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조선시대의 문화 교류

(1) 조선과 일본의 문화교류, ‘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 행차도
조선통신사 행차도
15세기 초 조선은 명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아 명과 사대관계를 가지면서 일본과 근린교린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원활한 대일본 외교를 위해서는 당시 중국과 조선의 연안을 어지럽히며 돌아다니는 왜구의 활동을 엄격히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무로마치 막부에게는 조선·명과의 무역 이익이 대단히 중요하였다. 이에 무로마치 막부는 적극적으로 왜구를 단속하였는데, 이처럼 당시 조선·일본·명은 다시 국교를 재개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15세기 전반, 조선과 일본은 상호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고 원활한 무역을 위해 조선은 ‘통신사’를, 일본은 ‘일본 국왕사’를 파견하였다. 그 뒤, 50차례에 걸쳐 일본 국왕사가 조선에 파견되었다. 일본 국왕사는 도읍인 한양(서울)까지 와서 국서를 교환하거나 새로운 조선 임금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또한 목면직물을 수입하거나 불교 경전인 대장경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도록 부탁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사절을 처음에는 보빙사, 회례사 등으로 불렀으나, 1542년 세종이 처음으로 ‘통신사’라 명하였다. 최초의 통신사는 이전에 죽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문상과 새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 취임 축하가 목적이었는데, 이후 통신사는 서로 의례를 교환하며 양국의 평화와 우호 관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사절이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일본은 오닌의 난이 일어난 이후, 하극상이 빈번하게 일어나 약 100여 년에 이르는 전란 시대를 맞이한다. 그로 인해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쓰시마를 중심으로 한 무역 관계만이 지속된다.

 

1592년 4월, 일본군 20만이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시작된 임진왜란은 일본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야심에서 출발하였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재침, 도합 7년의 전쟁으로 조선은 그야말로 쑥밭이 되고 만다. 명나라 지원군의 파병으로 이루어진 조선군과 명군의 합동작전과 전쟁에 지친 일본군,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전쟁은 종결된다.

 

당시 일본 국내사정은 급변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내전을 통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을 제압하고 실권을 잡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국내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조선과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았는데, 자신은 본래 조선 전쟁에 반대하였고 그 후 직접 참가하지 않았던 것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조선과 우호관계를 회복시키려 하였다. 당시 적대국이었던 조선과 일본이 언제부터 대청 견제의 연대의식을 갖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서로 독립국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교린관계가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종결은 일본이 조선과 강화를 맺음으로써 성립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침의 우려가 있었고, 명의 병사 역시 그대로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쟁 종결 직후 조선은 침략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일본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과 강화를 맺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복수를 위해 쓰시마를 공격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과의 전쟁을 정식으로 종결시켜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성공적으로 송환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또한 남쪽에서 일본의 재침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세력을 넓혀 국경을 침범하는 사건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은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킴으로써 남쪽의 불안을 해소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안팎의 분위기로 쓰시마에 온 사명당 일행은 쓰시마 영주의 안내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을 만나기 위해 슨푸까지 오게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명당 일행을 만나 포로 송환에 성의를 보이고 조선과의 신뢰를 보였다. 그는 ‘나는 임진왜란 때 간토에 머물고 있었고, 군에 관한 일은 관계하지 않았다. 조선과 나와의 사이에 원한은 없다. 화를 맺을 것을 청한다.’라고 말했다. 사명대사는 여기서 그의 말이 진심이라고 느끼고, 특히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귀국에 대한 약속을 받았고, 직접 1,390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이러한 사명대사의 보고와 세 번에 걸친 쓰시마의 강화 요청을 바탕으로 조정에서는 논의가 거듭되었고 후에 전후 처음으로 1607년에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1607년부터 재개되어 1617년, 1624년, 1636년, 1643년, 1655년, 1682년의 총 일곱 번의 왕래에서 조선통신사는 평화유지의 수단으로써 문화사절단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7회 통신사는 쓰시마 번으로부터 특별히 의학에 정통한 의관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또한 의사만이 아니라 문재가 있는 사람, 한시를 잘하는 사람, 서예나 그림에 능통한 사람, 악기 연주의 명인, 춤의 명수 등 문화 교류를 위한 다양한 인재가 선발되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나라에서 한 가지라도 뛰어난 재능을 가져 명성이 알려진 사람은 모두 데리고 가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통신사가 문화사절단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은 조선이 ‘무(武)’보다도 ‘문(文)’을 중하게 여기는 나라임을 알리고 ‘문’의 힘을 일본에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쿄 에도성에 들어가는 조선통신사와 그 인파
도쿄 에도성에 들어가는 조선통신사와 그 인파
일본에게 있어서 한반도는 고대부터 늘 문화 선진국이었던 만큼 군사력에서는 일본이 훨씬 앞서 있을지라도 문예, 학술은 여전히 조선으로부터 배우는 입장에 있었다. 당시의 조선통신사의 삼사는 당대 조선의 최고 지식인이었고 수행원들도 유능한 학자들이 선발되었으므로 통신사 일행이 머무르는 곳마다 이들과 교류하려는 일본 유학자·지식인 들이 모여들었다. 통신사 일행과의 교류는 일본의 지식인이 새로운 지식을 얻고 자신들의 학문 성취를 조선 지식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중요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쓰시마(對馬) 섬 남동쪽 이즈하라(嚴原)의 오후나에(お船江)지도 보기는 조선통신사들이 배를 대던 곳이다. 지금은 역사유적으로 지정돼 고즈넉하기 짝이 없지만 400년 전 이 선착장에는 조선에서 온 귀한 손님들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당시로서는 조선통신사의 행렬이 엄청난 구경거리여서 길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행렬을 맞이하였고 일본 측에서는 통신사가 지나가는 모든 도로와 마을들을 개보수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쓰시마에는 김성일이 통신사로 갔을 때 머물렀던 세이잔지(西山寺)지도 보기, 통신사들의 객관이었던 코쿠분지(國分寺)지도 보기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당시 조선통신사의 일본 왕래는 일본에게 선진 지식과 문물을 전파하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일본 지식인들의 관심이 매우 컸던 국가적인 행사였으며 오늘날 특정연예부분의 한류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일본의 문화와 예술 전 부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항들은 쓰시마 역사박물관지도 보기과 시모카마가리섬지도 보기에 있는 조선통신사역사관에 잘 전시되어 있다.

 

사신들이 일본에 오는 것을 기다린 사람들은 일본의 유학자들이나 학승들이었다. 그들은 왜란 때 조선에서 가져온 서적이나 문화재 그리고 학식이나 기술이 풍부한 포로들을 통하여 조선 문화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모로 관심이 많았다. 특히 조선의 인쇄 기술로 인하여 일어난 막부의 인쇄 문화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 유학자나 학승들을 만나서 한시를 창화하고 서화나 휘호를 남기게 될 것을 예상하여 시문에 뛰어난 이문학관과 서기를 동행하였고, 서화에 뛰어난 사자관과 화원을 1624년 사행 때보다 증원하여 일본에서 예상되는 문화 교류를 적극적으로 맞을 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은 문화적인 갈증을 느꼈고, 이러한 때 통신사는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있는 한줄기 시원한 소낙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 갈증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이는 진정한 문화적인 갈증이었다기보다 어떤 집단적인 충동에 의한 군중심리의 표현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신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 한 마디의 말이나 몇 자의 글도 큰 보배로 여길 뿐만 아니라, 효고에서 벽에 쓴 시 두 폭의 값이 각각 1백냥이고, 부사산율시(富士山律詩) 8수는 온 나라 안이 전해 베끼었는데, 이는 반드시 그 사람들이 참으로 확실히 아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한번 지극한 보배라 하면 온 나라 안이 몰려드니 또한 한번 웃을 만하다.

 

-김세렴, 『해사록』 1637년 2월 12일 -”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일행이 써주는 글과 그림, 한시를 요청하는 일본 사람이 너무 많아 사자관만으로 할 수 없어 글이 뛰어난 사람이 총동원되기도 하였다. 통신사가 방문할 때, 후쿠야마 번을 비롯한 인근의 유학자들은 그들과 한문으로 필담을 하며 교류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 필담에서는 오랜 여행을 위로하며 유학에 대해 교류하거나 한시를 주고 받았다. 특히 이들은 한시에서 후쿠젠지의 야경과 전망을 칭송하였다. 통신사들은 중국의 시인이 남긴 한시에 운을 달아 한시를 지었고, 후쿠야마의 유학자나 한학자가 통신사의 한시에 운을 달아 다른 한시를 낭송하였다. 이런 식으로 한시를 서로 읊으며 교류가 이루어졌다. 조선통신사는 그 영향이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미쳐,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에도시대의 외교문화사절인 조선통신사를 흉내낸 ‘당인춤’을 꼽을 수 있다. 일본에 3개만 남아 있는 조선통신사 유래 민속예능 중 당인춤은 1636년, 그 전년에 시작한 츠하치만궁(津八幡宮)의 제례 일부이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왔었던 에도(江戶)시대는 일본은 중국, 네덜란드와의 아주 한정적인 교역 이외에는 모든 나라와 관계를 단절한 쇄국시대였다. 그 당시의 일본국민은 중국과 조선을 구별할 의식이 없어, 조선통신사를 흉내낸 춤을 ‘당인춤’이라고 부르면서 전승해 왔다.
현재의 당인춤 행렬은 초인차(町印車)를 선두로 대기(大旗: 승용), 청도기(淸道旗), 나팔 2, 춤, 피리 2, 징 2, 큰북, 작은북 2, 영기(令旗), 대장, 우상, 중관 2, 사사라 4, 청도기, 대기(강용)의 23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년 10월의 축제에서는, 아악의 월천낙을 기조로 한 ‘미치바야시’라는 곡으로 행진하여, 2일간 약 300호 이상을 방문한 후에 춤을 추고 있다.주1)

 

조선의 우월한 문화는 일본에 자연스럽게 전파되었지만 그 반대로 일본도 조선에 자신들의 문화를 보내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쓰시마 도주는 일본의 기술을 보여주는 ‘희구(戱具)’를 보내왔다. ‘희구’는 내부에 기륜을 장치하여 미인이 거문고를 타는 형태를 만들어서, 운전에 따라 소리가 나는 장난감이었는데 사신은 기술을 감탄하기보다 "희구는 음교(淫巧)에 가까우니 돌려보내라" 하였다. 기실 당시 일본의 기술은 사대부가 보기에는 아이들 장난 같은 ‘음교’였지만 ‘희구’라는 ‘가라쿠리인형’은 서양 기술과 맞먹을 만큼 정교하여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사신이 생각하는 문화 교류는 일본 문사와 시문을 창화하는 것이었다.

 

막부 유관 중에 고가 세이리는 선배 오카다 간센의 스승 수구리 다마미즈가 편찬한 『이퇴계서초』(주자학의 진수를 요약한 이퇴계의 『주자서절요』같은 성격으로, 퇴계학의 진수를 소개한 안내서이다.) 전 10권을 가져와 도산서원에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렇게 당시 일본 유학의 권위자가 제자를 거느리고 왔는데, 이에 더하여 『이퇴계서초』가 편찬된 것을 보고 사신들은 일본 사상계 분위기에 만족하며 유학이 주류인 것처럼 오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유학이 강화된 것은 막부 개혁정책의 일환이었지 자생적으로 사상계의 주류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관학의 반대편에서는 국학자들이 일본 고대사와 고전연구를 바탕으로 조선과 중국을 깎아내리며 통신사 초빙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었다.
조선통신사가 간 길
조선통신사가 간 길
통신사 초빙을 비판적으로 보는 배경에는 일본의 내외 상황에 따른 의식의 변화에 있었다. 서양의 선박이 자주 출몰하여 문호 개방을 요구하고 존왕양이 운동주2) 이 격화되어 정치적으로 혼란에 빠졌고, 막부 재정이 악화되어 경제가 어려워졌으며, 더욱이 덴포의 기근이 엄습하여 폭동이 일어나는 등 사회혼란이 극에 달했다. 사회불안이 증폭되기 시작하는 18세기 후반에 일본에서는 『만엽집』 등의 고전을 재평가하는 국학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이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이 주변 국가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일본식 화이의식으로 발전해 갔다. 일본식 화이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일본서기』에서 "조선이 일본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막부는 통신사를 너무 지나치게 대접한다. 대조선 외교는 교린(상호평등)관계가 아니라 조선이 일본에 예속된 상하관계로 행해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막부가 지금까지 조선에 대해 행한 외교관례나 통신사 접대를 비난하였다. 이러한 일본식 화이의식은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자 ‘정한론’으로 모아지고 조선에 대한 침략으로 이어지게 된다.
대마도역사박물관(對馬島歷史博物館)
대마도역사박물관(對馬島歷史博物館)
대마도역사박물관(對馬島歷史博物館) 전경 01
대마도역사박물관(對馬島歷史博物館) 전경 01
대마도역사박물관(對馬島歷史博物館) 전경 02
대마도역사박물관(對馬島歷史博物館) 전경 02
대마도역사박물관(對馬島歷史博物館) 내부 01
대마도역사박물관(對馬島歷史博物館) 내부 01
대마도역사박물관(對馬島歷史博物館) 내부 02
대마도역사박물관(對馬島歷史博物館) 내부 02
조선통신사역사관 전경
조선통신사역사관 전경
조선통신사역사관(朝鮮通信使歷史館) 내부 01
조선통신사역사관(朝鮮通信使歷史館) 내부 01
조선통신사역사관(朝鮮通信使歷史館) 내부 02
조선통신사역사관(朝鮮通信使歷史館) 내부 02
조선통신사역사관(朝鮮通信使歷史館) 내부 03
조선통신사역사관(朝鮮通信使歷史館) 내부 03
조선통신사역사관(朝鮮通信使歷史館) 내부 04
조선통신사역사관(朝鮮通信使歷史館) 내부 04
조선통신사역사관(朝鮮通信使歷史館) 내부 05
조선통신사역사관(朝鮮通信使歷史館) 내부 05
조선통신사역사관(朝鮮通信使歷史館) 내부 06
조선통신사역사관(朝鮮通信使歷史館) 내부 06
조선통신사 행렬도 모형 01
조선통신사 행렬도 모형 01
조선통신사 행렬도 모형 02
조선통신사 행렬도 모형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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