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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토문강(土們江) 경계에 대한 심중을 파악하고 공동 감계(勘界)하겠다는 길림장군(吉林將軍)의 문서

조선이 도문강 경계를 가지고 심중에 교활한 속셈을 가지고 있어, 이미 도문강 경계에 대해 기간이 되면 전력으로 함께 조사하여 모호하게 만들거나 지체하는 일이 없도록 지시하였습니다(朝鮮存心狡賴圖們江界, 已飭屬屆時認眞會勘, 勿令含混稽延).

 
  • 발신자吉林將軍
  • 수신자總理衙門
  • 날짜1885년 8월 12일 (음) , 1885년 9월 20일
  • 문서번호1-3-1-25 (1060, 1938a-1939b)
(길림) 장군아문에서 자문을 보내 알립니다. 올해 7월 17일 북양대신 겸 직예총독의 다음과 같은 자문을 받았습니다.
광서 11년 7월 4일 조선국왕의 다음과 같은 자문을 받았습니다.

 
조선국왕이 자문을 보내 알립니다. 조선의 西北 강역은 원래 土門江을 경계로 하여 왔습니다. 강희 51년 烏喇總管 穆克登이 유지를 받들어 변경을 조사한 다음, 돌에 새겨 분수령 위에 세워놓아, 토문강 이남과 이북으로 중국과 조선의 경계를 삼았던 것입니다. 조선에서는 邊民이 혹시 다투다가 소란을 일으킴으로써 중국에 폐를 끼칠까 염려하여 토문강 이남 지역은 비워둔 채 백성이 들어가 살지 못하도록 해 왔습니다. 최근 종종 그 빈 땅으로 이사하여 집을 짓고 경작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변경 금지령이 오래되면서 점차 해이해졌는데, 이는 진실로 저희 지방관의 책임입니다. 그렇지만 그 땅은 실은 조선 땅이므로 조선 백성이 거기 거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 사람들은 [이런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오히려 두만강을 경계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癸未年(광서 9[1883]년)에 이르러 敦化縣에서 조선 지방관에게 조회를 보내 농민을 거두어들이라고 요구했는데, 경계가 명확하지 않으면 나중에도 양쪽 백성의 다툼이 그치지 않을 것으로 염려됩니다. 그래서 작년 冬至使 兼 謝恩正使 金晩植, 副使 南廷哲이 이에 관한 공문을 예부에 올리고, 아울러 지도와 비문 등은 예부에서 잠시 보존하여 나중에 참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국경에 관한 것이자 나중의 문제와도 관계되는 것이니, 응당 한 차례 조사를 통해 옛 강계를 명확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副司直 李應俊을 파견하여 자문을 보내니, 번거롭더라도 예부상서께서 이 문제를 대신 황상께 상주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인원을 파견하여 조사한 다음 처리하여 옛 강계를 명확하게 하고 변경의 말썽거리를 잠재울 수 있다면 큰 다행이겠습니다. 이에 응당 문서를 갖추어 자문을 보내 알리니, 예부상서께서 살펴보시고 답장을 주시기 바랍니다.
 

本 閤爵大臣이 위 문서를 받아서 예부에 자문을 보내 검토하고 처리하도록 했으며, 아울러 자문을 보내 귀 장군에게 알리니 번거롭더라도 검토하고 적절하게 처리한 후 답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吉林將軍은 광서 7년 李金鏞의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은 바 있습니다.
조선 빈민이 경계를 넘어 황무지를 개간하고, 이미 조선 함경도에서는 그들에게 증명서(執照)를 발급하고 구역별로 나누어 장부에 등록하였습니다. 아울러 조선 穩城府의 兵官 趙秉稷이 직접 제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
 
강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은 北岸에서 나는 것에 의존해서 사는데,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경계를 넘어 경작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단지 [중국 측에서] 각별한 인자함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때 이미 전임장군 銘安과 대신 吳大徵이 당시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길림의 기존 장정에 따라서 조선 백성에게 모두 조세를 납부하게 하고 호적을 조사하여 琿春과 敦化縣이 나누어 관할하게 해달라고 奏請하였고, 이를 재가하는 상유를 받은 바 있습니다. 조선국왕은 바로 뒤이어 습속이 같지 않고 말썽이 생길까 두렵다는 이유로 자문을 보내 예부를 통해 대신 상주를 올리게 하여 그들을 거두어들이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는 길림과 조선이 맞닿은 것이 원래 토문강을 경계로 삼고 있으며, 강의 동남쪽이 조선이고 서북쪽이 길림으로 경계가 분명하여 조금도 의심스러운 것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조선 관리가 태도를 바꾸어 마침내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하고 길림의 海蘭河를 토문강이라고 하면서 곧바로 기존의 강 이름을 일부러 뒤섞어버리고자 하였습니다. 삼가 『欽定盛京通志』 [주001]
번역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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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 연간 황제의 지시로 편찬된 것으로 120권의 분량으로 기존 기록에 미비되었던 성경(盛京) ·흥경(興京) 등의 창건과 태조 ·태종의 정도(定都) 경과를 보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타 건치연혁(建置沿革), 강역의 형승(形勝), 고적능묘(古蹟陵墓), 풍속토산(風俗土産) 등을 다루었다.

와 『吉省輿地圖』를 살펴보니 토문강은 장백산에서 발원하고,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구부러져 조선 땅과의 경계에 이르러 남쪽으로 꺾어져 바다로 들어갑니다. 해란하는 駭浪河라고도 하는데 길림 南崗지방의 二道溝 상류의 秫秸垜嶺에서 발원하는데, 토문강의 발원지와 멀리 수백 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백 수십 리를 흘러서 博爾哈通河로 흘러들어 가고, 다시 동쪽으로 수십 리를 가서 속칭 嘎雅河라고 하는 噶哈里河로 들어가서 다시 남쪽으로 꺾여 십여 리를 흐른 다음 토문강으로 들어갑니다. 강하의 원류가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므로 지금 조선에서 해란하를 토문강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張氏의 모자를 李氏가 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토문과 두만이 실은 하나의 강에 지나지 않고 현지인들의 발음이 조금 다른 것임을 모르고, 조선에서 끝내 두 강으로 나누는 것은 일부러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또한 변민이 문제를 일으킬까 염려되어 토문강 이남의 땅을 비워두고 백성이 들어가서 사는 것을 금지했다고 하는데 거기에서는 해란하를 토문강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강의 남쪽에 있다고 언급된 빈 땅은 실은 강의 북쪽에 있는 땅이 됩니다. 살펴보니 乾隆·道光 연간에 조선국왕이 경계가 되는 땅에 겨우 강 한 줄기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양쪽 백성이 말썽을 일으킬까 두렵다고 하여 차례로 예부에 자문을 보내 강 연안에 땔나무를 캘 땅을 조금 남기도록 奏請한 바 있으니, 이 곳의 빈 땅이 중국에 속하지 조선에 속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강희 연간에 변경을 조사하고 비석을 새겼다는 말은 실로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이미 아주 오래된 일인 데다가, 비석은 옮겨질 수도 있지만 강은 천고에 바뀌지 않는 것이니, 비석을 가지고 논의하는 것은 사실 강을 근거로 삼는 것만 못합니다. 요컨대 조선 백성이 越墾한 땅은 李金鏞의 목록에 따르면 여덟 곳으로 모두 토문강의 북안에 있으며, 조선 관리와 백성은 모두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 두 번 세 번 교활한 억지를 부리는 것은 사실 월간한 백성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마음속과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침 이 문제를 처리하려던 중 이번 달 24일 다시 북양대신이 보낸 다음과 같은 답장 자문을 받았습니다.

 
이미 조선국왕에게 전달하여, 조속히 적절한 사람을 파견하여 날짜를 정해 공동감계를 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아울러 길림장군께서는 지방관에게 수시로 독촉하도록 지시를 전달해 주십시오.
 

(이러한 문서초고를 옮겨 써서 자문으로 전달해 왔습니다.) 그래서 북양대신과 예부에 답장자문을 보내 검토하도록 함과 동시에 아울러 혼춘부도통에게도 자문을 보내 때가 되면 적절한 사람을 골라서 파견하여 확실하게 공동감계를 실시하여 경계를 분명하게 만들되, 불명확하게 하거나 지연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아울러 응당 총리아문에 자문을 보내 보고하니, 번거롭더라도 참고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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