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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각화

조사 개요 및 유적지 현황

Ⅱ. 조사 개요 및 유적지 현황

1. 조사 개요
 동북아역사재단은 2008년에 몽골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와 몽골의 서북쪽에 있는 오브스 아이막 일원의 암각화를 공동으로 조사하기로 합의하고 협정서를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양 기관은 조사단을 구성하고, 2008년 7월 21일부터 8월 20일까지 한 달간 모두 여덟 곳의 유적지를 조사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25개의 사슴 돌과 300여개의 암각화를 채록하였고, 2,400여 개의 형상을 파악하였다.
 양 기관이 펼친 한·몽 공동 암각화 조사는 2007년도의 고비 알타이 아이막 바양 올 솜에 이어 두 번째로 실시된 것이며, 이를 통하여 알타이 산맥 이동의 암각화를 하나의 권역으로 묶어서 살필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카스코–미누신스크 분지 및 투바 지역 바위그림과의 상관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몽골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의 선사 시대 바위그림의 세계를 하나의 권역 속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해주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펼치고 있는 해외 학술기관과의 일련의 북방 지역 암각화 조사 사업은 만리장성을 경계로 하여 그 이북 지역에서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한 북방 수렵 및 유목민 문화의 세계를 암각화를 통하여 파악하기 위함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지역 문화는 남방의 농경문화와 끊임없는 교류와 대립 그리고 충돌 과정을 거치면서 독창성 있는 문화를 구축하였으며, 아직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정착민 문화와 구별되는 유목 경제를 기반으로 하여 생활하고 있다.
 몽골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는 유럽의 프랑코–칸타브리아 지역에 견주어질 정도로 인류의 선사 문화사에서 주목을 끄는 지역이다. 알타이 산맥의 남쪽에는 호이트 쳉헤르 동굴벽화가 발견되었으며, 바이칼 호수의 북서쪽에는 말타와 부레트 등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조사·연구되고 있다. 또한 북극이나 동해로 흘러드는 레나, 예니세이, 오비 그리고 아무르 등지의 강변에는 석기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렵 및 유목민들의 문화유산들이 지표 속과 바위표면에 층을 이루면서 켜켜이 쌓여 있다.
 이 지역의 문화를 담당했던 주인공들은 서쪽의 이란계 유목민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이어왔지만, 인종적으로 몽골로이드를 주축으로 하며, 이들은 언어적으로 우랄 알타이어 중 터키어와 몽골어를 썼다. 역사적으로는 스키타이 시대 이후 흉노, 선비, 유연, 튜르크 등의 유목 민족이 차례로 이 지역에서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들의 정신문화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그리고 샤머니즘을 기반으로 하면서 천손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건조한 대륙성 기후와 척박한 자연 환경 등에 적응하여 유목이라는 경제 구조를 창출하였는데, 바로 이런 점들이 이 지역에서 관찰되는 일반적인 문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선사 및 고대 한국 문화 가운데도 이 지역과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성을 띠고 있는 요소들이 살펴진다. 그 가운데서도 우선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인종 및 언어적인 친연성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인은 인종적으로 몽골로이드에 속하며, 언어적으로는 알타이어 중에서도 퉁구스어 계에 속한다. 또한 천손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신화와 동물 토템 그리고 샤머니즘을 기반으로 하는 기층 종교 등에서도 동질성을 찾아낼 수 있다. 이러한 동질성은 선사 및 고대 물질문화와 조형 예술 가운데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한·몽 공동조사단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바위그림을 조사하여 그 실상을 세계 암각화 학계에 소개하는 한편 그 속에서 선사 및 고대 중앙아시아의 세계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문화소와 조형 양식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우리는 그러한 문화소를 이미 스키타이-시베리아의 세계 속에서 확인한 바 있다. 한·몽 양국의 공동조사단은 유라시아라고 하는 광역의 문화권이 시대의 차이와 문화 주체들의 성향 및 변동에 따라서 그 문화소가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중앙아시아적인 보편성 속에서 지역적 특수성은 무엇이고 또 그 상호간의 이질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살필 수 있는 단서를 파악해 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사진 6] 협정서 체결 장면
 양 기관은 이러한 문제들이 해명되어야 할 필요성에 공감하고 협정서를 체결하였으며, 그에 따라서 조사단을 구성하였다. 공동 조사단은 한국 측에서 장석호(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가, 몽골 측에서는 D. 체벤도르지(몽골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 소장), M. 쳉겔(몽골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바트투무르(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연구원), 바르사(울란바타르대학 학생) 등이 참여하였다. 그밖에도 오이도브, 에르덴체체크 등이 운전과 보조요원으로 참여하였으며, 필요에 따라서 현지 인력을 활용하였다.
 전체적인 조사 일정과 지역 선정 등은 D. 체벤도르지 소장과 장석호가 협의하여 정하였으며, 현장 조사를 위한 이동로 및 조사 유적지 결정 등은 체벤도르지 소장이 맡았다. 조사는 2007년도와 같이 촬영과 채록의 두 가지 방법을 중심으로 실시하였다. 사진 촬영과 암면의 형상 파악은 장석호가, 유적지 및 암면의 고도 측정은 M. 쳉겔이 맡아서 수행하였다. 형상 채록은 장석호와 M. 쳉겔이 주도하였다. 현장 조사는 전체 유적지 상황 파악, 유적지 위치 및 고도 측정, 암면 상황 파악, 사진 촬영, 형상 채록 등의 순서로 실시하였으며, 바트투무르와 바르사 등이 보조요원으로 조사를 도왔다.
 주 조사지인 오브스 아이막은 알타이와 타누 올 등 두 개의 산맥이 서북쪽을 둘러싸고 있으며, 오브스와 햐르가스 등의 거대한 호수가 있는 몽골 내에서 평균 해발 고도가 가장 낮은 아이막 가운데 하나이다. 오브스에서부터 호브드를 거쳐 고비알타이 아이막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호수들의 저지대(‘이흐 노로딘 호트고르’)가 펼쳐져 있다. 아이막의 중심에서부터 동쪽으로 한 후흐 산맥이 가로로 뻗어있다. 아이막의 행정 도시는 울란 곰이며, 오브스 호수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또 러시아의 투바공화국으로 통하는 포장도로가 나 있다. 울란바타르에서 오브스 아이막까지는 약 1,200여 km에 이른다
[사진 7] 골 모드 흉노 무덤 발굴 현장"
 조사단의 이동로는 울란바타르에서 볼간, 아르항가이, 자프항 아이막을 거쳐 오브스 아이막의 조사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7월 23일 아침에 울란바타르를 출발하였으며, 도중에 골 모드 흉노 무덤 발굴 현장을 답사하였고, 7월 24일 오후에 아르항가이 아이막의 하노이에 도착하였으며, 7월 27일 오전까지 이곳의 사슴 돌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7월 31일에 오브스 아이막 나란볼락크 솜의 ‘조라그트 하드’ 암각화 유적지에 도착하였으며, 8월 2일 오전까지 이 유적지의 형상들을 채록하고 촬영하였다. 8월 2일에는 다시 우믄고비 솜으로 이동하였으며. 8월 8일까지 ‘후렝 우주르 하단 올’ 암각화를 조사하였다.
 8월 9일 아침에 조사단은 오브스 아이막의 조사를 마치고 울란바타르로 향하는 귀경길에 올랐다. 이동로는 오브스 아이막에서 자프항, 흡수굴, 볼간, 수흐바타르 아이막을 거쳐 울란바타르에 이르는 길이었다. 8월 10일에 흡수굴 아이막 체체를렉크 솜에 있는 후흐딘 오보(일명 ‘만트’) 암각화 유적지에 도착하였으며, 11일까지 근처의 암각화 유적지를 답사하고 일부 형상들을 채록하였다. 조사단은 11일 오후 늦게 무릉시에 도착하였으며, 8월 12일에 무릉시 서쪽 44km 지점에 있는 ‘친군자브인 이흐 바가 모나’ 암각화와 17km 지점의 ‘오쉬긴 톨고이’ 사슴 돌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8월 14일 오후에 울란바타르에 도착하였으며, 8월 15일부터 8월 17일까지 헨티 아이막의 라샨 하드와 우주르 하드 등의 암각화를 조사하였다. 8월 18일부터 19일까지 이틀간은 그동안의 조사 내용을 정리하고 사진을 교환하였으며, 현장에서 채록한 도면들을 수합하는 등 귀국 준비를 하였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8월 20일 오전에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이렇게 하여 총 31일간의 조사 일정 중 20일 동안 현장 조사를 하였으며, 6일 간 이동을 하였고, 나머지 5일간은 출국과 귀국, 조사 준비, 조사 결과물 정리 및 교환 등에 할애하였다.
[사진 8] 사슴 돌 유적지(하노이)
2. 유적지 현황
1) 아르항가이 아이막 ‘하노이’의 사슴 돌 유적
 사슴 돌은 돌기둥에 사슴 형상을 새겨 놓은 것을 이르는데, 학자들 가운데는 그것을 기원전 12세기경의 것으로 편년하기도 하지만,주 006
각주 006)
체벤도르지, 쳉겔, 2008, 「몽골의 사슴 돌」, 국립경주문화재 연구소 외, 『돌에 새긴 유목민의 삶』, 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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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유라시아 대륙에 소위 ‘스키타이-시베리아 동물 양식’의 규범이 모든 조형 미술 속에 적용되었으며, 사슴 돌도 이 규범에 의거하여 표현되었다. 현재까지 사슴 돌은 약 700여 기가 발견되었으며, 이 중에서 600여 기가 몽골 내에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사슴 돌 문화의 중심은 몽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하카스코–미누신스크 분지의 타가르, 내몽골의 오르도스 등과 동 시대에 꽃핀 독특한 지역 문화인 셈이다.
 사슴 돌은 주로 기념과 희생제물의 복합적인 공간 속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시문 내용을 놓고 볼 때, 그것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유라시아식이며, 그 가운데는 사슴을 비롯한 동물 형상이 그려져 있지 않다. 두 번째는 사얀-알타이식으로, 보다 사실적인 사슴 형상이 그려져 있다.주 007
각주 007)
В.В.Волков, 2002, Оленные камни Монголии, М., 16~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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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몽골–자바이칼 식으로, 양식화된 사슴 형상이 그려져 있다. 그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슴 돌은 서몽골의 경우 히르기수르와 자바이칼 지역에는 돌널무덤, 그리고 투바에서는 우유크 문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주 008
각주 008)
В.В.Волков, 2002, 위의 책,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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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 사슴 돌 유적지 조사 광경(하노이)
 하노이 사슴 돌 유적지는 아르항가이 아이막 운드르 올란 솜 보르틴 암에 위치한다. 넓은 초원의 동북쪽에는 미치트 강이 흐르고 있고, ‘미치트 항가이’ 초원 가운데는 이미 도굴되어 그 원래의 모습을 살피기 어려운 여러 기의 돌널무덤과 함께 사슴 돌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슴 돌들은 사각 울타리를 이루면서 무덤 가장자리에 넘어져 있다. 이미 선행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과 같이,주 009
각주 009)
체벤도르지, 쳉겔, 2008, 앞의 글, 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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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사슴 돌들도 돌널무덤을 만들면서 둘레돌 등으로 이용된 흔적을 살필 수 있었다.
 세 기의 무덤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하노이 Ⅰ, Ⅱ, Ⅲ으로 명명하였으며, 무덤군의 남서쪽에 있는 것들을 일괄하여 제Ⅳ그룹으로 분류하였다. 그 다음 각 무덤 별로 흩어져 있는 사슴 돌의 개체 수를 파악하였는데, 그 결과 하노이 Ⅰ에서 6기, Ⅱ에서는 6기, Ⅲ에서는 서 있는 것 1기를 포함하여 10기의 사슴 돌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기타 그룹에서는 모두 3기의 사슴 돌이 확인되었으며, 이 가운데 한 기는 비스듬히 서 있었고 나머지는 넘어져 있었다. 모두 25기의 사슴 돌을 촬영하고, 그 가운데서 두 기는 네 면을, 나머지는 위에 드러난 한 면의 형상들을 각각 채록하였다.
 사슴 돌은 보통 높이 2m 전후의 돌기둥 네 면에 사슴을 중심으로 하여 동그라미, 활, 칼, 전투용 도끼 그리고 집 등을 새긴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슴 돌은 위, 가운데 그리고 아래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윗부분은 주로 동그라미와 그 변형들이 그려져 있다. 동그라미는 한 개만 그려진 것과 두 개가 그려진 것 등 두 가지 타입이 있으며, 두 개가 그려진 경우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짝을 이루고 있었다. 변형 동그라미는 주로 바깥으로 짧은 선이 그려졌으며, 일부 동그라미 가운데는 아래로 장식이 달려 있기도 하다. 바로 이 윗부분은 점선으로 가운데 부분과 구분되어 있다.
 가운데 부분은 사슴들이 집중적으로 그려져 있다. 사슴의 주둥이는 새부리처럼 변형되어 있으며, ‘C’자 또는 역 ‘C’자 형의 가지를 반복시켜 하나의 패턴으로 정형화된 뿔은 등선을 따라서 엉덩이 부분까지 이어져 있고, 또 견갑골 부위는 삼각형으로 융기되었다. 목은 길고 배는 비교적 홀쭉한 편이며 앞뒤다리는 안으로 굽혔거나 혹은 불완전하게 마무리되어 있다. 이러한 사슴 형상은 주로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비스듬히 대각선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여러 마리가 반복하여 그려져 있다. 이처럼 여러 마리의 사슴들이 돌기둥에 그려져 있기 때문에 이를 사슴 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래 부분은 사슴, 칼, 활, 동그라미 등이 그려진 것과 아무 것도 없는 것 등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가운데와 아래는 마름모, 지그재그 등의 무늬가 있는 띠나 선에 의해서 구분되어 있다. 25개의 사슴 돌을 통해서 모두 31개 면의 그림을 채록하였는데, 아랫부분에 형상이 시문된 것은 모두 8개였으며, 그 중에서 칼만 그려진 것은 3개, 사슴과 무기가 같이 그려진 것은 2개, 사슴만 그려진 것과 동그라미만 그려진 것 그리고 사슴과 불분명한 형상이 각각 1개씩 파악되었다.
 가운데와 윗부분에만 그림이 그려진 것은 23개였으며, 그 중에서 사슴은 10개, 사슴과 칼이 같이 그려진 것은 4개, 활과 칼 그리고 전투용 도끼 등 여러 가지 무기들이 같이 그려진 것과 집과 칼 그리고 집만 그려진 것이 각각 2개씩 확인되었다. 가운데 부분에 사슴만 그려진 것, 집과 무기만 그려진 것 그리고 불분명한 것도 각각 1개씩 확인되었다. 가운데와 아래의 경계지점에 무기들이 그려진 것도 1개가 확인되었다.
2) 오브스 아이막
(1) 조라그트 하드
 조라그트 하드는 오브스 아이막의 나란볼라크 솜의 북쪽에 위치한다. 솜에서 북쪽으로 약 60여 km 떨어진 곳에 해발 고도 2,358m의 토그토인 쉴(Togtoin Shil) 산이 있으며, 이곳에는 후레밍(Huremiing) 오보가 있다. 이 산은 한 후흐(Han Huh) 산맥의 서쪽 끝단에 위치하고 있다. 암각화 유적지는 토그토인 쉴 산의 지봉 가운데 하나이며, 그 고도는 해발 약 2,033m에 이른다. 솜에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유적지 인근의 유목민 여름집에 도착하였으며, 다시 그곳에 사는 유목민들의 안내를 받아 유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사진 10] 오브스 아이막 지도
[사진 11] 조사현장(조라그트 하드)
 암각화는 현지인들이 ‘조라그트 하드’라고 부르는주 010
각주 010)
몽골이나 투바 그리고 하카시야 등지의 암각화 유적지는 비치그틴 하드, 비치그티크 하야, 조라그트 하드, 피사니차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모두 글씨 또는 그림이 그려진 바위를 이르는 말이다. 조라그트 하드는 그림 바위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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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봉우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림은 산등성이를 따라 솟아 있는 바위의 동남쪽 암면과 산기슭에 드문드문 누워있는 바위들에 각각 그려져 있었다. 바위의 크기와 암면의 상황에 따라서 그림의 구도와 표현된 형상의 수도 각각 다르다. 즉, 하나의 암면에 100점 이상의 형상이 그려진 것이 있는가 하면, 단 하나의 형상만 그려진 것도 있다. 그림이 그려진 바위 주변에는 몽골의 여느 암각화 유적지처럼 동물의 뼈들이 흩어져 있었으며, 산기슭에는 마른 계곡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두 29여 개의 암면에서 총 572점의 형상을 채록하였다. 그림 가운데서 산양은 모두 382점이 확인되었으며, 사슴은 72점이 확인되었다. 기마상이 23점, 늑대가 22점이 그려졌으며, 사람 14점, 말 3점, 변형 동물 2점, 바퀴 1점, 기호 1점 등이 확인되었다. 그밖에도 미완성이거나 불분명한 형상이 52점이 있었다. 산양은 조라그트 하드 암각화의 전체 형상 중 약 67%에 이르며, 그러므로 산양을 이 암각화의 핵심적인 제재라고 할 수 있다. 사슴은 두 번째로 많이 그려진 제재이지만, 산양의 5분의 1에 불과하였다.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산양 형상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서 있거나 달리는 모습, 뿔이 하나만 그려진 것과 두 개가 그려진 것, 뿔을 나선형으로 그린 것과 나이테를 그린 것, 양감이 있거나 없는 것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산양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그것들이 여러 시기에 걸쳐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점은 산양이 오랜 기간 이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던 동물임을 말해준다. 산양은 대체적으로 여러 마리가 같이 그려져 있으며, 그 밖에도 늑대가 쫓거나 사냥꾼의 사냥감으로 그려진 경우도 있다.
 햇볕에 직접 노출되지 않은 바위는 그 표면이 황토색 등 원래의 색을 띠고 있지만, 누워 있거나 노출된 바위는 까맣게 타 있었고, 또 눈과 비 등으로 인해 중간 중간에 이끼가 끼어 있기도 하였다. 그와 같은 바위에 그려진 형상들은 세심히 살피지 않으면,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파악해 내기 어렵다. 또 햇볕의 각도에 따라서 그 선명도가 달라져 보이기 때문에 조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중심적인 제작 기법은 쪼기이며, 가느다란 선으로 그려진 형상도 몇 점이 확인되었다. 대부분의 형상은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며, 전면을 쪼아서 그렸지만, 나머지 몇몇의 형상들은 윤곽선만 쪼아서 그리기도 하였다. 선으로 그린 형상들은 쪼아서 그린 그림 사이 또는 그 위에 덧그려져 있었는데, 이로써 그것들은 보다 후대에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쪼아서 그린 형상 위에 색을 칠한 흔적은 살필 수 없었으며, 물감으로 그린 그림도 살필 수 없었다.
 조라그트 하드 암각화 가운데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산꼭대기의 제일 높은 곳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것은 조라그트 하드 암각화 중 제일 높은 바위에 그려진 산양 떼 그림이다. 이 그림은 바로 밑에서도 보이지 않았으며,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바위를 어렵게 올라가서 암면 앞에 서면 그 때 그림의 전모가 드러난다. 그림 속에는 모두 39개의 산양 형상과 다섯 개의 쪼다 말았거나 불분명한 형상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 그림이 주목을 끄는 이유는 커다란 산양 형상과 보다 작은 산양들이 서로 다른 위치와 양식에 의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구도는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를 비롯하여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고구려의 고분벽화 그리고 오늘날의 종교 미술 가운데서 즐겨 채택된 것인데, 소위 ‘주대종소(主大從小)’의 구성 방식이 적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사 및 고대 종교 미술 가운데서 주인공은 대부분 가운데 또는 높은 곳에 크게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암면의 그림이 그와 같은 구성 방식에 의거하여 그려진 것이다. 위에 그려진 산양은 다른 것들보다 네 배 이상 더 크게 그려졌으며, 눈, 귀, 뿔 그리고 꼬리 등도 더 분명하고 또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또한 아래의 산양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진 12] 희생제물(후렝 우주르 하단 올)
 이 그림은 조라그트 하드 암각화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대변하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유목민들의 성소이고 또 산양은 그들의 토템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이 그림은 조라그트 하드의 어느 그림보다도 높은 곳에 그려져 있었으며, 또 쉽게 눈에 띄지도 않았다. 형상 하나하나는 매우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었으며, 어디에도 덧그리기나 고의적으로 훼손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2) 후렝 우주르 하단 올
 후렝 우주르 하단 올은 오브스 아이막 우믄고비 솜의 바양골 바그에 있는 암각화 유적지다. 유적지는 우믄고비 솜에서 동남쪽으로 17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오브스 아이막의 남쪽 끝으로 호브드 아이막과 도계(道界)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동북쪽에는 하르 오스 호수가 있고, 서남쪽에는 해발 3,257m의 ‘소고’ 산과 3,351m의 ‘아일란 후흐’ 산이 있다. 서북쪽에는 멀리 차간 데글리의 만년설이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유적지의 동남쪽에는 하와르자와 으블즈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바로 앞에는 가뭄으로 바짝 마른 개울이 길게 물길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으블즈 바로 뒤에는 후렝 우주르라고 하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고, 바로 뒤에는 샤르 볼긴 온츠라고 하는 보다 높은 산이 솟아 있다. 후렝 우주르 하단 올은 이 둘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나지막한 언덕이기는 하지만, 후렝 우주르는 기복이 있는 언덕으로 바위들은 대부분 골짜기를 따라서 암맥을 이루고 있었다. 후렝 우주르와 샤르 볼긴 온츠 사이에는 비교적 편평한 평지가 있었으며, 암맥 사이사이에 몇 기의 히르기수르(케렉수르)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림은 이 두 곳의 동남쪽으로 향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곳의 조사는 두 지역을 하나로 묶어서 진행하였다. 후렝 우주르의 오른쪽 끝과 샤르 볼긴 온츠의 아래쪽 암맥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조사를 위해 후렝 우주르의 왼쪽 끝에서부터 샤르 볼긴 온츠의 마지막까지를 ‘Ⅰ’에서 ‘’까지 13개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다시 각 구역 내의 그림이 그려진 바위마다 1, 2, 3 등의 번호를 붙였다. 그런 다음 구역 별로 그림이 그려진 암면의 수와 암면 별 그림의 내용을 파악하였다.
 후렝 우주르의 Ⅰ구역에서는 3개, Ⅱ에서는 16개, Ⅲ에서는 15개, Ⅳ에서는 47개, Ⅴ에서는 58개, Ⅵ에서는 17개, Ⅶ에서는 36개의 암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샤르 볼긴 온츠와 경계 구역인 Ⅷ에서는 26개에서 그림이 확인되었으며, 샤르 볼긴 온츠에서는 Ⅸ 구역에서 29개, Ⅹ에서 49개,Ⅴ에서 39개, Ⅵ에서 13개, 에서 35개의 암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후렝 우주르 하단 올 암각화 유적지에서는 총 385개의 암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셈이다.
 그림이 그려진 암면의 분포 상황을 놓고 보면, 후렝 우주르에서는 Ⅳ와 Ⅴ번 구역에 그림이 집중되어 있으며, 좌우로 갈수록 그림이 그려진 암면의 분포 수는 줄어들었다. 또한 Ⅳ번과 Ⅴ번 구역의 바위들에는 다른 곳에 비해 형상의 크기가 컸고, 많은 형상들이 집중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러한 점을 놓고 볼 때, 이 두 구역이 후렝 우주르 암각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림은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그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주변 구역으로 퍼져나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흥미로운 점은 유목민의 으블즈도 바로 이 두 구역 앞에 세워져 있었다.
 후렝 우주르의 경우는,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를 구역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샤르 볼긴 온츠는 암맥이 계단식 층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샤르 볼긴 온츠는 산기슭에서부터 위로 향하면서 Ⅸ, Ⅹ 등의 구역 번호를 붙였다. 제일 높은 번 구역의 가운데는 이 암각화에서 가장 큰 교미하는 사슴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가면서 형상들이 점점 더 크게 그려져 있으며, 그 중심에 교미하는 사슴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참고로 이 장면에서 수사슴 형상의 크기는 140cm에 이른다. 그러니까 샤르 볼긴 온츠 산의 암각화는 이 그림을 정점으로 하여 위계질서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전체적으로는 병풍처럼 뒤를 막고 있는 바위산과 비록 극심한 가뭄 때문에 물은 말랐지만, 유적지 앞으로 흘렀던 시내 그리고 앞에 펼쳐진 넓은 초원은 몽골 암각화 유적지의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바위틈 사이에는 동물의 뿔이나 뼈 등이 감추어져 있었으며, 산꼭대기를 향해 통째로 바쳐진 흰 염소 한 마리가 있었고, 또 여기저기에는 해체된 동물의 잔해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러한 점들은 조라그트 하드와 마찬가지로 이곳이 지역 주민의 성소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암맥과 암맥 사이의 편평한 곳에도 드문드문 히르기수르가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 13] 히르기수르(후렝우주르 하단올)
 현장 조사 과정에서 모두 1,829점의 형상을 파악하였다. 이 가운데는 동물 1,677점, 사람 71점, 마차 15점, 기호 14점, 기타 52점 등이 그려져 있었다. 동물 가운데는 산양이 1,291점, 사슴 129점, 늑대 98점, 소 29점, 말 22점, 합성 동물 13점, 낙타 3점, 개 2점, 미완성이거나 불분명한 형상 90점 등이 확인되었다. 사람은 단독으로 그려진 것 25점, 기마상 33점, 사냥꾼 13점 등이 그려져 있었다. 마차 15점, 기호 14점, 기타 그룹으로 불분명한 것 52점 등이 살펴졌다.
 동물은 전체 형상의 약 92%에 이르며, 그 가운데서도 산양 형상이 약 77%의 형상 점유율을 보인다. 산양에 이어서 사슴이 두 번째로 많이 그려진 형상이다. 그런데 사슴은 산양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이렇듯 형상의 개체 수를 놓고 볼 때 동물이 이 암각화의 절대적인 제재이며, 그 가운데서도 산양이 핵심적인 제재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나 마차 그리고 기호 등은 보조적인 제재였음을 알 수 있다.
[사진 14] 목동
 
3) 흡수굴 아이막
(1) 후흐딘 오보
 후흐딘 오보는 흡수굴 아이막 체체를렉크 솜에 위치하는 암각화 유적이다. 체체를렉크 솜은 흡수굴 아이막의 서쪽에 위치하는데, 조사단은 오브스 아이막에서 자프항 아이막을 거쳐 무릉 시로 들어가면서 후흐딘 오보 일대의 암각화를 답사하였다. D. 체벤도르지 소장은 30년도 더 전에 A.P. 오클라드니코프 박사와 함께 답사한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이 지역에 넓게 분포하는 암각화들을 차례차례 안내해 주었다. 이 지역을 ‘오르신 톨고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1930년대부터 이곳에서 러시아 상인들이 마을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암각화 유적지는 체체를렉크 솜에서 서남쪽으로 약 20여 km 지점에 위치한다. 자프항 아이막의 테스 솜에서 흡수굴 아이막의 체체를렉크 솜으로 난 길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도중에 하르봄 바그와 체체를렉크 솜 사이를 가로지르는 테스 강의 지류와 만나게 된다. 바로 이 강변에 솟아 있는 나지막한 구릉들에는 멀리서 보아도 눈에 띠는 회백색 바위 덩어리 ‘차히르 하드 촐로’가 노출되어 있으며, 이 표면에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이 일대에서 모두 다섯 지점에서 암각화가 확인되었다. 나지막한 언덕의 그림이 그려진 바위들은 비바람과 햇볕에 노출되어 이끼가 끼고 또 풍화 등에 무방비한 상태로 방치되어있었다.
 첫 번째 암각화군은 나지막한 언덕 위에 노출된 차히르 하드 촐로라는 회백색 암면에 새겨진 것들이다. 나머지 네 곳에 비해서 유적지의 규모가 가장 작았으며, 형상의 개체 수 또한 많지 않았다. 그림의 내용은 말발굽과 사람 발자국 그리고 바위구멍 등이었다. 지표면에 노출된 암면은 표면이 크고 작은 요철로 인하여 매우 거칠었으며, 그런 까닭에 쪼여진 형상을 파악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노출된 부위와 지표면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흙으로 뒤덮인 부분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두 번째 암각화군은 후흐딘 오보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암괴가 나지막한 언덕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주위에도 크고 작은 암반이 지표 위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림은 주로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는 암면이나 바위 언덕의 낮은 부분에 집중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림이 그려진 암면의 방향은 동쪽이었다. 주변에는 다른 종류의 바위들도 있었지만, 특이하게도 이 지역의 암각화는 모두 회백색 차히르 하드 촐로에만 그려져 있었다. 바위의 표면은 매우 거칠었는데, 그러한 점은 이 지역에 분포하는 회백색 암면의 공통되는 성질이다.
 규모가 큰 만큼 형상의 개체 수도 풍부하였다. 가장 많이 그려진 제재는 소위 ‘말발굽’ 형상이었지만, 암면 별로 특정한 제재가 집중적으로 그려져 있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추상화된 사람 형상이 집중적으로 그려진 곳, 말발굽이 많은 곳, 사람 발자국이 집중적으로 그려진 곳 등이 있다. 물론 특정 형상이 집중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사이에는 빈도수만 낮을 뿐 그 밖의 다른 형상들도 그려져 있다. 또한 사람 형상 사이에 십자형 기호가 그려져 있거나 말발굽 형과 여성 생식기가 결합된 것, 사람과 여성 생식기 형상이 같이 그려진 그림 등도 주목을 끌었다.
 세 번째는 나지막한 언덕 끝에 노출된 거대한 회백색 암괴에 그려져 있었다. 그림은 주로 동쪽으로 향한 암면에 그려져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매우 간결하게 추상화된 동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밖에도 십자형 기호, 말발굽 형상, 사람 발자국 그리고 여성 생식기 등의 형상들이 확인되었다. 동물은 산양과 말이 그려져 있었는데, 종의 구별은 뿔이나 꼬리 등 속성이 드러나는 부분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었다. 십자형 기호는 동물 형상과 함께 구성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발굽이나 생식기 등은 단독으로 그려져 있었다.
 네 번째 암각화 군은 초원 가운데 나지막이 솟아 있는 언덕의 노출되어 있는 바위 표면에 그려진 것이다. 이것은 두 번째 암각화 군과 거의 유사한 조건의 암면 상황에 같은 제재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는 동물 형상들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사슴과(科) 동물과 함께 소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사슴과 동물은 윤곽선만 그렸고 소는 전면을 쪼아서 그렸다. 또 다수의 말발굽 형상과 함께 세로로 이등분된 동그라미, 두 겹 동심원 그리고 몇 줄의 선 그림도 살필 수 있었다.
 다섯 번째도 앞의 네 곳과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초원 가운데 나지막하게 솟아 있는 회백색 차히르 하드 촐로의 동남쪽으로 향한 부분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언덕의 높은 곳보다는 지면과 맞닿아 있는 낮은 부분이나 누워있는 바위들에 새겨져 있었고, 중심 제재는 말발굽 형상이었으며, 쪼기로 제작되었다. 유적지 바로 앞에는 크지 않은 호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대부분의 암각화 유적지에서 살필 수 있는 보편적인 입지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셈이다. 즉 물과 가까운 외딴 봉우리의 동남쪽 암면이 바로 그것이다.
[사진 15] 암각화 유적지 원경(후흐딘 오보)
 이처럼, 후흐딘 오보 암각화군의 중심 제재는 소위 ‘말발굽’과 사람 발자국과 호랑이 발자국, 여성 생식기 등이었으며, 추상화된 사람이나 동물 그리고 기호들이 보조적인 제재라고 할 수 있다. 동물 가운데는 말과 소 그리고 사슴 등이 확인되었다. 기호 가운데는 십자형, 동그라미 등이 있었으며, 바위구멍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그림의 제작 기법은 쪼기였으며, 경도가 약해서인지 형상은 비교적 깊게 쪼아서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동물 형상은 윤곽만 쪼아서 그린 것과 전면을 쪼아서 그린 것 등 두 가지 타입이 있다. 전면을 쪼아서 것은 윤곽선을 보다 깊게 쪼았으며, 몸통은 부드럽게 마무리하였다.
(2) 친군자빈 이흐 바가 모나
 이 유적지는 부렌토그토흐 솜에서 동북쪽으로 약 5km, 무릉 시에서는 서쪽으로 44km 지점에 위치한다. 그림이 그려진 유적지는 초원 가운데 외따로 솟은 높지 않은 바위 언덕이다. 근처의 산기슭에는 크기가 다른 히르기수르가 여러 기 조성되어 있는데, 그 구조는 둥근 돌무더기를 중심으로 하여 돌들이 원을 그리며 둘러진 모양이었다. 유적지 바로 근처에는 뭉흐 한의 궁전지가 남아 있다.
 암각화는 주로 윗부분에 있는 바위 표면에 새겨져 있었으며, 제재는 말발굽, 호랑이 발자국, 사람 발자국 그리고 여성 생식기 등이었다. 형상의 개체 수는 많지 않았고 또 사람이나 동물 형상 그리고 기호 등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 역시 그림이 그려진 바위는 차히르 하드 촐로이다. 후흐딘 오보와는 150여 km 이상 떨어져 있지만, 제재와 제작 기법은 매우 유사하였다. 말발굽의 크기는 가로 세로 약 10cm 정도였다.
(3) 오쉬긴 톨고이
 친군자빈 이흐 바가 모나에서 무릉 시로 향하여 약 27km 지점, 무릉 시에서는 서쪽으로 17km 지점에 ‘오쉬긴 톨고이’라고 하는 사슴 돌 유적지가 있다. 14기의 사슴 돌을 복원하여 놓았으며, 바로 그 뒤편에는 큰 규모의 히르기수르 두 기가 남아 있었다. 사슴 돌 가운데 한 기는 특이하게도 꼭대기에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하노이의 것은 비록 넘어져 있어도 온전한 모습이었으나, 오쉬긴 톨고이의 것은 대부분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 온전한 외형을 갖춘 것은 살피기가 어려웠다. 이곳의 사슴 돌도 세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꼭대기에 얼굴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아르항가이 아이막의 하노이에서 살펴보았던 것과 같은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시문된 사슴 형상도 같은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었으며, 위와 아래에 시문된 동그라미와 무기 등 도기호들도 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다.
 사슴 돌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유적지는 현재 몽골에서 세 곳이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아르항가이 아이막 운드르 올란 솜 보르틴 암의 하노이, 같은 아이막 이흐 타미르 솜의 차츠인 에레크 그리고 흡수굴 아이막의 오쉬긴 톨고이 등이다. 이 세 곳 가운데서 차츠인 에레크는 한·몽 공동 암각화 조사단이 2007년도에 답사하였으며, 그 가운데 일부를 채록한 바 있다. 하노이의 것은 2008년도에 채록하였으며, 오쉬긴 톨고이의 것은 촬영하였다.
4) 헨티 아이막
(1) 라샨 하드
 헨티 아이막은 울란바타르 동북쪽에 있다. 울란바타르 동북쪽에서 러시아로 향하여 뻗은 헨티 산맥이 투브 아이막과 도계를 이루고 있다. 라샨 하드는 우믄 델기르 솜에서 동북쪽으로 100km 지점에 위치한다. 으문델기르에서 바트 시레트 바그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 보면, 후르흐 강의 지류 바르흐와 만나게 되는데,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왼쪽으로 가면 바트 시레트 바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빈데르 바그가 있다. 이 세 지점의 한 가운데는 해발 1,000m 정도의 나지막한 산이 솟아 있고, 그 등성이 위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바위들에는 선사 시대의 암각화와 더불어 고대 묵서들이 남겨져 있다.
 이 유적이 학계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중석기 시대의 동물 형상에서부터 신석기와 청동기, 철기 시대에 그려진 동물 형상, 기하학적 형상 그리고 호랑이 발자국과 말발굽 형상 등이 모두 관찰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유적지의 중심에 있는 바위그늘 아래에는 여덟 가지 이상의 묵서들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은 한 때 이 땅에 살았던 거주자 또는 이곳을 지나간 방문자들에 관하여 이야기하여 주고 있다.
[사진 16] 기하학적 형상(라샨 하드)
 이 유적지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그림은 윤곽을 쪼아서 그린 세 마리의 동물이다. 그것은 묵서들이 있는 암면에서 오른쪽 100여 미터 지점의 누워있는 바위에 그려진 있다. E. 노브고로도바 등 일부 학자들은 이 동물 형상이 아제르바이잔의 코브이스탄과 샤흐타 동굴 등지에 그려진 소 형상과 동시대에 제작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주 011
각주 011)
Э.А. Новгородова, 1984, Мир петроглифов Монголии, М.,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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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라샨 하드 속의 이 동물 형상들은 중석기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였던 것이다.
 각 형상들의 크기는 왼쪽에서부터 56cm, 70cm, 58cm 등이며, 모두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다. 왼쪽과 가운데의 것은 귀(뿔)가 두 개, 오른쪽의 것은 하나가 각각 그려져 있다. 가운데와 오른쪽의 것은 주둥이 부분에서 선이 각각 한 개 내지 두 개씩 나와 있는데, 오른쪽의 것은 아래로 약간 휘어져 있다. 이 선 때문에 코끼리일 가능성을 언급하는 학자도 있다. 큰 몸통에 다리와 꼬리는 짧은 편이며, 꼬리가 없는 것도 있다. 이러한 신체의 세부 생김새를 놓고 볼 때 이 동물이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바위그늘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향하여 비스듬히 누워있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가로 6.7m, 세로 2.5m의 바위 표면에는 동그라미와 그 변형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동그라미의 크기는 보통 10cm 전후이며, 작은 것은 4.5cm에서 큰 것은 15cm에 이르는 것도 있다. 동그라미의 변형들 가운데는 가운데 점이 찍혀 있는 것, 세로로 이등분된 것, 말발굽 모양, 여성 생식기 모양, 직선과 곡선이 결합된 것 등이 있으며, 이들은 독립되어 있거나 서로 다른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 기하학적 도형들이 그려진 바위와 세 마리의 동물이 그려진 바위 사이에는 말발굽과 여성 생식기 등의 형상들이 집중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은 서쪽으로 향한 암면에 그려져 있으며, 이끼가 많이 끼어있다. 형상은 빛의 각도에 따라서 선명하게 보이기도 하고 또 그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여성 생식기 형상은 지표면과 맞닿은 아래쪽에 집중되어 있고, 말발굽 형상은 바위의 오른쪽 윗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언덕의 아랫부분에 서 있는 바위에도 호랑이 발자국과 사람 발자국 몇 개가 그려져 있으며, 바위그늘을 뒤편에서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바위에도 동물 형상이 하나 그려져 있다.
 유적지 중심에 서 있는 바위의 그늘에는 거란, 몽골, 위구르 등 유목민들의 고대문자와 라마교도들의 티베트어 그리고 한문 등의 묵서들이 남겨져 있다. 이 바위 그늘 속에는 8개 이상의 다른 시대에 남겨진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글씨들은 한 때 이곳에 연고권을 지닌 사람들에 관한 생생한 흔적들이며, 바위는 지난 수천 년 간 되풀이되어 온 부침의 인류사를 말없이 지켜온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묵서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고의적으로 훼손시킨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유적지 속에는 그림과 회문자(繪文字)로 그려낸 무 문자 시대와 각기 다른 코드로 기록된 문자 시대의 인류사가 간직되어 있는 셈이다. 이를 통해서 이 지역에서 살았던 서로 다른 시대 사람들의 표현 방법과 삶의 방식 그리고 관심사 등을 살필 수 있다. 따라서 라샨 하드는 이 지역에 연고권을 지녔을 민족과 국가들에 관한 메모리칩이며, 선사와 고대의 연결 고리이다.
(2) 우주르 하드
 라샨 하드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지점의 우주르 하드 바위그늘에도 말을 중심으로 한 동물 형상과 호랑이 발자국이 집중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동물은 모두 말이었으며, 누군가가 백묵으로 칠을 해 놓은 것도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언덕의 꼭대기 부분에 있는 바위그늘에 집중되어 있었다. 호랑이 발자국은 기슭에 있는 바위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호랑이 발자국은 하나만 그려진 것과 여러 개가 함께 그려진 것 등이 있었다.
 라샨 하드와 우주르 하드 주변에서는 또한 석기들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 D. 체벤도르지 소장은 인근에서 적지 않은 수의 석기들을 수습하였다. 유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거란 시대의 석성이 하나 확인되기도 하였다. 주변에는 유목민들이 건초를 만들어 겨울 대비를 하고 있었다.
[사진 17] 교미사슴(후렝 우주르 하단 올)
3. 유적지 및 그림의 보편성
 2008년도에는 네 개의 아이막에서 두 곳의 사슴 돌 유적지를 포함하여 모두 8개의 유적지를 조사하였다. 주 조사지는 오브스 아이막의 조라그트 하드와 후렝 우주르 하단 올이었으며, 이곳에서는 400여개의 암면에 그려진 2,400여 점의 형상을 파악하였으며, 그 중 약 300여 개의 암면에 그려진 형상들을 채록하였다. 이 두 유적지는 아직 학계에 소개되지 않은 미 조사지였으며, 그런 까닭에 전체의 규모, 유적지와 암면 하나하나에 대한 위치와 고도 그리고 방위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였다. 암면에 그려진 모든 형상들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으며, 또 주제와 양식 그리고 사회 상황 파악 등 향후의 연구에 필요한 형상들을 채록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이 지역 암각화 유적지의 공간성을 검토할 수 있었다. 조라그트 하드와 후렝 우주르 하단 올, 라샨 하드 그리고 우주르 하드 등은 모두 산줄기의 끝단과 그 꼭대기 부분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흡수굴 아이막 내의 후흐딘 오보나 친군자빈 이흐 바가 모나 등은 스텝 가운데 외따로 솟은 별봉이었다. 그림이 그려진 암면의 방향은 대체적으로 동남쪽이었으나 일부 누워있는 바위들은 모두 위로 향한 암면에 그려져 있었다. 헨티 아이막의 라샨이나 우주르 하드 등은 동남쪽과 함께 서쪽으로 향한 암면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바위그림 유적지는 언제나 물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흡수굴의 후흐딘 오보나 친군자빈 이흐 바가 모나의 주변에는 물이 풍부하였지만, 그 밖의 유적지는 주위에 강이나 계곡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오브스 아이막의 후렝 우주르 하단 올의 경우는 바로 앞에 흐르던 시내가 완전히 말라 있었다. 주변에서 살고 있는 사람과 가축들은 근처에 있는 단 하나의 샘물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조라그트 하드 암각화 유적지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계곡은 흔적만 남아있었다. 이곳 역시 현지 주민들은 말이나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에서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산골짜기의 샘에서 물을 길어 생활하고 있었다.
 한편 사슴 돌 유적지의 공간성은 암각화 유역지의 경우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사슴 돌은 주로 히르기수르 주위에 세워져 있는데, 이들은 보통 사방이 훤하게 트인 공간 속에 조영되어 있었다. 주변에는 강이나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으며, 유목민들의 여름 방목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한 점은 하노이나 오쉬긴 톨고이 그리고 아르항가이 아이막 이흐 타미르 솜의 차츠인 에레크 등지에서 공동적으로 살펴지는 현상이었으며, 따라서 사슴 돌 유적지의 공간성은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의 제재는 지역 별로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오브스 아이막은 바로 인근의 자프항이나 고비알타이, 호브드, 바양 울기 등의 아이막 그리고 더 나아가 러시아의 투바공화국 내의 암각화와 제재 및 양식 등의 측면에서 볼 때 큰 차이가 없었다. 즉 이 지역의 암각화 속에는 동물을 중심으로 한 수렵 및 유목민의 세계가 형상화되어 있었다. 오브스 아이막 내 암각화의 중심 제재는 산양이었으며, 지역 별로 약간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슴, 말, 소 그리고 늑대 등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에 곁들여 소수의 마차 형상과 활이나 총을 든 사냥뀬 등도 곁들여 소수의 마차 형상과 활이나 총을 든 사냥꾼 등도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흡수굴이나 핸티 아이막 내의 암각화 가운데는 동물 형상이 상대적으로 적었으며,사람과 호랑이 발자국, 말발굽 그리고 여성 생식기 등의 형상이 훨씬 더 많이 그려져 있었다. 후흐딘 오보 암각화 가운데 동물 형상은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며,또한 보다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나 동물의 발자국 그리고 생식기 등 신체의 부분들이 집중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은 사람 또는 동물의 특정 부위가 지니는 특징만 가지고도 종의 차이를 표현해 낼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림의 제작 시기는 지역 및 형상별로 각각 다르다. 가장 이른 것은 핸티 아이막의 라샨 하드 가운데 그려진 동물 형상으로 중석기 시대로 추측된다. 그 다음으로는 흡수굴과 핸티 아이막 일원에서 살펴본 사람과 호랑이 발자국, 말발굽 등이며,이들은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측된다. 흡수굴 아이막의 후흐딘 오보 가운데 사슴이나 소 그리고 라샨 하드의 주암면 오른편에 그려진 동물 형상도 신석기 말 또는 초기 청동기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볼 수 있다. 서쪽의 아르항가이나 오브스 아이막 일원의 동물 형상들은 소위 '스키타이 시베리아 동물 양식’의 전형이 지켜진 것이며,이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사이에 그려진 것이다.
 2008년도에 한·몽공동조사단이 새롭게 조사한 유적 가운데서 특별히 주목을 끌었던 그림은 조라그트 하드의 성소에 그려진 산양 토템과 후랭 우주르 하단 을의 교미하는 사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미 부분적으로 학계에 소개된 바 있는 핸티 아이막 라샨 하드 암각화 속의 동물 형상이나 사람과 동물 발자국 그리고 여성 생식기 등도 주목을 끌었다. 더욱이 라샨 하드 유적지는 중석기 시대의 동물 형상에서부터 역사 시대의 다양한 묵서들까지 동시에 살필 수 있어서 몽골 암각화의 편년 연구 및 역사복원에 더없이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조라그트 하드 암각화 속의 산양 그림이나 후랭 우주르 하단 올의 교미하는 사슴 그림은 유목민들의 사유의 세계를 조형 언어로 번역해 놓은 것이며, 이러한 그림들은 소위 '주대종소’라고 하는 종교화의 구성 방식과 그 기원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스키타이 시베리아 동물양식으로 그려진 교미하는 사슴 형상은 주제가 갖는 상징성 뿐만 아니라 '동물 양식’의 세부 디테일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슴의 뿔은 패턴화되고 과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과 결합되기도 하였다.

  • 각주 006)
    체벤도르지, 쳉겔, 2008, 「몽골의 사슴 돌」, 국립경주문화재 연구소 외, 『돌에 새긴 유목민의 삶』, 312쪽. 바로가기
  • 각주 007)
    В.В.Волков, 2002, Оленные камни Монголии, М., 16~19쪽. 바로가기
  • 각주 008)
    В.В.Волков, 2002, 위의 책, 14쪽. 바로가기
  • 각주 009)
    체벤도르지, 쳉겔, 2008, 앞의 글, 310쪽. 바로가기
  • 각주 010)
    몽골이나 투바 그리고 하카시야 등지의 암각화 유적지는 비치그틴 하드, 비치그티크 하야, 조라그트 하드, 피사니차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모두 글씨 또는 그림이 그려진 바위를 이르는 말이다. 조라그트 하드는 그림 바위라는 말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1)
    Э.А. Новгородова, 1984, Мир петроглифов Монголии, М., 34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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