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20년 12월 28일 한반도 북쪽에 있는 함경남도 파발리에서 태어났다. 13살이 되었던 해 6월 어느 날, 들녘에서 일하시는 부모님의 점심 준비를 위해 물을 길러 간 마을 우물가에서 무장한 일본군이 갑자기 나를 붙잡아 끌고 갔다. 부모님조차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 나는 트럭에 실려 주재소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여러 명의 헌병으로부터 강간을 당했다. 내가 소리를 치자 그들은 내 입에 양말을 쑤셔 넣고 나를 계속 강간하였다. 주재소장은 내가 소리를 내어 울었다는 이유로 왼쪽 눈을 때렸다. 이 일로 나는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열흘쯤 지나서, 혜산시에 있는 일본군 막사로 옮겨졌다. 거기에는 나를 포함하여 약 400명의 조선 소녀들이 있었고 우리는 성노예로 매일 5,000명이 넘는 일본 군인을 상대해야만 했다. - 어떤 날은 40명이 넘는 군인을 상대할 때도 있었다...
어느 날 한 조선 처녀가 왜 매일 40명이 넘는 군인을 상대해야만 하는지를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처벌로, 일본군 사령관 야마모토는 칼로 그 조선 처녀를 베어버리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인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조선 처녀를 발가벗긴 채 손과 발을 묶고 못이 박힌 판에 피와 살점으로 뒤범벅이 될 때까지 그녀의 몸을 굴렸다.
......
그 당시 군대 막사에 있었던 소녀들의 절반이상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두 번 도망가려고 시도했지만 두 번 다 며칠 후에 붙잡혔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심하게 고문당하였고 나는 아직까지도 상처가 남아있을 정도로 수차례 머리를 구타당하였다. 또한 이들은 처음부터 죽일 생각으로 나의 입술 안쪽, 가슴과 배 그리고 몸에 문신을 하고 산등성이에 버렸다. 일본군이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한 중국인 남자가 나와 국혜를 옮겨 약 두 달간 간호해 주었다. 나는 일본군의 성노예로서 5년을 보낸 후 18살의 나이에 상처와 불임 그리고 말도 잘 할 수 없는 채로 조선으로 돌아왔다.
유엔 인권위원회 특별 보고관
레디카 쿠마라스와미(Radhika Coomaraswamy)보고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