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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키르기스스탄 고대 문화

2) 남부 키르기스스탄 고대 문화

키르기스스탄 남부 지역은 키르기스스탄의 문화가 그렇듯이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이 문화는 유라시아의 고고한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아프리카 대륙은 인류의 발상지다. A.P. 데레뱐코는 면밀한 조사와 축적된 고고학적 자료를 총체적으로 분석하여, 가장 오래된 호모 개체가 행한 두 번의 이주 물결을 분류하였다. 첫 번째 물결은 호모 어게이트(Homo ergaster)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주한 것으로서, 그것은 150만~80만 년 또는 60만 년 전에 히말라야와 티베트의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방향은 아라비아, 파키스탄, 인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등이며, 두 번째 방향은 이란,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몽골, 남부시베리아 등이다. 두 번째 이주의 물결은 45만~35만 년 전 고대 호모 개체의 근동지역에서 유라시아로의 이동과 연관이 있다(Derevyanko, 2005). 모든 나라들이 그런 것처럼 키르기스스탄의 남부 지역에서 발견되는 석기시대 유적의 대부분은 이와 관련이 있다.
석기(유타쉬 사이 유적)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남부 지역에서 이른 석기시대의 것으로 연대가 결정된 유적인 호드자 바키르간 사이, 팔만, 우츠 코르곤, 고드조 카이으이르 등지에는 명확한 층위학적 연결점 없이 단일한 자갈로 만든 석기들(외날찍개, 양날찍개, 긁개 등)이 발견된다(Konoplya, 1959; Ranov, 1968). 셀운구르 동굴에서 출토된 자료들의 연대 문제는 예외적으로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몇몇 연구자는 초기 흉적세의 것으로 연대를 정한다(Islamov, Krahmal' 1995). 그러나 다른 연구자들은 유적의 공방을 아쉘 시기로 보기 보다는 초기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분류하면서 자갈 문화권으로 간주한다[Aniciutkin, Vishnyaczski, 2001-2002; Vishnyaczski, 1996]. 일련의 연구자들은 지질연대학상, 동물지리학상 그리고 화분포자학상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셀운구르를 중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간주한다(Velichko 외, 1990).
키르기스스탄 남부 지역의 중석기시대(무스테리안기) 유적으로는 카프츠이가이, 아이르바즈 1-5, 유타쉬 사이, 사스이크 운쿠르 등이 있다(Okladnikov 외, 1964; Kasimov, 1972; Derevyanko 외, 2001·2003; Charginov, 2003·2007·2007а·2010].
이처럼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자료들을 통해 고대의 인간이 키르기스스탄에 최초로 거주하게 된 것은 이른 석기시대였으며, 석재를 1차·2차 가공하는 자갈 전통을 지닌 민족과 관련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새로운 것이 첨가된 아쉘 전통이 그 지역의 좀 더 오래된 자갈 전통 위에 형성되었다. 이는 셀운구르 동굴에서 발견한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중기 구석기 시대 공업의 형성과 발전은 십중팔구 토착 전통의 석재 가공, 특히 후기 아쉘 전통의 영향을 현저하게 받은 레발루아 기법의 발전된 형태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카프츠이가이산의 전경
후기 구석기시대는 중석기시대(기원전 10~6,000년)로 대체된다. 중석기시대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가장 유명한 유적은 카라수우 강 왼쪽 기슭에 있으며, 나르인 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한 타수 코무르 동굴이다.
생산력 발달, 새로운 형태의 노동 활동 발생 그리고 고용주와 고용인 간의 인간관계 완성은 신석기시대(기원전 6~4,000년)에 이루어진다. 키르기스스탄 남부 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들로는 케트멘 튜빈 계곡, 알라이 계곡, 바트켄 지역, 랴이랴크 지역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넓은 지역으로 이주 하였음을 보여준다.
산양 모양 청동 패식
황금제 사슴
청동기시대(기원전 2,000~2,000년 초)에는 키르기스스탄 남부 지역에서 농업, 목축과 사냥 등을 주로 하는 고대 농경민족과 목축 농경민족이 정주하였다. 주로 남부 키르기스스탄의 계곡 지역에는 추스트 문화를 지닌 고대 농경민족이 거주하였다. 그들의 정주지들은 우즈겐 주와 카라 수우 주의 여러 지역과 오쉬 시 인근 지역에서 발견된다(Bernstam, 1997; Zadneprovsky, 1962·1962а; Tashbayeva, 2000). 마른 가지, 짚, 돌 등을 섞어서 이긴 점토로 만든 집이 거주지로 사용되었는데, 이 거주지를 발굴할 당시에 다양한 가재도구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검은색 물감으로 채색된 삼각형, 마름모꼴, 지그재그 모양의 선, 다양한 기하학적 형상의 문양으로 장식된 점토 용기들이 자주 발견되었다. 주요 생업은 농업인데 주로 밀, 보리, 수수를 재배하였다.
청동제와 석제 농기구를 대체한 철재도구들로 인하여 생산력이 증가되었는데, 이는 공동체의 사회·경제 제도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페르시아가 전하는 자료에 따르면, 키르기스스탄 남부 지역에 거주한 가장 오래된 민족은 사크 민족이고, 그리스가 보유한 자료에 따르면 아시아 스키타이 민족(기원전 8~3세기)이다. 그들은 몇 개의 민족 연합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주거 형태를 갖추었으며, 펠트나 가죽을 입힌 짐마차에서 살았다. 지금까지도 사크 민족의 거주지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이 민족의 대부분이 목축업에 종사하였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황금제 수탉
도자기 제조업, 야금업, 동물 가죽 가공, 방직 등이 발전하였다. 가재도구는 점토, 나무, 가죽, 철과 구리 등으로 제작하였다. 생활 용품과 제례용품들은 종종 야생동물과 가축 형상(스키타이 동물 양식으로 불리는)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교하게 제작되었다(Bernstam, 1952а).
키르기스스탄 남부 지역에 남아 있는 사크 시대 자료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케트멘 튜빈 계곡(차아르 타쉬 자연경계 지역)과 토구즈토르 주(사이말르이 타쉬 자연경계 지역)의 암각화들이라 하겠다. 암각화는 경제활동, 이데올로기, 유목민의 관념 등을 밝혀 주고, 또 조형예술사를 연구하는 데 풍부한 자료가 되어 준다.
고고학적 연구의 성과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키르기스스탄의 사크 민족은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 여러 지역의 민족들과 정치·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회적 불균형 심화, 약탈을 일삼는 무사들, 부를 축적한 종족 지도층, 다른 유목민의 습격 등이 사크 민족의 단결력을 약화시켰으며, 이로 인해 기원전 3세기에 붕괴되었다.
투르케스탄 동부 지역에서 이주한 오손 민족은 기원전 2세기부터 텐산에서 거주하였다. 기원전 2~1세기에 그들은 강력한 민족 연합을 결성하였으며, 영역을 텐산, 알라이, 세미레치에(제투수) 일부 지역을 포함한 이레 강과 발하쉬 호수까지 넓혔다. 오손 민족 연합의 수도는 이스이크 쿨 호수 남쪽 기슭에 위치하였다(Bernstam, 1997). 오손 민족의 주요 활동은 유목형 목축, 즉 말, 염소 그리고 소 사육이다. 그러나 오손 공동체의 일부는 정착 생활을 하였다(Bartol'd, 1996). 쿠르간 발굴 당시 석재 곡물 분쇄기와 수수 등 곡물이 발견됨으로써 오손 민족 사이에서 농업이 행해졌음을 알려 준다. 오손 민족의 텐산 지역 정주에 대한 단편적인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그들이 목축, 농경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제 성향을 지녔음을 추정할 수 있다. 오손의 유목민은 펠트로 만든 천막에서 지냈는데, 고기나 우유를 섭취하였다. 가사 도구로는 주로 점토, 목재, 가죽으로 만든 용기들이 사용되었다. 다량의 제품, 특히 무기들은 철을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가장 발달한 가공업으로는 도기 제작업, 야금술, 목재 가공, 동물 가축 가공과 방직을 수 있다.
오손 민족 연합은 국가 형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다른 유목민들의 잦은 습격, 특히 훈족의 습격이 그들의 사회·경제 발전을 저해하였다. 오손 민족은 훈족과 오랜 기간 전쟁을 벌였다. 전쟁과 지도자들 간의 권력 투쟁으로 인한 내란이 기원전 1세기 중반에 오손 민족 연합의 붕괴를 초래했다.
기원후 1~5세기에 키르기스스탄에는 오손 민족과 함께 오손족과 친족 관계에 있는 민족이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подбойные)와 카타콤 무덤을 남겼다. 그들이 어떤 인종에 속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몇몇 학자들은 장례의식, 즉 (подбой)와 카타콤의 기원을 훈족이나 유연(жужан)족이 텐산으로 유입된 것과 연관을 짓고, 다른 학자들은 중앙아시아에 거주한 그 지역 민족들과 연관 짓는데, 이는 중앙아시아에서 카타콤 무덤이 이미 청동기시대의 사크 민족에 의해 알려졌기 때문이다. 카타콤 무덤을 남긴 주민은 유목과 반정주 생활을 하였다. 그들의 주요 경제 활동은 목축업과 농업이었다. 높은 수준의 수공업, 즉 도자기 제조업, 야금술, 귀금속 세공술, 목재 세공업, 제혁, 펠트천 제작 기술을 보유하였다(Bernstam, 1997; Baruzdin, 1956).
유목민들이 텐산과 알라이에 거주할 때 키르기스스탄 남부의 일부 지역은 페르간 계곡에 위치한 노예국가 다방(파르카나)에 속하였다. 오쉬 주의 여러 지역에는 도시와 주거지의 흔적, 운하, 관개수로, 채광지 등이 남아 있다(기원전 3~1세기). 이 민족들의 주요 경제 활동은 농업이었는데, 밀, 쌀, 보리, 수수, 목화, 알파파, 참외류와 야채류 등을 재배하였으며, 그 밖에도 포도와 야채 그리고 과수 등의 재배업도 발달하였다. 동부 지역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 순종의 말 번식이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경마용 말 형상들은 아라방 마을 근처의 절벽에 그려져 있다. 이 시대는 페르간 역사에서는 노예제도 관계의 발전 전조가 나타난다.
생산력 증가는 그 시대의 경제, 문화 생활의 수준을 높여주었으며, 정주민과 텐산 지역 유목민 사이의 관계를 강화시켰다. 또한 서로의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기원전 7세기~기원후 6세기의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유목 경제와 정주 농업 경제가 동시에 발전하였는데, 특히, 유목 목축업이 우세였다. 공공관계와 생산력이 점차적으로 증대됨으로써 6세기에 봉건제도가 발생하게 되었다.
키르기스스탄 남부 지역의 이후 역사는 투르크, 튜르게쉬, 카르루크, 카라하니드 등의 국가들과 관련되어 있다[История Киргизской ССР(키르기스 연방공화국 역사), 1984].
카라하니드 시대에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문화가 번성하였으며, 생산력이 증대되었다. 카라하니드 시대에 유목민들의 정주화 과정이 촉진되었다. 농경을 함으로써 크고 작은 정착지, 도시, 대상 숙박지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슬람 전통의 영향을 받은 건축술이 발달하였다. 지도자와 카라하니드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마우솔레움들이 지어졌으며, 현재까지도 이 기념물들의 의미는 퇴색되지 않고 있다(Bernstam, 1950). 상품 및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고, 지도층은 아랍의 화폐 체계를 모방한 화폐를 발행하였다.
카라하니드 문화층은 키르기스스탄 남부 지역과 북부 지역의 거의 모든 정착지에 나타난다. 가장 유명한 유적은 부란의 탑과 11~1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우즈겐 건축물 등을 들 수 있다. 이 유적들은 그 시대에 유행한 건축술이었던 구운 벽돌을 이용하여 지어졌다. 그 외에도 미가공 벽돌로 지은 회교 성지의 무덤(참배 장소) 건축물도 유명하다.
키르기스스탄의 중세 후기 유적들을 연구함으로써, 이 지역의 물질·정신 문화의 발전 양상을 좀 더 깊이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칭기즈칸의 내습 이후에는 기존 도시 문화와 정착지들은 쇠퇴하게 되었으며, 주민의 일부는 유목 생활로 전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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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키르기스스탄 고대 문화 자료번호 : ag.d_0006_001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