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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각화

투바 바위그림의 세계

  • 편자
    마리나 킬루노브스카야

Ⅳ. 투바 바위그림의 세계

 투바는 산악지대로 아시아 대륙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투바의 수도 크이즐 시에는 아시아의 지리적 중심지가 있으며, 카 헴과 비 헴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오벨리스크를 세워 그것을 표시하였다. 이곳에서부터 예니세이 강(투바어로 말하자면 울르크 헴)이 시작되며, 그것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헴치크 강의 합류 지점에서 북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바꾸어 서 사얀 산맥을 관통한다. 여기서 총 연장 300km의 소위 ‘예니세이의 사얀 협곡’이 시작되며, 그것은 하카스코-미누신스크 초원의 출구에서 끝이 난다. 오늘날 협곡은 샤얀 수력발전소의 담수로 인하여 물속에 잠겨있다. 울르크 헴 강변은 언제나 사람들이 생활하는데 매우 좋은 조건을 제공해 주었으며, 그래서 고고학적인 유적지들이 풍부하다. 그것들 가운데서 여러 개의 문화층이 있는 바위그림 유적지들이 특히 흥미롭다.
 예니세이와 그 지류를 따라 투바와 남-동부 시베리아가는 일찍부터 관계를 맺어져 왔다. 투바 공화국의 남쪽 지역에는 유출구가 없는 호수의 분지가 있고, 웁수 누르 호수가 포함되어 있다. 이곳에서 몽골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졌었다. 남·서부 지역은 알타이에 직접 맞닿아 있다. 알타이로 가는 가장 좋은 길은 헴치크를 따라 나있다. 몽군-타이가는 투바에서 풍경이 아름답고 높은 지역 중의 하나로 코쉬-아가츠 마을 지역에 있으며, 추이 강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고, 그곳에는 유명한 파지리크 쿠르간이 있다.
 동쪽에는 타이가의 식물들이 분포해 있는 투진 분지가 있으며, 그것을 남부시베리아와 관련시킬 수 있다. 투바를 통해서 고대로부터 서로 다른 인종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산악 국가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려웠으며, 사람들의 이동을 통제했고, 현지인들에게 자신들의 독창성을 보존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그것이 고대의 예술 속에 반영되어 있다.
 투바로의 첫 번째 이주는 후기 구석기 시대에서 시작되었다. 가장 이른 시기의 사람들의 생활 흔적은 40~1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S. N 아스타호프 박사는 타누 올라 산맥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 타르갈르이크 마을 근처에서 아슐리안 시대의 손도끼를 발견했다. 사글리, 차단, 타르갈르이크와 울루크 헴 강의 계곡에서는 무스테리안 시대의 유적들이 있다.
 13개의 문화층이 있는 ‘타라 다쉬’ 유적과 예니세이의 하드인 그리고 쿠일루크-헴 강의 동굴 등의 발굴을 근거로 하여 Ⅵ. 세메뇨프 박사는 지금으로부터 2만 5천 년 전부터 시작된 투바의 고대 문화를 시대 구분하였다. 쿠일루크-헴 동굴에서 독특한 장식무늬가 시분된 뼈로 만든 귀걸이가 발견되었고, 아친 유적지, 아폰타바 산, 말타와 부레트와 같은 동남부시베리아 후기 구석기 시대의 유적지에서 뼈로 만든 조형 예술품이 추가되었다. 타라-다쉬의 아래층에서는 빗살무늬의 토기, 뼈와 돌로 만든 무기와 함께 신석기 시대의 돌무덤이 발견되었다.
‘아시아의 중심’오벨리스크
- 투바공화국 수도 크이즐
예니세이 사얀 계곡의 토라-다쉬 유적지
- Ⅵ. 세메노프
쿠일루크 헴 동굴 출토 뼈 장신구
- 구석기 시대
아파나스에프 문화의 토기
- 에네올리트기. 토라-다쉬 유적지
 기원전 3천 년대의 중반기에 마차, 구리와 청동 제품 그리고 최초로 유목 목축형태를 지닌 동유럽인종들이 사얀 - 알타이 산지로 들어왔다. 그들은 소위 아파나시에보 문화를 남겼다.
 보다 오랜 된 토착 집단과의 연합 과정에서 아파나시에보 문화의 권역을 중심으로 하여 남부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독특한 오쿠네보 문화가 형성되었다. 중앙아시아와 남부 시베리아 문화의 발달의 다음 단계는 알타이 초원과 미누신스크 분지로 이주해 온 안드로노보 문화 집단과 관계가 있다. 이 문화의 격변으로 인하여 서시베리아에서는 이르멘 유형의 문화 블록이 형성되었으며, 미누신스크 분지에는 카라수크 문화가, 투바에서는 몽군-타이가 문화의 매장 유구가 그것들과 일치한다. 이 시대에는 도자기 장식의 기하학적 양식과 암각화에서의 양식화의 경향이 특징이다.
 후기 몽군-타이가 유적지들의 특징은 고대의 융성한 발달을 토대로 한 돌무더기 매장, 그리고 그것들에 초기 스키타이의 케렉수르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케렉수르와 몽군-타이가 무덤들에서는 사슴돌과 스키타이 시베리아 동물 양식으로 제작된 동물 그림이 있는 판석을 살필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아르장 쿠르간은 스키타이 3요소(무기, 마구, 예술)를 갖춘 스키타이 문화의 종합적인 열쇠이며, 또한 융성한 고대 문화를 기반으로 한 거대한 구조물이다. 그 속에서 아르자노-마이에미르 양식의 변형된 동물 형상이 있는 사슴 돌 파편을 발견하였는데, 그런 양식은 서쪽으로는 천산에서 내륙아시아까지 분포하고 있다. 투바에서 스키타이 시대의 문화는 돌널무덤이나 통나무관 속의 매장 있는 많은 수의 쿠르간이 특징이며, 그 속에서 많은 양의 생활 집기와 황금이나 청동 그리고 뼈로 된 장신구들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1천년기 말에 투바는 惴누족(흉노)의 지역으로 흡수되었고, 그의 영향 아래에서 스키타이 시베리아 양식의 지역 문화를 기반으로 한 독창적인 코켈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그것은 투르크족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군노(흉노)-사르마트 시대의 시작과 함께 스키타이 양식으로 형상화된 암각화는 변형되었다. 그 가운데서 타쉬트이크 시대의 조형성이 풍부하게 반영된 유적(예를 들면 크이즐 근교의 말르이 바얀 콜)이 있다. 중세 초기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전쟁 영웅의 사실적인 모습을 형상화 한 석인상(투바어로 케지크케제), 전쟁이나 사냥 장면과 관련된 암각화 등 튜르크 시대의 조형 유물이 넓게 분포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한 투바 바위그림의 전통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투바에서 암각화의 연구는 이미 19세기부터 시작되었다. 그라츠는 저명한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데, 그는 자신이 조사한 투바의 서쪽에 있는 그림들을 단행본 유의 연구 논문집 속에 처음으로 발표하였다(1957, 1958). 중앙아시아의 이 지역 바위그림에 관한 기초적인 연구는 걸출한 암각화 연구자 M. A. 데블레트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녀는 가장 흥미로운 유적지들을 채록, 조사, 기록하고 저술들을 간행하였으며, 또 직설적으로 말해 투바의 선사미술을 세계적인 학문으로 개척하였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물질문화사연구소(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투바 학술 조사단은 투바의 여러 지역에서 1986년부터 암각화의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물론 모든 연구자들은 암각화뿐만 아니라 다른 조형 예술과 고대 역사에도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모든 연구들은 종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투바 내의 여러 지역에 있는 바위그림들은 현재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준-헴치크와 바룬-헴치크에는 크이즐 마질리크 마을 근처에 있는 비지크티크-하야, 알라쉬 강변의 사르이크-다쉬, 치르가크이 강변의 샨치크, 슈이 마을 근처의 채색화, 크이즐- 다크 마을의 사암츠이르가 있고, 중부 지역에는 이쉬티크- 헴 마을 근처의 스인-츄레크, 아르갈르이크티이 산맥, 보쉬-다크 산, 오르타-사르골(울르크 헴의 왼쪽 기슭), 크이즐 근처의 말르이 바얀 콜, 에르베크 Ⅰ-Ⅲ, 수글루크- 헴 무덤 근처의 헤르비스, 바얀- 콜 근처의 이니탈과 카라-불룰, 숄데 -테이(울루크-하야)산과 쿠일루크-헴 강의 이메, 칭게 강변, 비-헴 강변의 그림들은 하나하나의 바위 가운데 새겨져 있으며, 도게 산의 시골 마을과 그 산 기슭에 그림이 있다. 타누-라 서부 지역 차일라크-헴의 경계 지역에도 암각화가 많기로 유명하다. 엘레게스트 강변에도 암각화가 있다. 청동기 시대와 초기 스키타이 시대의 채색화가 그려져 있는 에르진 지역의 독특한 유적지 야말르이크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라츠는 사글라 강변의 오뷰르 지역에 있는 암각화에 관해 발표하였다. 우리들은 쿤구르투크 마을 근처에 있는 무덤 둘레돌의 형상을 채록했다. 토제의 아자스 호수 근처에는 사슴 형상이 새겨진 무덤 둘레돌이 유명하다. 이밖에도 많은 바위그림 유적지가 있다.
 투바에는 석기 시대의 암각화가 알려지지 않았다. 그림의 첫 번째 층은 아마도 에네올리트와 초기 청동기 시대와 관계가 있다. 지금까지 이 시대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있는 성소 야말르이크 유적지로, 그것은 에르진스크 주의 사라 누르와 테레 홀 호수 사이에 있는 테스 헴 강의 남쪽에 있다(킬루노브스카야, 1990; 킬루노브스카야, 세메노프, 2006). 야말르이크는 물기가 없고 소금기가 많은 스텝에 개체적으로 기묘하게 풍화되어 있는 남아 있는 바위 잔구이다. 그림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하나는 자연적인 감실에 그려져 있고,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멀지 않은 경사지의 바위 동쪽 부분에 있다. 그림이 있는 바위 근처에서 발굴이 이루어졌고, 그 발굴지로부터 얻은 자료들을 통해서 판단하건대 야말르이크 그림이 있는 장소의 부근은 신석기 시대의 가장 오래된 단계에서 기원전후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살았던 주거지가 있었다. 그림들은 붉은 물감의 다양한 톤으로 그렸고 서로서로를 뒤덮으면서 중첩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소, 말, 양, 비뚤어진 십자가 등의 형상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보다 늦은 시기(후기 청동기 혹은 초기 스키타이 시대)에 그려진 사슴 형상이 덮여 있었다. 소 형상은 일정한 캐논을 따르고 있는데, 그것은 뾰족한 다리, 배와 등 부분의 삼각형 융기, 큼직한 몸통, 뾰족하게 튀어나온 엉덩이, 벌린 입이 있는 작은 주둥이, 이파리 모양의 귀 그리고 ‘S’자 모양의 뿔 등이다.
 야말르이크의 소와 말 그리고 양과 유사한 형상은 몽골의 쪼아서 그린 암각화 속에서 살필 수 있다(출루우트, 이쉬긴, 톨고이, 기타, 노브고로도바, 1984; 체벤도르지, 1982 : 6~21). 이들과 아주 비슷한 것은 찬드만 암각화인데, 노브고로도바(E. A. Novgorodova)는 그것을 신석기 시대로 편년하였다(노보고로드바, 1984 : 34~39). 야말르이크 그림은 어쩌면 고비 알타이의 살트인 동굴과 또 중국의 신장-위그루 자치구 알타이 시 근처의 동굴 속에 물감으로 그린 그림들과 비교되는데(바레노프, 1998: 89~90), 그것들은 신석기나 에네올리트기로 편년된다. 그것들사이에는 무엇보다도 비뚤어진 십자형이 서로 유사하다.
왜곡된 표범 형의 말 번호 표
- 청동기 아르잔 무덤
아르잔 무덤 출토 사슴 돌 파편
-
아르잔 무덤
- 복원도
곰 형상
- 흉노-사르마트 시대. 말르이 바얀 콜
 투바의 바위그림에서 에네올리트 층은 초기 청동기 시대의 층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으며, 크고 다양한 모양의 형상과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그 시기에 제작된 많은 양의 그림은 울루크 헴 강변에 분포되어 있다. 신화-의례적인 형상들의 온전한 집합체는 거대한 강과 관련되어 있고, 그것들은 바위 위에 표현되었다. 청동기 시대에서 의례의 중심은 예니세이의 가장 좁은 곳(울루크-헴)을 차지하고 있고, 사얀 〈나팔관〉으로 향해 들어갈 때 건너기에 편하며, 햇볕에 검게 타 번쩍거리는 표면으로 뒤덮인 넓은 바위들이 있다.
 암각화들은 울루크 헴 강의 양 기슭에 집중되어 있는데, 왼쪽에는 무구르 사르골의 경계, 오른쪽에는 칭게 강 하구의 알드이 모자그와 우스트 모자그가 있다. 여기에는 쪼아서 그린 독특한 뿔이 있는 리치나가 있는데, 그것은 장소의 정령-주인들을 표현한 것이다. 그것들은 마치 강의 양쪽에서 서로서로와 울루크 헴의 거친 물살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들 유적들은 데블레트에 의해 단행본으로 발표되었다(데블레트, 1980, 1998, 2005 등).
 현재 무구르 사르골은 사얀 수쉔 저수지의 담수로 물속에 완전히 잠겨있다. 알드이 모자가 유적지는 완전 파괴의 기로에 놓여 있다. 물의 영향으로 파괴 위기에 처해 있고, 오직 산 정상에 있는 암각화들만 보존 되어 있다. 그 바위 표면들은, 거친 물살에 의해 이미 그림들이 사라지고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물결에 씻긴 바위표면 층에 햇볕의 그을림과 또 이미 풍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오직 현재 예니세이 강의 중간을 따라 홀로 솟아 있는 우스튜 모자가의 높은 곳에 있는 바위 표면에만 그림들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대다수의 형상들이 청동기 시대와 스키타이 시대에 제작된 것이다. 사얀 계곡에서 네 번째의 큰 유적인 비지크티크-하야는 부분적인 침수가 시작되었다. 그 위에는 바위구멍이 새겨진 돌들이 누워있는데 그것은 일정한 원칙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으로, 데블레트는 그것을 밤하늘의 별 모습과 연결시켰다. 모졸라 호무자프 유적지는 울루크 헴 강의 흐름을 따라서 상류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물은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 산기슭 가까이에 있다. 많은 형상들로 구성된 바위표면은 특히 인상적인데, 몽골 자바이칼 양식으로 표현된 나는 듯한 사슴들이 그 중요한 제재이다. 물 가까이의 몇몇 바위에는 낫 모양의 뿔이 있는 쪼아서 그린 황소 형상이 있다.
로시형상
- 흉노-사르마트 시대. 말르이 바얀 콜
 이 모든 유적들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강변에 연하여 하나씩 끊임없이 서 있는 커다란 바위와 돌들에 그림들이 쪼여져 있는데, 그것들은 서로 다른 역사 시대와 관련되어 있다. 근본적으로 산양의 도식적인 형상이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바위그림의 중요한 제제였다. 목동의 길은 그렇게 불렸으며, 그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울루크 헴 강변을 따라 나 있었다.
 바위에 새겨진 리치나는 일정한 연대적 안내표가 될 수 있다. 그것들과 오쿠네보 문화의 이즈바야니에 그리고 무덤 판석과의 관계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형상은 어쩌면 보다 이른 에네올리트 시대에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주한 유목민들의 영향 아래에 형성되었으며(세메노프 박사의 관점에서 보면`-`원(原)토하르 언어 사용자들이었음 - 세메노프, 1993), 동유럽 초원의 고대 얌(구덩이) 문화의 관계된다.
 고대 얌 문화의 특성인 석인상은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의 이미지가 합성된 복합적인 용모를 지닌 분노의 신 모습을 하고 있다. 양감이 있는 오쿠네보 시대의 조각은 바위 표면으로 옮겨지면서 환상적인 리치나의 용모를 획득했고, 후에 데블레트 박사는 사실적인 가면의 원형을 보았다. 샤먼이나 무당들은 이러한 가면을 쓰고 특별한 의식을 수행했다(데블레트, 1997, 1998, 2005). 또한 리치나는 스키타이 시대까지 존속하였으며, 오쿠네보 전통의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로, 그것은 스키타이 시베리아 동물 양식의 형성에 기반이 되었다. 예를 들면, 이른 시기의 사슴 돌에 리치나가 새겨졌는데, 그것들은 사람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속에 시조신과 신인동형 적 우주의 이데아가 담겨있다.
 리치나 형상은 사얀 알타이를 넘어 아무르강 하류, 인샨(陰山), 캐나다와 미국의 북서쪽 해안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투바의 리치나는 크고 다양한 형상이 특징이다. 머리 모양(둥근형, 타원형, 계란형, 하트형), 뿔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뿔의 생김새, 정수리의 튀어나온 ‘안테나’, 턱 아래의 돌출된 손, 내부 구성(가로선과 모난 괄호 등등) 등이 있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양한 모양 속에는 그것들의 여러 시대가 내포되어 있고, 또 마찬가지로 다양한 의미론적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예니세이강 상류, 특히 무구르 사르골과 알드이 모자가의 바위들에는 기하학적인 형상 등 특정한 기호, ‘울타리’ 혹은 ‘집’들, 바위구멍들, 태양 상징들과 함께 종종 안트로포모르프의 모습이 새겨졌는데, 리치나를 통해서 어떤 신 혹은 신적인 형상의 기호-상징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헴치크의 비지크티그 하야 암각화는 독특한 리치나로 유명하다. 1881년 А. В 아드리아노프가 그것을 발견하고, ‘중앙아시아 암각화의 특이한 그룹 중의 하나가, 얼굴의 윤곽 그리고 가지 모양의 뿔이 있는 양식화된 사람 얼굴 형상’(쉐르, 1980 `:`229)이라고 기술하였다. 남쪽을 향한 수직 바위 표면의 거의 땅바닥에 닿은 아랫부분에는 높이가 거의 1m에 가까운 유난히 큰 새 형상이 쪼여져 있다. 새는 측면에 접은 날개와 약간 구부러진 부리, 잘 새겨진 발톱과 더불어 두 발로 서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꼬리 아래에는 계란형 머리를 한 서로 다른 세 개의 리치나가 그려져 있다.
 알에서 나온 신화적인 새가 우리들 앞에 있는데, 그 새는 서로 다른 영들이 거주하는 세 개의 세상으로 나누어진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리치나 중의 하나는 황소의 뿔이 달려 있으며, 그것들로부터 아래로 가지들이 달려 있다. 가지가 달린 그와 같이 큰 뿔은 왼쪽 옆의 바위에 새겨진 넓은 옷을 입은 환상적인 형상에서 살필 수 있다. 그들은 양손에 어떤 지팡이를 들고 있다.
 크지 않는 황소 또는 산양의 뿔과 사람의 다리와 더불어 종모양의 옷을 입은 유사한 형상들을 몽골 알타이(차간 살라, 바가 오이구르)와 인샨(쿠바레프, 2005 : 74—그림 69)의 바위에서 살필 수 있다. 그 가운데서 몇몇의 손에는 지팡이로 해석 할 수 있는 물체가 보인다.
야말르이크 성소의 바위그림 유적지
- 투바의 남쪽
야말르이크
- 물감으로 그린 그림
야말르이크
- 물감으로 그린 그림
 다른 바위들에는, 그것들이 기본적으로 위에 분포되어 있으며 만약에 그곳으로 오르면, 가장 다양한 장면들이 형상화되어 있는데, 짐을 싣고 있는 소들의 행렬(아마도 야크처럼 보이는)에서 넓고 풍부한 장식 문양이 있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이끌고 있으며, 버섯 모양의 모자를 쓰고 활을 든 사람들의 사냥꾼의 사냥 장면, 소들의 행렬, 소들의 몸통은 선 쪼기로 그린 기하학적인 무늬로 뒤덮여 있고 그 밖의 많은 것들이 있다. 즉 우리들 앞에 드러난 그림의 구성은 고대인들의 복잡하고 신화적인 관념에 관하여 증거 하여 주고 있다.
 울루크 헴 오른쪽 계곡의 솔데 테이 산 바위에는 많은 수의 짐을 실은 황소들이 그려져 있다. 등에 직사각형의 구조물이 있는 이 소들은 때로는 개체적으로 그려졌고 또 때로는 사람이 그것들을 끌고 가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는데, 이 경우 생식기가 표현되었다. 마찬가지로 버섯모양의 사람 형상이 있는 사냥 장면 속에서도 그러한 예를 살필 수 있다. 짐을 실은 소 형상은 고리모양의 뿔과 아래로 길고 또 아래쪽이 넓은 꼬리가 달려 있다. 짐을 실은 소 형상은 투바, 몽골 그리고 알타이의 바위그림 가운데서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현상이 우연히 중앙아시아의 바위그림에서 생긴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아마도 신성한 동물이자 내세의 거주자이며 중개자의 역할을 하는 소에 관한 일정한 관념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데블레트(Дэвлет)는 특히 흥미로운 두 개의 사실을 소개했다. 첫 번째는, 수트-홀 호수에서 나온 소에 관한 신화인데, 그 소는 보통 소와 그리고 호수의 신인 거대한 황소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동할 때 그 등에 아홉 채의 유르트를 싣고 갈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컸다(데블레트, 1990). 소와 관련된 ‘호수’의 신화들은 M. B. 케닌-로프산에 의해서 소개되었다. 그것들은 투바의 많은 호수 속에 소처럼 생긴 호수의 지배자들이 살고 있는데, 보통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그의 울음소리는 멀리서도 들리며, 대지와 사람들에게 풍요로움을 선사해 준다고 케닌-로프산은 소개하고 있다(Kenin-Lopsan, 2003). 바로 이로써 소 형상이 내세와 관련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무구르 사르골
-
우스튜 모자가
-
새 형상
- 서부 투바의 비지크티크 하야
예니세이의 사얀 계곡
- 무구르 사르골과 칭게 강 하구의 성소
 사람 형상들 속에서, 버섯 모양 혹은 둥근 머리 모양으로 구분되는 사람 형상들은 때로는 꼬리가 달리고 손에 창 또는 활을 들고 있는데, 이들을 청동기 시대와 관련시킬 수 있다. 꼬리는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데, 말이나 야크처럼 넓고 긴 것과 긴 선에 끝이 둥근 것이 있는데, 많은 연구자들은 그것들을 거울, 가방, 북 또는 나선무늬의 물체로 보고, 샤먼의 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쿠바레프, 야콥손, 2006 : 84). ‘버섯 모양’과 ‘둥근 머리’ 모양의 사람 형상들 사이에 싸움도 형상화되어 있다. 그와 같은 형상들이 마차 위에도 재현되었다(칼박-타쉬, 우스튜-모자가, 기타).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은 리치나와 함께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이 형상이 청동기 시대의 전 기간에 걸쳐 존재했음을 말해 준다. 그것들은 모든 암각화 속에 그려져 있다. 보다 분명한 ‘도상학적’인 재현을 우리들은 울르크-헴 분지 속의 오르타-사르골 암각화 가운데서 볼 수 있다. 두 개의 형상이 서로 뒤를 따르고 있다. 이들은 버섯 모양의 큰 머리(이것을 뒤집어진 달 모양이라고 할 수 있지만)에 길고 가느다란 목, 어깨가 발달된 직사각형의 몸통, 하나의 손은 팔꿈치에서 구부러져 대퇴부 혹은 직선에 동그라미가 달린 ‘꼬리’에 대어져 있고, 앞으로 쭉 뻗은 다른 하나의 손은 구부러진 활을 들고 있다. 가장 특징적인 세부는 발이 크고 무릎이 구부러진 다리인데, 이를 통해서 그것들을 ‘춤추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버섯 모양의 사람
- 오르타-사르골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형상들을 알타이, 카자흐스탄 그리고 몽골 등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하였다. 이 형상의 일반적인 해석은 신화적인 세계의 사람-버섯의 형상이다. 인도 유럽의 신화 속에서 버섯은 남성 생식기의 상징이다. 토포로프(В. Н. Топоров)는 신화와 미신 속에서 버섯들이 우뢰, 벼락, 소나기의 신과 관계가 있다고 기술하였다(토포로프, 1991 : 335~336). 그리스에서 오세아니아 그리고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많은 민족들 속에 우뢰가 있으면 버섯들은 잘 자란다는 관념이 있다. 바위 가운데서 이 이데아의 구현을 살필 수 있으며, 버섯 모양의 사람 형상은 우뢰와 벼락 신의 표시일 것이다(구부러진 다리를 기억함). 이것은 유사한 형상이 동물들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데, 그 동물 중의 첫 번째가 산양으로 그것은 우뢰의 신의 불변하는 속성이다.
톨스트이 므이스 1
-
리치나
- 무구르 사르골
 사얀 알타이의 청동기 시대 전 기간에서 중심적인 주인공은 소 형상이었다. 그것은 투바와 중앙아시아의 거의 전 암각화 유적지에 형상화되었다. 소 형상은 기본적으로 뿔의 생김새에 따라서 구분된다. 쿠바레프(В. Д. Куварев)는 그것들을 고리모양, 낫 모양, 마름모꼴, 하프 모양, 직선(사슴 또는 영양 같은), 활모양(산양의), 사슴, 복합적(구불구불한 것, 꺾인 선) 등 여덟 개의 타입으로 구분하였다(쿠바레프, 야콥손, 1996 : 61~64). 하나의 바위 표면에서 서로 다른 타입의 뿔이 있는 소 형상들을 자주 살필 수 있다. 만약에 뿔의 모양을 편년 그리고 양식적 기준표로 삼으려면, 동물 형상의 다른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가장 이른 시기의 형상들은 매우 큰 몸통, 도식적인 다리, 그 가운데 몇몇은 짧고, 등에 난 혹과 생식기가 매우 특징적이다. 그들은 고리, 하프 그리고 낫 모양의 뿔이 있다. 고리 모양의 뿔은 가장 넓게 분포되어 있다. 그것들은 솔데 테이와 비지크티그 하야 그리고 알드이 모자가, 차이라그 헴 등 모든 바위그림 속에 그려져 있다. 하프 모양의 뿔은 정면에서 포착한 것으로 무구르 사르골과 알타이의 오제르 마을에서 나온 돌 그리고 칼바크 타쉬 등지의 소 가운데서 형상화되어 있다(쿠바레프, 1988:그림 69, 75, 표 Ⅷ). 낫 모양의 뿔도 정면에서 포착하여 그린 것으로 몽골(노브고로도바, 1980)과 투바의 모자가 코무자페와 투바의 알드이 모자가의 소 형상에서 살필 수 있다(데블레트, 1993a:그림 1). 일반적으로 소의 뿔은 측면으로 그려져 있지만 두 뿔은 나란히 앞으로 향하고 있다.
예니세이의 비지크티크 하야
- 바위구멍
예니세이의 비지크티크 하야
- 바위구멍
예니세이의 비지크티크 하야
- 바위구멍
소와 사냥꾼
- 우스튜 모자가
도게 바르이의 리치나가 있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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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신상
- 알드이 모자가
투바 바위 위의 기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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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에서 포착하여 펼쳐진 뿔이 있는 소 형상은 옆모습의 그것과 비교할 때 적게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형상들은 내몽골과 인도에도 있다. 펼쳐진 뿔들은 리치나-가면의 특성인데, 하프 또는 낫 모양의 소뿔로 표시되어 있다. 그것은 중앙아시아에서 리치나가 황소 의례와 관련되어 있음을 증거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 형상은 기본적으로 양식적인 특징을 통해서 투바에서는 오쿠네보 문화의 첫 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초기 청동기 시대의 예술적 성격을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일정한 도식주의, 비례 왜곡, 큰 몸통(사각형의) 등이다.
 장식을 한 몸통의 그림 층은 수직선, 사각형, 지그재그 기타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와 같이 아자스 호수 주변의 돌에 그려진 사슴의 몸통은 수직선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두 다리는 아래로 향하고 있고 아래로 숙인 고개에 굽은 등을 하고 있다(데블레트, 1980: 그림 21-5). 아이므이를리크 묘지의 오쿠네보 무덤에서 출토된 석기에 새겨진 말 형상은 그것들과 많이 닮았는데, 그 몸통은 수직선으로 나누어졌고 몸통도 마찬가지로 크며 자그마한 머리는 아래로 향하고 있다(Вайнштейн, 1974:그림 4-6, 7).
 청동기 시대 예술의 다음 단계는 마차 형상과 관계가 있다. 중앙아시아와 남부시베리아에서는 소나 말이 끄는 이륜, 사륜 그리고 지붕이 있는 마차 수백 개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형상들의 완전한 전집은 B. A. 노보제노프가 출판하였다(Новоженов, 1994). 조형예술에서 마차의 출현은 남부우랄과 볼가 강 하류로부터 이란족의 이주를 반영하고 있고,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그 이주는 기원전 3천 년대 말에서 2천 년대 초에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것은 안드로노보 문화, 유라시아 스텝을 통해 신장과 알타이 지역으로 향해 동쪽으로 이주해 온 그 구성원들과 상호 관련이 있다.
투바의 리치나(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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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부시베리아, 투바 그리고 몽골에서는 늦은 청동기 시대의 카라수크 문화와 함께 마차 형상을 표현하였다. 바위그림 속에서 마차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그려졌음을 지적하여야 한다. 마차는 오쿠네보 전통과 관련된 큰 몸통의 소, 버섯 모양의 사람 그림과 함께 구성되어 있다. 한편 마차 형상은 초기 스키타이 시대와 관련된 몽골-자바이칼 양식의 사슴 돌 가운데서 볼 수 있다. 투바에는 카라수크 문화의 유적이 없지만, 그러나 그 영향이 몽군-타이가 타입의 매장 의례와 예술 속에서 분명히 살펴지고 있다.
 몽골이나 알타이 등과 비교할 때 투바에서는 마차 형상이 약 20여 개 정도로 그다지 많지 않다. 그것들의 스타일은 다양하다. 무구르 사르골(2), 알드이 모자가(2), 칭기스칸의 길(1), 우스튜 모자가(1), 오르타 사르골(4) 등 그것들의 대부분은 울루크 헴 강변에 있다(데블레트, 1998). 우스튜 모자가 산의 〈돌 나침반〉 바위에는 동물들의 행렬과 함께 네 개의 마차가 그려져 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르지만, 전개도식으로 그려져 있다. 세 개는 네 개의 바퀴살과 두 마리의 말이 끌고 있으며, 하나는 바퀴살이 없고 한 마리의 말이 끌고 있다. 마차 곁에는 활을 든 사람과 함께 삼각형의 차체 혹은 가느다란 선이 비스듬하게 덮인 플랫폼을 나타내었다. 직선의 나무를 축으로 보다 도식적인 한 쌍의 말이 있는 두 번째 마차에는 차체 대신에 사람 형상이 서 있는데, 정면을 향하고 있고 다리를 넓게 벌렸으며, 아래로 내린 손 가운데 하나에는 선이 나와 있는데, 아마도 채찍인 것 같다. 그곳으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 활 든 사람이 서 있는데, 이 사람도 역시 발을 벌리고 있으며 한 손에는 몽둥이나 채찍으로 보이는 물건을 들고 있다. 아마도 이것도 그와 같은 제재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며, 우리들에게 서사적인 장면을 제시하고 있다. 활 든 사람과 뿔이 있는 투구를 쓴 사람들이 첫 번째 마차를 둘러싸고 있다. 두 개의 다른 마차는 오직 동물 형상만 있는 곳에 그려져 있다. 제시된 것 중의 하나에는 두 마리의 말이 채워져서 있고, 뒤가 뾰족하고 속에 가느다란 선이 있는 사각형의 플랫폼-차체가 제시되어 있다. 마지막 마차는 바퀴살이 없으며 한 마리의 말이 그려져 있다. 다른 것과는 달리 이 형상의 축은 직선이 아니라 멜대 모양으로 완전히 다른 구조의 수레이다. 이와 같은 모양의 축대는 오르타-사르골 마차에서는 살필 수 있는데, 그 가운데는 마찬가지로 마부도 묶여있는 동물들도 없으며, 차체는 타원형이고 바퀴에는 살이 있다.
 우리는 다른 마차 형상을 스인 츄레크 산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매우 도식적이며 마치 하나의 선으로 그린 것 같다. 말들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고 동그라미가 달린 직선의 마차 축과 네 개의 바퀴살이 있는 바퀴가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도식적인 산양 형상들이 마차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것들은 서로 쌍을 이루면서 겹으로 배치되어 있다. 중앙에는 정면으로 향하고 과장된 생식기가 있는 쪼아서 그린 형상이 있으며, 그 형상의 어깨에는 위로 향하여 끝이 날카로운 선이 나 있다. 그 형상 위 그리고 마차 형상 아래에는 가운데에 점이 있는 쪼아서 그린 동그라미가 있다. 이 형상들은 하나의 쪼아서 그린 넓은 선으로 형상화되었는데, 동물 형상은 직선의 몸통과 발, 반원의 뿔이 있고, 선으로 그려진 사람 형상의 손은 양쪽으로 벌리고 있다.
 비슷하게 아주 도식적으로 묘사한 형상 그리고 그것들의 쌍으로 배치는 카라수크 시대의 전통에 완전히 부합하며, 그것을 패트킨은(Б. Н. Пяткин)은 처음으로 분류하였고(Пяткин, 1997:62), 레온티에프(Н. Леонтьев)는 바르치 1의 북안의 무덤에서 나온 판석에 새겨진 형상을 통해서 ‘바르친’이라고 이름 붙였다(레온티에프, 1980 `: 72). 거기에는 쪼아서 그린 매우 도식적인 마차와 짝을 지어 가는 말들, 그 중의 두 마리는 ‘말뚝’ 근처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 등이 있다. 이 유적을 늦은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돌 나침반
- 칭게 강의 오른쪽 기슭
 우리들은 투바에서 보다 분명하게 이와 같은 선-실루엣 혹은 사실적인 방법으로 묘사한 동물 형상들을 헤르비스 산에서 볼 수 있다(6 그룹). 여기에는 쪼아서 그린 산양과 맹수 형상이 있다. 구성은 그룹의 중요한 부분인데, 그것은 네 마리의 순록으로 구성되어 있고, 바위 표면의 대각선을 따라 각각 층을 이루면서 쌍으로 배치되었다. 그것들은 머리를 위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것들의 맞은편에는 말이 서 있는데, 머리는 아래로 향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수평선을 향해 대각선을 이루고 있다. 모든 형상들의 몸통은 하나의 선으로 표현하였고, 그 몸통에서 아래로 네 개의 다리가 나 있다. 이와 비슷한 형상들은 이 산의 다른 바위들에도 있다.
 우리들은 마찬가지로 치르가크이(서 투바) 강 계곡의 샨치크 산맥에 있는 그림들을 늦은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본다(킬루노브스카야, 2004). 그들의 대부분은 제 3군 가운데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도식적인 방법으로 그려진 사슴 형상을 분류하는 것이 필요한데, 우리들은 그것을 〈치르가크이 양식〉이라고 부른다(마찬가지로 우선 우리들은 샨치크 산 그림 가운데 있는 특징을 주목했다). 그것은 직사각형의 몸통(양감이 있는데, 바르친 식의 하나의 선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에 네 개의 수직 다리, 뿐만 아니라 뒷부분은 마치 엉덩이가 발달한 것처럼 묘사되었다.
 직선의 머리는 아래로 향하고 있고, 두 뿔에는 가지가 나 있다. 위로 향한 뿔은 끝이 갈라져 있고, 직선의 가지는 바깥으로 향하고 있으며, 두 개의 가지는 안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비스듬하게 십자형을 이루고 있다. 몇몇 사슴들의 뿔 사이에는 비스듬한 십자형이 있는데, 그것을 동물의 형상 없이 개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고, 그것은 사슴 기호의 의미를 지니며, 사슴을 대신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사슴들은 산양, 맹수 그리고 사냥꾼 등 다른 동물들과 함께 구성되어 있다. 소 형상들이 산치크, 헤르비스 그리고 스인-츄레크 산의 암각화 가운데 없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바르친 혹은 치르가크이 양식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판단하건대, 후기 청동기 시대와 스키타이 시대에는 소 형상이 고유한 의미를 상실하고, 그 자리를 사슴 형상이 대신 하게 되었다.
등에 짐이 있는 소 형상
- 숄데-테이
 청동기 시대에서 스키타이 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암각화는 독립적으로 서 있는 거대한 돌에 그려져 있으며, 그것은 크이즐에서 카 헴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7km 지점인 도게 산 근처에 있다. 돌의 크기는 4×2m이다. 산기슭 아래 남남서쪽으로 향한 큰 바위 표면에, 거의 수평의 표면에 깊게 쪼아서 사냥 장면을 표현하였다. 모든 상황을 통해서 볼 때 그림은 실질적으로 한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바위 가운데는 ‘S’자 형의 가지가 달린 큰 뿔이 등을 따라 뒤로 젖혀진, 몽골-자바이칼 양식으로 그려진 커다란 사슴 두 마리가 있다. 그 곁에는 〈치르가크이〉 양식의 나무처럼 생긴 뿔을 가진 세 마리의 사슴 형상이 있고 또한 개와 산양 그리고 활을 든 사람 형상이 있다. 위에는 지름이 2cm 정도의 바위구멍들이 있고 마치 사슴 돌에서처럼 주둥이를 쭉 뻗은 산양 형상도 있다. 바위의 다른(북쪽) 면에는 쪼아서 그린 두 개의 마차가 있다. 하나는 도식적인 말 형상이 서로 단을 이루며 서 있다. 둘 다 직선의 차축과 타원형의 차체 그리고 살이 없는 바퀴가 있다. 이와 유사한 마차는 몽골의 초기 사슴 돌에 있다.
 사냥 장면 속에 새 부리 모양의 사슴 형상이 함께 있는 구성은 칭게 강 오른쪽 강변의 바위 표면에 그려져 있다. 그림이 있는 표면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감실 속에 있다. 바위는 동쪽으로 향해 약간 경사져 있지만, 거의 수평으로 누워 있다. 바위 색은 어둡고 거의 검정에 가까우며 번쩍거린다(무구르 사르골의 돌을 연상시킨다). 오른쪽에는 새 부리 모양의 주둥이와 등 뒤로 낫 모양의 가지가 달린 커다란 뿔이 있는 몽골-자바이칼 양식으로 그려진 두 마리의 사슴 형상이 있다. 중앙에는 발굽 끝으로 서 있는 산양, 긴 몸통의 말, 버섯 모양의 모자를 쓴 사냥꾼, ‘Ф’자 형의 사람 형상, 많은 수의 산양, 곧은 발과 나뭇가지 형 뿔이 있는 사슴, 맹수 등 작은 크기의 형상들이 뒤섞여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작은 형상들이 네 개 내지 다섯 개씩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그것을 주로 사슴 돌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중앙아시아에는 기원전 1천 년대 초의 스키타이-시베리아 예술의 복원을 위한 모든 전제들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청동기 시대의 풍부한 예술품의 존재이다. 하나는 오쿠네보 문화로, 그것은 현지 신석기 시대 예술의 전통을 흡수하고 또 그것들과 유입된 인도 유럽의 영향을 통합하였다. 다른 하나는 찬란한 청동 미술품 그리고 무덤 판석과 바위에 새겨진 형상 등과 더불어 청동기 문화로, 그것은 몽골에서 넓게 분포하고 있는 케렉수르와 사슴 돌 등 스키타이 이전 그리고 스키타이 초기의 유적들과 직접 관계된다.
무구르-사르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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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바의 소 형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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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슴 돌은 중앙아시아의 찬란한 예술적 현상 중의 하나이다. 그것들은 절대적인 가치에 의해 조형 예술적 집합체 속에 들어가고, 스키타이 시베리아 동물 양식의 초기 단계에서의 형성과 발전 과정 속에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스키타이 예술의 기원 그리고 형성의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되어 있다. 사슴 돌은 돌기둥(선돌)인데 일정한 조형 예술적 규범에 따라 만들어졌다. 통상적으로 돌은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위에는 세 개의 선으로 구성 된 〈얼굴〉이 있고, 양쪽에는 고리 혹은 귀걸이가 있으며, 가운데 선 혹은 움푹 들어간 홈에 의해서 〈목걸이〉가 구분된다. 중간에는 동물형상이 있는데, 중심적인 형상은 사슴이다. 아래쪽은 선으로써 〈허리〉를 구분하였다. 허리띠 쪽에는 단검, 칼, 도끼, 화살 통, 부싯돌 등 무기가 덧그려져 있다. 이 유물은 네 개의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유라시아식(동물 형상이 없다), 사얀 알타이식(사실적인 형상), 몽골 자바이칼식(양식화 된 사슴형상), 그리고 혼합형 등이다.
아자스 호수에서 출토된 돌 위의 사슴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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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의 돌 찻잔
- 아이므이를르이크 무덤
마차
- 알드이 모자가
마차
- 우스튜-모자가
 사슴 돌은 오르도스에서 엘바에 이르기까지 스텝을 따라 전 유라시아에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사슴 돌은 중앙아시아 그리고 더 분명히 말하자면 몽골과 투바 선사미술의 〈고전적〉 특성이라고 하는, 모든 조형 예술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들에게 사슴 돌의 발상지와 중앙아시아에서 그 출현 배경을 찾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
 스키타이 시대의 사슴 돌과 바위그림 그리고 일정한 양식적 특징들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응용 예술품들은 여섯 개의 조형 예술적인 복합체 속에서 통합되며, 기원전 8~2세기까지의 다양한 조형 예술적 전통과 편년에 부합한다(킬루노브스카야, 1994). 투바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전 기간에 걸쳐 사실적 그리고 장식-양식적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조형 예술적 경향이 존속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사실적〉이라는 말은 조건적이다. 형상의 표출 속에서 일정한 양식화는 마찬가지로 스키타이 시베리아 예술 가운데서 이와 같은 매너를 위한 특성이다.
마차
- 차이랄크-헴
마차
- 도게
마차
- 스인-츄레크
사슴
- 후기 청동기 시대. 헤르비스
 굽 동물은 자연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자세로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발끝으로 서 있거나 혹은 배 아래에 다리를 구부리고 있는 모습이다. 특정한 동물들의 비례, 종의 특징 그리고 고유한 속성 등을 갖추고 있다. 시간이 경과되면서 몇몇의 동물 형상들은 모두 보다 사실적인 경향을 보였으며, 사실성은 그림의 간결성과 우아미를 희생시키면서 획득하였다.
 동시에 장식적-양식적인 매너도 바뀌었다. 만약 처음에 비례의 왜곡과 형상 상호 간 또는 물체 표면의 보완을 위한 부분적인 과장이 이루어지면, 그 다음 단계(사그를르인 문화)에서는 장식 무늬로 표면의 과포화, 많은 형상들과 그 각 부분의 보완 등이 관찰되며, 모든 조형 예술의 공간을 그와 같이 채우고자 하는 갈망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관객 앞에 선들의 엮임으로부터 모두 새롭고 또 새로운 형상, ‘수수께끼 그림’의 원칙으로 드러난다.
 스키타이 문화의 마지막 단계(오젠-알라-벨리크)에는 몇몇 동물 형상들은 장식적인 요소(‘S’자 형 그리고 나비 모양의 멈춤쇠, 산양 뿔 대신의 나선형 등)의 외양을 가지고 있다. 스키타이 예술 속에서 이러한 경향들은 그 이후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유적지에서 관찰된다. 두 개의 조형 예술적 전통은 서로 다른 발생의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들은 청동기 시대의 암각화에서 그것을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스키타이 시대 투바의 암각화는 유라시아 스텝의 전 지역에서 발견된 암각화와 여러 가지의 유사성이 보인다. 중앙아시아는 사코-유에지 예술의 단일 세계이다. 내몽골에서 파미르-알라야에 이르는 대륙 속에서 사코 유에지 예술이 형성되었으며, 그 대륙은 모든 종류의 사슴 돌의 분포권과 부합하는데, 즉 몽골-자바이칼, 사얀-알타이 그리고 복합적인 것들이다. 양식의 보편성은 사슴 돌과 주조물, 금, 뼈, 뿔, 펠트, 나무 등의 수공예품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위그림 속에서 살펴지는데, 그것은 그 해당 지역의 장인들의 의해서 재현된 민족 예술의 한 부분이다. 이것은 단일 문화 공간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면 아르잔 쿠르간에서 출토된 돌에 그려진 사슴과 멧돼지는 카자흐스탄의 우르 마랄 강변에 있는 잘트이르이크-탄에서 발견된 이와 같은 동물 형상과 놀랄만한 양식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와 같은 예들은 수없이 많다. 기념비적인 유물은 주조물 속에 복사되었거나 그 반대이다. 알타이의 마이에미르 쿠르간에서 나온 거울에는 사슴 형상과 산양이 주조되어 있는데 아르잔 돌과 우르-마랄 암각화 속에 새겨진 형상들과 완전히 유사하다. 아르잔 쿠르간에서 나온 거꾸로 뒤집혀진 표범 모양의 금속판은 코쉬-페이 계곡의 사슴 돌에 새겨진 형상들과 완전히 그 크기까지도 일치한다.
사슴
- 샨치크(치르가크이)
도게 산 기슭의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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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부리 형 주둥이의 사슴
- 알라가 산
 두말할 필요도 없이 스키타이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 예술에서 지역적 특성은 보존되어 있다. 어떤 조건이 그와 같이 광대한 지역에서 문화의 유사성을 낳았는가? 언어, 신화, 사상, 시원, 목축 경제일까? 확실히 대답하기가 어렵다. 우리들은 아무데서나 이란어족이 암각화를 제작한 집단이라고 확언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일성의 기반은 청동기 시대에 마련되었고, 이 때 이 지역에서 말들이 끄는 마차 형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스텝 종족이 산악 국가와 내륙 아시아의 오아시스로 향하는 거대한 이동의 신호였다. 많은 주제, 양식의 모양과 요소는 우연이 아니며, 우리들은 티벳과 중국, 한국의 예술 속에서 그것을 찾고 있다. (번역:김정은)
코쉬-페이 산의 사슴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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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바 스키타이 예술의 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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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바 바위그림의 세계 자료번호 : ag.d_0003_001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