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선시대 문화교류의 의의

15세기 국외 정세상의 실리적 관계에 따라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조선과 일본의 평화유지가 그 목적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역시 국가적 실리에 의해 재개되었으나 오랜 평화가 유지되고 12차례에 걸친 행렬을 통해, 그 관계는 문화 교류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이 더 커지게 되었다. 초기 조선 정부의 ‘문’을 중하게 여기는 나라임을 알리고 일본에 과시하려는 의도와, 사신들의 문화적인 우월감으로써 일본을 문화적으로 순화시켜 야만적인 침략성을 바꾸도록 해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조선통신사는 일본에게 다양한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전파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화의식으로 일본을 단순히 오랑캐의 나라, 저속한 문명의 나라라고 얕잡아 보던 조선 사신들의 시각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조엄은 일본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한 신진 지식인이었다. 그는 일본 기술 수준의 정교함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일본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자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정신으로, 고구마 종자를 구하여 조선에 보내고 일본의 수차(水車)와 주교(舟橋)를 조선에 도입시켰다. 이렇게 사행에서 새로운 것을 보거나 배울 만한 기술이 있으면 일단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조선에게 매우 의미 있는 변화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통신사는 일본만이 일방적으로 선진 문물을 수혜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또한 일본의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문물들을 전달받는 쌍방적 관계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조선통신사 행렬에 따른 일본의 재정적 부담, 당시 화이론적 사상의 유행에 따른 일본 국내 사정에 따라 조선통신사는 12회의 사절을 마지막으로 종결을 맞게 된다.

 

이와 같이 조선의 통신사 파견은 양국간의 외교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일본의 학술·사상·예술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또한 일본의 다양하고 실용적인 기술들을 통해 민생을 위한 실리적인 문물을 도입할 수 있었다. 조선 통신사는 양국의 실리적 관계를 목적으로 시작되고 종결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전달된 무수한 문화 교류는 유물과 정신은 현재까지 이어져 두 나라를 더 가깝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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