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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카스코-미누신스크 분지의 바위그림

  • 번역자
    장석호

Ⅲ. 하카스코-미누신스크 분지의 바위그림

1. 지구물리학적 조건과 기후
 미누신스크 분지는 지리적으로 시베리아의 거대한 예니세이강 기슭을 따라 형성된 스텝 분지로, 서쪽에는 쿠즈네츠키 알라타우, 남쪽과 동쪽에는 동서 사얀 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남동쪽의 저지대 혹은 미누신스크 스텝에는 붉은 색 데번기의 사암들이 들어나 있으며, 절대적인 표고 300~350m의 나지막한 언덕이 솟아있는 평지인데, 그 범위 내에는 언덕 돌출부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담수호가 있는 지역들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분지의 자연적인 식생은 주로 스텝의 나리새-귀리류 그리고 포아과 식물들의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변화가 극심한 대륙성 기후이며, 어느 지역은 건조하다. 예니세이 강의 오른쪽 기슭은 보다 습윤하다. 겨울철의 강수량은 매우 미미하다. 서쪽의 강한 바람은 활발한 눈의 이동을 촉진시키며, 그것은 재분배하고 증발시킨다. 1월의 평균 기온은 -19~25˚C, 7월은 +19~20˚C에 이른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의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물질문화사연구소와 국제 학술 조사대의 연구(미누신스크 분지와 투바)는 고대의 기후 변동에 관한 세세한 연대표를 만들 수 있게 해 주었다(반길 B., 자이체바 G. I., 보코벤코 N. A. , 2005; 디레크센, 쿨코바, 반길, 2005). 청동기 시대(기원전 3천년전~기원전 2천년)의 기후는 매우 건조했고(특히 투바에서), 그리고 기원전 2천년기 말에서 1천년기 초에는 습윤하고 따뜻한 기후가 시작되었다.
 자연적인 스텝의 풀들은 기본적으로 동물들의 사료용 기반이며, 농업은 인공적 관개시설을 요구했다. 사얀 스텝 분지 산기슭의 동물상은 서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의 산기슭과 접한 평지스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부 알타이와 투바의 스텝 분지 동물세계는 어느 정도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시베리아의 동물들을 제외하고 안틸로파(영양의 일종), 제이란(영양의 일종), 붉은 늑대, 산고양이, 기타 등등의 동물들이 몽골로부터 이 지역으로 들어왔다. 털 짐승들은 남부시베리아 산지의 전형적인 타입이다(다람쥐, 흑담비, 담비, 족제비 등). 로시(큰사슴), 마랄(큰사슴), 북 순록, 카바르가(노루의 일종), 산양, 야생 양(아르하르), 곰, 늑대, 살쾡이 등 커다란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알타이와 사얀 등 높은 산악지대에서는 눈 표범도 보인다(미하일로프, 1961: 51).
 이 지역에서 석기시대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기와 관련된 많은 양의 고고학적 유물들을 발견하였다. 그렇지만 조사한 스텝지대로의 활발한 이주는 에네올리트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청동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말, 그리고 철기 시대 초에 매우 강력하게 지속되었다.
서 사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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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글라흐트이와 테프세이 산 사이의 예니세이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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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르 산 일대의 하카시야 스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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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카스코-미누신스크 분지의 고대 문화
 하카스코-미누신스크 분지는 실질적으로 아시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데,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고대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는데 호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외부로부터의 다른 문화의 영향을 최저로 받았고, 아득한 선사시대로부터 형성되어 온 토착 문화의 토대 위에서 최대한으로 발전했다.
 이미 석기 시대부터 이 지역에는 사람들이 살았으며, 이에 관해 이 지역의 남쪽(마이닌스카야)과 북쪽(아폰토프스카야 그리고 다른 곳)에 있는 구석기 시대의 정주지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중석기와 이른 신석기 시대(대략 기원전 8천~4천 년 전)는 고고학적인 자료를 실질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바실리에프, 2001:61).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타이가 지대의 전방과 산기슭에 집중되어 있다. 스텝지역은 실질적으로 비어있으며, 스스로의 의의를 구하고 있다.
 신석기 시대 말기에는 고대 주민들이 아마도 중부 예니세이의 스텝 분지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관해서는 하카시야의 스텝 호수 주변에서 개체적으로 발견된 유물들이 증거하고 있다(리시츠인, 1988: 15~20). 그리고 에네올리트기부터 스텝 지역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다.
 아파나스에프 에네올리트 문화(기원전 4천년~3천년 전)는 바로 사얀-알타이 산지 시스템의 스텝 지역에서 조사되었다. 이것은 고대 유럽인에 의한 이 지역의 첫 번째 쿠르간 문화로서, 유라시아 유목 문화 시스템 중에서 가장 동쪽에 해당하며, 그 문화 담당자들은 인도 유럽어를 사용하였다.
 아파나스에프 문화의 기원에 관해서는 세 개의 시각이 존재하고 있다.
아파나스에프 문화의 토기
- 아바칸 박물관
 1. 얌(구덩이) 문화의 담당자들이 흑해 북부의 서쪽으로부터 이주해 와서 살았다(S. A. 테플로우호프, S. V. 키셀레프, A. P. 오클라드니코프, E. B. 바데츠카야, Y. F. 키류쉰, Vl. A. 세메노프 외).
 2. 동남 카스피 해 연안 지역의 서쪽으로부터 서시베리아, 카자흐스탄, 알타이를 거쳐 예니세이와 남서부 몽골로 이주해 왔다(I. N. 로핀).
 3. 이 문화는 완전히 자생적(중앙아시아)이며, 유입의 가능성은 서쪽(카스피해 연안이나 파미르와 천산 기슭에서)으로부터 주민의 일부가 이주해 왔다(V. I. 몰로딘, N. A. 보코벤코, P. E. 미탸에프). 그러므로 아파나스에프 문화의 해명에 대한 과제는 그대로 남아 있고, 새로운 접근 방법과 스텝의 유럽 지역에서 유적들의 복합적인 연구 등이 요청된다.
 무덤들은 많지 않지만 둥글고, 돌 울타리를 멋들어지게 만들었으며, 강변에 집중되어 있다. 정주지 등은 일시적(계절적)으로 사용되었다(그랴즈노프, 1967). 계란형이나 원형의 그릇에는 아름다운 장식무늬가 있다.
 그 다음으로, 오쿠네보 문화(기원전 3천년기 말~기원전 2천년기 전반)는 기본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러나 아마도 아파나스에프 문화와의 기원적인 관련은 없는 것 같다. 오쿠네보 양식으로 만들어진 많은 조형물(얼굴, 동물의 개체적인 조형물 등)들은 매우 넓은 지역(알타이에서부터 극동지역에 이르기까지)에서 살필 수 있다. 오쿠네보 무덤 속의 피장자 유골은 아파나스에프보다 몽골 인종에 더 가까우며, 양 인종 간의 유전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릇에는 어느 정도의 계통성이 있다(예를 들어 향료). 가장 근사한 것은 서시베리아 연합체, 즉 사무스, 로스토프킨 그리고 특히 크로토프와 관계된다. 이것은 유사한 제품이나 일반적인 종교적 표상 그리고 그릇 속에 나타난다.
안드로노보 문화의 토기
- 프리스탄 무덤 7번 울타리
 미누신스크 분지는 안드로노보 유목 민족(기원전 16~14세기)들의 분포지 가운데서 가장 동쪽 끝을 이루고 있으며, 카자흐스탄과 서시베리아로부터 서남쪽으로의 전설적인 인도 아리안족의 이주가 바로 이 종족과 관련된다(Е. Е. 쿠즈미나). 많은 연구자들은 안드로노보족들이 인도이란어 계통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란족 기드로님(기드로=라틴어로 ‘물’, 님=‘이름’을 지칭함, 기드로님이라고 하는 지명은 물과 관련된 곳)의 분포권은 예니세이에서 이미 제시한 지역의 안드로노보 족의 분포권과 일치하며, 북쪽에서 쿠즈네츠스키 알라타우로 돌아서 그들의 분지로에의 이동을 그리게 하는 것 등의 상황을 신중히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덤들은 십여 개 또는 수십 개(50개까지)의 울타리로 만들어졌다. 그릇과 함께 화려한 기하학적 장식이 있는 장신구가 묻혀 있었다.
 카라수크 문화(기원전 16~10세기)는 안드로프 문화와 교체되었으며, 그것은 중부 예니세이의 하카스코-미누신스크 시 사이의 분지를 기반으로 하여 분포한다. 이것은 청동기 시대 말에 남부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발달한 문화이다. 예니세이의 스텝 지대에서 수천 개의 매장 유적과 아름답고 다양한 청동기들이 발견되었다. 그 지역적인 변형들과 그 개개의 구성 인자들의 영향은 카자흐스탄의 중부에서부터 몽골과 북중국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미쳤다. 거대한 사료학적 기반은 문화의 기원과 발전의 방향 그리고 주변 지역과의 외적인 관계 등에 관한 다양한 가설을 만드는 토대이다.
 최근에 카라수크 문화의 기원에 관한 대립적인 가설들이 제기되었다(Э. Б. 바데츠카야, 1986; С. 레그랑, 2000).
 1. 카라수크 문화의 지역 자생과 그 구성 인자는 아파나스에프(А. Н. 리프스키), 오쿠네보 혹은 안드로노보 문화(М. П. 그랴즈노프, Г. А. 막시멘코프, Э. Б. 바데츠카야, С. 레그랑) 등 선행했던 다양한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레그랑(С. 레그랑)과 보코벤코(Н. А. Боковенко)는 카라수크 문화가 서쪽으로부터 모종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음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예니세이 강 중류 지역에서 자생하였다고 본다.
톨스트이 므이스(곶) Ⅰ의 타가르 시대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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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
- 아바칸 박물관
카라수크 문화의 토기
- 수호에 호수 II호분, 에르미타즈박물관
산양 장식이 있는 간두령
- 타가르 문화, 아바칸 박물관
카라수크 시대의 단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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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장식된 버클
- 사를라 마을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 흉노시대
 2. 다수의 연구자들은 청동기의 분석을 근거로 하여 카라수크 문화의 중앙아시아(남-동쪽) 기원을 증명하였다. 왓손(Watson)은 사실적인 카라수크 예술이 조건적인 양식이나 샨 청동기의 전형적인 것들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데, 이것은 그의 견해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의 스텝 문화는 남부 시베리아와 중국에 영향을 주었으며 독립적인 존재를 증명한다. 노브고로도바(Э. А. Новгородова)와 볼코프(В. В. Волков) 등도 이와 같은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데, 그들은 청동 제품들(특히 굽은 칼을 제외한 단검과 칼들)이 중앙아시아의 남부 스텝에서 미누신스크 쪽으로 들어온 것이며, 그 미누신스크 지역은 카라수크 세계의 서북쪽 경계이고 몽골과 북중국은 이 문화의 중심지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곳에서는 전형적인 카라수크식 매장 구조와 용기들의 무덤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3. 키셀레프(С. В. Кисилев)는 카라수크 문화가 중국 그리고 오르도스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견해에 따르면, 초기의 영향은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였다고 한다. 칼그렌(B. Kalgren)은 중국으로부터 시베리아의 동물양식이 나왔다고 하고, 한편으로 그것은 중국에서 돌발적으로 생겨났다고 강조했다. K. 예트마르는 이 문제에 신중히 대처하면서 카라수크 청동기에 인샨(陰山) 문화의 일정한 영향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4. 바데츠카야(Э. Б. Вадецкая)의 견해에 따르면, 카라수크 문화의 몇몇 요소들의 서쪽 기원(그릇의 개별적 타입과 그 장식, 매장시설의 몇 가지 요소)은 카자흐스탄 중앙 베가즈이-단드이바에프 주민이 동쪽의 예니세이로 이주한 결과이다. 츨레노바(Н. Л. Членова)는 예니세이에서 카라수크 문화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보지만, 그러나 모든 개별적인 요소(예를 들어 동물 양식)들이 이란과 그 주변 지역에서 들어왔다고 했다.
 카라수크 문화의 고고학적인 유적은 돌널 속 그리고 크지 않은 울타리 안에 보존된 묘지(3천 개 이상의 무덤을 이미 조사했음)에서 1~2천 개 이상 헤아려지는 묘지(150개 이상)이자 주거지(10여 개)이다. 토기도 다양한 기하학적인 무늬로 장식되었다
타쉬트이크 시대 나무 판 위의 그림
- 테프세이 III의 1호분
아스키즈 무덤 군이 있는 스텝
- 19세기 스탄케비치의 채색화.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물질문화사연구소의 고문서국
바야르스카야 피사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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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암각화
- 바야르산맥. 후기구석기~청동기 시대. 아바칸 박물관의 복원도
 다음은 타가르 문화인데, 그것은 기원 전 1천년 기의 카라수크 문화의 전통 중 어느 부분을 이어갔다. 이 문화는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의 강력한 문화 중의 하나였으며, 중심지를 따라 돌기둥이 서 있는 기념비적 돌 울타리는 특히 하카스코-미누신스크 분지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러나 많은 청동 유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스키타이 시베리아 동물 양식의 조형물들이 넓은 지역에서 살펴진다. 초기 타가르 시대의 유물들이 카라수크 문화 그리고 서쪽 지역들의 문화와 기원적인 관련이 있으며, 그것은 기원 전 1천 년기 전반에 카자흐스탄-중앙아시아적 새로운 문화가 예니세이 강 중류 지역에 영향을 끼쳤음을 살피게 해 준다. 타가르 문화는 이 시기에 사회의 효율적인 조직과 아울러 사카-스키타이 시대의 강력한 유목문화를 보여주었다. 타가르인들의 인류학적인 타입은 유럽인종이며, 특히 유럽의 스키타이 인종과 아주 가까운데, 다만 타가르 시대 말기에 몽골로이드와의 혼합이 증대되었다(코진체프, 1977).
 기원 전후의 타가르 문화와 사회에도 마찬가지로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개략적인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청동기가 철기로 바뀌었으며, 두 번째는 궁륭형과 함께 거대한 봉토분이 나타났으며, 부분적으로 매장의례가 바뀌었는데 이는 아마도 보다 새로운 몽골로이드의 유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타쉬트이크’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타가르 문화 매장 시설의 많은 요소들은 궁륭형 무덤 건축의 전통과 타쉬트이크 문화의 몇 가지 의례 속에서 지속되었음을 살필 수 있지만, 그러나 이주해 온 주민들의 문화적 영향도 있었다. 이것은 민족 대이동의 시대이자 유목민들의 거대한 그룹들의 이주 시대로, 그러한 상황은 많은 수의 예니세이의 바위그림 속에 전쟁장면의 모습으로 반영되어 있다. 바로 이 시기는 중앙아시아에서 서쪽으로 흑해 그리고 유럽 중심지까지 유목민족들(흉노-군, 투르크, 기타)의 강력한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강력한 이주의 원인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그러나 유라시아에서 세계적 자연 환경의 요소 그리고 또 내부적인 사회 발전의 과정 등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다.
 바위그림은 독창적인 고고학적 원천이며, 삶의 여러 관점과 고대 사회의 세계관을 살필 수 있도록 해 주었고, 그러한 것들은 발굴지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특히 이것은 보다 역동적이고 활발한 고대 유목민 사회와 관련되는데, 그 이주는 유라시아의 인류-문화적 상황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몇 가지 경우는 암각화만이 중앙아시아에서 세계적 문화 현상의 확산을 충분히 추적할 수 있게 해 주었다(예를 들면, 이동 수단의 발달- 바퀴, 수레, 마차 형상 그리고 기마의 기원- 사냥 방법과 전술, 복잡한 종교-신화적 시스템의 형성 과정 등).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암각화 유적지의 풍부함(100개 이상)은 고대 문화 발전의 여러 관점들을 결정하는데 훌륭한 사료적 기반을 만들게 한다.
 바위그림의 학술적 연구는 18세기부터 시작되었다(Д. Г. 메스르쉬미트, И. Г. 그멜린, Г. 팔라스의 조사). 이후, 19세기 말에 카스트렌(М. А. Кастрен), 티토프(Л. Ф. Титов), 스파스키(Г. И. Спасский), 파포프(Н. И. Попов), 사벤코프(И. Т. Савенков), 아스펠린(И. Р. Аспелин), 그 밖의 다른 연구자들이 조사를 통해 암각화 유적의 수를 대폭적으로 늘렸으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아드리아노프(А. В. Адрианов)가 많은 기여를 하였는데, 그는 특별히 정교하게 그것들을 채록하였다(데블레트, 1996). 20세기에는 댐 등 새로운 건설 프로젝트와의 관계 속에서 쉐르(Я. А. Шер)는 많은 바위그림 유적지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수행했는데, 그는 소련 과학아카데미 레닌그라드 고고학 연구 분소(ЛОИА АН СССР)와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물질문화사연구소(ИИМК РАН)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암각화 조사대를 이끌었다(쉐르, 1980; 쉐르, 1996; 블레드네바, 프랑크포르트, Legtchilo 기타, 1995).
 미누신스크 박물관의 연구원 레온티에프(Н. В. Леон-тьев)와 화가 카펠코(В. Ф. Капелько)는 암각화 연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지금은 케메로보 고고학자들의 그룹이 매우 적극적이고 성공적으로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예니세이 강 중류지역의 암각화에 관한 매우 중요한 시리즈물을 내고 있다(패트킨, 1977; 패트킨, 마르티로프, 1985; 미클라쉐비치, 1995; 소베토바, 1995; 소베토바, 2005; 미클라쉐비치, 소베토바, 1999; 기타).
 그와 더불어 제작 시기의 문제들은 이 분야의 연구를 위해 매우 실질적인 사료로 남아있다. 바위그림의 제작 시기 구분은 매우 복잡하지만, 그러나 지금 연구자들에 의해 여러 방법으로 연구되고 있으며, 바위그림의 개개 층들을 구분하게 하였다.
 1. 층위학(문화층에 의해 서로 서로를 뒤덮은 형상, 폐쇄 된 고고학적 유적지에서 발견한 그림들),
 2. 지형학(암맥을 따라 유적지 속에서 그림이 있는 바위 표면의 배치 그리고 바위 표면 자체),
 3. 그을린 정도(하나의 바위표면 위의 그림들),
 4. 쪼기 기법과 도구의 흔적,
 5. 비교와 대비(다른 고고학적인 유물이나 조형 예술품과의 비교, 기타 유사한 것),
 6. 양식(확인된 주제, 양식, 구성).
튜라 산 암각화
- 오쿠네보 문화기-초기청동기 시대
무덤 판석 위의 형상
- 체르노바야 8호분. 오쿠네보 문화
표트르 1세 수집품 중의 황금 버클
- 남부시베리아. 스키타이 시대
브이치하 산의 암각화
- 카라수크 문화. 후기 청동기 시대
말 형상
- 아프카세브스카야 피사니차의 부분. 스키타이 시대
 앞에서 나열한 방법에 따라 연구자들은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신석기 이전, 신석기, 청동기 시대(1~3시기), 초기 목동의 시대(1~3시기) 그리고 중세기 등 충분히 객관적으로 바위그림의 제작 시기를 구분하고 있다(그랴노프, 1960; Н. 파돌스키, 1970; 보브로프, 1972; 사비노프, 1964, 1976-1994; 쉐르 1966, 1975, 1980, 1993; 데블레트, 1976, 1982, 2005; 포르모조프, 1969; 크이즐라소프 , 레온티에프, 1980; 레온티에프, 1976, 1980; 레온티에프, 보코벤코, 1985; 보코벤코, 1987; 패트킨, 마르티노프, 1985; 오클라드니코프, 1967-1980; 샤마쉐프, 1987-1994; 장석호, 1999; 소베토바, 미클라쉐비치 1999; 기타 다수).
 아직까지는 구석기 시대의 것이라고 신뢰할만한 바위그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몇 몇 개의 커다란 형상들은 유적지와 함께 구석기 시대에 관련시킬 수 있는 근거가 있다(암소-바야르 산맥, 테프세이, 수하니하, 샬라볼리노, 기타). 오래된 층위 속의 이런 형상들은 ‘미누신스크’ 양식이라고 불리며(파돌스키, 1973:270~272), 쉐르는 그것들이 구석기 시대 초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보충적인 증거 자료를 구하고 있다(쉐르, 1980:190). 바위그림에서 이 층의 태고성에 대해서는 크기가 거대한 형상, 양식적 특성(둔중한 몸통, 앞으로 내 민 주둥이와 작은 머리, 마치 ‘늘어뜨린’ 것 같은 발, 도식주의와 사실성, 기타 등등), 형상들의 배열, 선사 시대 사냥꾼의 주변 세계(순록, 야생 소, 로시, 곰, 멧돼지, 말, 사슴), 형상의 ‘원초성’ 등이 증거하고 있다. 대부분 대퇴부가 잘 발달되었고, 몸통의 앞부분 혹은 전체 몸통을 수직선으로 분할하였다. 이 조형적 방법은 예니세이 중류 지역의 모든 바위그림에서 특징적이다(소베토바, 미클라쉐비치, 1999).
 신석기 시대의 ‘앙가라’식 암각화들은 예니세이의 암각화를 이 시대의 것으로 편년하게 하였다(오클라드니코프, 마르티노프, 1972`: 180~184; 파돌스키, 1973: 269~271; 쉐르, 1980 :`187~190; 패트킨, 마르티노프, 1985 : 118~121; 기타 등등). 연구자들은 ‘앙가라식 조형적 전통’의 발생이 새로운 주민들의 동쪽으로부터의 이주와 관계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달리는 로시(사슴의 한 종), 살찐 말, 곰, 도식적인 배 등의 형상이다(브이치하, 샬라볼리노, 아글라흐트이, 테프세이, 기타 등등).
 오쿠네보 문화의 암각화들은 무덤에서 나온 판석 위의 많은 형상들과 이즈바야니에와 같은 돌기둥 그리고 바위 위(샬라볼리노, 수하니하, 테프세이, 기타 등등) 표면에 새겨진 형상들을 통해서 잘 알려졌다(‘오쿠네보 논문집’, 1997, 2006 참조). 레온티에프(Н. В. Леонтьев)는 크고 다양한 모양의 주제와 형상(안트로포모르프 형상, 리치나, 합성 맹수, 태양 상징과 기호)들을 몇 개의 편년 그룹으로 나누었다. 안트로포모르프 형상은 초기 ‘타스하즈 그룹’으로, ‘세 번째 눈’이 없고 윤곽이 있는 리치나는 ‘벨트르이’식 그룹으로, 윤곽이 없는 리치나는 늦은 ‘죠이, 식그룹’으로 나누었다(레온티에프, 1978: 89~97). 또한 오쿠네보식 조형예술의 전통, 물감으로 그린 그림과 쪼기, 가느다란 선으로 새긴 것 등 여러 가지 조형 기법이 특징적이다.
 안드로노보 층의 형상은 세이멘스코-투르빈 유형의 유물들과 유사성을 통해서 구분되는데, 지금으로서는 두꺼운 목과 가슴이 있는 뚱뚱한 말 형상만 이 시기에 관계된다(패트킨, 1977).
 카라수크 시대의 바위그림은 이 시대가 매우 도식적이고 또 조건적이며, 주제는 매우 단순하지만, 그러나 달리는 말, 사냥 장면, ‘세계수’, 마차 형상(브이치하, 테프세이, 후르투야르 홀 기타) 등등 일정한 기호적인 의미를 지닌다. 형상은 도식적이고 또 사실적이며 예술성이 높은 청동검 손잡이의 주물 조각과는 매우 다르다. 조형물에 따라 연대 추정이 이루어지는데, 그것들은 카라수크 유적지(바르치의 북안, 폴타코프의 하라-하야 마을 기타 등등)에서 발견된 것이다(레온티에프, 1980: 69~80; 패트킨, 1985; 필리포바, 1990; 샤비노프, 1993; 미클라쉐비치, 1995; 기타 등등). 그것들은 매우 도식적인 말 형상과 마차, ‘생명수’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보여준다. 말 형상은 매우 도식적인데, 실질적으로 모두 전면 쪼기로 그려졌다. 목은 그다지 길지 않지만 가늘고, 몸통은 날씬하고 다리는 도식적이다(둘 또는 넷). 아마도 청동기 시대의 비슷한 양식으로 그려진 마차, 수레 그리고 말 등의 다양한 형상들은 미누신스크 분지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카드이르바에프, 마르쉐프, 1977: 5, 6~9), 알타이(오클라드니코프, 오클라드니코바, 자포로즈스카야, 스코르이니나, 1960 : 152; 그 외), 투바(데블레트, 1982 `: 8) 그리고 몽골(볼코프, 1972) 등지에서 스키타이 시대까지 지속되었다(패트킨, 1970 : 126~129).
나무 판 위의 그림
- 테프세이 III의 1호분. 타쉬트이크 문화
 스키타이(타가르) 형상은 일련의 부동의 양식적 특성에 의해 확실히 분류되고 있고, 그것은 사얀 알타이의 스키타이 유적으로부터 나온 가장 다양한 예술품들과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동물 형상(그 가운데서 말)은 몸통의 일반적인 비율 그리고 동물의 어깨와 대퇴부에 장식된 나선무늬 등이 특징이다. 동물의 몸통에 활처럼 휘어진 선이나 교차하는 선이 가득한 형상이 미누신스크 분지의 특징이다(쉐르, 1980 : 87, 88, 120; 기타). 끝없이 풍부한 표현력으로 그려진 이들 말이나 기마상들은 스키타이 시베리아 양식과 관련된다. 복잡한 주제의 집합체인 그이후 시기의 형상들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다양한 동물들의 개체적인 형상들’(아글라흐트이, 테프세이, 바야르, 오브르이프, 우스트 투바, 기타).
  2. ‘사람과 기마상의 개체적인 형상들’(타가르 시대 쿠르간의 많은 둘레돌, 테프세이 암각화, 우스트 투바, 바야르, 흐이즈일 하야, 기타),
  3. ‘동물의 무리 그림들’(아글라흐트이-키잔, 세들로비나, 테프세이, 오르타 사르골, 모자-호무잘르크, 기타),
  4. ‘희생 동물의 행렬’(아글라흐트이, 돌 울타리),
  5. ‘신성한 사슴’(바야르, 우스트 에시, 벨르이 이유스 Ⅳ, 순두크),
  6. ‘태양 말’(우스트 투바 Ⅳ),
  7. ‘특정 집단의 평화로운 삶의 장면’(바야르 Ⅰ-Ⅲ, 아글라흐트이-키잔, 쉬쉬카, 인야, 볼치이 계곡, 폴로사타야, 기타),
  8. 빠르게 달리는 기마상(전 지역),
  9. 말을 끌고 가는 사람(폴로사타야),
  10. 말을 끌고 가는 기마상(흐이즈일-하야, 세들로비나, 기타),
  11. 말을 타고 ‘사냥하는 장면’(테프세이, 바야르 Ⅱ, 우스트 투바, 아글라흐트이-아프카세프, 세들로비나, 울라즈이, 기타) 그리고 도보하는 사냥하는 장면(티게이, 바야르 Ⅱ),
  12. ‘전쟁 장면’: 보병들의 전투(수하니하, 벨르이 이유스), 보병과 기마병의 전투(샬라볼리노, 세들로비나, 노보-바야르스카야), 기마병 간의 전투(샬라볼리노, 바야르, 세들로비나),
  13. ‘종교-신화적 내용의 주제’: 세계수 곁의 말(아글라흐트이, 울라즈이), 하늘 말과 성스러운 마차(우스트 투바, 아글라흐트이, 쉬쉬카, 세들로비나, 기타),
  14. 내세로 가는 길(쉬쉬카, 칼르이, 자바이칼, 몽골의 차강 골, 기타),
  15. 사람이 죽고 내세를 떠나는 영혼(테프세이 ⅩⅥ, 카프카즈스카야, 후추르트, 기타), 정권에 참여 그리고 병사들의 출발(테프세이, 우스트 투바), 종교적 축제(흐이즈일-하야, 발샤야와 말라야 바야르 스카야 피사니차).
 타가르 예술에서 몇 가지 주제 계통의 발생적인 관계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청동기 시대(기원전 2천년)의 문화층들로부터 나타나며, 첫 번째가 오쿠네보와 카라수크 문화로부터이다(М. Л. 파돌스키, Я. А. 쉐르, Д. Г. 사비노프, Н. А. 보코벤코, 기타).
  1. 성스러운 말과 마차,
  2. 희생 동물(말, 산양, 순록),
  3. 하늘의 그리핀들,
  4. 고통의 장면,
  5. 세계수와 말들,
  6. 사람과 말들,
  7. 내세로 가는 길 등이 그것이다.
 군노-사르마트 시대 타쉬트이크 층의 형상들은 독자적인 양식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동물들은 앞발 중의 하나를 구부려서 빠르게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말 머리에는 언제나 버섯모양의 깃털 장식이 있다. 기타 등등), 예니세이의 Ⅰ-Ⅴ세기의 일련의 고고학적인 유적들(테프세이 Ⅲ, 기타 등등)의 예술품 속에 제시되어 있다(그랴즈노프, 1971; 쉐르, 1980 : 251~254; 코이즐라소프, 1990 : 182~191). 다양한 주제들(사냥 장면, 전쟁 장면, 동물 행렬)을 실질적으로 미누신스크 분지 전 지역에서 살필 수 있다(포드카멘, 투스, 흐이즈일-하야, 찰판, 테프세이, 기타).
 그러므로, 바위그림은 객관적으로 특정한 역사적 시기 가운데 서로 다른 민족들의 생활 속에서 여러 방면과 단계적으로 발생한 사건들을 반영하고 있다. 인도 유럽인 유목문화의 침투와 그 문화의 전 중앙아시아에로의 확장은 예를 들어 예니세이(아파나스에프)와 한국의 동시기 문화(송국리 타입)와 같은 단지 그릇의 유사한 형태와 장식 모티프뿐만 아니라 청동기 시대 바위그림에서 주제의 유사성을 만들었다(얼굴 형상, 나선무늬, 마름모꼴, 지그재그 등 복잡한 기하학적 도상). 보다 특징적인 예는 예니세이의 오쿠네보 시대 암각화 (리치나, 기하학적인 형상)속에 제시되었는데, 그것들은 대곡리와 천전리 등 한국의 암각화 유적지의 유사한 얼굴 형상과 대비된다(장석호, 1999; 김정배, 2006). 이처럼 주제와 제작 방법의 가까운 유사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문화적 친연성 아니면 청동기 시대의 이 지역 민족들과의 다른 관련성에 관해 증거하고 있다.
 보다 늦은 시기의 유사성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생명수(生命樹)와 희생제물인 말, 순록, 혹은 산양, 유사한 속성 가운데 그리고, 시베리아 타입의 샤머니즘 시스템, 기타 등등 인도유럽식 주제의 침투이다. 군노-사르마트 시대에 한국 예술과 중앙아시아의 관련성은 보다 증대되었으며(실로브에프, 1997 : 359), 아마도 북 스텝 유목민 세계의 영향 아래에 있었고, 또 중앙아시아의 흉노-惴누의 형성과 십중팔구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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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카스코-미누신스크 분지의 바위그림 자료번호 : ag.d_0003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