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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계(邊界)를 조사하고 찾아낸 석표명문(石標銘文)과 석편(石片) 문자를 초록하여 입안(立案)을 청하는 문서

관원을 파견해 琿春과 片通 지방의 한·중 접경지역을 조사하여 그리고, 아울러 康熙 53년의 石標銘文과 찾아낸 石片의 문자를 초록했습니다. 이에 立案해주기를 상주하여 청합니다(派員勘査琿春, 片通地方中韓界坻繪圖並錄康熙五十三年石標銘文殘石拓片奏請立案).

 
  • 발신자軍機處
  • 수신자總理衙門
  • 날짜1883년 12월 1일 (음) , 1883년 12월 29일
  • 문서번호1-3-1-09 (792, 1257b-1258a)
12월 1일에 군기처에서 길림장군 希元이 올린 다음과 같은 附片의 초록을 보내왔습니다.
(새로 길림장군에 부임하여) 인계를 받은 서류 가운데, 전에 조선 慶源府의 백성이 片通 지역 내에 새로 토지를 나눠 받은 농민들의 작물재배를 막았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前署將軍玉亮과 督辦甯古塔等處事宜·太常寺卿 吳大澂이 조선의 배신과 함께 「吉林·朝鮮商民貿易地方章程」을 논의하도록 상주를 통해 파견된 형부낭중 彭光譽로 하여금 바로 혼춘부도통과 함께 현지에 가서 片通 지역이 과연 혼춘 소속인지 아닌지를 확인한 다음 상세하게 답변을 올리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 후 곧 해당 郎中의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았습니다.

 
함께 가서 조사해보니 片通 지역에는 上水 石標銘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은 조선에서 明 宣德 연간에 세웠다가, (淸) 康熙 53년에 重刻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찾아보니 中水·下水 石標의 옛터가 있어 글자가 있는 돌 몇 조각을 파냈습니다. 이치로 따지건대 康熙 53년 이전 그곳이 조선의 땅임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康熙 53년 이후 혼춘부도통이 屬官으로 하여금 두루 조사하게 했는데 달리 分界에 관한 사항이 전혀 없으므로, 이에 근거하면 여전히 이곳이 조선 땅이라는 점은 응당 의심할 만한 점이 없습니다. 지도를 그리고 조선에서 처음에 보내온 石標의 전문과 글자가 있던 石片의 탑본을 초록해서 올리면서 지시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邊禁이 이미 풀렸으니 마땅히 조선국왕에게 咨文을 보내 중국·조선 지방관이 沿江 상하의 交界地域을 명확히 조사하고 지도로 그려 立案하는 문제, 그리고 강을 가로막고 있는 조선의 옛 제방 터를 조선국왕에게 공문을 보내 그쪽에서 모두 철거시키도록 하는 문제에 대해 상주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해당 署將軍 등은 세 개의 석표가 있는 옛터를 이미 명확히 확인하여 결코 최근에 침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조선 陪臣 어윤중에게 조회하여 조선 백성에게 알려 각기 그곳에서 안주하게 하여 그 땅을 잃지 않게 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강을 막고 제방을 쌓은 것에 대해서는 水利와 농사에 방해됨이 없을 수 없으니, 응당 상주하여 금지시킴으로써 농토가 유실되고 양쪽 마을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미처 이런 내용을 상주하기 이전에 (전임 장군) 玉亮이 병으로 인해 자리를 비우게 되었고, 吳大澂은 유지를 받아 서쪽으로 옮겨가 버렸습니다. 沿江 경계지역은 토문강 수원을 조사하도록 파견된 팽광예 낭중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알리면 다시 논의하는 것 외에, 해당 낭중의 원 보고문건 등을 초록하고 지도를 베껴 그려 咨文으로 禮部에 보내 검토하게 하였습니다. 응당 附片으로 아뢰어야 할 것이니, 삼가 살펴보시고 예부에 지시하여 자문을 검토한 다음 처리하라고 지시해주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삼가 주를 올립니다.
광서 9년 12월 1일에 군기대신이 다음과 같은 유지를 받았다.

 
알았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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