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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이 도문강(圖們江) 감계(勘界) 문제에 대해 보낸 자문(咨文)을 올리는 북양대신(北洋大臣)의 문서

조선국왕이 도문강 감계 문제에 대하여 咨文을 보내왔습니다(朝鮮國王咨開圖們江勘界情形).
  • 발신자
    北洋大臣 李鴻章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6년 1월 14일 (음)(光緖十二年正月十四日) , 1886년 2월 17일 (光緖十二年正月十四日)
  • 문서번호
    1-3-1-31 (1112, 2019a-2024b)
1월 14일, 북양대신 이홍장이 다음과 같은 문서를 보내왔다.
내용 요약:조선국왕이 [강희 연간의] 도문강 감계에 대한 자료를 보내왔으니 검토하고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별지: 조선의 도움을 받아 백두산 국경 조사를 처리하라는 예부(禮部)의 자문(咨文)
 

(1) 「예부에서 알립니다」(예부에서 백두산의 국경 조사를 조선(한국)에서 도움을 받아 처리하라고 통보한 咨文)

예부에서 알립니다. 강희 50년 8월 4일 大學士 溫達 등이 상주한 뒤 다음과 같은 상유를 받았습니다.
올해 穆克登 등이 鳳凰城에서 長白山까지 중국 변경을 조사하려 했으나, 길은 멀고 물줄기는 커서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내년 봄에 얼음이 줄어드는 시기를 기다려 司員을 따로 파견하여 목극등과 같이 義州江의 발원지에서 작은 배를 만들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도록 하라. 만일 작은 배가 나아가기 어렵게 되면 육로를 경유하여 토문강으로 가서 중국지역을 조사하라. 이번에 가는 것은 특별히 중국 변경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니, 조선국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다만 중국 변경 내에서 길이 요원하고 지역이 너무 험하여 혹 중도에서 장애가 나타나면 조선국으로부터 약간 도움을 받도록 하라. 이런 사정에 대해 예부는 조선국에서 올해 進貢을 하러 온 관원에게 알리고 그로 하여금 자문을 베껴서 국왕에게 전하게 하라.
 
(이러한 상유를 받았으므로 예부에서는) 조선국에서 진공하러 온 正使 礪山君 李枋 등에게 알리고 글을 베껴서 조선국왕에게 가져가게 하며, 곧장 응당 조선국왕에게 알려야 합니다. 이에 응당 자문을 보내니 살펴보고 시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강희 51년 2월 7일
별지: 목극등(穆克登)에게 백두산 험로(險路)를 만류하는 조선 접반사(接伴使)의 문서
 

(2) 「(조선의) 접반사가 백두산에 함께 오를 것을 요청한 문서」

조선국 접반사 議政府 右參贊 朴權과 咸慶道觀察使 李善溥가 欽差大人 烏拉總管 閤下께 삼가 再拜하고 글을 올립니다. 삼가 대인께서 皇命을 공경히 받들어 힘들게 遠邦에 오셔서 산천을 모두 거치고 온갖 험난함을 맛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뜻과 기세가 더욱 강해지시고 용감히 나아감을 게을리하지 않으시니, 최선을 다하는 뜻과 충성은 실로 공경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저희들은 외람되이 대인을 인도하는 임무를 맡게 되어 직접 뵐 수 있으니, 감히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쏟아 저희 임금께서 중국을 존경하는 뜻을 감히 본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궁벽한 변방의 郡邑에 물품과 인력이 거의 없어 모시는 예절이 모양을 갖추지 못해 하루 종일 불안해하였고, 오직 아래에서 죄를 얻게 될까 저희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 합하께서 곡진히 賑恤을 베푸셔서 대단히 절약해주시고 음식은 모두 각하의 行廚에서 쓰시며 조금도 조선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시니, 감격한 나머지 부끄러운 마음 깊고도 깊었습니다.
전해 들으니 합하께서 두 강의 발원지를 살피기 위해 장차 백두산 정상으로 향할 것이라 하는데, 저희들은 이에 몹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 정상 호수의 물이 넘쳐 서쪽으로 흘러내려 압록강의 상류가 됩니다. 그러나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그 사이가 몇백 리이며 모두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깊고 험한 골짜기입니다. 사냥꾼과 화전민도 겨우 헤쳐 갈 수 있으니, 蜀道주 001
각주 001)
촉도(蜀道)는 촉, 즉 오늘날의 사천성(四川省)으로 통하는 험난(險難)한 길이라는 뜻이다. 유명한 시인 이백(李白)의「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는 사천으로 가는 길의 어려움을 ‘푸른 하늘을 오르기보다 어렵다(難於上靑天)’고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인정(人情)과 세로(世路)의 어려움을 비유(比喩)하여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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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井陘주 002
각주 002)
정형(井陘)은 한(漢)나라 장수 한신(韓信)이 조나라를 공격할 때 물을 등지고 진을 펼치는 배수진(背水陣)을 사용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장소(오늘날의 하북성 정형현)를 가리킨다. 장수들이 배수진을 친 이유를 묻자 그는 “병법에도 ‘죽을 자리에 빠진 다음에 삶을 꾀할 수 있고, 죽을 자리에 들어간 다음에야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답하였다 한다. 이에 대해서는 『사기(史記)』권92「회음후한신열전(淮陰侯韓信列傳)」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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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그 험난함을 비교하기에 부족합니다. 지금 합하께서 귀하신 몸으로써 헤아릴 수 없는 땅에 가벼이 가신다면 아마도 神明의 도움이 있더라도 필히 가는 중에 곤란한 일을 당하실 것이니, 이것이 저희들이 불안해하며 걱정하는 이유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번 교계를 살펴보는 일은 실로 황상께서 조선을 염려해 주셔서 간악한 백성이 국경을 넘나들며 말썽을 일으키는 폐단을 막으려는 데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대인께서 반드시 몸소 가서 보려 하시는 것도 직분상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산길의 험준함이 그와 같으니 귀하신 몸으로 온갖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나라일을 실행하려는 정성이 비록 간절하고, 지시를 받은 훈계 또한 아주 막중한 것이라 하더라도 합하께서는 이에 대해 다시 한 번 논의하여 신중하게 할 여지는 없겠습니까?
또한 한 가지 일에 대해, 극히 외람되고 또한 죄를 얻는 점도 알지만, 망령되이 (대인의) 너그러운 관용을 믿고 이 기회를 빌려 아뢰고자 합니다. 지금 합하의 행차에 다만 筆帖式·大通官 각 1명 및 甲軍 20명만을 대동하고 있은 즉 간소함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는 말 및 식량을 실은 말이 모두 38마리이며 말마다 마부가 딸려 있습니다. 조선 관원 가운데 대인의 행차를 뒤따르는 사람이 또한 5~6명에 이르고 이들도 각기 타는 말과 마부, 하인이 있습니다. 아울러 길을 찾고 여는 사람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거의 70여 명에 이릅니다. 한 사람이 각기 15일치 식량을 가지고 가는데, 길은 험하고 말은 약하여 무겁게 실을 수 없고, 만일 말이 가지 못하게 되면 사람이 짐을 지고 가야 할 것이니, 응당 데려갈 숫자는 말은 80여 필, 사람은 130여 명에 이르게 됩니다. 장백산의 높이와 크기는 海內 으뜸이라 비록 한여름이라도 빙설이 녹지 않습니다. 하물며 지금 비가 연일 계속 내리는 것으로 보아 이미 장마의 기운이 있습니다. 만일 계곡에서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친다면 많은 사람과 가축이 반드시 죽거나 다치거나 하는 우환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합하께서 沿路를 지나오신 것을 보면 인자하다는 명성이 자자하며, 오직 한 가지라도 폐가 생길까, 한 사람이라도 다치게 될까 걱정하시는 것은 아마도 황상이 어린아이를 보살펴 주시는 인자함을 본받으셔서 그러하실 것입니다. 지금 만일 불행히 만에 하나 위와 같은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면 합하의 측은지심으로써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고통을 나누시는 황상의 정사에 대해서도 해를 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희들의 어리석은 생각에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합하께서 혹 수행한 사람 중에 날래고 명민한 자, 세 사람을 뽑아 조선의 역관 및 안내인과 같이 가서 살펴보게 하고, 또 畵師로 하여금 그림을 그려서 돌아오게 한다면 발원지와 산길이 눈과 마음에 분명해질 것이니 아마 이것으로 돌아가셔서 아뢰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합하께서 어떻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또 듣기에 합하께서 저희들로 하여금 수행하지 말고 우선 무산에 가서 기다리게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반드시 합하께서 저희들의 노쇠하고 병약한 상황을 걱정하셔서 이런 곡진하게 걱정해주시는 가르침을 내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임금의 명을 받아 흠차대신의 행차를 접대해야 하므로 스스로 편안한 곳에 있으면서 합하께서 홀로 험한 길을 무릅쓰게 한다면, 이는 실로 의리와 직분상 결코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삼가 원컨대 합하께서 너그러이 살펴 주셔서 특별히 저희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뒤따를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강희 51년 5월 7일
별지: 조선 접반사(接伴使)의 만류를 거절하는 목극등(穆克登)의 답서(答書)
 

(3) 「칙사(목극등)가 답장으로 보낸 문서」

보내온 서한을 보니 장백산이 험준하고 행차하기 어려워서 내가 헛된 발걸음을 할 수 있는 상황을 갖추어 이야기하였으니, 나를 위한 계산이 정말로 상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사람의 진실한 정성이 아니라면 어찌 간곡히 정성을 다함이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본인은 몸소 황상의 유지를 받들었기에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피하지 않을 터인데 어찌 어려움을 피해 쉬운 것을 택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황제께서는 하늘이 사랑하는 자식이어서 하늘이 필시 소리 없이 도울 것이니, 너무 얽매여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또 서한의 뜻을 살펴보면 접반사 가운데 한 명이라도 따라갈 것을 간곡히 청하고 있는데, 이는 진실로 임금이 명한 뜻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니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다만 산길이 가파르고 험난한 곳을 넘고 위험한 곳을 확인해 나가려면 모두 각자 걸어서 가야 하는데, 당신들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은 따라가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고, 만일 함께 간다면 반드시 공무를 그르칠 것이니, 결코 당신들과 동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요청하지 마십시오.
강희 51년 5월 8일.
별지: 토문강(土門江)에 목책(木柵)을 설치하는 사안에 대한 칙사의 자문(咨文)
 

(4) 「칙사가 木柵을 설치하는 것이 적절한지 아닌지 묻고 논의하는 咨文」

황상의 유지를 받들어 변경을 조사하는 穆克登이 조선의 접반사와 관찰사에게 변경 업무에 대해 자문을 보내 알립니다. 내가 친히 白山에 이르러 압록·토문강 두 강을 살펴보니 모두 백산의 근저를 따라 발원하여 동서 양변으로 나뉘어 흐르고 있습니다. 원래 강북을 중국의 영역으로 삼고, 강남을 조선의 영역으로 삼은 것은 역사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논의할 대상이 되지 못하기에 두 강이 발원하는 분수령의 가운데에 비를 세웠습니다. 토문강의 원류로부터 물길을 따라 내려와서 살펴보니 물이 수십 리를 흐르다가 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바위틈을 따라 지하로 흐르다가 백 리쯤 아래에 이르면 비로소 큰 물줄기로 다시 드러나 무산으로 흘렀습니다. 물이 흐르는 양쪽 둔덕에는 수풀이 별로 없고 땅이 평평해 사람들이 邊界임을 알지 못하며, 그 때문에 국경을 넘나들면서 집을 지어서 길이 혼잡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접반사·관찰사와 함께 상의하니, 茂山과 惠山이 가까운 물이 없는 곳에 굳건한 경계표시를 세워 사람들로 하여금 변계가 있음을 알게 하여 감히 월경하여 말썽을 일으키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아마도 황제께서 백성을 아끼시는 지극한 뜻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며, 양쪽 국경도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이에 상의하기 위해 자문을 보냅니다.
강희 51년 5월 28일
별지: 토문강(土門江)에 목책(木柵)을 설치하는 문제에 대한 보고 문서
 

(5) 「목책을 세우는 문제에 대한 보고」

조선국 접반사 의정부 우참찬 박권,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 등이 삼가 보고를 올립니다. 경계를 살펴 정하고 나무울타리를 세워 표시함으로써 나중의 폐단을 막고자 합니다. 삼가 대인께서 황명을 받들어 조선에 힘들게 왕림하셨는데, 험하고 힘든 일을 겪으시면서 교계를 조사하고 분수령 위에 비를 세워 표지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또 토문강의 원류가 눈에 보이지 않게 복류하므로 명백함에 흠이 생길까 걱정하여, 이미 지도와 책으로써 친히 (경계를) 지시하시고, 울타리를 세울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다시 직접 물었으면서도 여전히 그 일 처리가 꼼꼼하지 못할까 걱정하셔서 이렇게 자문을 보내 다시 물어보신 것 같습니다. 위로는 황상께서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인자함을 몸 받으시고, 아래로는 조선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하여 거듭 당부하면서 자세히 물으시는 바가 이와 같으시니, 그 감격스러움은 무엇에도 비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 합하께서 나무울타리를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자세히 물어봐 주셨습니다. 저희 생각에 나무울타리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계책은 아니라고 여겨서, 혹 흙을 쌓거나, 혹 돌을 모으거나, 혹 나무를 키워 울타리를 삼는 것이 어떤가, 그리고 농한기를 틈타 공사를 시작하겠다는 뜻과 중국에서 사람을 보내 감독할 것인지 삼가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대인께서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미 경계를 결정한 후이므로 표식을 세울 때에 아마 중국에서 사람이 가서 감독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농민을 동원해서 일을 시키지 마십시오. 또한 하루아침에 해야 할 급한 일이 아니니 監司가 주관하여 편리한 대로 공사를 시작하여 비록 2~3년 후에 마친다 하더라도 역시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매년 節使를 보낼 때 공사의 상황을 파악하여 通官에게 말하여 내게 전달된다면 황상께 전달할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사퇴한 다음 이런 뜻을 저희 국왕께서 아뢰었습니다. 자문에서 말씀하신 양쪽 국경에 아무 일도 없게 하는 방안은 이것 외에는 더 이상 여쭐 바가 없습니다. 또한 저희가 감히 자문으로 답장을 하기에는 불편하여 삼가 이러한 보고의 형식으로 아뢰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합하께서 곡진히 인자하신 성찰을 베풀어 주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이에 응당 보고를 갖추어 보내는 바입니다. 이상입니다.
강희 51년 6월 2일
별지: 국경을 획정한 일에 대해 감사를 전하는 조선국왕의 표문(表文)
 

(6) 「조선국왕이 定界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表文」

조선국왕[성명 생략]이 말씀드립니다. 지난 여름 중국사신께서 경계를 살피러 오셔서 조선에서 편의를 제공하도록 번거롭게 하지 않으면서도 변경의 경계를 바로잡아 주심으로써, 황상께서 작은 나라를 어여삐 여기는 은덕으로 간악한 백성이 국경을 넘나드는 근심을 거의 없앨 수 있게 되었으니, 조선의 군신은 머리를 모아 感頌하며 하늘을 우러러 사랑하고 떠받드는 마음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삼가 表文을 올려 감사를 드리는 바이니,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제가) 제후의 법도를 삼가 지키고 있음에, 외람되이 먼 나라를 안무해주시는 은덕을 입어 황상의 사절이 먼 곳까지 와서 직접 경계를 살피시어, 다행함이 처음의 기대를 넘어서서 마음속 깊이 감격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창성한 때를 만나 어설프게나마 (선조의) 유훈을 받들며 궁벽하게 下土에 살면서 황상을 떠받들기 위한 정성을 헛되이 쏟고 있으나, 황상께서 內封과 마찬가지로 대우해 주셔서 오랫동안 하해와 같은 교화에 무젖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사절이 친히 왕림하여 특별히 변경을 밝혀 닦으시고 양쪽 지역의 禁地를 엄격히 정하여 강물로 경계로 삼으셨으며, 산의 남북을 표시하여 돌에 새겨 세웠습니다. 이러한 일을 하면서도 조선에서 접대하는 비용을 덜어주는 데에도 몹시 신경을 쓰고, 간악한 백성이 국경을 넘나드는 우환을 없애 주시어 영원히 유지될 방안을 만들어 주셨으니, 은총이 베풀어지는 바에 대해 너무 황송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는 대개 황제 폐하의 功과 參을 모두 길러 주심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業光이 거듭 비춤은 동물과 식물을 막론하고 모두 이에 호응하고, 혜택이 널리 미침은 뭍과 바다를 막론하고 서로 이어질 정도입니다. 聲敎가 멀리까지 미쳐 심지어 외진 곳에 있는 藩邦까지도 남다른 은혜를 입게 되었으니, 신이 어찌 어리석지만 힘을 다하고, 충정을 더욱 독실하게 하고, 커다란 그늘(과 같은 황상의 은덕)을 우러러 떠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미력한 힘이나마 은혜를 갚는 것을 생각하면서 항상 定制를 준수하고자 하니, 어찌 감히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느슨히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하늘을 보고 황상을 우러름에 그 감정이 격렬해지고 두려워 정말 어찌할 줄 모르겠습니다. 삼가 표문을 바쳐 감사를 드리는 말씀을 아룁니다.
강희 51년 11월 3일 조선국왕이 삼가 표문을 올립니다.

  • 각주 001)
    촉도(蜀道)는 촉, 즉 오늘날의 사천성(四川省)으로 통하는 험난(險難)한 길이라는 뜻이다. 유명한 시인 이백(李白)의「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는 사천으로 가는 길의 어려움을 ‘푸른 하늘을 오르기보다 어렵다(難於上靑天)’고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인정(人情)과 세로(世路)의 어려움을 비유(比喩)하여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정형(井陘)은 한(漢)나라 장수 한신(韓信)이 조나라를 공격할 때 물을 등지고 진을 펼치는 배수진(背水陣)을 사용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장소(오늘날의 하북성 정형현)를 가리킨다. 장수들이 배수진을 친 이유를 묻자 그는 “병법에도 ‘죽을 자리에 빠진 다음에 삶을 꾀할 수 있고, 죽을 자리에 들어간 다음에야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답하였다 한다. 이에 대해서는 『사기(史記)』권92「회음후한신열전(淮陰侯韓信列傳)」을 참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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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이 도문강(圖們江) 감계(勘界) 문제에 대해 보낸 자문(咨文)을 올리는 북양대신(北洋大臣)의 문서 자료번호 : cj.k_0001_0030_0010_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