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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조선의 경계에 대해 고증할 내용을 상주(上奏)하여 조사를 청하는 총리아문의 상주문(上奏文)

중국·조선의 경계에 관한 사안에서 밝혀야 할 것 세 가지, 고증해야 할 것 다섯 가지를 上奏하오니, 길림장군에게 명하시어 신속히 적절한 관원을 (파견하여) 조사하게 해주십시오(具奏中韓界案, 應辨析者三, 應考證者五, 請飭下吉林將軍, 速妥員覆勘).

 
  • 발신자總理衙門
  • 수신자光緖帝
  • 날짜1886년 3월 25일 (음) , 1886년 4월 28일
  • 문서번호1-3-1-34 (1134, 2091b-2095b)
3월 25일에 본 아문에서 다음과 같은 奏摺을 올렸다.
길림·도문강의 공동감계 결과가 확정되지 않아 삼가 대체적인 상황을 보고하면서 아울러 길림장군에게 지시하여 인원을 파견하여 다시 勘界를 함으로써 변경의 백성을 안정시키고 번속을 무마해주시도록 상유를 내려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지난해 7월 중 총리아문에서는 조선의 북방 유민이 길림 도문강 변지를 차지해서 개간·경작하는 문제에 대해 시간이 오래 지나면 말썽이 생길 것이고, 또한 조선국왕이 자문으로 요청하였으므로 길림장군에게 지시하여 인원을 파견하여 공동감계를 실행함으로써 백성을 안정시킬 것을 상주해서 요청한 바 있고, 그것을 재가하는 상유를 받아 삼가 옮겨 적은 다음 (길림장군에게) 통보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1월 7일 길림장군이 다음과 같은 자문을 보내왔습니다.
광서 11년 12월 16일 파견한 길림변계 감계위원 덕옥과 진영 등이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습니다.

 
조선 안변부사 이중하와 만나 도문강 변계를 조사하여, 현재 이미 도문강 양쪽 연안 山水의 형세와 前 鍾城府使 李正東이 고집한 石碑와 돌더미(石堆)·흙무더기(土堆)를 일일이 실지조사를 통해 확인하였으며, 상세한 지도와 설명서를 작성하고 같은 자리에 서 함께 직인을 찍고, 각자 친필로 서명한 다음 각기 한 장씩 나누어 가졌습니다. 생각건대 조선에서는 土門江을 豆滿江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무산에서 위로 70리에 있는 강어귀에 이르면, 강이 두 줄기로 갈리는데 남쪽 줄기는 西豆水입니다. 서두수는 平甫坪 위에 이르러서 다시 동·서 두 줄기로 갈라집니다. 그 북쪽 줄기는 紅丹水이며, 상류는 다시 남북 두 물길로 나눠집니다. 또한 장백산을 조선에서는 백두산이라고 부르며, 산꼭대기에 큰 연못이 있어 둘레가 수십 리로, 북쪽에 松花江의 正源이 있습니다. 산의 남쪽 기슭에 작은 석비가 있는데, 비면에는 한문으로 “[강희 연간] 烏拉總管 穆克登이 유지를 받들어 변계를 조사하기 위해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鴨錄이고 동쪽은 土門이다. 따라서 분수령 위에 비석을 세워 기록한다” [주001]
번역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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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비의 원문에 따라 번역하였다.

라고 한 내용이 적혀 있으며, 비의 서쪽에 물줄기가 있어 서남으로 흐르다 압록강에 유입하며, 비의 동쪽에도 물줄기가 있어 장백산 동쪽 기슭을 감돌며, 조선에서는 이를 伊嘎力蓋라고 하며, 중국어로 바꾸면 黃花松溝子가 됩니다. 이 물줄기의 동남 연안에 돌더미가 백여 개 있으며, 그것이 끝나는 지점은 장백산의 正東에 있는 大角峰입니다. 비석의 동남쪽 40리는 小白山으로 물줄기가 있어 대각봉 동북으로 흐르다가 斜乙水 및 황화송구자의 물줄기와 합류하여 娘娘庫로 들어갔다가, 송화강으로 꺾어듭니다. 이것이 각 물줄기 및 비석과 돌더미의 본모습입니다.
요컨대 장백산 남쪽 기슭의 조선 吉州 지역에 있는 鶴項嶺은 약 400~500리의 길이로 아주 큰 분수령을 이루며, 그 서남쪽의 물줄기는 압록강으로 흘러들고, 동북의 물은 소백산 이남의 경우에는 도문강으로, 소백산 이북의 경우에는 송화강으로 흘러듭니다. 도문강의 발원지에 대해 따지자면, 서두수는 조선의 내지에서 발원하고, 양안의 거민이 아주 많은데다가 집이나 분묘는 모두 연도가 오래되었으므로 이곳은 단연코 도문강의 정원이 아닙니다. 오로지 소백산 동남에서 발원하는 三汲泡 동쪽의 홍단수가 (바로 도문강의 정원에 해당되는데, 그러려면) 당시 응당 삼급포 일대의 분수령 위에서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웠어야만 비로소 비문에서 말하는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도문이라”는 여덟 글자와 일치하게 됩니다. 그런데 安邊府使는 시종 비석과 돌더미를 근거로 고집하면서, 또한 비문에서 말하는 “동쪽은 토문”의 토문이 바로 황하송구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황화송구자의 양쪽 언덕이 마치 문처럼 생긴 흙무더기 때문이라면서 토문강이 바로 이 土門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실로 삼는 말이 아주 교활합니다. 저희들은 이 일을 응당 타협해서 마무리해야지 억지로 강요해서 마무리할 수는 없었으므로 피차 각기 지도를 가지고 돌아가 보고하기로 하였습니다.
 

(길림장군이 생각건대) 지도와 설명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른바 홍단수라는 것은 바로 『直省輿地全圖』에 나오는 소도문강입니다. 서두수는 平甫坪 위에 이르면 동·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동쪽 줄기는 학항령에서 발원하고 서쪽 줄기는 蒲潭山에서 발원하므로 서두수는 바로 『여도(直省輿地全圖)』에 보이는 대도문강이라는 것을 즉각 알 수 있습니다. 포담산은 바로 『여도』에 보이는 費德里山입니다. 옛것을 들어 지금의 것을 고증하니, 마치 符節 [주002]
번역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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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신(符信)이라고도 하며, 돌이나 대나무·옥 따위로 만들어 신표로 삼아 주로 사신들이 소지하던 물건을 가리킨다. 원래 하나이던 것을 두 조각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함께 맞추어 들어맞으면 확인이 가능한 일종의 신분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처럼 딱 들어맞습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작년에 海蘭河를 도문강으로 잘못 지적하였었는데, 지금은 다시 황화송구자에 문과 같은 흙언덕이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땅은 너무도 분명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있음에도 그것을 가리키는 (조선 측의) 주장은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비석과 돌더미를 반드시 증거로 삼아 야 한다고 하는데, 인위적으로 옮길 수 있는 비석은 정해진 위치가 없지만, 문서에는 확실한 증거가 남아 있어 실제로는 강을 경계로 삼는다는 것을 어찌 안다고 하겠습니까? 또한 조선 백성이 오래도록 이 지역을 차지하여 살면서 몰래 여기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님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界碑 동쪽의 황하송구자는 본디 송화강의 발원이지 결코 도문강의 발원이 아닌데 말입니다. 해당 위원 등은 말하기를 “당시 경계를 정하여 비석을 세운 곳은 응당 三汲泡 일단의 분수령 위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비록 포담산의 위치가 지도와 확실하게 들어맞는 것만은 못하지만, 단지 그 거민들이 아주 많고, 과격한 일에 나서지도 않았기 때문에, 서로 공평하게 얻을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고, 게다가 중국이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뜻을 잃지 않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공동감계 상황과 함께 지도를 아울러 귀 아문에 보내니 대신 상주하여 상유를 내려주시도록 간청해주십시오.
또한 1월 14일 북양대신의 다음과 같은 자문을 받았습니다.
朝鮮商務를 감독하는 道臺 원세개가 조선 의정부의 답장 조회 및 『承文院故實』초록 1건, 지도 1장을 보내면서 자문으로 전달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같은 날 북양대신의 다음과 같은 자문을 받았습니다.
조선국왕의 자문을 받았는데, ‘대체적인 윤곽을 가렸으므로 비문과 돌더미 그리고 토문이라는 글자를 근거로 삼고자 하니 검토하고 대신 상주해 주십시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총리아문의) 신 등이 『欽定皇朝通典』·『文獻通考』를 삼가 살펴보니 모두 길림과 조선은 도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실려 있고, 또한 『欽定會典圖』에도 대도문강이 장백산의 동쪽 기슭에서 나와 두 물줄기가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르며, 소도문강은 그 북쪽 산에서 나오는데, 두 물줄기가 동남으로 흘러 합류하며, 또한 동쪽으로 寧古塔城의 남쪽 경내를 지나 噶哈里河와 만난 다음 동남으로 흐르면 북쪽에서 두 작은 물줄기가 합류하며, 琿春城의 서남을 지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강희 50년 5월 5일 다음과 같은 상유를 받은 바 있습니다.
(짐이) 전에 특별히 계산을 잘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파견하여 동북일대의 산천형세를 모두 天上의 경도·위도에 따라 추산하고 상세하게 지도를 그리게 하였다. [그것을 보면, 混同江은 장백산 뒤에서 흘러나와 船廠 打牲烏喇를 거쳐 동북으로 흐르다 黑龍江을 만나 바다로 들어간다. 이곳은 중국 땅이다. 압록강은 장백산에서 동남쪽에서 흘러나와 서남으로 흘러가며, 鳳凰城과 조선의 義州 사이에서 바다로 흘러든다.] 압록강 서북은 중국의 땅이고, 강의 동쪽은 조선 지방으로 강을 경계로 삼고 있다. 토문강은 장백산 동쪽으로 흘러나와 동남으로 흐르다 바다로 접어든다. 토문강의 서남은 조선 땅이고, 강의 동북은 중국 땅인데, 역시 강을 경계로 삼고 있다. 이곳은 모두 분명하지만, 압록강과 토문강 사이의 땅은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전에 部의 관원 2명을 鳳凰城에 보내 조선인 李玩枝 事件을 공동으로 재판할 때, 또한] 打牲烏喇總管 穆克登[을 같이 가게 하였다. 그들이 훈시를 요청하였을 때 짐은 일찍이 몰래 다음과 같은 유지를 내린 바 있다. 너희들은 이번에 가서 아울러 그 지방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조선 관원과 함께 강을 거슬러 올라가되, 만약 중국에 속한 땅으로 갈 수 있으면 조선 관원과 함께 중국에 속한 땅으로 가고, 혹 중국에 속한 땅에 장애가 있어 통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너희들은 모두 조선에 속하는 땅으로 가도록 하라. 이 기회를 틈타 갈 수 있는데 데까지 두루 가서, 상사하게 살펴봄으로써, 변계를 확실하게 조사하여 돌아와 상주하라. 생각건대 너희들은 이미 그곳에 출발했을 것이니, 이번에는 그 지방의 상황에 대해서는 대체로 파악하였을 것이다]을 파견하여, 거기에 가서 변계를 살펴보게 하라.
또한 이해 8월 4일에는 다음과 같은 상유가 내려졌습니다.
전에 烏拉總管 穆克登을 파견하여 (봉황성에서 장백산에 이르는) 변계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들이) 이미 조사한 지역의 지도를 그려 바쳤으나, 길이 멀고 물길이 커서 (그 때문에) 지정한 곳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내년 봄(얼음이 녹을 때)에 다시 의주에서 (작은)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고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 이르면) 육로로 길을 바꿔 토문강을 찾아가 조사하도록 하라.
(총리아문의) 신 등이 거듭하여 궁리해보니, 강희 연간에 관원을 파견하여 감계를 하였지만, 『흠정회전』이나 『欽定三通』은 모두 건륭 연간에 들어온 이후에 만들어졌으므로 (근거가 되기 어렵지만), 이른바 『一統輿圖』 [주003]
번역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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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통여도』는 앞서도 나왔지만 『황조일통여지전도(皇朝一統輿地全圖)』를 가리킨다. 청대에 이조락(李兆洛)과 동방립(董方立)이 그린 중국전도(中國全圖)로 도광(道光) 12(1832)년 처음 간행되었는데, 강희·건륭 이후 가장 좋은 목각판본 지도로 일컬어진다. 주로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와 『건륭내부여도(乾隆內府輿圖)』를 기초로 행정구역이나 물길의 변화를 참작하여 수정하여 만들었다고 하며, 경도와 위도 역시 모두 첨가되어 있다.

에 나타나는 산천의 맥락은 자연히 아주 분명하게 고증되어 있어 확실한 의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산 이름이나 강 이름은 방음에 차이가 있고, 또한 옛날과 지금의 각 지도를 비교해보면 방위나 곧고 비스듬한 점에 또한 여러 차이가 있습니다.
양쪽에서 다투니 반드시 절충되는 점이 있어야 비로소 감계 결과를 확정할 수 있고, 현재 이 사안에서는 응당 구분해서 가려야 할 것이 세 가지, 고증해야 할 것 다섯 가지가 있으니, 이점에 대해 황태후·황상께 아뢰고자 합니다. 작년 조선에서는 도문강과 두만강이 서로 다른 강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총리아문에서는 이를 반박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조선에서 다시 비문을 억지로 끌어다가 문처럼 생긴 흙벽이라는 주장으로 바꾸었는데, 이미 여러 차례 말을 바꾸었으므로 그 주장은 제대로 먹힐 리 없습니다. 목극등의 비문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동·서의 두 물길을 대조하였고, 또한 도문강이 토문강이라는 것은 강희제의 유지에서 이미 분명히 나타나 있고 다른 지리지에서도 누차 보이는 바입니다. 다만 방음의 가볍고 무거움의 차이가 있어 따로 곡해되는 경우가 있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이것이 응당 구분해서 가려야 할 첫 번째 사항입니다.
조선이 세워지고 난 다음 강희 연간 무렵에는 땅은 많고 사람은 적어 함경도 서북은 모두 甌脫 [주004]
번역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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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탈(甌脫)은 변방, 변경의 황지, 또는 양국 국경 사이의 완충지대를 가리킨다.

지역으로 비워놓았으며, 조선국왕이 보내온 자문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그곳은 종래 백성에게 개간을 허용해온 지역이 아닌데, 근래 유민들이 몰래 들어가 농사를 짓는데 관리들이 수시로 찾아내서 단속하지 못한 것은 저희 책임입니다
그곳은 길림성과 가까워 평소에 출입이 금지된 봉금 지역으로 종전의 中江이나 呼蘭 등지처럼 개간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던 곳입니다. 조선이 평소 藩封의 도리를 지켜 유민이 그것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던 일은 분명합니다만, 최근에는 땅이 적고 인구가 늘어나자 점차 (중국의 변경지역을) 차지해서 개간하게 되었는데, 조선 관리가 왜 봉금령을 분명하게 위반하면서 은근히 땅을 넓힐 계획을 꾸미게 되었는지, 이것이 응당 구분해서 가려야 할 두 번째 사항입니다. 길림장군의 자문에서 이르기를 홍단수는 바로 소도문강이고, 서두수가 대도문강, 포담산이 비덕리산이라고 했습니다만, 이것은 아직 확정적인 것은 아니고 좀 더 따져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일통여도』에 보이는 홍단수는 바로 紅丹河로 무산의 남쪽에 있어 무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소도문강과 관계가 없음은 곧 알 수 있습니다. 서두수는 홍단수의 남쪽에 있고, 또한 지도의 길주 내지에 있는 학항령에서 발원하므로 대도문강이 아니라는 점도 확인이 됩니다. 비덕리산은 흑산의 남쪽·도문강의 북쪽에 있어 서두수의 발원지인 포담산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이런 것들은 반드시 보조증거가 확실해야만 비로소 단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응당 구분해서 가려야 할 세 번째 사항입니다.
조선경내의 무산 동쪽에 있는 會寧·鐘城·穩城·慶源·慶興과 이 5府 동쪽의 鹿屯島 海口는 도문강이라는 천연의 경계가 자리 잡고 있으면서 경계를 구분하고 있어 조금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습니다. 피차간에 확정이 되지 못한 곳은 무산 서쪽에서 穆克登이 석비를 세운 곳까지의 땅입니다. 이 280여 리 사이는 바로 강희제의 유지에서 말하는 이른바 “두 강 사이의 부분으로 잘 알지 못하는 땅”이며, 이곳을 반드시 세밀하게 고찰해보는 것이 바로 감계의 요령일 것입니다. 해당 위원들이 말하는 거리는 단지 토착인들의 이야기에만 근거한 것이라 충분히 믿을 만한 증거는 되지 못하므로, 또한 위도를 측량해서 증거로 삼아야만 제대로 처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응당 고증해야 할 첫 번째 사항입니다.
또한 이 280리 사이의 땅은 西豆水 쪽으로 뻗어 길주 경내로 들어가고, 남쪽으로 뻗어 甑山 [주005]
번역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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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甑山)은 소백산(小白山)으로부터 뻗어 나온 산줄기(支脈)로 소백산 동쪽 180리 해당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산 남쪽은 홍단수(紅丹水)이고, 북쪽은 석을수(石乙水)이며, 이 산줄기는 석을 ·홍단 두 물줄기 사이에서 끝난다.

으로 꺾어 들어갑니다. 무릇 경계를 가르는 것은 산세를 따르거나 혹은 물 모양을 따르거나 하는데, 결국은 강의 발원지를 찾는 것이 주가 되며, 동서 쪽 사이를 새끼줄로 맨 듯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나뉘는 것은 아닙니다. 界碑는 경우 몇 자 정도의 크기에 지나지 않으니 월간한 백성이 몰래 북쪽으로 옮겨놓았을지도 모른다고 길림장군이 지적한 문제도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검토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응당 고증해야 할 두 번째 사항입니다.
『會典』에 실려 있는 소도문강이 대도문강 내지의 북쪽에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도문강이라고 하는 것은 장백산 동쪽 기슭에서 나와 두 물줄기가 합류한다고 하는데, 이 두 물줄기는 반드시 이름이 있을 터인데, 방언에 의하거나 그 지도상의 방위로 가려보더라도 홍단수 상류의 두 물줄기인지 아닌지, 아니면 다른 이름이 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응당 고증해야 할 세 번째 사항입니다.
목극등의 비문을 상세히 살펴보면 단지 “유지를 받들어 변경을 조사하는데, 여기에 이르러 둘러 보니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고 돌에 새겼을 뿐이지, 비문에는 결코 경계를 나눈다(分界)는 말이 없습니다. 단지 두 물줄기의 모습을 말했을 뿐이니, 당시 비석을 세운 곳이 반드시 당시 경계를 나눈 곳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왜 이것을 고집하면서 경계를 나눈 확실한 증거라고 하는지, 이것이 응당 고증해야 할 네 번째 사항입니다.
또한 비문에 실려 있는 “둘러본다”는 말은 당연히 강희제의 聖諭를 받들어 강을 경계로 삼는다는 뜻을 뭉뚱그려 이야기한 것이므로, 만약 반드시 자세하게 나누어서 이야기해야 한다면, 압록강의 발원은 압록이라 하지 않고 建川溝라고 하므로 도문강의 발원도 반드시 도문이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경우입니다. 중국의 濟水는 그 발원을 沈이라 하고 漢水는 그 발원을 漾이라고 하지만, 침과 양은 여전히 제수나 한수와 같은 큰 강의 이름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큰 강으로 작은 강을 통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홍단수만 가지고 도문강의 발원이라고 총괄해서 지목할 수 없는 것일까요? 이것이 응당 고증해야 할 다섯 번째 사항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조선은 대대로 번봉의 자리를 지키면서 그 직분을 따라왔습니다. 그 유민들이 차지해서 개간한 땅은 길림에 속하는 곳은 당연히 유민들을 적절하게 거두어들이거나 아니면 중국의 판도에 편입하고, 조선에 속하는 것은 당연히 옛날의 경계를 분명히 밝히고 경계비를 추가로 세워 영원히 분란을 잠식시켜야 할 것입니다. “비석은 정해진 위치가 없지만, 문서에는 확실한 증거가 남아 있다”는 길림장군의 지적은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 이야기입니다. 결국 반드시 도문강을 분명하게 확정해야만 경계가 분명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은 藩封에 대해서 원래 항상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의 영토는 중국에서 관리하며, 또한 조금도 그 안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허용할 수 없으므로, 응당 길림장군에게 즉시 변경의 상황과 지도에 익숙한 관원을 파견하고 이상에서 서술한 각 사항에 따라 세밀하게 공동감계를 실행하여 경계를 설정하고 유민을 적절하게 안치시킴으로써 藩服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변민의 생업을 안정시키도록 지시를 내려주실 것을 간청하고자 합니다. 길림과 조선의 감계에 관련된 모든 사항에 대해 주접을 갖추어 아룀과 동시에 문건과 지도 등을 군기처로 보내 참고하도록 하였으며, 엎드려 황태후·황상께서 살펴보시고 지시를 내려 주시기를 기다려 그에 따라 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삼가 주를 올립니다.
광서 12년 3월 25일, 군기대신은 다음과 같은 상유를 받았다.

 
논의한 대로 하라.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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