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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NAHF.cj.d_0001_0020_0030_0030ID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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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국(俄國)인들이 국경 경계비 부근에 집을 짓는 일과 관한 조선의 자문(咨文)에 대한 군기처(軍機處)의 문서

러시아인이 경계비 부근에서 건물을 지으려 하여 조선국왕이 대신 상주해달라고 요청한 咨文에 따라 예부에서 대신 상주한 주접과 그에 대해 받은 유지(片交俄人欲在界牌近處築室, 朝鮮國王請代爲轉奏一摺, 所奉諭旨).

 
  • 발신자軍機處
  • 수신자總理衙門
  • 날짜1867년 2월 18일 (음) , 1867년 3월 23일
  • 문서번호1-2-3-03(43, 56b)
二月十八日, 軍機處交出全慶抄摺[詳見密檔].
草目:具奏俄國人欲在界牌近處築室, [주001]
번역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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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界牌’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康熙 28(1689)년 청・러시아 사이의 ‘尼布楚界約’으로 세워진 경계비이다. 이 조약문의 말미에 “중국・러시아・라틴 문으로 이 조약문을 새겨 兩國邊界에 두어 영원히 界牌로 삼는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中俄尼布楚界約」, 朱寰 等編, 『中國對外條約辭典(1689-1949)』(吉林敎育出版社, 1994), p.807). 하지만 이때 양국 경계는 두만강 하구지역이 아니었으므로 본문의 界牌와 맞지 않는다. 따라서 두만강 하류 지역이 중국과 러시아의 경계로 설정된 다음에 세워진 것을 찾아야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1860년에 체결된 「中俄北京條約」에 관련된 조항이 나온다. 즉 北京條約의 기초가 된 “天津條約 제9조에서는 지도를 그리고 紅色으로 교계지역을 나누는데, 지도 위에는 러시아알파벳으로 阿・巴・瓦에서 啦・薩・土・烏까지를 표기”하기로 하였고, “계비를 세운 다음 영원히 바꾸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朱寰 等編, 위의 책, p.820). 그러나 오늘날 남아 있는 界牌는 1886년 吳大澄에 의해 다시 세워진 것이다. 1880년 이후 吉林督辦으로 일하면서 이 지역의 ‘建設’에 큰 공을 세운 그가 1885년 이후 琿春副都統 依克唐阿 등과 함께 다시 경계를 조사하고, 러시아 측과 담판하여 중・러 교계지역에 土字牌 등을 건립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琿春의 두만강 하구에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石刻이 최근 세워졌다.

朝鮮國王請代爲轉奏一摺, 抄錄原奏, 恭錄諭旨咨呈由.

 
이름
全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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