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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12명의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들의 목소리가 담겨져 있다. 1991년 김학순 씨의 공개증언에서 비롯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와 같은 사회운동단체들의 국내․외적인 활동과 학자들의 연구 활동으로 연결되어 왔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지난 10여 년 동안 운동계, 학계가 활발히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살아있는 증거자료라고 할 수 있는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들의 용기있는 ‘증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3년 19명의 ‘위안부’ 경험자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엮어져 증언 1집이 나온 이후로 이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2001년까지 해서 증언집 5권이 출간되었다. 이 책이 또 하나의 ‘증언집’ 으로 분류된다면 6집이 되는 셈이다.
이 책은 2002년 5월 19일에 17명으로 구성된 연구팀이 만나서 첫 번째 워크샵을 가진 이후로 2년여 동안 수십 차례가 넘게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들을 짜내면서, 그리고 인터넷 토론방을 수시로 활용하면서 서로의 의견들을 주고받으며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우리 연구팀은 우선 출간된 5권의 증언집들을 점검하여 증언집에 포함된 여성들(66명)과 포함 안 된 여성들을 구별하고, 그동안 증언집에 포함된 적이 없는 76명의 여성들 중에서 현재 건강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으나 여러 가지 면에서 접촉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여성들을 선별하여 그들에 관한 기존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연구팀원들은 지역별로 나누어져 인터뷰를 분담했다.
기본적인 인터뷰 방법 및 요령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강의형태를 빌어서뿐만 아니라 인터뷰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조율하였다.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들의 취향에서부터 인터뷰시의 어려운 점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인터뷰에서 빠진 내용들이 무엇인지, 인터뷰에서 나온 이야기 중에서 이해 못하는 부분들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녹취방법과 편집방법은 어떤 것이 좋을지, 각자의 편집본에서 문제점들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논의를 수없이 했던 것이다. 실제적인 인터뷰는 각 지역 담당 연구팀별로 활동 스케줄을 짜서 융통성 있게 수행하되, 전체적인 작업의 일관성 있는 진척을 위해서는 게릴라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팀별로 행하는 인터뷰가 특수지원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즉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때는 마산, 대구, 청주, 광주, 정읍, 고창, 보령 등을 가리지 않고 연구책임자인 필자가 달려가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들과의 이야기 중에서 연구자들에게 생소한 용어나 지명이 나오거나, 혹은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전쟁사나 의료관련 지식들이 요구되면, 관련되는 전문가들을 외부강사로 초빙해서 설명을 들으며 서로의 이해를 돕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이 책은 연구팀원들 간의 탄탄한 팀웍과 꼼꼼한 인터뷰 준비 및 점검작업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일단 본 연구는 일정기간 안에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를 목표로 하여 시작하였기 때문에 ‘위안부’ 경험자들과 연구자들 간에 충분하게 신뢰감을 형성할 만큼의 시간적인 여유를 갖지 못하고 ‘이야기 거리를 수집’ 하는 데에 급급했었다. 따라서 ‘위안부’ 경험자가 말문을 트는데 시간을 오래 끈다거나, 기억이 너무나 희미해서 앞뒤 이야기에 일관성이 없다거나, 약속시간을 이리저리 변경해 가며 면담을 회피한다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면서‘우리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즉 위안소에서의 경험)를 안 해 준다거나, 이야기는 해 주되 ‘우리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 부분의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든가 하면 연구팀은 지속적인 면담을 포기하거나 면담이 몇 차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보고서에는 싣지 않기로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 여성들이 왜 연구자들과의 만남에서 침묵, 왜곡, 과장, 회피, 공격적인 언술 등의 다양한 자기표현 방법을 사용했는지 그러한 다양한 표현방법이 내포하고 있는 중요한 의미들을 짐작은 하면서도 좀더 구체적으로 여성들의 이야기 속에 포함시키지 못했었다. 그러나 우리 연구팀은 보고서를 제출한 이후에 줄곧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이 책을 준비해 왔다. 즉,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들의 구술태도를 가능한 한 정확히 드러낼 수 있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재편집하였고, 동시에 본 연구 작업을 총체적으로 검토하고 논의하는 「총론」과 연구자들 각자의 참여경험에 대한 「참여기」를 포함시켜서 좀더 성찰적인 우리들의 논의를 드러내 보이기로 했다. 특히「총론」의 두 번째 부분인 “일본군 ‘위안부’ 여성의 경험을 말한다는 것”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들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구술행위의 특징과 의미, 구술상황의 특징, 구술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본 연구가 대상으로 했던 여성들은 공통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라고 불려지기는 하나, 이들 여성 각자의 삶의 경험은 구체적인 위안소 생활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 생활 이전과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르고 특이하며, 이 과거의 경험들은 현재의 삶과 상호 맞물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연구팀은 여성부라는 정부부처가 후원하는 ‘증언집’ 형태의 보고서를 결과물로 만들어내야 하는 ‘주문생산’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제약을 안고 연구를 시작했었다. 동시에 우리들이 여성부로부터 ‘주문’을 받은 것과 유사하게,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들에게 ‘증언집’이라는 기본적인 이야기 틀을 공통적으로 제시하며 그에 따라 이야기해 줄 것을 인터뷰를 통해서 ‘주문’을 한 셈이다. 그 기본적인 구성요소로는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의 생년월일, 고향, 학벌, 형제 및 가족관계, 연행상황, 이동경로 및 이동수단, 위안소 생활, 위안소에서 나오게 된 정황, 귀국 시기 및 경로, 결혼 및 가족형성, 생계활동, 질병의 종류, 현재생활 등이 포함된다.
그러다 보니 우리 연구자들은 이들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보인 복잡한 감정적인 층(emotional layers)이나 사회관계, 혹은 자기 삶에 대한 모순적인 이해 및 해석 등을 주목하고 이런 것들을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하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소위 “두터운 이야기(thick description)”로 만들어내기 보다는 오히려 이런 것들을 ‘증언집 생산’에 방해가 되는 거추장스러운 것들로 간주하여 거세하거나 축약시켜서 이들의 삶을 ‘위안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얄팍한 이야기(thin description)”로 유형화시켜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총론」의 세 번째 부분에서 “구술의 재현과 편집상의 문제들”이라는 주제로 자세하게 논의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위험성을 덜어보고자 많은 고민과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배치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기억구조를 가능하면 훼손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들과 연구자와의 상호작용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였다. 즉, 기존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와 여성주의라는 양분된 시각을 넘어서 구술의 층화된 의미해석과정을 염두에 두고 보다 적극적으로 방법론적 고찰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연구자는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그 역할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야기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전달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즉, 연구자는 여성들의 과거 경험과 현재의 시각들이 서로 엉켜져 있는 이야기들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구술성과 가독성 사이의 어딘가에 선을 그어야 하는 불편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데, 이러한 불편함은 편집수정작업을 그야말로 수십 차례에 거쳐야 했던 우리 연구팀의 경험이 그대로 말해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총론」과 연구팀원 각자가 쓴 「참여기」에도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이 책에는 인터뷰의 소위 성공사례만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실패기」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들을 인터뷰하는 상황, 조건, 맥락 등이 다양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편집하는 과정에 개입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드러낸다.
이 책은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확신하면서 열심히 그리고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느라 끝까지 수고한 우리 연구팀원들이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보고서 제출이라는 작업이 마무리되고, 연구책임자인 필자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흩어지려는 연구팀원들의 힘을 보듬어가며, 또한 자신의 몫뿐만 아니라 다른 연구팀원들의 몫까지 맡아가며 수십 차례의 수정․편집작업을 주관하면서 끝까지 수고해 준 최기자, 김은경, 오연주, 강현주의 헌신적인 노고가 없었더라면 이 책은 분명 ‘무게가 덜나가는 얄팍한 책’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이 책을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역사쓰기의 시도라는 좀 더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데는 자기성찰적인 고민들을 계속하면서, 그 고민들을 「총론」으로 엮어낸 김은경, 최기자, 박정애의 공헌 역시 크다. 연구팀원들 중에는 초반부터 인터뷰 작업에는 열심히 참여했으나, 위에서 설명한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이 정리한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실리지 못한 경우들도 있다. 김미현, 양나윤, 이순영 등의 연구원들이 이에 해당하는 데, 이들의 노고 역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또한 산적한 실무처리에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면서도 언제나 따뜻하게 우리 연구팀원들을 맞아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은 정대협 식구들과 숨겨져서 드러내지지 못했던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들의 목소리가 우리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준 여성부 관계자들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그 누구보다도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싶은 분들은 다름 아닌 일본군 ‘위안부’ 경험자들이다. 그분들이 그동안 몇 차례씩이나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속내 이야기들을 털어 내 주었기에, 우리는 과감하게 새로운 역사쓰기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우리들에게 자신이 살아 온 이야기를 해 주며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 이 문제를 더 알켜야 한다”고 강조하던 ‘위안부’ 경험자들 중의 한 여성은 이 책이 미처 출간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살아남은 게 꿈만 같애. 꿈이라도 너무 험한 악몽이라” 하면서도, 다른 여성들과는 달리 “하나도 부끄러운 것이 없어. 왜냐하면 내가 부끄러운 짓을 했어야 부끄럽지” 하며 자신 있게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 내던 분인데…. 이제 다시 그 분의 이야기가 담긴 녹취록을 들쳐보며 자세를 고쳐본다.
2004년 5월 10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전쟁과인권센타 소장 김명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