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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중일한관계사료

변경지역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약탈하고 월경(越境)한 사람을 구류한 사실이 없다는 길림장군(吉林將軍)의 문서

조사해보니, 변경지역 중국인이 무리를 지어 조선에서 말썽을 부리거나, 조선 월경민을 구류한 일이 없습니다(査沿邊華民竝無結夥侵擾朝鮮及羈留該國逃人情事).
  • 발신자
    吉林將軍 富明阿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67년 5월 16일 (음)(同治六年五月十六日) , 1867년 6월 17일 (同治六年五月十六日)
  • 문서번호
    1-2-3-11(59, 71a-75b)
5월 16일, 吉林將軍 富明阿가 다음과 같은 문서를 보내 왔습니다.
올해 5월 11일, 본 아문에서 驛站을 통해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습니다.
조선국의 逃人들을 결코 내지 유민들이 억류・약탈한 적은 없었다는 점을 확인하였으며, 이 내용을 삼가 역참을 통해 상주하여 회답하면서, 지도를 그리고 부연설명도 덧붙여 열람하실 수 있도록 삼가 올리는 바입니다. 살펴보건대, 이전에 총리아문과 예부 등의 아문에서 전후로 咨文을 보내서, 조선국왕이 도망간 촌민들을 잡아달라고 요청한 것과, 러시아인이 경계비 지역에 건물을 지으려 한다는 것을 (알려 온 咨文을 대신) 상주한 주접을 (그에 대해 내려진) 유지와 함께 삼가 초록하여 奴才 등에게 보내어, 그에 따라 처리하도록 지시한 바 있습니다. 奴才 등이 원 주접을 검토하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조선 慶源府 관할 阿山鎭 白顔村의 주민 尹才官 등 9명이 전후로 강을 건너 도망쳤습니다. 30일에는 중국인 수백 명이 무리를 이루어 강을 건너와서, 본 마을에 남아 있던 도망자들의 처자식과 재산, 牛馬 등을 전부 가져갔고, 마을 사람 金應哲 등 6명도 온 집안이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막던 중, 3명이 유탄에 맞아 부상을 당했고, 강변을 지키기 위한 막사도 세 차례에 걸쳐 불에 탔습니다. 범행을 저지른 범인들을 마땅히 하나하나 조사해서 잡아들여야 하겠지만, 국경이 구분되는 곳이라 감히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禮部에서 (이 내용을) 그대로 황상께 대신 상주해주시어, 변방을 지키는 관원들에게 따로 지시하여, 법규를 분명히 하고 위의 여러 범인들도 압송하여 돌려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었습니다.
외국인 12명이 慶興府 東門 밖으로 와서, (그중) 한 사람이 우리나라의 말로 소리 높여 이르기를, “러시아에서 界牌 근처에 건물을 지으려 하는데, 貴府에서 놀라고 의아해할 것 같아서, 내가 都統의 문서를 받들고 먼저 와서 알리는 것입니다.”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날로 강을 건너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보고를 받고, 역임 吉林將軍이 변방 오랑캐의 상황에 대해 보고한 바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다시 살펴보건대, 조선慶源府琿春과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여, 내지 奸民이 남에 이끌려 이익을 좇아 악행을 도왔던지, 아니면 조선 도망자들의 요청으로 그들을 도와주었는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사안은 변경에 관계된 것으로서 속국을 침해한 일이니, 반드시 철저히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응당 吉林將軍에게 지시하여 정말로 중국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가 조선 도망자들의 재산을 가져왔는지, 그리고 건물을 짓는다고 하는데 어느 나라의 경계인지를 분명히 조사하여 밝히게 해야 합니다. 아울러 방어하던 사람이 부상을 당하고 방어를 위해 세운 막사가 불탄 것이 중국인의 소행인지 아닌지 상세하게 확실히 조사하여 사실대로 회답하되, 조금이라도 두둔하는 바가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강변을 지키는 각 초소 관원들에게 충실히 엄밀하게 단속하여, 중국과 조선 백성이 피차간에 몰래 월경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강역을 분명히 하고 邊防을 튼튼히 하도록 엄격히 지시해야 할 것입니다. 조선에서 위의 범인들을 전부 압송하여 돌려 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해서는, 만약 중국 내지에 있다면 곧바로 해당 將軍에게 지시하여 文武官員을 파견해서 조선으로 압송하여 그곳 변경관원에게 넘겨 처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奴才 등은 황상께서 만방을 위무하시는 것을 염두에 두어, 각국이 자기 땅에서 단연코 월경을 하여 문제를 일으킴으로써 이웃 나라에 해를 끼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힘써 노력하고자 합니다. 또한 조선은 我朝에 대해 가장 공순하였으므로, 바야흐로 다사다난한 시절을 맞이하고 있는 그들을 더욱 體恤해 주어, 먼 곳의 사람들을 회유하시려는 황상의 지극한 뜻에 부합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奴才 등은 올해 3월 전후로 문서를 받은 날부터 누차 寧古塔副都統과 琿春協領에게 공문(咨文과 箚文)을 보내, 정확하고 상세하게 조사하여 사실대로 咨文으로 보고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즉 “작년에 무리를 이루어 월경하여 조선 도망자들의 재산을 가져온 사람들이 정말로 중국인들인지, 만약 사실이라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두 몇 명인지, 평소에 어느 지역에 흩어져 살다가 일이 있을 때 어느 곳에서 모이는지, 포위해서 섬멸할 수 있는지, 아니면 방법을 강구하여 쫓아내거나 사로잡을 수 있는지, 그리고 경계비 근처에 건물을 짓고 집을 지은 자들이 있는지, 그리고 건물을 짓고 집을 지은 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어느 나라의 경내에 있는지, 또한 조선에서 (그들을) 막던 사람들은 누구에 의해 부상을 당했는지, 방어하기 위해 세운 막사는 또 어떤 자들에 의해 불태워졌는지,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모두 중국인들의 소행인지 아닌지, 또는 실제는 외국인들이 구실을 만든 것인지, 그리고 奸民이 조선인들을 구류했다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등등의 문제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이러한 간사한 무리들을 체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억류된 조선 도망자들을 조선으로 송환해서 해당 관원에게 넘기도록 하였습니다. 즉 이상의 각 내용에 대해서는 寧古塔副都統과 琿春協領 등에게 각기 咨文과 箚文을 보내어 그 지시에 따라 조사하여, 하루 6백 리의 속도로 서둘러 사실대로 상세하고 분명하게 보고하되, 결코 그들을 두둔해서 탄핵을 당해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2・3월 이래 떠돌던 마적들이 분분히 동쪽으로 옮겨가자, 金을 노리던 비적 무리들까지 잇따라 말썽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寧古塔琿春에서 훈련을 받던 부대는 모두 文武官員의 지휘 아래 이들을 막고 토벌하는데 동원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응당 조사해야 할 위의 사안들이 길이 막혔을 뿐만 아니라, 관청에서도 돌아볼 틈이 없어서 지연되었고, 결국 奴才 등이 누차 엄격히 독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5월 7일에야 비로소 寧古塔副都統 烏勒興阿가 佐領 松恒의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아 전달해왔습니다.
저는 琿春에서 파견된 防禦 永祥과 함께 양국의 언어를 알고 있는 장교와 병사를 데리고 먼저 圖門江 주변 접경지대에서 관할 지역을 상세히 살펴보았는데, (旗民이 아닌) 일반 백성의 戶籍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곳에 비록 평소에 농사를 짓던 사람은 있었지만 얼마 되지 않았으며, 또한 불법을 저지른 바도 없었습니다. 그 외에는 모두 旗人들이었습니다. 몇 차례 돌아다니며 조사하였지만, 월경하여 조선인 도망자들의 재산을 가져온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현재 경내에는 이러한 도망해온 조선인을 억류한 일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위와 같이 비적이 되어 불법을 저지르거나, 游民을 받아들여 월경해서 말썽을 일으킨 적이 결코 없다”는 보증서를 各 旗屯의 嘎山達들에게서 받아냈습니다.
조선에서 방어하던 사람들이 누구에 의해 부상을 당했는지, 그리고 방어를 위해 세운 막사는 또 누가 불태워졌는지 강변을 따라가면서 상세히 조사를 다녔으나,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 정말 물어볼 수도 없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사건이 강의 남쪽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반드시 강을 건너가 慶源府使에게 照會하여, 직접 대면하여 조사해야만 비로소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佐領 松恒과 防禦 永祥이 곧바로 병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가 府使 閔文鎬와 대면하여 소식을 탐문하였더니, 다음과 같이 답하였습니다.
河山鎭 白顔村은 저희 府 동남쪽 100여 리쯤에 있는데, 일전에 大國의 복식을 갖춘 사람들이 도망쳤던 여러 사람들과 함께 뒤섞여 강을 건너와, 도망 중인 사람들의 처자와 재산을 옮겨갔으며, (이때) 金應哲 등도 온 가족이 함께 따라 갔습니다. 당시 이들을 막고 있었던 촌민 金益三金允儉, 尹成習 등이 저항하자, 물건을 가져가던 사람들이 총을 쏴서 金益三 등이 유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다급한 상황이라 심문을 할 겨를이 없어서 어떤 자들인지는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아울러 강변에 방어하기 위해 세운 막사도 이들에 의해 불태워졌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더니, 작년 12월중에 비적 수십・수백이 무리를 이루어 三洞山 부근에 몰려온 적이 있고, 격퇴를 당해 도망간 일도 있었습니다. 해당 府使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원래 慶興府 소관으로, 각자 관할하는 바가 있어 (저는 이에 대해) 단지 듣기만 했을 뿐입니다.
 
佐領 松恒 등은 사건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없어서 더 이상 증명이나 탐방을 할 수가 없어, 해당 府使에게 앞으로 비적이 월경을 한다면 소요를 일으키도록 놔두지 말고 곧바로 섬멸하여, 각자 국경을 지키는 정례를 지키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요청하였습니다. 佐領 松恒은 바로 뒤이어 慶源에서 慶興府로 가서 확실한 탐방을 하려 하였지만, 慶源府使는 공문을 받은 적이 없어 그리로 감히 안내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佐領 松恒 등은 결국 길을 꺾어서 러시아와의 경계비가 있는 곳으로 향하였는데, 琿春 서남쪽 150여 리쯤 되는 곳에 慶興府와 강을 사이에 둔 곳이었습니다. 그곳의 경계비로부터 동쪽으로 반 리 정도 되는 곳에 러시아인들이 새로 지은 초소건물 하나와, 지키는 사람 14명이 있었으며, 그 외에 다른 사람이나 따로 지은 건물은 전혀 없었습니다.
佐領 松恒 등은 거기서 맞은편으로 강을 건너가 다시 慶興府로 가서 三洞山 부근의 사건을 조사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려 강물이 불어서 건너지 못하고 있던 차에, 마침 慶興府에서 강 건너를 보다가 두 사람을 뗏목을 타고 강북으로 건너게 해서는, “내일 海船을 보내서 안내하겠습니다. 지금은 배가 없습니다.”라는 문서를 전달해 왔습니다. 佐領 松恒 등이 막 답장을 하려던 순간 러시아 경계비가 있는 곳으로부터 지키던 러시아인이 달려오더니,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물었습니다. 佐領 松恒 등은 이에 경계비를 조사하던 중 조선의 어부가 건너왔기에 조사한 것이라고 답하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인은 함께 강을 건널 것을 우려하여 결사적으로 훼방하면서 松恒 등이 다시는 조선인과 말을 나누지 못하게 하였고, 이에 그는 해당 府에서 보낸 원래의 문건에 ‘내일 다시 만날 필요 없겠습니다’라고 적어서 보냈습니다.
佐領 松恒 등은 그 날 해안가의 외진 곳에 머물고, 다음 날 아침 棘心河嚴杵河 일대를 살펴보았는데, 조선의 도망자들이 모두 이 두 곳에서 집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남녀노소가 모두 약 천여 명이었습니다. 다만 그 복색과 모자는 다양하였습니다. 중국식 의관을 한 사람도 있었고, 러시아식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지만, 역시 조선식 복식을 갖춘 사람이 가장 많았습니다. 또 살펴보건대 조선의 소와 수레, 가축, 세간과 비슷한 것들이 무수하였습니다. 그 도망자들에게 몰래 물었더니 黃丹畢朴廣畢, 尹戈金이라는 세 사람이 모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일찍이 崔씨와 韓씨 姓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와서 경작하고 있는데, 본국에서 연이어 흉년이 들고 징병과 징세가 늘어 어쩔 수 없이 도망쳐 나왔습니다. 러시아의 경계비가 있는 산을 거쳐 모두 이곳으로 도망쳤는데, 뜻밖에도 러시아인들이 소와 쟁기, 씨앗 등은 지급하지 않고 단지 땅만 주면서 집도 스스로 짓게 하였습니다. 이때는 고국으로 돌아가려 해도 감히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佐領 松恒 등은 도망자들 속에 중국인이 숨어 있을까 걱정하여 세 가지 의복을 입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상세히 심문하였는데, 모두가 조선 방언을 쓰고 있었으며, 내지 유민으로서 틈을 타서 끼어 든 경우는 없었습니다. 佐領 松恒 등은 몰래 그들에게 돌아가라 권하면서, 원한다면 압송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관원 依虔克什이 와서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였으며, 佐領 松恒 등이 “교계지역을 조사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알렸지만, 조선의 도망자들이 모두 러시아의 관할 아래 있어, 상황을 살펴보건대 佐領 松恒 등이 간섭을 강행하기는 곤란하였습니다. 일이 변방의 국경과 관련된 중요한 업무이므로, 자칫하면 말썽을 일으킬까 두려워 감히 그들을 강제로 송환시키려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棘心河嚴杆河 일대에는 조선의 이러한 도망자들 외에도 외진 곳에 고기 잡는 사람들의 임시숙소가 있어 고기잡이를 하며 생활을 하는 어부라 칭하는 사람들이 17・8명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은 겨우 사방을 막을 뿐이고, 옷과 신발도 없을 정도인데, 이 어부들 역시 실로 조선에 들어가 노략질하거나 구류하는 일을 할 형편은 아닌 것입니다. 매번 국경지대를 조사할 때마다 항상 만나는 사람들로, 이 어부들의 진술서와 확인서도 받아 함께 寧古塔으로 보고를 올립니다.
(吉林將軍은 寧古塔副都統이 대신 전해온) 烏勒興阿가 咨文을 보내 조사・처리해달라고 한 요청을 받았습니다. 奴才 등이 다시 지도를 상세히 검토하였더니, 현재 경계선 안쪽은 琿春協領衙門의 旗屯에 속하고, 경계선 바깥은 러시아와의 경계입니다. 圖門江 서쪽 조선 각 지방은 비록 우리 국경과 많은 곳에서 맞닿아 있지만 초소 이외에는 인적이 거의 없고, 설사 초소가 있더라도 실제로는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합니다. 또한 河山鎭 白顔村 역시 우리 경계선에 인접해 있고 慶興府慶源府 역시 바로 경계 바깥쪽에 있기 때문에 도망자들은 강을 왕복할 때는 아침에 떠나서 저녁에 돌아올 정도라 두루 단속하기가 어렵습니다. 한편 경계선 안쪽의 旗屯에서는 游民이 들어오는 것을 불허하여 경계선 바깥의 游民이 발을 붙일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강을 건너가 약탈하거나 도망자들을 억류한 사건들은 당연히 중국인(中華人)의 소행이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佐領 松恒 등의 조사에 따르면, 그 도망자 중에는 여러 나라의 복식이 뒤섞여 있어, 그들이 자작극을 벌려 그 힘을 보태려는 것이 아니라고 보장하기도 어렵습니다. 아울러 이전에 러시아인들이 慶興府 동문에서 경계비 부근에 건물을 지을 것이라고 했다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경계비 인근의 거주지에 우마차가 많고, 닭이나 개 등 가축과 세간 등도 아주 많아 사정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지금 조선 도망자들의 재산은 중국인이 강을 건너가 약탈한 것도 아니고, 중국인이 그 도망자들의 처자식을 억류한 사실도 없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 도망자들이 현재 경계비 근처에 세운 건물들은 우리 경내에 있지도 않으며, 우리와 경계가 닿아 있는 곳에서 游民들이 다른 사람에 의해 이끌리거나 이익을 탐하여 악행을 도운 일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마땅히 요청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변경과 관련된 사안이므로 조약에 비추어 각자의 경계를 각자 관리하면서, 경계를 넘어 간섭하여 문제가 생기는 일이 있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강변과 국경을 단속하는 각 초소 관원에게 엄격히 지시하여, 앞으로는 충실하고 엄밀하게 단속하여 서로 월경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강역을 분명하게 하고 변경 방어를 두텁게 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珠渾珠河歡綽霍河, 圖門江 주변 동남 일대에 대해 재차 병력을 헤아려 초소 두 곳을 증설함으로써, 각 초소의 장교・병사들과 협동하여 함께 단속하도록 하는 것 외에, 棘心河嚴杵河 등지는 러시아 경내이고, 거기서 불러들인 조선의 도망자를 압송하기는 힘들다는 점을 奴才 등이 유지에 따라 확인한 경과를 驛站을 통해 긴급히 답장으로 上奏하고, 아울러 지도를 그리고 부연 설명도 덧붙여 열람하시도록 올려, 兩宮皇太后와 皇上께서 열람해주시기를 엎드려 요청하는 바입니다. 삼가 주를 올립니다.
이러한 上奏에 대해서, 마땅히 원 주접을 초록하여 총리아문으로 올려 검토해주시기를 요청해야 할 것입니다.

색인어
이름
富明阿, 尹才官, 金應哲, 烏勒興阿, 松恒, 永祥, 松恒, 永祥, 閔文鎬, 金應哲, 金益三, 金允儉, 尹成習, 金益三, 松恒, 松恒, 松恒, 松恒, 松恒, 松恒, 松恒, 松恒, 黃丹畢, 朴廣畢, 尹戈金, 松恒, 松恒, 依虔克什, 松恒, 松恒, 烏勒興阿, 松恒
지명
조선국, 조선, 慶源府, 阿山鎭, 白顔村, 慶興府, 러시아, 조선, 慶源府, 琿春, 중국, 조선, 중국, 조선, 조선, 조선, 寧古塔, 琿春, 琿春, 圖門江, 조선, 河山鎭, 白顔村, 三洞山, 慶興府, 慶源, 慶興府, 러시아, 琿春, 慶興府, 慶興府, 三洞山, 慶興府, 러시아, 조선, 棘心河, 嚴杵河, 조선, 조선, 조선, 러시아, 棘心河, 嚴杆河, 조선, 조선, 寧古塔, 圖門江, 조선, 河山鎭, 白顔村, 慶興府, 慶源府, 慶興府, 珠渾珠河, 歡綽霍河, 圖門江, 棘心河, 嚴杵河, 러시아,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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