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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게 서양 각국과 조약을 맺어 통상하도록 권하는 일이 어렵다는 이홍장(李鴻章)의 문서

李裕元이 “조선이 원래 서양 학문을 싫어하고 서양과 통상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왔으니,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고 통상을 하라고 권하는 일이 짧은 시간의 노력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接李裕元函謂:“朝鮮素惡泰西之學, 不願與西洋通商,” 勸與列國立約通商事, 殆非一朝夕之功).
  • 발신자
    北洋大臣李鴻章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0년 2월 9일 (음)(光緖六年二月初九日) , 1880년 3월 19일 (光緖六年二月初九日)
  • 문서번호
    2-1-1-07 (329, 397b-401a)
2월 9일, 北洋大臣李鴻章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다.
 
삼가 알립니다.
지난 가을에 寄諭를 받아서 丁日昌이 진술한 각 항목에 따라 조선의 原任太師李裕元에게 서신을 보내 서양 각국과 조약을 맺고 통상함으로써 일본의 간교한 계획을 막으라고 권유한 바 있습니다. 이미 7월·11월 두 번에 걸쳐 서신의 대략적인 내용을 서신으로 알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 李裕元이 서신을 보내왔는데, 이전의 일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永平府知府인 遊智開의 비밀보고에 따르면 李裕元이 따로 서신을 보내어 이르기를 “조선은 본래 타국과 왕래하기를 원치 않으며 비록 조정에 말을 전하긴 하겠지만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기에 감히 힘써 다투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어제 遊智開가 다시 李裕元이 11월 12일에 보낸 서신을 전달하였는데, 많은 말을 늘어놓았지만 대체로 “서양의 학문을 평소 몹시 싫어하여 거기에 물들기를 원하지 않으며 또한 조선은 척박하여 많은 상선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을 구실로 삼았습니다. 삼가 원래의 서신을 초록하여 올리니 살펴보십시오. 조선은 동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고 풍기가 비교적 뒤쳐져서 비록 중국이 대신 계획을 빈틈없이 세워준다고 하더라도 시무에 통달하고 전체 局面을 두루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이것도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지금 나라 전체의 사람들이 견문이 부족하고, 가가호호 일일이 깨우쳐 주기도 곤란한 형편입니다. 李裕元도 衆議에 얽매여 있으니 이렇게 앞뒤로 말을 바꾸는 것을 보면 또한 이 일을 옳다고 여기는 것 같지는 않은 듯합니다. 형세가 바뀌면 다시 기회를 보아 권고할 일이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기는 곤란한 것 같습니다. 삼가 비밀리에 알리는 바입니다. 삼가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별지: 조선 原任太師李裕元이 北洋大臣李鴻章에게 보낸 서신(朝鮮原任太師李裕元致北洋大臣李鴻章文)
 
첨부문서:초록
 
1. 「조선 原任太師李裕元이 보낸 서신」초록
 
李 中堂大人께 올립니다.
얼마 전 보내주신 서신 때문에 자문전달관 李容肅을 통해 삼가 서신을 써서 遊智開知府에게 전달해 올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곧 10월 20일에 李容肅이 보낸 서신을 받아보았는데, 서신은 이미 살펴보신 것 같았지만, 그 상세한 내용을 알지 못해서 마음이 막힌 듯 답답하였습니다. 올해 年貢使行이 있으니 그 편을 통해 감히 속마음을 말씀드리는 서신이 전달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올해 7월 9일에 내려주신 서신은 절을 하고 손을 씻고 읽었습니다. 그 후에 사절을 이용하[여 서신을 전달하]는데 차질이 생겨 지금까지 감사의 마음을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평범한 서신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답장을 미루면 곤란한데, 하물며 거듭 깨우쳐 주시는 말씀이 오직 조선의 기밀사무를 위해 가르침을 주시는 것인데, 몽롱하게 듣고도 못들은 체 하였으니 불민한 잘못을 스스로 책망하는 일에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외람되이 이렇게 뒤늦게 호소하는 것은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아 더욱 절박하기 때문이니 부디 긍휼하게 여기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최근 조선이 일본과 친교를 가지고 조약을 맺어 통상을 하는 것은 만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에 대한 적절한 응대는 실로 전후로 내려주신 가르침에 따라 의심하거나 시기하는 뜻을 보이지 않고 줄곧 부드럽게 대함으로써, 그 거칠고 오만한 성질을 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말과 행동이 차이가 아주 크고, 요구하는 것은 대부분 전혀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다른 항구를 개방하라고 요구하는데, 모두 중요한 곳이 아님이 없었으므로 서로 오랫동안 버티다가 이후에 元山津을 열었는데, 仁川은 수도와 가까운 곳이어서 끝내 그 요구에 부응하지 않자 물러나면서도 여전히 미련이 컸던 것 같습니다. 자못 다행스럽게도 서로 간의 和好를 잃는 데 이르지는 않았지만, 그 탐욕스럽고 교활한 뜻은 오로지 병탄과 잠식에 있습니다. 금년 봄에 琉球를 폐멸하고 최근 포선으로 시위를 한 일 등은 만약 이렇게 비밀리에 알려 깨우쳐주시지 않았다면 이 귀머거리와 장님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李 中堂大人의 어진 덕이 저희 조선을 보호해 주신 것이 정말 오래 되었습니다. 이처럼 근심거리를 위기와 혼란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대신하여 대비해주시는 시도가 어찌 이처럼 지극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西人의 국면은 실로 자연의 기운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지극한 가르침이었고, 재난을 막는 요체는 또한 毒으로써 毒을 공격하고 敵으로써 敵을 제압하는 대책에 있다는 것도 누누이 알려주셨습니다. 비록 정성스럽게 몽매함을 일깨워주시고 세세하게 풀어주시니, 어찌 깜짝 놀라서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서양 각국과 먼저 交通하면 곧 일본은 저절로 견제할 수 있게 되고, 일본을 견제할 수 있으면 곧 러시아가 엿보는 것 또한 걱정할 것이 없다는 점, 이것이 가르침의 큰 줄거리였습니다. 關稅를 정하고 商情에 익숙해지고 여러 폐단을 엄금하는 등에 대한 내용에 이르면, 또한 어찌나 그 처분이 상세하고 세밀합니까! 진실로 황송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조선은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고 삼가 옛 법도를 지키면서 文弱함에 안주해서, 스스로 나라 안을 다스릴 뿐 外交를 돌볼 여유는 없습니다. 더구나 서양 학문은 우리 道와 달라서 실로 백성의 성정과 어긋나니, 일찍이 뜨거운 불처럼 두려워하고 독화살처럼 피하며 귀신을 보듯 경원하였습니다. 최근에 몰래 입국한 프랑스인은 비록 咨文을 받들어 압송해 돌려보냈으나, 그 가르침에 전염된 조선 사람은 멋대로 풀어준 적은 없으니 이를 통해 아마도 헤아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편 판매나 기독교 선교는 어금니를 미리 뽑는다고 사나운 돼지를 제압할 수 없는 것과 같다는 점은 또한 분명히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옛적에 나라를 도모하는 사람은 “먼 나라와 교제하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한다”고 하였고,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공격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적으로써 적을 제압하는 기술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국면은 옛날과 전혀 달라서 비록 무력이 강대해서 스스로 힘센 나라라고 해도 아침에는 예물을 보내고 저녁에는 전쟁을 하면서 양쪽 국경에서 대기하다보면, 분주하게 명을 따르는데 피로하여 스스로 먼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어찌 조선과 같이 문약한 나라가 옛날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실로 하지 못하는 것이지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神農帝께서 百草를 맛보다가 毒을 먹고 백 번을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셨지만, 神農帝가 아니면서 그 행위를 본받는다면 한 번만 독을 먹더라도 다시 일어날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지금 적을 제압하려고 해도 내가 먼저 적의 공격을 받을 것이고 독을 공격하려고 해도 내가 먼저 해를 입을 것이니, 진실로 한 번 독을 먹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까 두려운데 어찌 적을 제압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오직 우리 李 中堂大人의 威望이 멀고 외진 곳까지 떨치고 계획하심이 中外에 모두 들어맞아, 저 러시아의 강함, 서양의 방대함, 일본의 변덕스러움이 이에 좌절하여 무릎을 꿇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인이 호시탐탐 대만을 노리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으며, 조선은 오랫동안 보호해주신 은혜를 입었으니 또한 늘 믿는 바가 있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서양의 公法이 이유 없이 다른 나라를 빼앗고 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러시아가 강하지만 터키에서 병력을 철수했다고 하니, 조선이 무고한데 혹시라도 병탄의 毒을 만나게 된다면 또한 여러 나라가 함께 막아주기를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어리석게 의심하면서 석연하게 풀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일본이 琉球의 왕을 폐하고 그 영토를 병탄한 것은 桀宋주 001
각주 001)
걸송(桀宋)은 전국시대 말기 송의 강왕(康王)을 가리키는데, 강대해진 송이 주변 국가에 대해 무력을 떨치면서 포악하게 굴자 제후들이 그를 ‘걸송(桀宋)’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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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행실과 같습니다. 유럽 여러 나라는 마땅히 齊桓公주 002
각주 002)
제환공(齊桓公, B. C. 716~B. C. 643)은 춘추오패(春秋五霸)의 하나로 춘추시대 제국(齊國)의 열다섯번째 군주이다. 관중(管仲)을 승상으로 삼아 개혁을 추진하여 제국의 강성을 이끌고 여러 차례 제후국과의 회맹(會盟)을 주도하기도 하였는데, B. C. 659년 적인(狄人)의 침입을 받은 형(邢)을 구조한 다음, 형국의 도성을 제국에 가까운 곳으로 옮겼으며, 위(衛)가 다시 적인의 침입을 받고 멸망하자, 다시 새로 성을 지어주어 위(衛)를 부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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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대를 일으켜서 邢나라를 옮기거나 衛나라를 부활시켜준 것처럼 하거나, 아니면 의리로써 일본인을 깨우쳐서 鄭莊公주 003
각주 003)
정장(鄭莊)은 정장공(鄭莊公, B. C. 757~B. C. 701)을 말하는데, 춘추시대 초기의 저명한 군주로 정(鄭)의 세 번째 군주이다. 주(周)의 천자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지만, 춘추소패(春秋小霸)로 일컬어질 정도로 정을 강성(強盛)으로 이끌었다. 계모가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그녀와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가, 나중에 후회하면서 부하의 충고를 들어 땅굴을 파고 가서 그녀와 만났다는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송(宋)이 오랫동안 주(周)에 대한 조공을 거르자, 연합군을 거느리고 송을 정벌하였으며, 이때 거기에 참여하지 않은 허(許)를 항명죄로 멸망시키려다가 다시 용서해준 일이 있는데, 본문의 이야기는 바로 이 일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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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許나라 군주를 다시 세워준 것처럼 했어야 하는데, 귀를 기울여도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왜입니까? 망하기 직전의 오스만 터키제국을 구할 때에는 공법을 의지할 수 있었지만, 이미 멸망한 琉球에 대해서는 공법을 행하기 어려운 것입니까? 아니면 일본이 사납고 교활하여 각국을 경시하기 때문에 비록 제멋대로 이익을 독점하여도 공법이 시행될 수 없는 것입니까? 벨기에와 덴마크는 작은 나라로서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어도 강대국·약소국의 상호 균형에 의지하였지만, 琉球王은 수백 년의 오래된 나라인데도 유지하지 못하였던 것은 고립된 곳에 있어 각국과 떨어져 있기에 공법이 미치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까? 조선은 험준하고 대지가 끝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터키·琉球·벨기에·덴마크 등의 나라와 비교해 보면 더욱 가난하고 허약할 뿐 아니라 서양과의 거리가 멀어서 도달할 수 없으니 무기로 버티는 것은 물론이고 玉帛[등의 예물]으로 응대하는 것 역시 제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무릇 일본인은 통상에 익숙하고 營造에 뛰어나며 부강의 기술을 모두 얻었는데도, 오히려 그 창고가 텅 비고 채무가 쌓여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조선이 계획을 바꾸어 널리 항구를 설치하고 멀고 가까운 곳과 통하고 技巧를 모두 배우더라도, 반드시 띠로 만든 광주리로 받쳐 모시면서 응대하다보면 곧바로 가득했던 주머니가 텅 비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어찌 창고가 비고 채무가 쌓이는 일본의 전철을 따르겠습니까? 더구나 조선의 산물이 보잘 것 없고 貨物이 조악한 것은 사방에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각국이 멀리에서 와서 교역을 하면 아마도 조그만 시장이 천금을 가진 상인을 수용하기 어려운 것처럼 또한 주인과 손님 모두 의지할 데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 스스로 떨쳐 일어나기 어려움이 실제로 이와 같습니다. 앉은뱅이가 먼 길을 가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방에 앉아서 지키는 것이 이익이 아니겠습니까?
上國의 규모는 비유하자면 천지처럼 큽니다. 크고 작은 것이 모두 포함되어 있으니, 좋고 나쁜 것을 모두 찾아내어 [나무를 잘라 그릇을 만들고 비단을 찢어 옷을 짓듯이] 여하튼 어떤 것이든 만들어낼 수 있으며, 기린·봉황·뱀·용 같은 인재에 대하여 아무런 親疏·厚薄의 차별이 없어주 004
각주 004)
이 구절은 그 뜻이 명확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편 마지막 구절의 무적무막(無適無莫)은 『논어(論語)』 「이인(裏仁)」편에 나오는데(“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두텁지도 엷지도 않다, 남에 대해 親疏·厚薄함이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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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방해를 받는 일이 있어도 조처가 넓고 단단하니 곧바로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갑자기 본받으려고 하면, 닭이 봉황을 배우려하는 것 같지 않겠습니까? 李 中堂大人께서 속마음으로 가르침을 주시고 힘써 吉祥함을 따르고 해로움을 피하도록 하는 마음이 간절하고도 정성스러우니, 비록 父兄이 子弟에게 대하는 것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형세에 얽매이고 막혀 행동이 자유롭지 못해서 그 뜻을 떠받들 수 없으니, 크게 어리석은 사람은 종신토록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이것을 일컫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은 서양과 일본이 大人의 위엄 앞에서 감히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니, 조선은 그 큰 덕에 영원히 의지하면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밤낮으로 빕니다. 생각이 궁하고 말재주가 모자라 더 쓸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엎드려 어리석음을 가엽게 여기고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體度가 늘 萬康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소생은 산야에 기거하고 있고 남은 생이 길지 않아서 달려가 앞에 엎드려 절하고 속마음을 다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이 정말로 애석합니다. 이만 줄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소생 李裕元再拜.
을묘년 11월 12일 발송.
경진년 2월 5일 도착.

  • 각주 001)
    걸송(桀宋)은 전국시대 말기 송의 강왕(康王)을 가리키는데, 강대해진 송이 주변 국가에 대해 무력을 떨치면서 포악하게 굴자 제후들이 그를 ‘걸송(桀宋)’이라 불렀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제환공(齊桓公, B. C. 716~B. C. 643)은 춘추오패(春秋五霸)의 하나로 춘추시대 제국(齊國)의 열다섯번째 군주이다. 관중(管仲)을 승상으로 삼아 개혁을 추진하여 제국의 강성을 이끌고 여러 차례 제후국과의 회맹(會盟)을 주도하기도 하였는데, B. C. 659년 적인(狄人)의 침입을 받은 형(邢)을 구조한 다음, 형국의 도성을 제국에 가까운 곳으로 옮겼으며, 위(衛)가 다시 적인의 침입을 받고 멸망하자, 다시 새로 성을 지어주어 위(衛)를 부활시켰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정장(鄭莊)은 정장공(鄭莊公, B. C. 757~B. C. 701)을 말하는데, 춘추시대 초기의 저명한 군주로 정(鄭)의 세 번째 군주이다. 주(周)의 천자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지만, 춘추소패(春秋小霸)로 일컬어질 정도로 정을 강성(強盛)으로 이끌었다. 계모가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그녀와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가, 나중에 후회하면서 부하의 충고를 들어 땅굴을 파고 가서 그녀와 만났다는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송(宋)이 오랫동안 주(周)에 대한 조공을 거르자, 연합군을 거느리고 송을 정벌하였으며, 이때 거기에 참여하지 않은 허(許)를 항명죄로 멸망시키려다가 다시 용서해준 일이 있는데, 본문의 이야기는 바로 이 일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이 구절은 그 뜻이 명확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편 마지막 구절의 무적무막(無適無莫)은 『논어(論語)』 「이인(裏仁)」편에 나오는데(“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두텁지도 엷지도 않다, 남에 대해 親疏·厚薄함이 없다는 뜻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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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게 서양 각국과 조약을 맺어 통상하도록 권하는 일이 어렵다는 이홍장(李鴻章)의 문서 자료번호 : cj.k_0002_0010_0010_0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