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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독도 일본사료집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의 네 번째 질의서

  • 발신자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
  • 수신자
    동래부(東萊府)
  • 발송일
    1695년 5월 (음)(을해년(1695) 5월 일)
네 번째 삼가 살펴보건대, 82년 전 우리 주(州)에서 동래부(東萊府)에 편지를 보내어 의죽도(礒竹島)를 자세히 조사하는 일을 알렸더니,주 001
각주 001)
『증정교린지』권4, 鬱陵島礒竹島辨正顚末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광해군 6년 갑인(1614)에 동래부사 윤수겸(尹守謙)이 장계를 올려, “왜소선(倭小船) 1척이 의죽도(礒竹島)의 형세를 살펴보려고 온 까닭에 그 섬이 어느 곳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경상, 강원의 사이에 있다.’고 답하였습니다. 그 말의 뜻을 살펴보니 이것은 울릉도(鬱陵島)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후에는 다시 왕래가 없었다.
『邊例集要』권17, 雜條附 鬱陵島, 甲寅(1614) 6월조에 의하면 이들 왜인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을 받아 礒竹島의 크기와 지형을 탐색하러 왔는데 바람을 만나 표류할까 두려워 路引을 발급받았고 서계도 지참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조선 정부는 경상감사와 부산의 변신(邊臣)으로 하여금 울릉도가 우리나라에 소속되어 있다는 내용의 회답서계를 쓰시마번에 보내도록 했다.
『광해군일기』6년(1614) 9월 2일 辛亥條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울릉도에 왜노(倭奴)의 왕래를 금지하라는 뜻으로 전일 예조의 서계(書啓) 가운데 이미 사리에 근거하여 회유(回諭)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마도의 왜인이 아직도 울릉도에 와서 살고 싶어 하여 또 서계를 보내었으니 자못 놀랍습니다. 본도(本島)가 우리나라에 소속되었음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는데, 방물(方物)을 거두기도 하고 도민(島民)을 조사 정리하기도 한 전고(典故)가 명확히 있습니다. 이 일을 회답하는 서계 가운데 갖추어 기재하고 의리에 의거하여 깊이 꾸짖어서 간사하고 교활한 꾀를 막는 것이 편리하고 유익할 듯합니다. 경상감사와 부산의 변신(邊臣)에게 공문을 보내 온 배에 특별히 유시를 하고 이 글을 전적으로 맡아 싸가지고 속히 돌아가 도주(島主)에게 보고하여 조정의 금약(禁約)을 준수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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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가 답서에 이르기를주 002
각주 002)
이때 조선은 쓰시마번에 서계를 두 번 발급했다. 동래부사 윤수겸(尹守謙)의 서계(1614년 7월부)와 동래부사 박경업(朴慶業)의 서계(1614년 9월)이다. 서계 본문은 뒷부분의 주기(注記)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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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울릉도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지금은 비록 황폐해 있으나 어찌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점거하는 것을 허용하여 시끄럽게 틈이 벌어질 단서를 열겠습니까?”
그 두 번째 답서에서도 역시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른바 의죽도라는 곳은 실제로 우리나라(조선)의 울릉도입니다. 지금은 비록 황폐하게 버려져 있지만 어찌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거주하도록 허용하여 시끄럽게 틈이 벌어질 단서를 열겠습니까?”
이때에 우리나라(일본)에는 바야흐로 坂城의 役事주 003
각주 003)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세력을 멸망시킨 ‘오사카노진(大坂の陣, 1614~1615년)’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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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어서 나라 안이 소란스럽게 움직이느라 군무(軍務)가 심히 위급하였으니, 본주에서 감히 이 두 편의 서계를 전하여 아뢰지 못한 것은 일이 안정되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우리 前 번주 萬松公 주 004
각주 004)
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 宗将盛의 넷째(혹은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1579년(혹은 1580년) 宗家 제17대 당주 소 요시시게(宗義調)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계승했다. 1587년 隱居했던 양부(養父)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하여 요시토시는 가독을 요시시게에게 반납하였는데 이것은 같은 해 히데요시(秀吉)의 규슈(九州) 정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요시토시는 요시시게와 함께 히데요시에게 복종하여 쓰시마 일국(一國)을 안도(安堵)받았다. 1588년 요시시게의 死後 다시 당주가 되어 임진왜란 시에는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번대(一番隊)에 소속되어 5,000명의 병력으로 최선봉에서 싸웠다. 히데요시 사망 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西軍)에 가담했으나 전후 악화된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희망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용서를 받고 소령(所領)을 안도받아 쓰시마 후추번(対馬府中藩)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요시토시는 1609년 조선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는 데 성공, 이후 조선통교는 쓰시마번이 전담하게 되었다. 요시토시의 法號는 만송원(萬松院)이다. 본문에 보이는 그의 맏아들은 소 요시나리(宗義成, 1604~1657)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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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맏아들은 나이가 겨우 12세였기 때문에 역신(逆臣)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주 005
각주 005)
야나가와(柳川)씨는 에도시대 초두 쓰시마번 소(宗)씨의 중신(重臣)으로 활약했던 집안이다. 야나가와씨는 쇼군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家光)로 이어지는 3대에 걸쳐 쇼군의 측근으로 봉사한 특이한 경력을 가진 집안으로, 중앙권력자와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는 점에서 소씨의 다른 가신들과는 성격을 달리했다. 야나가와 가문의 3대 당주인 시게오키(調興)는 에도에서 태어나, 조부 시게노부(調信)나 부친 도시나가(智永)와는 달리 쓰시마로 귀환하는 것조차 꺼려했다. 이윽고 시게오키가 그의 세력을 발판으로 점차 主君인 소 요시나리(宗義成)를 경시하자 양자는 대립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시게오키는 1605년 조선의 사절을 후시미(伏見)까지 데려 온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과거 쇼군 이에야스가 소 요시토시(宗義智)에게 하사한 규슈 히젠(肥前)의 영지 2,800石 중에서 1,000石이 부친 야나가와 도시나가(柳川智永)에게 분급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아, 스스로 소씨의 가신이 아니라 막부의 直臣(直參旗本)처럼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1631년 양자는 서로를 막부에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1635년 쇼군 이에미츠가 친재(親裁)한 결과 요시나리는 무죄, 시게오키는 츠가루번(津輕藩)에 유배판결을 받았다. 또한 양자의 심의 과정에서 그간 조선과의 외교에서 쓰시마번이 반복해온 국서개찬(國書改撰) 사실이 폭로되어, 주군과 가신의 불화로 보였던 사태가 국제적인 외교사건으로 번지기도 했다. 이처럼 쓰시마번주 소 요시나리와 그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대립한 끝에 막부에 소송을 제기한 사건을 야나가와잇켄(柳川一件)이라 한다. 야나가와잇켄은 소씨의 입장에서는 쓰시마를 계속해서 지배할 수 있을지 여부가 걸린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소씨의 승리로 판결이 내려진 후 번 내에서 야나가와씨는 ‘반역자(逆臣)’로 규정되었다. (『書き替えられた国書』, 『倭館—鎖國時代の日本人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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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통교(通交)를 마음대로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편의 서계를 또한 전란을 평정하고 승리하여 개선한 후에도 전하여 아뢰지 못하는 것은 그 당무(黨務)를 속인 일이 비단 이 78년 전뿐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변방의 백성들이 그 섬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표류하여 귀국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에 예조참의가 본주(쓰시마번)에 서계를 보내서 말했습니다.
“왜인 馬多三伊 등 7명이 변방의 관리에게 체포되었기에 그들에게 연유를 물어보았더니 그들은 三尾關 주 006
각주 006)
시마네현(島根縣) 북동단 八束郡의 항구도시 미호노세키(美保關). 오키(隱岐) 섬과의 연락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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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사는데 울릉도로 고기잡이를 하러 갔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돌아가는 왜선(倭船)에 태워 귀도(貴島)로 돌려보냅니다.”
대개 82년 전에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마음대로 거주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시끄러운 틈이 벌어질 단서를 열어서야 되겠습니까?’라는 말을 하였다면, 78년 전에야말로 참으로 다른 사람들이 고기잡이를 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도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며 허락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설령 당시에 동맹을 맺은 나라와 서로 잘 지내려는 도리 때문에 우리 백성들이 고기잡이하러 가는 것을 금지하지 않으려 했다면, 또한 서계 가운데 그 사유를 서술하지 않을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이 섬이 과연 귀국의 강토 경계에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거주하는 것은 참으로 침범하는 일이며, 어쩌다 한 번 고기를 잡으러 가는 것도 또한 침범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여러 해 동안 거주하는 것은 금지할 수 있으면서 어쩌다 한 번 고기 잡으러 가는 것은 금지하지 않은 것도 또 매우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재작년에 명령을 받았을 즈음에 이것저것 참고하여 조사해 보았지만 끝내 분명하게 밝힐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감히 이 두 서계의 일을 막부에 말씀드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전날에 회답한 서계에 ‘한 개의 섬이 두 가지 이름을 갖고 있는 상황을 귀주 사람들도 또한 모두 다 알고 있다.’고 한 말은 82년 전 두 편 서계주 007
각주 007)
1614년 동래부사가 조정의 지시에 따라 쓰시마번에 발급한 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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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의죽도(礒竹島)라는 것은 실제로 우리나라의 울릉도이다.’라는 등의 말이 있기 때문입니까? 귀국에서 끝내 다시 생각해 주지 않는다면 전날의 답서를 막부에 전하여 아뢸 것인데, 그렇게 되면 82년 전의 두 서신도 또한 마땅히 한꺼번에 올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80년 전과 78년 전의 앞뒤 편지의 뜻이 서로 합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에 대해 지금 그 사정을 궁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갖추어 묻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분명하게 밝혀 주십시오. 을해년(1695) 5월 일.

  • 각주 001)
    『증정교린지』권4, 鬱陵島礒竹島辨正顚末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광해군 6년 갑인(1614)에 동래부사 윤수겸(尹守謙)이 장계를 올려, “왜소선(倭小船) 1척이 의죽도(礒竹島)의 형세를 살펴보려고 온 까닭에 그 섬이 어느 곳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경상, 강원의 사이에 있다.’고 답하였습니다. 그 말의 뜻을 살펴보니 이것은 울릉도(鬱陵島)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후에는 다시 왕래가 없었다.
    『邊例集要』권17, 雜條附 鬱陵島, 甲寅(1614) 6월조에 의하면 이들 왜인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을 받아 礒竹島의 크기와 지형을 탐색하러 왔는데 바람을 만나 표류할까 두려워 路引을 발급받았고 서계도 지참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조선 정부는 경상감사와 부산의 변신(邊臣)으로 하여금 울릉도가 우리나라에 소속되어 있다는 내용의 회답서계를 쓰시마번에 보내도록 했다.
    『광해군일기』6년(1614) 9월 2일 辛亥條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울릉도에 왜노(倭奴)의 왕래를 금지하라는 뜻으로 전일 예조의 서계(書啓) 가운데 이미 사리에 근거하여 회유(回諭)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마도의 왜인이 아직도 울릉도에 와서 살고 싶어 하여 또 서계를 보내었으니 자못 놀랍습니다. 본도(本島)가 우리나라에 소속되었음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는데, 방물(方物)을 거두기도 하고 도민(島民)을 조사 정리하기도 한 전고(典故)가 명확히 있습니다. 이 일을 회답하는 서계 가운데 갖추어 기재하고 의리에 의거하여 깊이 꾸짖어서 간사하고 교활한 꾀를 막는 것이 편리하고 유익할 듯합니다. 경상감사와 부산의 변신(邊臣)에게 공문을 보내 온 배에 특별히 유시를 하고 이 글을 전적으로 맡아 싸가지고 속히 돌아가 도주(島主)에게 보고하여 조정의 금약(禁約)을 준수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따랐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이때 조선은 쓰시마번에 서계를 두 번 발급했다. 동래부사 윤수겸(尹守謙)의 서계(1614년 7월부)와 동래부사 박경업(朴慶業)의 서계(1614년 9월)이다. 서계 본문은 뒷부분의 주기(注記)를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3)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세력을 멸망시킨 ‘오사카노진(大坂の陣, 1614~1615년)’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소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 宗将盛의 넷째(혹은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1579년(혹은 1580년) 宗家 제17대 당주 소 요시시게(宗義調)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계승했다. 1587년 隱居했던 양부(養父)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하여 요시토시는 가독을 요시시게에게 반납하였는데 이것은 같은 해 히데요시(秀吉)의 규슈(九州) 정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요시토시는 요시시게와 함께 히데요시에게 복종하여 쓰시마 일국(一國)을 안도(安堵)받았다. 1588년 요시시게의 死後 다시 당주가 되어 임진왜란 시에는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번대(一番隊)에 소속되어 5,000명의 병력으로 최선봉에서 싸웠다. 히데요시 사망 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西軍)에 가담했으나 전후 악화된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희망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용서를 받고 소령(所領)을 안도받아 쓰시마 후추번(対馬府中藩)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요시토시는 1609년 조선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는 데 성공, 이후 조선통교는 쓰시마번이 전담하게 되었다. 요시토시의 法號는 만송원(萬松院)이다. 본문에 보이는 그의 맏아들은 소 요시나리(宗義成, 1604~1657)를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야나가와(柳川)씨는 에도시대 초두 쓰시마번 소(宗)씨의 중신(重臣)으로 활약했던 집안이다. 야나가와씨는 쇼군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家光)로 이어지는 3대에 걸쳐 쇼군의 측근으로 봉사한 특이한 경력을 가진 집안으로, 중앙권력자와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는 점에서 소씨의 다른 가신들과는 성격을 달리했다. 야나가와 가문의 3대 당주인 시게오키(調興)는 에도에서 태어나, 조부 시게노부(調信)나 부친 도시나가(智永)와는 달리 쓰시마로 귀환하는 것조차 꺼려했다. 이윽고 시게오키가 그의 세력을 발판으로 점차 主君인 소 요시나리(宗義成)를 경시하자 양자는 대립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시게오키는 1605년 조선의 사절을 후시미(伏見)까지 데려 온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과거 쇼군 이에야스가 소 요시토시(宗義智)에게 하사한 규슈 히젠(肥前)의 영지 2,800石 중에서 1,000石이 부친 야나가와 도시나가(柳川智永)에게 분급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아, 스스로 소씨의 가신이 아니라 막부의 直臣(直參旗本)처럼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급기야 1631년 양자는 서로를 막부에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1635년 쇼군 이에미츠가 친재(親裁)한 결과 요시나리는 무죄, 시게오키는 츠가루번(津輕藩)에 유배판결을 받았다. 또한 양자의 심의 과정에서 그간 조선과의 외교에서 쓰시마번이 반복해온 국서개찬(國書改撰) 사실이 폭로되어, 주군과 가신의 불화로 보였던 사태가 국제적인 외교사건으로 번지기도 했다. 이처럼 쓰시마번주 소 요시나리와 그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대립한 끝에 막부에 소송을 제기한 사건을 야나가와잇켄(柳川一件)이라 한다. 야나가와잇켄은 소씨의 입장에서는 쓰시마를 계속해서 지배할 수 있을지 여부가 걸린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소씨의 승리로 판결이 내려진 후 번 내에서 야나가와씨는 ‘반역자(逆臣)’로 규정되었다. (『書き替えられた国書』, 『倭館—鎖國時代の日本人町—』) 바로가기
  • 각주 006)
    시마네현(島根縣) 북동단 八束郡의 항구도시 미호노세키(美保關). 오키(隱岐) 섬과의 연락 항구. 바로가기
  • 각주 007)
    1614년 동래부사가 조정의 지시에 따라 쓰시마번에 발급한 답서.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萬松公,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馬多三伊
지명
의죽도(礒竹島), 울릉도, 의죽도, 울릉도, 三尾關, 울릉도, 의죽도(礒竹島),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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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의 네 번째 질의서 자료번호 : ud.k_0004_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