본 여론은 정부가 중립을 엄수하도록 권할 것입니다. 2. 조선은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통상을 할 뜻이 있는데, 대신 주선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一. 中俄萬一有事, 日本輿論多勸其政府嚴守中立. 二. 朝鮮有意與美國結約通商, 可否代爲周全).
  • 발신자
    出使大臣何如璋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0년 10월 16일 (음)(光緖六年十月十六日) , 1880년 11월 18일 (光緖六年十月十六日)
  • 문서번호
    2-1-1-10 (342, 437a-447a)
10월 16일 出使大臣何如璋등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습니다.
 
이번 달 14일, 제105호 서신을 삼가 올렸는데 이미 열람하셨을 줄 압니다. 전에 듣기에 러시아 해군경이 장치 요코하마에 온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16일에 일본의 琿春주재 영사 小林[고바야시]이 전보로 외무성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레소프스키(Lessovski, 理疏富斯基)주 001
각주 001)
Stepan S. Lessovski(Лесовский, Степан Степанович, 1817~1884)는 러시아의 군인으로 1881년까지 해군 제독을 역임하고 그 해 전역하였다. https://fr.wikipedia.org/wiki/Stepan_Lessovski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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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요코하마로 오는 정확한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듣기에 그는 나이가 이미 70여 세이고, 20년 전에 이미 배를 타고 일본에 온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그가 오기를 기다려 일본에서는 賓禮로써 대접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만일 일이 생긴다면, 일본은 당연히 중립입니다. 다만 만국공법에 중립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엄정중립”이니, 곧 일체의 정박이나 석탄과 식량 구매 등의 일을 모두 다 거절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의중립”이니 정박이나 석탄과 식량 구매도 모두 허락해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립은 그 국가의 우세나 시세, 이익 등에 따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은 스스로 계획을 세우기를 응당 엄정중립을 지키는 것으로 했기 때문에, 신문 주필은 정부에 이렇게 하도록 많이 권하지만, 그러려면 반드시 스스로 준비를 해야만 러시아인의 청을 거절할 수 있는데 일본의 역량이 그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듣기에 伊犁의 일이 이미 타결되었다고 하고, 전에 總理衙門의 지시에서는 러시아가 논의를 한 달로 제한했다고 하였으니 중국이 9월 말까지인데, 지금 이미 기한을 넘겼는데 결정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타결되었다는 말이 확실한 소식인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일본의 최근 사정은 평소와 같습니다. 삼가 이상의 서신을 보내니 總理衙門에서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평안하시길 빕니다.
 
특별히 따로 알립니다 :
이번 달 17일 오후에 李東仁이라고 하는 조선인이 방문하여 參贊黃遵憲을 만났습니다. 그는 일본 언어에도 통하였고, 필담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앉아서 인사말을 몇 마디 나눈 후에 곧 옷섶을 풀고 붉은 비단 보따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는데, 큰 도장 세 개가 찍혀 있었고, 안에는 “지금 엄밀하게 정탐하는 일을 특별히 李東仁에게 맡겨서 가서 항해하도록 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또한 원형 상자와 같은 木具하나를 꺼냈는데, 위에는 火印이 있었고 그가 이것이 조선 국왕의 密詔이고 그 둥근 나무가 곧 符驗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말하기를 조선 조정의 논의가 지금 일변하여 최근 9월 3일에 지시를 받아서 漢城에서 출발한지 6일 만에 元山津에 도착하고 십여 일을 머물다가 友人의 서신을 받았는데, 國主가 지금 前修信使金宏集주 002
각주 002)
김홍집(金弘集, 1842~1896. 어릴 때의 이름은 金宏集)은 조선 말기의 관료, 정치가로 자가 경능(景能), 호가 도원(道園) 또는 이정학재(以政學齋)이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1867년 경과정시(慶科庭試) 문과에 급제한 다음 관직을 시작하여 지방관과 내직을 역임하였는데, 1880년 일본이 요구한 인천 개항, 공사 주재(公使駐箚)와 해관세칙(海關稅則) 등의 현안을 타결하기 위한 제2차 수신사(修信使)로 임명되어 58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 정부와의 협상에는 실패하였으나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과 정관응(鄭觀應)의 『이언(易言)』을 가지고 돌아와,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개화정책을 채택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880년 말 그는 일본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인천 개항문제를 협의, 20개월 뒤에 인천을 개항하기로 합의하였다. 아울러 정부가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중추 기구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자, 12월 통상관계를 전담하는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발탁되었다. 1882년에 미국과 1883년에는 영국·독일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조약 체결을 담당한 전권대신들의 부관으로 임명되어 협상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또한 임오군란의 사후 수습책으로 정부에서 일본 및 청나라와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및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할 때에도 전권 부관으로 임명되어 협상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1884년 9월에는 예조판서와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를 겸임함으로써 대외 교섭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에도 온건 개화파로서 국정과 외교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수립되자 ‘왜대신(倭大臣)’으로 지목되어 광화문 앞에서 군중들에 의하여 타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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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하여금 何如璋公使에게 서신을 보내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도록 지시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金宏集의 이 서신이 驛遞를 통해 부쳐졌는데, 언제 도착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18일 아침에 그는 다시 와서 먼저 서신 몇 건을 꺼내고 友人이 그에게 부친 서신이라고 했는데, 字畫은 각각 달랐지만 내용은 모두 하나같이 上命에 따라 金宏集修信使가 何如璋公使에게 서신을 보냈고, 서신을 보낸 뜻은 모두 何公으로 하여금 미국에 빨리 와달라고 권해달라는 것입니다(원문은 이와 같고, 뜻은 미국에 빨리 와서 조약을 체결하라고 권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후 조선은 새로운 상황의 개척[開荒]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최근에 여러 대신들의 회의에서 主上과 世家가 여러 가지를 公論하였는데 지난해와는 판이하게 달라서, 花房公使(즉 일본 공사)가 요청한 것에 따라 형세를 보고 살펴서 처리하려 하며, 또한 미국 공사가 오면 그의 요청에 따라서 형세에 따라 답장을 하겠다고 합니다. 또 筆記한 장을 꺼냈는데 이르기를 國主와 首相이 비밀리에 의논한 자리에서 적은 필기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 政府公議한 장을 꺼냈는데, 그 글의 뜻을 살펴보니 러시아를 방어하는데 있고, 일본을 대할 때에는 誠信을 다하는 데 힘쓰고 미국을 대할 때는 때에 따라 操處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조선국은 과연 장차 크게 변할 것입니다. 이전에 조선의 金宏集修信使가 도착하기 전에 저는 외교를 권장하려 하였습니다. 總理衙門의 지시를 받았고, 또한 평소 北洋大臣李鴻章이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 권유하였음을 알고 있고, 근래에 南洋大臣劉坤一주 003
각주 003)
유곤일(劉坤一, 1830~1902)은 자가 현장(峴莊)으로 호남성(湖南省) 신영현(新寧縣) 출신이다. 상군(湘軍) 출신의 청말 관료로 1874년 서리양강총독(署理兩江總督), 1875년 9월부터 양광총독(兩廣總督)으로 부임하였고, 다음해 남양통상대신(南洋通商大臣)을 겸임하였다. 제부(制府)는 명·청대에는 총독(總督)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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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러한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에 그가 온 것을 알고, 위태롭고 특별한 시기임을 강조하는 말로 권고하여 그가 크게 깨닫도록 하였지만, 또한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까 염려가 되었고, 중간에 또한 제가 다 말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參贊黃遵憲에게 지시하여 『朝鮮策略』을 쓰게 하였습니다. 이 책은 문답을 통해 논변하는 형식으로 구성하여, 먼저 러시아를 방어해야 함을 알려주고, 러시아를 방어하는 방법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락함으로써 自強을 도모하는 데 있다고 하였는데, 筆記속에서 말한 冊子가 바로 이것입니다. 金宏集이 떠날 때 제가 다시 그 손을 잡고 이르기를, “지금 러시아 해군경이 군함 15척을 이끌고 琿春에 주둔하고 있는데, 만약 날씨가 추워지면 남하해 와서 盟約을 강요하면 항거하기 쉽지 않으니 全滅을 당할까 염려 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르기를 “미국은 비교적 공평하니 만약 일이 없을 때 미리 결연을 맺고 다른 나라도 모방하여 결연을 하게 되면 이익이 무궁하니 각하께서 귀국하여 조정의 논의에 변화가 있을 경우 서신을 보내 알려주시면 대신하여 주선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더니 그는 예, 예라고 답하면서 떠나갔습니다.
지금 李東仁이 가져온 여러 문건을 보니 조선이 미국과 결연을 맺고자 하는 일은 확실히 믿을 만합니다. 제가 19일 申刻에 전보를 보내 지시를 청했는데 전보를 보낸 후 20일 오후에 영국 대리공사 케네디(J. G. Kennedy)주 004
각주 004)
당시 병으로 귀국하였던 주일본 영국 공사 파크스(Parkes)를 대리하던 일본주재 대리공사 J. G. Kenned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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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지금 듣기에 조선이 외교를 원하니 최근 독일·이탈리아·프랑스 등의 여러 외교관들이 선박을 파견하여 함께 가자는 말을 하는데, 아마 영국 역시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조선이 외교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각국이 함께 간다면 일이 너무 긴박하여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영국 대리공사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엎드려 생각하건대 서양 각국이 조선과 통교하기를 원한 것이 오래되었고, 러시아인은 호시탐탐 노리면서 禍心을 숨겨서 더욱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러시아 군대가 琿春에 주둔하고 있으니 만약 이끌고 남하하면, 비록 조선이 화친을 청하여 다행히 멸망을 당하거나 땅을 넘겨주는 데 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위세로써 겁박하여 城下에서 乞盟하게 되면 屬國이라는 이름을 중국은 더 이상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러시아의 병탄을 막고 서양 각국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비교적 공평한 미국을 선택하여 빨리 조약을 맺음으로써 結援을 도모하고 화를 늦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날씨가 나날이 추워져서 러시아의 선박이 오래 정박하기 어려우니 그 깃발이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작성한 『主持朝鮮外交議』를 삼가 따로 베껴서 올리니 만약 채택할 만한 것으로 여기신다면 신속하게 禮部를 통해 문서를 보내서 보완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편으로는 總理衙門의 電示를 기다리고 한편으로는 金宏集修信使가 보낸 서신이 오기를 기다린 후에 기회를 보아 적절하게 준비하여 착실히 안전하게 이익이 될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조선이 비록 때늦었음을 후회한다고 하더라도 일이 이미 너무 지체되어 도움이 될지 아닐지는 감히 알 수 없지만, 다만 제 마음을 다해 만회를 해보고자 도모할 뿐입니다. 이 일은 중대한지라 제가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하면서 시기를 놓칠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삼가 서신으로 總理衙門에 요청하니 신속하게 검토하고 訓示를 내려주시어 遵行할 수 있기를, 또한 이 일을 비밀로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시 한 번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따로 『主持朝鮮外交議』 한 권을 올리며, 또한 李東仁이 가져온 문서 2건을 첨부하여 올립니다. 이것은 李東仁이 스스로 비밀리에 넘겨준 것이니 만약 禮部를 통해 문서를 보내거나 혹은 總理衙門을 통해 조선에 서신을 보낼 때 언급한다면 모두 언급하기 불편할 것입니다. 삼가 이 점을 첨가합니다.
이번 달 19일 酉刻에 보낸 전보를 베껴서 올리니 검토해 주십시오. 여기에 조선 委員李東仁이 직접 가지고온 國王의 密詔에 다르면 지금 조정의 논의가 일변하여 국왕의 지시로 金宏集修信使가 제게 서신을 보냈고, 서신의 뜻은 제가 미국에 조속히 와서 조약을 맺도록 권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대신하여 돌보아 성사시킬 것인지에 대해 응당 전보와 지시를 내려주실 것을 청하여, 이후 金의 서신을 받은 다음 遵行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지금 사실을 탐색해 보니 러시아 해군경이 아직 琿春에 있고 여전히 요코하마로 오는 날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나머지 상세한 내용은 나중에 서신으로 다시 알리겠습니다.
 
별지: 何如璋의 『主持朝鮮外交議』(何如璋『主持朝鮮外交議』)
 
첨부문서:淸摺초록
 
1. 『主持朝鮮外交議』
조선은 아시아의 요충에 위치하고 그 서북은 吉林·奉天과 접해 있어서 중국의 왼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이 있으면 밖으로 대양을 막고 안으로 황해를 끌어안아 成山과 釜山 사이에 서로 군사 지원이 이어질 수 있고, 天津과 上海수천 리가 바닷길로 바로 연결됩니다. 이리하여 北京의 門戶가 더욱 튼튼해지고, 북양 일대가 옷이 얇아 추위를 느끼는 것처럼 고립되거나 길이 막힐 염려가 없어집니다. 조선이 망하면 우리의 왼팔이 잘리고 울타리가 모두 없어지니, 후환을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서양의 논자들은 모두 “아시아에서 조선은 유럽에서의 터키와 같아서 반드시 서로 다투는 요충지”라고 말합니다. 우리 大淸이 동쪽 땅에서 일어날 때부터 먼저 조선을 평정하고, 그 이후에 明을 정벌하였습니다. 康熙와 乾隆시기에는 조선이 위로 보고하지 않는 일이 없어서, 거의 내지의 郡縣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는 越南의 소원함이나 버마의 편벽함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200여 년 동안 德으로 字小를 하고, 예로써 事大를 하는 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입니다. 조선이 처마 밑에 의탁하여 안전을 얻었으니, 은혜는 깊고 정의는 굳으며 서로 편안하고 무사하여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북쪽에 매우 강한 러시아가 조선과 이웃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가 사할린 전체를 얻고 또 黑龍江의 동쪽을 경영하여 豆滿江입구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부터, 높은 지붕에서 병에 든 물을 쏟는 것처럼 가까이서 핍박하는 형세가 나타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조선이 위태로우면 중국의 형세도 날로 급박해집니다. 그러므로 중국의 오늘날 형세를 논하자면, 蒙古나 西藏의 예처럼 조선에 駐劄辦事大臣을 두고 모든 국내의 정치 및 외국과의 조약을 모두 중국이 주지함으로써 외국인들이 감히 엿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上策입니다. 다만 지금은 일이 많고 채찍의 길이가 미치지 못하듯이 역량이 부족하여 이 대책을 진실로 시행할 수 없으니, 부득이하게 그다음 방안을 생각해야 합니다. 러시아가 혼자 차지하려는 형세를 막고 天下萬國과 서로 고르게 하여 유지하도록, 조선으로 하여금 미국·독일·영국·프랑스와 통상하도록 하는 것이 좋은 방책입니다. 몇 년 동안 우리 總理衙門과 南洋·北洋大臣이 힘을 합쳐 같은 마음으로 함께 이러한 일을 도모하였지만, 조선은 동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풍기가 얽매여 있기에 전혀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아 어찌 해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형세가 위급해지자 조선은 완전히 방향을 바꾸게 되었는데, 이것은 어찌 하늘이 그 속마음을 인도하여 조선을 위해 위급존망의 전기로 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제가 일찍이 조사해 보니 서양의 屬國은 모두 스스로 그 정치를 주관하여, 모두들 “아시아의 조공국[貢獻之國]은 속국[屬土]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서양의 통례를 살펴보면, 屬國과 半主之國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에는 대부분 통할하는 나라가 그것을 주관합니다. 또한 서양의 통례를 살펴보면 두 나라가 전쟁을 할 때 다른 나라는 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한 쪽을 도울 수 없지만 屬國만은 예외입니다. 지금 조선을 러시아가 삼키려하는 위급함에서 구하려면, 부득불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서로 버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선이 스스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게 하면 다른 나라들은 모두 조선을 自主國으로 인식하여 중국의 屬國이라는 이름은 홀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일시적으로 다급한 일을 구하자고 근심을 뒷날까지 남기게 되니, 역시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다시 萬國公法을 두루 살폈는데, 도이치 연방은 종래 각자 조약을 체결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니, 지금 중국이 조선에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는 것을 허락하여도 원래 안 될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마땅히 조정에서 회의를 하여 속히 유능하고 숙련되고 총명하여 외교의 利害를 알 수 있는 사람을 조선에 파견하여 대신 조약 체결을 주지하게 하도록 청한다면, 속국의 명분은 이로 인해 더욱 분명해질 것이고, 나중에 혹시 외국과 문제가 생기더라도 우리가 조종한다면 충분히 북양의 거점을 공고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아주 좋은 방책입니다. 혹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마땅히 總理衙門을 통해 諭旨를 주청하여 조선 국왕에게 지시를 내려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고, 조약 앞부분에 “지금 조선은 중국정부의 지시를 받들어 모모 국가와 조약을 체결하기를 원한다”고 밝히게 한다면, 대의가 분명해지고 변경의 울타리도 저절로 굳건해질 것입니다.
제가 삼가 생각하건대 조선은 중국과의 관계가 아주 원만하고 평소 공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전에 프랑스 선교사 사건도 우리가 한 번 말하자 곧바로 그를 석방하였으며, 조선이 일본에 문서를 보낼 때에도 매번 ‘上國’이나 ‘天朝’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일본과 가까워진 것은 구습을 조금 깨뜨린 것이나, 그 군신 상하가 사사로이 서로 경계하여 하는 말을 보면 “淸人의 후의는 일본보다 더 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조정을 통해 칙유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당연히 지시에 그대로 따를 것이며, 서양의 여러 나라들도 조약을 원하지만 반드시 얻을 수 없는 시점에서 우리가 주지할 수 있다면 당연히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도이치 연방의 전례를 끌어올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의 명을 받들어라”고 하는 문구를 외국에서도 거절할 명분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조선이 개항을 하게 된다면, 마땅히 칙령을 내려 중국의 龍旗를 그대로 쓰도록 하거나 혹은 주위를 구름으로 둘러서 구별하는 뜻을 보이고 우리 체제를 존숭하도록 해야 합니다. 마땅히 조선에 칙령을 내려 상인들이 중국에 와서 무역하도록 하고, 중국 상인에게도 부산과 원산진 등에 가서 통상하도록 하여 서로 소식이 통하게 해야합니다. 또한 조선 학생들에게 지시하여 京師同文館에 와서 서양 언어를 배우고, 福州船政局과 上海製造局에 와서 배 만드는 것과 간단한 기계를 익히고, 直隷나 江蘇의 練軍에 와서 서양 무기를 익힘으로써 武備를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요컨대 지금은 시세가 변하고 사정이 달라졌기 때문에 중국이 조선을 대하는 데에도 반드시 옛 제도를 조금 변통해야만 비로소 구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또한 생각하건대, 지금 러시아의 해군제독 레소프스키가 군함 10여 척을 거느리고 琿春부근에 정박하고 있는데, 날이 추워지고 얼음이 얼면 반드시 남하할 것입니다. 만약 불행하게도 조선을 침범하여 차지하는 등 해악을 끼치려 한다면 조선은 반드시 땅을 나누어 주어 스스로를 지키고자 할 것입니다. 침대 옆에 남이 누워서 코를 골며 자도록 놔두어서는 후환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만약 다행스럽게 이러한 일이 없더라도,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조선 백성의 힘을 빌려 개척하고 조선의 쌀을 옮겨 나르고자 할 것이며, 이러한 뜻을 품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만약 군함을 모두 이끌고 맹약을 강요한다면 조선 역시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선 땅은 오늘은 항구를 닫을 수 있어도 내일은 반드시 열지 않을 수 없으며, 내일 항구를 닫아도 다음 날에는 반드시 열지 않을 수 없으니, 결코 閉關할 수 없음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위협을 통해 불공평하고 손해가 많은 조약을 맺는 것보다는 차라리 중국이 급히 도모하여 대권을 잡고 뒷날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릇 아시아의 여러 소국은 쇠미한지 오래되었습니다. 越南은 이미 프랑스와 땅을 나누었고, 버마는 다시 영국의 통제를 받습니다. 천행으로 조선은 간신히 영토를 보전하고 있으나, 구습을 굳게 지키고 잘못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면서 여러 차례 권해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마음속으로 후회하고 있지만 이미 손을 써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탄할 지경인데, 지금의 형세가 절박하여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으나 다행히 한 줄기 살아날 기회가 있습니다. 시간과 기회는 다시 오지 않으니, 어찌 구제하기 위해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실로 근심과 번민을 이기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이러한 軍國大事를 논의하여 올리나,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까 깊이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속히 고려하여 결정해 주신다면 천하에 다행한 일입니다.
별지: 조선 偵探委員李東仁이 비밀리에 건네준 조선 국왕과 대신의 經筵자리에서의 협의 내용 필기(朝鮮偵探委員李東仁密交國王與大臣密議當筵筆記)
 
2. 「조선 偵探委員李東仁이 비밀리에 건네준 조선 국왕과 대신이 경연 자리에서 비밀리에 협의한 내용의 필기」
임금:“修信使가 무사히 다녀왔으니 다행입니다.”
領相:“과연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임금:“萬里에 걸친 큰 바다는 비록 아주 위험하다고는 하나 한 척의 배로 왕래하니 中原에 다녀오는 것보다 수월한 것 같습니다.”
領相:“修信使의 氣質이 평소 허약하여 처음에는 우려되었지만 무사히 그 임무를 완수하였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임금:“修信使의 말을 듣자하니 일본인들의 접대가 매우 정성스러웠다고 합니다.”
領相:“신 또한 들었습니다. 그리고 丙子年에 金綺秀가 갔을 때는 그 진심을 알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대접부터 다르고 신뢰와 호의를 보여주었습니다.”
임금:“일본인들과의 회담 중에 러시아와 관련된 일이 매우 우려된다고 하였습니다.”
領相:“러시아는 근래에 자못 강성해져서 중국 또한 이를 제지할 수 없을 정도이니 정말 우려됩니다.”
임금:“중국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조선주 005
각주 005)
원문은 我國인데 이후 편의상 모두 조선으로 통일하여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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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어떻겠습니까!”
領相:“몇 해 전 宮本小一주 006
각주 006)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는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이를 담당하였던 일본 외무성의 중견관료(外務大丞)로 그 실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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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회석상에서 가까이 앉아 이야기했던 것이 바로 러시아에 대한 것으로, 이것이 사실이었지만 저희는 과연 그러할까 의심했었습니다. 이번에 수신사 일행을 통해 淸國人이 보내온 책자를 보니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임금:“러시아는 비록 우려스럽지만, 일본인들이 필경 극도로 살피고 있을 것입니다.”
領相:“이번 수신사 일행에 대한 접대나 일행 중의 통역관·하인에 대한 우대는 丙子年과 다르니, 이를 통해 그 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임금:“우리가 공연히 의심하여 뜬소리가 많습니다.”
領相:“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임금:“수신사 일행이 가져온 책자는 청국 공사가 전해준 것으로, 그 두터운 뜻이 일본에 비해 훨씬 큽니다. 그 책자를 대신들 또한 보았습니까?”
領相:“일본이 이처럼 정성을 보이는데 하물며 淸人들은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필시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비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심이 본래 의심이 많아 책을 덮어두고 더 이상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그 책자를 다 읽어보니 어떻습니까?”
領相:“신이 완독해보니, 그 사람의 논변은 조목조목 제 마음속의 생각과 부합하여 한 번 보고 치워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대저 러시아는 먼 북쪽에 치우쳐져 있어 다만 추위를 참지 못하고 매번 남쪽으로 옮기고자 하므로, 다른 나라들의 일은 단지 이익을 일으키는 것뿐입니다만, 러시아인이 원하는 바는 토지와 사람에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백두산 북쪽은 러시아 경내입니다. 비록 큰 바다로 떨어져 있더라도 돛단배 한 척으로도 바람을 타고 왕래할 수 있는데, 하물며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국경이 접해 있으니 어떻겠습니까! 평상시에는 또한 호흡이 서로 통할 수 있을 정도이며, 얼음이 얼면 비록 도보라도 통행이 가능합니다. 현재 병사를 가득 실은 러시아 군함은 16척에 이르고 배마다 3천 명을 실을 수 있습니다. 만일 추위가 끝나면 그 세력은 필시 남쪽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 뜻은 본디 예측할 수 없으니 어찌 위태로움에 급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일본인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바는 러시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대비하기를 바라는 것은 실로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領相:“그것은 마치 楚나라를 위한 것이지 趙나라를 위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주 007
각주 007)
이 내용은 유명한 모수자천(毛遂自薦)의 고사에 나오는 것인데, 진(秦)이 조(趙)를 공격하자 조는 평원군(平原君)을 초(楚)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때 문무를 겸비한 20명을 뽑아 동행시키고자 하였는데 마지막 스무 번째 사람은 스스로를 추천한 모수(毛遂)였다. 하지만 초에 이르러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초가 주저하자, 모수가 나서서 군사를 내어 진을 공격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실은 楚를 위한 것이지 趙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楚王을 설득하였다. 그 결과 귀국한 모수는 객경(客卿)으로 초빙되어 조의 군대를 이끌고 초와 연합하여 진의 공격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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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조선이 대비하지 않으면 일본이 필시 위험에 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찌 러시아인의 뜻이 일본에 있다고 핑계를 대면서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또한 壬辰年의 일을 보면 ‘길을 빌린다’고 하면서 공연히 바다를 건너왔으나, 실제로 는 길을 빌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인에게 어찌 ‘길을 빌린다’는 뜻이 없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면, 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필시 방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현재 성곽, 무기, 군졸, 군량의 수준이 옛적에 미치지 못하여 백의 하나 믿을 것이 없으니, 결국 무사하기 어렵습니다. 눈앞의 대비를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임금:“방비책은 어떻습니까?”
領相:“어찌 방비책을 저희가 강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청인의 책자 속 논설이 이와 같은 계획을 갖추어 다른 나라에 건네주었으니 심히 所見이 있어 그런 것입니다. 그 중 믿을 만한 것은 믿고, 채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에서는 필시 그것을 믿지 않아 장차 휴지 조각이 되게 할 것입니다. 6월에 미국인이 東萊에 왔습니다. 이 나라는 본디 원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만일 書契를 東萊府에 올렸다면 실로 東萊府에서 접수하지 못할 일도 없었고, 禮曹에 올렸다면 禮曹에서 접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서양 국가라고 거부하여 접수하지 않았는데, 이 사실이 그대로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 결국에는 수치와 모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원수의 나라라고 한다면 사실은 일본이 대대로 원수의 나라입니다. 미국에 대해 어떤 평판이 있기에 원수의 나라라고 합니까? 먼 나라를 안무하는 뜻에서 그들과 분쟁을 낳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임금:“미국이 어찌 원수의 나라이겠습니까?”
領相:“실로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조선 풍습이 본래 이와 같아 천하에 비웃음을 당합니다. 서양 국가는 본래 우리와 恩怨이 없었지만, 처음에 우리 어리석은 무리들이 그들을 끌어들여 강화도와 평양에서 말썽이 나게 하였으니 이는 조선이 자초한 것입니다. 몇해 전 서양인들이 조선에 들어온 것도 중국의 咨文에 근거하여 내지를 살피려는 것이었습니다. 대저 서양 선박이 입경하면 느닷없이 邪學을 구실로 삼[아 그것을 배척하]는데, 서양인이 중국에 갔을 때 중국 사람들이 그들을 邪學이라고 배척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른바 邪學이라 해도 배척하면 될 뿐, 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이 經筵자리에 左相께서 나오지 않으셔서 신이 홀로 삼가 聖敎를 받들었습니다만, 마땅히 재상 모두와 함께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조정의 모든 사람들은 단지 좋은 관직만을 탐하고, 모두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계책을 내놓으니, 유독 신에게 무슨 대책이 있겠습니까?”
임금:“재상들의 의사는 어떻습니까?”
汶庠등:“대신들이 이미 상주를 갖추었기 때문에, 다시 아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임금:“原任大臣이 함께 그 책을 보았을 텐데,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領相:“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재상들 모두가 우리 국사는 본디 의정부에서 처리하는데 어찌 다른 의정부가 있겠느냐고 하였지만, 비록 열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음에도 可否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가 겁나지 않겠습니까? 부모가 되어 처자식을 지키려는 것은 본디 바라는 바이지만, 전혀 따지지 않고 뒤로 물러나 高談만 일삼고 있으니 이런 행동은 名節과 義理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신하라면 응당 종사와 백성의 안녕을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어느 아침에 러시아인들이 강을 건너온다면 필시 “내정을 정비하고 외적은 물리쳐야 한다(內修外攘)”고 떠들겠지만, 이런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사람들의 기백, 나라의 법도, 무기와 재정이 예전만 못하므로, 먼 나라를 안무하는 원칙을 급무로 삼아 종사를 편안케 하는 계책으로 삼는 편이 더 낫습니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전하의 마음이 확고해진 다음에야 걱정이 없을 수 있습니다. 전하의 마음이 의심과 신뢰 사이를 맴돌면서 결정하지 못하신다면, 거짓으로 명예를 탐하는 사람들이 떼 지어 일어나게 될 터이니 러시아인들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반드시 안에서 분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임금:“의정부에서 가부의 논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領相:“原任大臣이 언제 入侍할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신이 오늘 전하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매번 불확실한 말만 늘어놓고, 우물쭈물하며 전하 앞에서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하였으니, 신에게 실로 죄가 있습니다. 오로지 전하의 마음이 확고하게 결정되시기를 바랍니다.”
임금:“時·原任大臣들이 결국 논의해야 하겠지만, 오늘은 만나는 때가 아닙니다.”
領相:“오늘 바로 알현이 있을 것입니다.”
임금:“러시아인들이 앞으로 山東으로 갈 것이라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領相:“기세로 보면 어딘들 가지 않겠습니까?”
임금:“세 使臣들의 견문록 또한 이미 보았는데, 러시아가 甯古塔을 침탈했다는 이야기의 진위 여부가 상세하지 않습니다.”
領相:“아직 알 수 없습니다.”
임금:“하늘이 어찌하여 이러한 무리를 낳아 천하에 횡행하게 하는지 실로 분통스럽습니다.”
領相:“氣數가 그런 것입니다.”
임금:“만약 중국의 道光연간이었다면 이 무리들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領相:“비록 道光연간이었더라도 氣數와 관계된 바 역시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領相:“지방의 무기 정돈에 대한 지시가 그토록 엄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수선하지 않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화약과 조총은 매번 하급 서리들이 기회를 틈타 바꿔치기 하여 성 밖으로 가져 나가니 정말로 분통이 터집니다.”
임금:“그렇다면 나랏돈을 허비한 것에 불과합니다”.
領相:“듣기로는 花房義質공사가 머지않아 온다고 하니, 그 동정을 살피고 또 그 논의를 들어보면 아마 조처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경연과 상주 이후 밖에서의 논의가 시끄러워질 것 같아 답답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임금:“大臣들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何如璋의 부가설명]: 李東仁에 따르면, 領相曰의 ‘相’은 조선의 首輔로 이름은 李最應입니다. 그 논한 바를 보면 임금과 수보 모두 외교를 원하며, 원하지 않는 자는 오로지 原任大臣뿐입니다. 領相의 말에는 자못 넌지시 간언하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李東仁이 말한 原任大臣은 李裕元이며, 일찍이 李 中堂大人께 서신을 보냈던 사람입니다. 또한 일찍이 일본 외교관 宮本小一이 “李裕元이 현재 조선왕의 부친으로 조선인들은 大院君이라 한다”고 했지만, 확실한지 여부는 알 수 없어 李東仁에게 물어보니 잘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첨부합니다.
추신:내용을 보면 壬辰年의 일 운운하였는데, 이는 豊臣秀吉이 조선을 공격한 일을 말합니다.
별지: 李東仁이 비밀리에 건네준 『朝鮮政府會議節略』(李東仁密交朝鮮政府會議節略)
 
3. 「李東仁이 비밀리에 건네준 『朝鮮政府會議節略』」
러시아는 북쪽에 처해 있으면서 虎視耽耽기회를 엿보니 천하가 그 나라를 호랑이처럼 두려워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근래 중국 및 각국의 언론[文字]이 항상 이 나라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러시아와 경계를 접하고 있으니 그 폐해를 입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현재 前修信使가 돌아오면서 중국인 黃君의 책자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이른바 『朝鮮策略』이라 하며, 스스로 묻고 답하면서 의심나고 어려운 점을 제기하고 있는데, 근심이 깊고 생각이 멀리 미치는 것이 이전에 보았던 각국 언론보다 훨씬 상세하고 치밀합니다. 비록 그 말이 모두 타당한지는 알 수 없으나 또한 어찌 편안한 가운데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미리 크게 강구하는 의리가 아닌지 알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서는 “중국과 친하라”고 하였는데, 2백년 동안 조선이 큰 나라를 섬기는 정성은 일찍이 조금도 나태해진 적이 없고, 上國또한 우리를 內服주 008
각주 008)
내복(內服)은 천자가 직할하는 사방 천리의 지역을 말한다. 복(服)이란 천자의 일에 복무한다는 의미로써, 내복은 사방 천리의 왕기(王畿) 이내 지역이기 때문에 그렇게 지칭하고, 왕기 이외의 지역·제후는 외복(外服)이라 한다. 쉽게 말해 내복은 중국, 외복은 중국 밖의 제후국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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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대하고 지금까지 곡진히 비호해왔으니, 새삼 친해지기 위해 힘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日本과 맺으라”고 한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근래 신뢰있고 화목한 관계를 강구하면서 公使가 매년 오고 있고, 행하기 곤란한 요청을 들어주었으니 이는 조선이 마음과 힘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조선의 습속이 그들을 놀란 눈으로 보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을 때 서운한 감정을 품게 하는 단서가 없지 않았고, 이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의심하는데, 이는 실로 우리의 誠信이 미흡한 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금 공사가 머지않아 다시 온다고 하니 우선 우리 도리에 따라 힘써 성신을 다하고, 혹여나 이전과 같이 경시하고 홀대하지 않음으로써 和好의 의리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공사가 오게 되면 필시 본국에서 지시받은 바가 있을 터, 이른바 京城의 공사관 설치나 仁川개항 같은 문제입니다. 그들이 들어주기 어려운 요청들을 내놓는다면 어찌 쉽사리 허용할 수 있겠습니까? 경성에 공사관 설치를 허용하고 인천 개항을 불허한다면, 경성과 인천의 관계로 보아 경성은 더욱 불안해질 것입니다. 혹은 인천 개항을 허가하고 경성의 공사관 설치를 불허한다면, 그들은 또한 원하는 바를 쉬지 않고 떠들어댈 것입니다. 만일 한편으로 경성 공사관 설치를 허용하고 다른 한편으로 인천 개항을 하게 되면 그들이 우리를 건성으로 대하게 되도 만회할 수 없습니다. 장차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는 公使가 공무를 처리할 때에 하는 말에 따라 결국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美國과 연합하라”고 한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현재 천하 각국은 서로 合縱하여 러시아가 다른 나라를 경멸하는 위세를 저지하고자 합니다. 하물며 조선은 바닷길의 요충지에 있으면서 孤立無援의 상태이므로, 연합하여 우호를 맺는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제도는 지금껏 외국과 교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은 수만 리나 떨어져 있어 소식조차 미치지 못하는 곳입니다. 현재 우리가 무엇으로 먼저 교류하고 연합하여 우호를 맺어 원군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배를 정박시키고 문서를 전달해 오면 그 문서를 보고 좋은 말로 답장할 것입니다. 바다 위의 어려움을 호소하면 능력에 맞게 구제하고 대접할 것이니, 이는 먼 나라 사람들을 구휼하는 도리로 여겨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다면 이후에는 미국에서 반드시 ‘조선이 잘 대접한다’고 할 것이니, 이때에 또한 어찌 서로 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때에 따라서 어떻게 조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대개 여기에서의 논의는 조선의 안위가 청·일본에 관계되는 바이기에 이렇게 세심하게 빠짐없이 말하고 있으며, 우리 역시 예사로운 일로 넘겨서도 안됩니다. 더구나 그 말이 이렇게 절실하고 곧바른데, 어찌 안일함을 도모하면서 세월을 허비할 수 있겠습니까?
 
[何如璋의 부가설명]:이상 두 가지는 李東仁이 行囊에 휴대하여 가져와서 꺼내주어 열람한 것인데, 그가 처음에는 抄錄을 남기려고 하지 않았으나 강요하여 가까스로 抄錄할 수 있었습니다. 절실히 바라건대, 비밀로 해 주십시오.

  • 각주 001)
    Stepan S. Lessovski(Лесовский, Степан Степанович, 1817~1884)는 러시아의 군인으로 1881년까지 해군 제독을 역임하고 그 해 전역하였다. https://fr.wikipedia.org/wiki/Stepan_Lessovski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2)
    김홍집(金弘集, 1842~1896. 어릴 때의 이름은 金宏集)은 조선 말기의 관료, 정치가로 자가 경능(景能), 호가 도원(道園) 또는 이정학재(以政學齋)이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1867년 경과정시(慶科庭試) 문과에 급제한 다음 관직을 시작하여 지방관과 내직을 역임하였는데, 1880년 일본이 요구한 인천 개항, 공사 주재(公使駐箚)와 해관세칙(海關稅則) 등의 현안을 타결하기 위한 제2차 수신사(修信使)로 임명되어 58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 정부와의 협상에는 실패하였으나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과 정관응(鄭觀應)의 『이언(易言)』을 가지고 돌아와,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개화정책을 채택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880년 말 그는 일본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인천 개항문제를 협의, 20개월 뒤에 인천을 개항하기로 합의하였다. 아울러 정부가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중추 기구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자, 12월 통상관계를 전담하는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발탁되었다. 1882년에 미국과 1883년에는 영국·독일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조약 체결을 담당한 전권대신들의 부관으로 임명되어 협상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또한 임오군란의 사후 수습책으로 정부에서 일본 및 청나라와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및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할 때에도 전권 부관으로 임명되어 협상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1884년 9월에는 예조판서와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를 겸임함으로써 대외 교섭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에도 온건 개화파로서 국정과 외교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수립되자 ‘왜대신(倭大臣)’으로 지목되어 광화문 앞에서 군중들에 의하여 타살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유곤일(劉坤一, 1830~1902)은 자가 현장(峴莊)으로 호남성(湖南省) 신영현(新寧縣) 출신이다. 상군(湘軍) 출신의 청말 관료로 1874년 서리양강총독(署理兩江總督), 1875년 9월부터 양광총독(兩廣總督)으로 부임하였고, 다음해 남양통상대신(南洋通商大臣)을 겸임하였다. 제부(制府)는 명·청대에는 총독(總督)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당시 병으로 귀국하였던 주일본 영국 공사 파크스(Parkes)를 대리하던 일본주재 대리공사 J. G. Kennedy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원문은 我國인데 이후 편의상 모두 조선으로 통일하여 번역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는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이를 담당하였던 일본 외무성의 중견관료(外務大丞)로 그 실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이 내용은 유명한 모수자천(毛遂自薦)의 고사에 나오는 것인데, 진(秦)이 조(趙)를 공격하자 조는 평원군(平原君)을 초(楚)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때 문무를 겸비한 20명을 뽑아 동행시키고자 하였는데 마지막 스무 번째 사람은 스스로를 추천한 모수(毛遂)였다. 하지만 초에 이르러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초가 주저하자, 모수가 나서서 군사를 내어 진을 공격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실은 楚를 위한 것이지 趙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楚王을 설득하였다. 그 결과 귀국한 모수는 객경(客卿)으로 초빙되어 조의 군대를 이끌고 초와 연합하여 진의 공격을 물리쳤다.  바로가기
  • 각주 008)
    내복(內服)은 천자가 직할하는 사방 천리의 지역을 말한다. 복(服)이란 천자의 일에 복무한다는 의미로써, 내복은 사방 천리의 왕기(王畿) 이내 지역이기 때문에 그렇게 지칭하고, 왕기 이외의 지역·제후는 외복(外服)이라 한다. 쉽게 말해 내복은 중국, 외복은 중국 밖의 제후국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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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러시아의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은 중립을 지키라는 여론과 주선과 미국의 조약 체결에 대한 의견 문서 자료번호 : cj.k_0002_0010_0010_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