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문화유산자료

세키노조사단의 조사

노산리 개마총(노산리 제1호)

조사경과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말미에 첨부한 발굴일지가 참고된다.
노산리 제1호 즉 개마총(鎧馬塚)의 발굴은 1916년 10월 28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조사단은 평양에서 자동차로 이동해 오전 8시에 현장에 도착했다. 면사무소에 여장을 풀고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는데 노산리 제1호분의 조사를 맡은 것은 오바 쓰네키치[小場恒吉]이고 모두 10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 10월 29일에는 7명의 인부를 시켜 봉분의 동남쪽을 파고 연도를 확인한 다음, 현실 내부의 토사를 제거하고 벽화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1913년대에 이루어진 고구려 고분의 조사 경험은 고구려 석실분의 입구를 대체로 남쪽으로 낸다는 인식을 확산시켜 이후의 조사방법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이루어진 고구려 고분의 굴착조사에서는 주로 봉분 정상에서 아래로 곧게 굴착해서 석실을 확인한 다음 천장석의 일부를 파괴하고 현실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조사가 진행되었다. 강서대묘와 강서중묘가 이러한 방법으로 발굴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圖 4_평양 주변의 주요 고구려 유적
10월 30일에는 현실 안의 토사를 계속 제거하면서 한편으로는 천장의 상부를 실측하였다. 10월 31일에는 작업을 쉬었고 11월 1일에 오바가 인부 1명을 데리고 석실 내부를 실측하였다. 2일에도 실측작업은 계속되었으나 3일은 또 하루를 쉬었다. 4일에 실측을 재개하여 5일에 실측작업을 마무리하였다. 실측작업이 마무리되자 11월 8일에 야쓰이 세이치가 사진 촬영을 실시하고 곧바로 봉분을 복구하였다. 개별 고분에 대한 굴착작업의 진행과 실측을 오바가 담당하고, 야쓰이가 주로 고분의 사진 촬영을 담당한 것으로 보아 개별 조사원들의 특기가 고려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노산리 개마총에 대해서는 다이쇼[大正] 5년도 보고서에 설명이 있지만, 이를 정리하여 『국화(國華)』에 발표한 내용이 조금 더 자세하다. 이를 간추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개마총은) 대성산록의 높지 않은 구릉에 축조된 원형 고분인데 고분의 장축은 동남향이고 현실은 전후로 약간 긴 장방형으로 그 전면에 연도가 달린 구조이다. 4벽의 상단에 2중으로 평행내어쌓기를 한 다음 그 위 모서리에 2번의 삼각모줄임을 하여 천장 면적을 줄였다. 그런 다음 조정된 1장의 천장석을 덮어 놓은 구조이다.
종래 일반적인 고구려 고분의 형태와 동일한데 그 4벽과 천장석은 크게 가공되지 않은 돌을 이용해 축조하고 그 위로 두껍게 석회를 발라서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 위에 회화를 그려 넣었다. 연도는 약간 길고 좌우 벽은 현실과 같은 구조로 그 위에 큰 돌을 덮어서 천장을 만들었다. 현실의 특징으로 천장의 석회는 박락된 곳이 많고 지금 회화의 흔적이 있는 곳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전에 이미 발굴(도굴)된 것으로 훼손되거나 오염된 곳이 많다. 4벽에는 소위 사신도를 그려 넣었는데 남벽 입구의 좌우벽에 주작도, 그리고 청룡은 몸통과 꼬리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현무는 희미하고 뱀꼬리만이 서로 겹쳐 있을 뿐이다. 백호도 역시 꼬리 부분만이 남아 있다. 제1모줄임부의 좌벽에는 전반부에 한 사람이 보관을 쓰고 가는데 그 뒤의 사람에게 시중을 받고 있다. 다음으로 안장을 얹은 말이 있는데 갑옷[鎧甲]을 걸치고 두 사람이 고삐를 당기고 한 사람이 채찍을 쥐었는데 문자도 새겨져 있다. 문자는 ‘原王着鎧馬之象’이라 적혔으나 처음의 原은 분명하지 않은 글자이다. 그 뒤로 세 사람이 환두도를 들고 따른다.
후방의 제1모줄임부의 좌단에 한 사람이 서 있다. 앞사람의 머리를 보고 있을 뿐, 다른 것은 모두 박락되었다. 오른벽의 하단에 소를 그리고 그 앞에 짐을 그려 둔 것 같지만 분명하지 않다.
2번째 모줄임부에는 왼쪽에 삼족오를 그리고, 오른쪽 동그라미 안에 옥토끼가 약을 찧는 그림이 있다. 그 뒤에 두꺼비가 있는데 이는 일월(日月)의 상으로 동서(東西)를 보여주는 것이다. 기타 반룡문을 그렸지만 박락되었다. 이 반룡문은 화상리 대연화총(감신총)과 통구의 삼실총에 있는 것과 유사한데 약간 진보된 것이다. 천장 모서리의 삼각형 모줄임부에는 같은 모양의 반룡문을 그리고, 또 성문(星文)을 그렸는데 거의 떨어져 있었다. 그 위 삼각형 모줄임부와 천장석에 그려진 것도 마찬가지였다.
연도에서 현실로 이어지는 좌우측 벽에는 역사(力士)를 그렸는데 발굴조사 중에 밤에 사람이 들어와 파괴시킨 점은 심히 유감이다. 연도 좌우벽에도 벽화가 있는데 현실 가까이에 사자를 그렸다. 우벽에 사람이 있고 등 쪽으로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있다. 그 외 좌벽에도 한 사람이 개마에 타고 있는데 마멸되어 겨우 식별이 될 정도이다. 현실과 연도의 벽화가 완전히 보존되어 있지 않은 점은, (이것이) 당시의 풍속과 관습을 연구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이렇게 묵서가 기록된 벽화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圖 5_개마총의 분구도와 석실 도면(오바 작도)
圖 6_노산리 개마총 발굴 전 전경
圖 7_드러난 연도부
圖 8_모줄임부와 벽화
圖 9_모줄임부 상태
圖 10_현실 좌측 평행내어쌓기면의 벽화
圖 11_현실 좌측 평행내어쌓기면의 인물도
圖 12_현실 우측 평행내어쌓기면의 月象圖
圖 13_현실 우측 평행내어쌓기면의 日象圖
圖 14_현실 좌측 평행내어쌓기면의 벽화 모사도
圖 15_현실 우측 평행내어쌓기면의 月象 모사도(圖 12의 모사도)
圖 16_현실 좌측 평행내어쌓기면의 인물도 모사도
圖 17_현실 좌측 평행내어쌓기면의 인물도 모사도
圖 18_벽화 인물의 모사도
다이쇼 5년도(1916년) 조사 보고에는 노산리 1호 즉 개마총의 사진이 12장 게재되었으며, 『고구려시대의 유적[高句麗時代之遺蹟]』 상권에도 거의 동일한 사진이 실렸다. 다만 후자에는 나중에 오바 쓰네키치가 그린 벽화 모사도가 새로 추가되었다.
이들 사진과 도면을 참고하여 개마총의 구조를 살피면 우선 봉분은 방대형으로 연도는 동남쪽으로 나 있다. 도면에는 고분의 현실 천장 위의 흙량이 많지 않은 것처럼 그려졌는데 이는 봉분 상면의 토사가 많이 유실되었음을 시사한다. 현실의 동남쪽 중앙에 달린 연도는 바깥쪽이 가장 넓고 현실로 접근하면서 2번에 걸쳐 좁아지는 현상이 확인된다. 연도부의 가장 바깥쪽의 폐쇄를 상정한다면 연도부에서 3번의 폐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시대의 유적』에는 연도부 바깥쪽에 서 있었던 두꺼운 판석으로 된 폐쇄석이 상반이 파괴된 채로 드러나 있으며 연도부의 천장은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높게 축조되었다. 연도부의 좌우벽은 거칠게 가공된 자연석으로 축조하였으며 그 위로 석회를 두껍게 발라 미장하였는데 연도부 바깥쪽의 석회 훼손이 가장 현저하다.
큰 판석 4장을 가공하여 현실의 바닥으로 삼았으며 현실의 좌우에 나란히 침상과 같은 시상대(관대)를 놓았는데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 현실의 4벽은 미미한 편이지만 바깥으로 배가 부르며 상부로 가면서 곡선을 이루며 줄어든다. 그 위에 두 번에 걸친 평행내어쌓기와 역시 두 번의 삼각모줄임을 한 다음 1장의 천장석을 덮어서 마무리하였다. 모줄임에는 여러 장의 거칠게 가공된 자연석이 이용되었으며 석회를 발라서 면을 조정하였다. 훼손된 석회면을 통해서 모줄임석의 사이와 뒤쪽에 다수의 자연석이 채워진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현실 벽면과 모줄임부에서 확인된 벽화는 위에 번역해 둔 설명이 비교적 구체적이기 때문에 생략한다. 다만 특이한 것은 현실 우측의 평행내어쌓기 면에 그려진 日象은 벽면에서 떼어내어 바닥에 놓고 촬영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점이다.
『고구려시대의 유적(高句麗時代之遺蹟)』에 실린 고분의 실측도와 벽화 모사도는 오바 쓰네키치가 작성한 것인데 1916년의 조사와는 별도로 나중에 따로 이루어진 것이다.

내리 서북총(내리 제2호)

장수원 역의 동북쪽에 위치하는 내리에는 20여 기의 고분이 분포하는데 보고서의 사진을 참고하면 잔존상태가 양호한 봉토분이 무리를 지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 서북총(西北塚)이 조사되었다고 보고되었으나 세키노의 조사일지에는 내리 제2호분의 조사내용만이 기록되어 있다. 정황상 내리 서북총과 내리 제2호분이 같은 고분이라 판단되는데, 현장에서 내리에 소재하는 고구려 고분에 대한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그중 2호만을 골라서 굴착조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결과적으로 내리에서 고구려 고분 1기만이 조사되었기 때문에 조사 후에 일련번호와 상관없이 내리 서북총이라 보고한 것이다.
내리 서북총(2호)은 발굴조사에 착수한 첫날인 10월 28일에 굴착을 시작하였으며 현장 감독은 세키노 다다시의 동생인 노모리 겐이 담당했다. 첫날의 조사에 동원된 인부는 9명이며 같은 날 이미 연도의 천장을 발견했다고 한다. 즉 내리 서북총도 개마총과 마찬가지로 연도를 확인해서 현실로 진입하는 방법으로 발굴을 진행했다. 10월 29일에는 역시 노모리의 감독 하에 발굴을 계속하여 연도 내의 토사를 제거했으며 작업공간이 협소해서인지 인부를 4명으로 줄인 사실이 확인되며 일단 10월 30일에 토사 운반 작업을 마무리했다. 11월 1일과 11월 5일에 인부 1명을 대동하여 노모리 전담으로 실측이 진행되었다.
다이쇼 5년도 보고서와 『고구려시대의 유적(高句麗時代之遺蹟)』에는 관대 등에 하얀 선이 그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석실 내부 실측을 위한 기준선으로 판단된다. 석실 바닥에 그려진 기준선을 벽면에도 연장하였으며 적당한 곳에 수평선도 그어 두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지금의 석실 실측법과도 유사한데 이것이 봉분 바깥의 기준선과도 일치하게 설정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16년의 고구려 석실분 조사에서 이미 고분 내부에 비교적 정교한 기준선을 설치하고 실측을 실시했다는 점은 주목된다.
圖 19_내리 서북총(2호) 분구도(노모리 작도)
圖 20_내리 서북총(2호) 석실 실측도(노모리 작도)
圖 21_내리 서북총 근경(남쪽에서)
圖 22_연도부 폐쇄 상태(봉토 밖에서)
圖 23_연도부 폐쇄석을 제거한 상태
圖 24_현실 내부에서 본 현문
圖 25_모줄임부 상태
圖 26_현실 바닥의 관대(실측용 기준선)
圖 27_내리 남방의 고분군 전경
圖 28_내리 북방의 고분군 전경
한편 다이쇼 5년도(1916년)의 보고서에는 실측도가 게재되지 않았지만 1929년에 발간된 『고구려시대의 유적(高句麗時代之遺蹟)』에는 석실과 분구 실측도가 발굴 사진과 같이 실려 있다. 그리고 ‘세키노컬렉션’에 보관된 내리 서북총의 도면 프린트에는 ‘1916년 조사, 1919년 제도’라고 적혀 있다. 이것이 1919년에 유구 실측도를 다시 작성했다는 의미인지 1919년도에 도면 원도를 인쇄물로 사용하기 위하여 깨끗하게 제도했다는 의미인지 분명하지 않다. 또 1917년 잡지 『국화(國華)』에 실린 조사단장 세키노의 보고문을 참고하면 조사 당시 오바 쓰네키치가 노산리 개마총과 호남리 사신총의 도면을 작성했다는 내용이 나오고 나중에 이들 고분의 벽화를 추가로 모사할 계획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로 보아 『고구려시대의 유적』에 실린 도면은 조사 당시 노모리가 작성해 두었던 것을 1919년경에 다시 제도했고, 1929년에 이것을 다시 이용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1919년에 제도되었다는 ‘세키노컬렉션’의 도면 프린트에는 석실 단면의 표시부호가 일본어 ‘가타카나’인데 『고구려시대의 유적』은 분명 동일한 도면임에도 불구하고 ‘알파벳’으로 바뀌어 있다. 이는 1916년의 조사과정에서 여러 연구자가 작성한 도면을 1929년에 새로이 『고구려시대의 유적』 도판을 만들면서 일괄 통일한 흔적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조사일지에는 11월 9일에도 노모리가 내리 서북총의 실측도를 작성하고 있으며, 10일에 봉분을 복구하고 11일에 출토품과 실측도를 정리한 것으로 나온다.
내리 서북총에 대한 조사내용은 다이쇼 5년도의 보고서에만 약간 기술되어 있다. 이를 아래에 간추려 번역해 둔다.
장수원의 동북에 있는 시족면 내리의 고대지에 약 20여 기의 고구려 고분이 있는데 지금 내리 서북총이라고 명명된 것은 그 서북에 위치하는 것이다. 봉토가 유실되어 원추형을 띠는 것으로 둔덕이 밋밋하고 현실의 바닥에서 분정까지 잔존 약 313cm, 현실은 높이 268cm, 동벽은 309cm, 서벽은 306cm, 전벽과 후벽은 250cm이다. 천장은 고구려 고분의 일반적인 모줄임 형식을 띠는데 좌우의 벽에 접해서 한 쌍의 관대가 있다. 연도는 남으로 달렸는데 길이는 335cm이다. 현실 서벽, 천장, 저면, 관좌 및 연도의 전부에 석회를 칠해 두었다. 현실 입구는 판석으로 막았는데 비교적 작은 할석에 석회를 발라서 막은 다음 2매의 판석으로 폐쇄하였다. 연도 내부의 할석에 석회를 발라 연도 바깥쪽까지 막았지만 도굴을 당하여 지금 유존하는 부장품은 없고 현실 내에서 목관에 사용된 철못과 인골 잔흔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이쇼 5년도 보고서에 게재된 원고와 사진 9장, 그리고 『고구려시대의 유적』에 실린 석실 실측도를 참고하여 조사내용을 약간 보충하기로 한다.
우선 봉분의 기저는 원형을 띠며 봉분 중앙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석실이 있다. 연도를 포함하여 석실은 그 중심축을 남북으로 두며 남쪽에는 연도가 달렸다. 현실은 장방형인데 동서보다 남북으로 더 길다. 4벽의 기저는 전반적으로 직선적이나 후벽은 바깥으로 약간의 곡면을 형성한다. 바닥은 회다짐을 하였고 동서벽에 붙여 각각 1개씩의 석제 관대를 설치하였다. 천장은 2번에 걸쳐 평행내어쌓기를 하고, 다시 2번의 삼각 모줄임을 한 다음 천장석 1매를 덮어서 마무리 하였다. 벽면 전체는 두껍게 석회로 미장되어 그 내부를 살필 수가 없으나 개마총과 유사한 방법으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연도부의 폐쇄는 우선 현문의 바깥을 판석으로 막고 그 뒤에 굵은 막돌을 채워 넣었다. 또 그 바깥에 다시 깨끗하게 가공된 쌍바라지식 돌문을 달아서 마무리했다. 그 바깥에는 다수의 큰 막돌을 이용해 다시 폐쇄했다. 입구에서 가까운 연도의 좌우벽은 마무리 미장회가 부분적으로 떨어져 있었다. 박락면을 통해서 석실의 축조에 거칠게 가공된 막돌들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도에는 두꺼운 판석을 덮어서 천장으로 삼은 다음 두껍게 회칠하여 마무리했다. 현실의 4벽과 모줄임 단부가 석회로 깨끗하게 미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벽화는 발견되지 않았다.
고분은 발굴 당시 이미 도굴된 상태였는데 도굴자는 연도부 폐쇄석의 상부를 들어내고 침입하여 폐쇄된 돌문마저 상반부를 파괴했다.

토포리 대총(토포리 제1호)

조사일지를 살피면 토포리에서는 모두 4기의 고분이 발굴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10월 28일에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가 인부 9명을 시켜 토포리 대총(1호)을 굴착하였는데 당일 저녁 무렵에는 이미 연도가 드러났다고 한다. 토포리 1호, 즉 대총은 봉분의 남쪽을 굴착해서 먼저 연도를 찾은 다음 폐쇄석을 제거하고 현실로 들어가는 순으로 조사가 진행되었다. 다음날인 29일에도 역시 오가와의 감독하에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그 와중에 부분적으로 실측작업도 병행된 정황이 확인된다. 이날 동원된 인부는 전날보다 한 사람이 더 많은 10명이었다. 30일에는 연도에 찬 토사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금동촉과 유약이 발린 도기 파편이 발견되었다. 31일에는 외부에 있는 호석을 노출시켜 실측하고, 11월 1일에 현실 바닥면을 조사하는데 실측까지 병행한 이날 작업에는 인부 2명이 동원되었다.
圖 29_토포리 대총 분구 측량도
圖 30_토포리 대총 석실 실측도(오가와 작도)
11월 2일에는 하루 종일 인부 2명을 데리고 실측을 하였으며, 3일은 하루를 쉬고, 4일에도 같은 체제로 작업을 계속했는데, 실측작업이 끝난 것은 11월 5일이다.
보고서 일지에는 11월 5일에 오가와의 실측작업이 끝났다고 되었으나 원본 일지에는 6일에도 작업을 계속했다고 적혀 있다. 보고서 작성과정에서의 착오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8일에는 역시 인부 2명을 데리고 고분을 실측하고 고분군의 배치도를 작성한 것으로 확인된다. 11월 9일에는 야쓰이가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봉분에 대한 복구작업이 실시되었다. 토포리 대총의 조사경과는 일지에 상세히 기록되었지만, 조사내용은 다이쇼 5년도 조사 보고서가 참고된다. 이를 번역해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고분은) 장수원의 동쪽에 있는 독립된 작은 구릉이 연결되는 지맥의 남쪽을 달리는 말단 가까운 곳에 있는데 모두 20여 기의 고분이 연속되며 멀리 대동강이 보이는 입지이다. 대총은 한 변이 27m 정도인 방대형의 기단 위에 설치된 방대형 토분(土墳)으로 높이는 기단 위에서 788cm 정도이고 현실은 방형에 가까운데 천장은 4벽에서 내어쌓기를 2번하였고, 또 모서리를 줄이고 다시 평행하게 모를 줄인 다음 천장석을 덮었다. 바닥에는 돌을 깔았는데 현실의 크기는 길이 306cm에 폭이 275cm, 높이가 349cm(?)인데 4벽과 천장은 석회로 미장하였다. 현실 내 우벽에 접해서 넓은 석단을 만들어 붙여 두었는데 합장용으로 만들어진 것 같고, 좌벽에 붙여서 전후에 서로 마주보게 돌을 두었으며, 석단과 마찬가지로 석회를 바른 것이다.
현실 입구에는 (석)문을 설치했는데 상부 좌우의 축혈은 하부의 좌우 축혈보다 좁고 현실에 가깝다. 연도 중앙부에 다시 폐쇄한 부분이 있는데 입구에도 판석을 세워 두고 그 바깥에는 돌을 쌓아서 막은 듯하다. 바닥면은 전방으로 가면서 점차 낮아지며, 연도의 전체 길이는 129.5m이고 현실에 접하는 부분은 528cm, 천장이 있는 부분까지의 높이는 뒤에서 172cm, 입구에서 205cm 정도이다. 현실 내에서 석침을 발견했는데 이를 통해서 고구려에서는 목관을 사용하지 않고 곧바로 유해를 석침 위에 안와(安臥)시키는 장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고분은 몇 번 발굴(도굴)을 당한 것 같은 형적을 남기며, 연도 중간에서는 그 횡단면이 방형에 가까운 금동촉 1개를 발견했고 현실 및 연도에서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다음 채색하여 연화문을 그린 도기 파편과, 화려한 녹유의 도기 잔편이 많이 발견되었다. 연화문은 아직 원숙하지 않고 유치함이 있지만 육조의 분위기가 있다. 고구려는 육조시기에 이미 요업이 상당히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토포리 대총은 이름 그대로 대형의 석실 봉토분으로 매우 긴 연도가 달려 있다.
토포리에 군집하는 고구려 고분 중에서 가장 크고 현실의 천장도 대단히 높다. 조사 전에는 그 주변에 다수의 조선묘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봉분의 외연을 따라 기단석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다. 봉분의 북쪽에는 도굴하면서 굴착한 것으로 보이는 함몰구가 있다.
발굴은 봉분의 남쪽을 굴착·하강하여 묘도와 연도부를 확인하고 연도를 통해 석실 내로 진입하였다. 연도를 포함한 현실의 중심축은 서쪽으로 약간 비틀어졌으나 기본적으로 남북방향이다. 현실은 남북이 약간 긴 형태로 연문이 달린 남벽은 직선적이지만 나머지 벽의 기저는 배가 나온 구조이다. 현실의 축조 방법은 천장과 사방벽 및 모줄임부가 깨끗하게 석회로 미장되어 있어 분명히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다만 연도 입구와 부분적으로 석회가 떨어진 곳을 살피면 모두 대충 가공된 막돌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약간 좁아진 연문을 나와 연도가 이어지는 좌우 모서리에 쌍바라지 돌문을 달았던 축혈, 즉 장부 구멍이 있고 연도 입구와 중간지점에 다시 막돌로 폐쇄한 흔적이 있다. 연도의 입구에도 천장을 한 단 높여서 판석을 걸쳐 놓았고 그 바깥에 다수의 굵은 막돌을 쌓아서 폐쇄하였다. 그리고 그 바깥으로는 천장석이 없는 묘도부가 이어지는 구조이다.
현실 바닥은 보고서에도 설명이 있지만 합장이 가능한 관대가 서쪽에 설치되고 동쪽벽과 서쪽벽의 모서리 그리고 그 반대쪽에도 회칠을 한 막돌을 정연하게 쌓아 두었으나, 그 용도는 알 수 없다. 관대 역시 두꺼운 판석이 아니고 표면에 회칠을 해서 정면한 것이다. 현실의 바닥 역시 회다짐을 하고 석회로 미장한 것으로 관찰된다. 문지방은 가공된 석재를 조립해서 만들었으며 회칠한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연문의 좌우벽과 천장은 깨끗하게 석회로 미장되었다. 연도의 천장은 비교적 넓은 판석을 이용하여 덮었으며 그 아래면도 석회를 발라서 깨끗하게 미장하였다. 고분은 도굴을 당한 것으로 개마총, 내리 서북총과 마찬가지로 연도부의 폐쇄석 상부를 들어내고 폐쇄 판석의 상부를 파괴하고 현실로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
고분에서는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머리가 둥글게 생긴 관정이 출토되어 목관이 존재하였음을 증명해주며, 그 외에도 철도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철제품이 다수 출토되었다. 철제품은 그 형태로 보아 현실 내부에 무엇인가를 걸어 두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사이부장경호 2점과 연화문 채색 뚜껑이 2점 출토되었는데, 서로 직경이 비슷하여 세트일 가능성도 있다. 사이부 장경호는 바닥 직경이 작고 동 최대경이 어깨에 있으며 구연이 나팔처럼 외반하는 것이다. 이 중 한 점은 교상파수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 분명하며, 목 부분에 점토띠를 두르고 횡으로 연속되는 홈을 찍어 돌린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문양적 속성은 발해 토기나 기와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것이어서 그 관련성이 주목된다. 다른 한 점은 표면에 황갈유가 묻은 것으로 목과 어깨부에 다치구에 의한 침선이 돌아간다. 연화문이 채색된 뚜껑에도 외연과 중간 부분에 띠를 두르고 연속되는 홈을 찍어서 새겼는데, 이 역시 발해 토기와 와당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문양이다. 뚜껑의 표면을 소성 전에 깨끗하게 마연한 것도 발해토기와 연결되는 제작기법상의 속성이다.
圖 31_토포리 대총 발굴 전 전경(서쪽에서)
圖 32_묘도부 노출로 드러난 연문
圖 33_현문과 연도부 상태
圖 34_석침 실측도
圖 35_석침 사진
圖 36_출토된 사이부장경호 1
圖 37_출토된 사이부장경호 2
圖 38_삼족기
圖 39_토제 뚜껑 1
圖 40_토제 뚜껑 2
圖 41_석제 다리
圖 42_토제 뚜껑 3
圖 43_반형토기
또 보주형의 꼭지가 달린 토기 뚜껑도 2점 출토되었는데, 사이부장경호와 구경이 비슷하다. 이 토기도 황색 유약이 발린 것으로 뚜껑의 표면 외연을 따라 침선이 돌아가고 중간 부위에는 파상문이 시문되었다. 또 짐승발 모양의 다리가 달린 평면 원형의 반형토기가 출토되었고, 조립식 기물의 석제 다리도 출토되었다. 석침은 머리와 어깨선을 따라 홈을 파낸 것으로 머리 쪽이 높고 어깨가 낮게 만들어졌다.
현재 토포리 고분군은 위성사진을 통해 보존되어 있음이 확인되지만 어떤 고분이 대총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토포리 남총(토포리 제4호)

토포리 남총은 조사 당시 토포리 제4호로 불리던 고분으로 토포리 대총의 남쪽 들판에 위치한다.
이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는 1916년 10월 30일에 개시되었다. 현장에서 발굴을 감독한 것은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로 발굴 첫날인 30일 오전에는 고분의 외형을 실측하였고 그 다음 굴착을 개시해서 저녁 무렵에 연도를 발견하였다. 연도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철륜 2점이 발굴되었다고 하나 보고서와 『고구려시대의 유적(高句麗時代之遺蹟)』에는 게재되지 않아 어떤 유물인지를 알 수 없다. 토포리 남총에 대한 조사기록은 11월 1일에 다시 보이는데, 오전 중에 오가와가 인부 2명을 데리고 현실의 바닥면을 조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남총의 조사는 11월 1일에 끝난 것으로 보이며, 11월 9일에 봉분을 복구하는 작업을 했다. 11월 11일에는 오가와가 토포리 대총과 남총의 출토유물을 정리하고 오후에는 그 주변 고분들의 분구 고저차를 조사하였다.
토포리 남총의 조사내용은 『국화(國華)』나 『인류학잡지(人類學雜誌)』에 실린 세키노의 보고 논문에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는 남총에서 벽화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토포리 대총과 마찬가지로 다이쇼 5년도의 보고문에는 간단한 언급이 있다. 이를 정리하여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토포리 대총의 남쪽에 있는 평야 고분의 남단에 4기의 고분이 동서로 열을 지어 있는데 그중 서쪽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다. 외형은 방대형이고 높이는 현실 바닥에서 봉분 정상까지 386cm정도이다. 현실은 보편적인 고구려 모줄임 천장이다. 4벽과 천장, 바닥에 비교적 두꺼운 석회를 발랐다. 현실의 길이는 252cm이고 폭은 242cm, 높이는 277cm이다. 실내에는 현실의 길이 방향으로 좌우에 서로 나란하게 관대가 설치되었는데 돌을 쌓은 다음 그 위에 석회를 바른 것이다. 현실 입구에 1쌍의 문이 있고 그 바깥, 즉 연도부는 할석과 석회로 막았다. 토포리 대총과 마찬가지로 이미 도굴을 당하였다.
 
圖 44_토포리 남총 분구 측량도(오가와 작도)
圖 45_토포리 남총 석실 실측도(오가와 작도)
圖 46_토포리 남총 조사 전 전경
圖 47_토포리 남총 연도와 현문 노출 상태
圖 48_토포리 남총 모줄임 상태
圖 49_토포리 남총 좌·우 관대
『고구려시대의 유적(高句麗時代之遺蹟)』에 실린 실측도를 보면 고분은 장축을 거의 남북으로 두고 축조되었으며 정남향에 가깝게 연도가 달렸다. 봉분의 기저부는 방대형에 가까우나 상부로 올라갈수록 원형으로 변한다. 실측도에는 4벽이 모두 바깥쪽으로 호선을 그리는 구조로 묘사되어 있으며 상위로 가면서 곡선형태로 줄어든다. 바닥은 보고문에서도 밝힌 것처럼 석회로 다지고 미장하였으며 현실 좌우에 붙여 관대를 만들었다. 관대는 큰 판석을 이용하지 않고, 막돌과 석회를 섞어서 모양을 만든 다음, 그 위를 석회로 미장한 것으로 조사 당시에는 박락이 심한 상태였다. 고분은 노산리 개마총, 토포리 대총과 마찬가지로 2차례 평행내어쌓기를 하고 모서리를 삼각형으로 덮은 다음 그 위에 천장을 덮은 전형적인 고구려 석실분의 천장형태로 마무리하였다. 모줄임부에는 모두 두껍게 석회가 발려서 그 안쪽의 축조 상황을 확인할 수 없다.
연도는 남쪽으로 달린 중앙 연도이고 문지방이 설치되었으며 문미석이 현실 및 연도 천장보다 1단 낮은 형태이다. 그리고 연도 바깥쪽에서 쌍바라지식의 돌문[石扉]을 달았다. 양쪽 돌문에는 중앙에 쇠로 만든 둥근 문고리가 달려 있고, 그 아래로 가로지름대를 끼워서 문을 잠그기 위한 쇠고리가 달려 있다. 돌문의 상부가 거칠게 파괴된 것으로 보아 도굴자는 연도로 침입하여 폐쇄석과 돌문을 연이어 파괴하고 현실로 침입한 것으로 보인다.
연도는 바깥쪽으로 나오면서 천장이 1단 높아지면서 마무리되는데 묘도와 가까운 쪽은 훼손된 흔적이 역력하다. 연도부의 벽면에는 회칠이 크게 떨어져 있으며, 훼손면에는 다수의 막돌이 드러난 상태이다. 이를 통해서 대충 가공된 막돌을 이용해서 석실과 봉분을 구축하였으며, 거친 벽면 위로 두껍게 석회를 발라서 미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판으로 보아 연도의 바닥은 가공되지 않은 평평한 돌들을 깔았으며, 연도 천장은 매우 두꺼운 돌을 덮어서 축조한 정황이 확인된다

호남리 사신총(토포리 제5호)

‘세키노조사단’이 작성한 조사일지를 통해 조사과정에서는 이 고분을 토포리 5호라 하였으나, 그후 이를 지우고 그 위에 호남리 사신총(四神塚)이라고 고쳐 적은 흔적이 있다. 즉, 조사 후의 어느 시점에 토포리 5호를 호남리 사신총으로 바꾸어 부른 정황을 알 수 있다(早乙女, 2008). 『고구려시대의 유적』에 실린 주변 지형도를 보면, 호남리 고분군은 토포리 고분군에서 동쪽으로 1,500m가량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조사일지를 참고하면 10월 31일에 조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早乙女, 2008). 이때 고분의 외형을 실측한 사람은 오바 쓰네키치로 인부 1명의 보조를 받았다고 기록되었다. 즉 『고구려시대의 유적』에 실린 도면 제 546번의 호남리 사신총 외형 실측도는 오바가 이때 작성한 것이 틀림없다. 다만 보고서에 실린 도면의 이름과 단면선 기호 표시 등이 오바의 필체와 다른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위에서도 살핀 것처럼 1929년에 책을 내면서 일괄로 고친 결과로 여겨진다.
11월 1일이 되면 세키노와 야쓰이가 호남리 사신총의 발굴조사를 감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천리에서 천왕지신총과 검산 고분을 조사했던 세키노가 호남리 사신총의 발굴 현장에 도착한 것이 11월 1일이며, 이를 통해 세키노가 자리를 비운 발굴현장에서 오바가 현장감독의 일을 대신 수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호남리 사신총의 굴착에 동원된 한국인 인부는 8명이며, 첫날 굴착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11월 2일에는 연문의 문미석이 확인되어 그 문미석을 따라 동쪽으로 굴착해 들어갔으며, 이때 동원된 인부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8명이었다. 최근 활자화된 『세키노 다다시 일기[關野貞日記]』를 참고하면 11월 3일은 황태자의 식일이었기 때문에 작업을 쉬었다고 한다(關野貞硏究會編, 2009). 황태자의 식일이란 훗날 쇼와[昭和]천황이 되는 메이지[明治]천황의 손자 히로히토[裕仁]가 황태자로 책봉된 날을 의미한다. 11월 4일부터는 노모리가 호남리 사신총의 발굴을 감독하였다. 전날까지 문미석으로 생각하고 조사를 진행하였으나 이것이 연도부의 입구를 막은 돌이라는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작업 방침이 약간 변경되었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겨우 연도 안의 상부 2척 정도까지 토사를 제거할 수 있었다. 이때 현실에 벽화가 있음을 인지한 기술이 처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연도부를 굴착하는 과정에서 연문의 상부에 드러난 틈새로 인부를 들여보내 현실 안을 살폈을 가능성이 있다. 이날 작업에 동원된 인부는 6명이다.
圖 50_호남리 사신총 분구도(오바 작도)
圖 51_호남리 사신총 석실 실측도(오바 작도)
圖 52_호남리 사신총 전경(남쪽에서)
圖 53_호남리 사신총(서쪽에서)
圖 54_기단석 노출 상태 1
圖 55_기단석 노출 상태 2
圖 56_기단석 노출 상태 3
圖 57_분구 기저부 부석 노출 상태 1
圖 58_분구 기저부 부석 노출 상태 2
圖 59_분구 기저부 부석 노출 상태 3
圖 60_현문 폐쇄 상태
圖 61_현문 상태(2006년 김광섭 촬영)
圖 62_연도 폐쇄부 노출 상태
圖 63_현문과 남 벽면 상태
圖 64_현문 개방 상태
圖 65_현실로 옮겨진 석비(2006년 필자 촬영)
圖 66_모줄임부 상태
圖 67_모줄임부 현재 상태(2006년 김광섭 촬영)
圖 68_주작(남벽 좌측)
圖 69_현재의 주작 상태(2006년 필자 촬영)
圖 70_주작(남벽 우측)
圖 71_현재의 주작 상태(2006년 필자 촬영)
圖 72_서벽의 백호(1916년 촬영)
圖 73_서벽의 백호(2006년 김광섭 촬영)
圖 74_동벽의 청룡(1916년 촬영)
圖 75_동벽의 청룡(2006년 필자 촬영)
圖 76_북벽의 현무(1916년 촬영)
圖 77_북벽의 현무(2006년 필자 촬영)
圖 78_출토유물 1(금공품)
圖 79_출토유물 2(쇠도끼)
圖 80_다양한 형태의 철못
11월 5일에는 인부를 9명으로 늘여 연도에 찬 나머지 흙을 제거했으며, 6일에는 연도부 정리 작업에 인부 6명을 동원하였다. 1910년 이전에 이루어진 낙랑과 고구려 고분의 발굴조사에서는 연도부가 전혀 조사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조사방법상의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조사일지에는 이날 작업을 오바가 감독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전날까지 감독이었던 노모리는 인부를 데리고 호남리 금사총(토포리 6호)에서 실측작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날은 비로 작업을 중단하였으며 11월 7일과 8일에 걸쳐 오바가 인부 1명을 데리고 실측작업을 실시하였다. 오바가 고분을 실측하는 동안 야쓰이는 11월 9일에 봉토의 외연을 따라 자갈돌이 깔린 사실을 밝혀냈다.
이를 계기로 11월 10일에는 세키노, 야쓰이, 구리야마, 오가와, 노모리, 오바가 모두 모여 전날 발견된 봉분 기저를 따라 돌린 자갈돌을 조사하였으며, 이때 무려 23명의 인부가 동원된 정황이 확인된다. 아마도 다른 고분의 조사에 동원되던 인부를 일시 호남리 사신총의 부석(敷石)조사에 전부 투입한 결과로 이해된다. 세키노의 야장에도 이날 호남리 사신총을 조사했다고 적혀 있다.
이 부석열(敷石列)에 대한 조사는 하루 만에 끝난 것으로 보이며, 그 다음 날은 오바 혼자만 인부를 대동하고 고분의 외부를 실측하였다. 이러한 기술로 보아 호남리 사신총의 도면은 모두 오바가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현장에서의 실측작업은 11월 12일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호남리 사신총의 조사내용은 다이쇼 5년의 보고와 1917년에 발표된 잡지 『국화(國華)』에 게재되었는데, 여기서는 내용이 좀 더 충실한 후자의 원고를 요약하여 우리말로 옮긴다.
호남리의 산 구릉에 있는 큰 고분으로 현실은 방 12척, 천장 높이는 약 10척이다. 4벽은 대리석으로 축조한 것으로 상부로 가면서 약간 내경한다. 천장은 보통 양식으로 먼저 4벽에 2중의 평행내어쌓기를 하고 그 위 모서리에 삼각, 혹은 평삼각모줄임석을 놓아 석실 면적을 크게 줄인 다음 중심석을 얹어서 마무리했다.
현실의 전면에는 연도가 있는데, 측벽 천장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옛날에 이미 발굴(도굴)되어 부장품이 거의 없다. 유일하게 연도부에서 금동 투조첩향의 파편을 발견했고, 현실 바닥에서는 원래 목관에 발라 두었던 칠 파편을 습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의 4벽에는 소위 사신도를 석면 위에 그대로 그려 두었다. 안타까운 것은 벽의 하반부가물의 침식을 받아 그림이 모두 지워져 없어진 점인데 (그 때문에) 상반의 회화만이 분명하게 남았다.
남면 입구의 좌우에는 주작의 그림이 있다. 필치가 거칠며, 머리는 타조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를 그렸는데 형태가 기고웅경, 지난 논문에 언급한 우현리 南塚(강서대묘), 乾塚(강서중묘)의 벽화보다는 매우 오래되었고 비교적 매산리 수총(狩塚)의 벽화와 가깝다. 그 연대는 아마도 약 1,400~1,500년 전의 것으로 판단된다. 북벽에는 현무의 그림이 있다. 거북의 머리는 거의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고 뱀의 머리는 비틀어서 그 후방 거북의 몸을 감고 있는데 이는 흔하지 않은 의장이다. 보통의 현무도와는 전후가 상반된다.
천장에는 어떠한 회화도 그려져 있지 않다. 이 고분은 위치가 아주 좋은 곳이며 규모도 발군이다. 현실의 구조장식이 훌륭하고 추고(推古)한 것이 아마도 고구려시대 국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그 연대는 회화의 양식으로 판단하건데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장수왕에서 멀지 않은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호남리 사신총은 필자가 2006년에 현지를 방문한 바가 있다. 당시의 관찰결과와 보고서에 제시된 사진과 도면을 참고하여 1917년의 보고문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기로 한다. 우선 조사 당시의 봉분 기저는 타원형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 발견된 기저부 부석열의 평면형태가 방형인 것을 보면 원래 고분의 기저도 이와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연도는 정남향이며, 장축은 남북방향이다. 그리고 고분의 전방에서 폭이 45m에 이르는 석축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제단일 가능성이 높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봉분 기저에는 폭 3m 정도의 부석이 봉분 기저의 석축을 따라 방형으로 돌아가며 깔린 상태이다. 이들 석축과 부석열은 『고구려시대의 유적』 도판에서 보는 바와 같이 봉분 기저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축조 당시의 고분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발굴에 착수할 당시 봉분의 남쪽에는 도굴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봉분에는 키가 낮은 잡목들이 자라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사 결과 현실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며, 바닥에는 상면이 평탄하게 조정된 부정형의 돌을 깔아 두었고 그 사이를 석회로 채웠다. 4벽의 기저부는 직선으로 처리되었으나 위로 올라갈수록 곡선형태로 내만한다. 벽면의 축조는 현실로 노출된 면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두께도 균등하게 맞추어 가공한 석재를 6단에 걸쳐 비교적 정교하게 쌓아 올렸으나, 강서대묘와 강서중묘와 같은 정교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천장은 2번에 걸쳐 평행내어쌓기를 한 후 다시 2번 삼각 모줄임을 하고 천장돌을 덮었다. 이 역시 석회로 미장한 것이 아니라 면을 비교적 정교하게 가공한 석재를 쌓아 올린 것이다. 석회는 석재와 석재 사이에만 부분적으로 사용된 상태인데, 벽석과 모줄임석 사이 그리고 모줄임석과 천장석 사이에 석회를 사용한 정황히 비교적 분명하게 관찰된다.
현문에는 돌을 깎아서 만든 문턱이 바닥보다 한 단 높게 만들어졌고 이맛돌도 연도의 천장보다 한 단 낮게 조정되었다. 연도의 바닥에는 현실 바닥과 마찬가지로 상면이 평평한 부정형 돌을 깔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웠다고 하였다. 그러나 2006년에 필자가 확인한 결과 석회로 전면이 미장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북한이 연도에 새로이 문을 달고 보수를 하는 과정에서 연도벽과 바닥에 새로 석회 미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문의 바깥에는 돌로 된 쌍바라지문이 달려 있었다. 물론 도굴로 인하여 문의 상부가 파괴된 상태였지만, 1916년 발굴 당시에는 아래쪽 좌우 장부 구멍에 석비의 축이 안정감 있게 박혀 있는 상태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2006년에 확인한 결과 석비는 파손되어 완전히 제자리를 잃고 현실의 왼쪽 구석켠에 포개져 있었다. 돌문에는 문미석에 설치된 축혈(장부 구멍)이 문지방의 축혈보다 현실에 더 가깝게 설치되었기 때문에 문짝은 자동으로 닫히게 된다. 연도의 바깥에도 바닥에 낮은 턱이 마련되고 같은 지점의 연도 천장석이 높아지는 부분이 있는데, 1916년에는 여기에 축이 없는 두꺼운 판석이 기대어져 있었다. 그 바깥쪽에도 원래 폐쇄석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도굴되면서 모두 치워진 듯하다. 오바가 그린 호남리 사신총 도면에는 연도 벽면의 돌들이 표현되지 않았다. 원래 전체적으로 석회로 미장되었던 면이라고 의식했던 결과가 반영된 표현으로 보이는데, 2006년에 현지에서 관찰한 결과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간 회미장의 아래로 제법 두께와 높이를 맞춘 돌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정황을 확인했다.
호남리 사신총에서는 머리가 도금된 관정 9점, (주조)철부 1점, 철창 1점, 금동 금구편, 금동투조 식금구 1점, 그 외 목관에서 떨어진 칠편 등이 발견되었다

호남리 금사총(토포리 제6호)

호남리 사신총 아래에는 2기의 고분이 연접하며 그 아래로 약간 떨어져 또 하나의 고분이 조영되어 있다. 현재 북한에서는 이를 순서대로 2호, 3호, 4호라고 하는데 4호가 바로 금사총(金絲塚)이다. 금사총은 1916년의 발굴에서 토포리 6호로 불렸으나, 토포리 5호를 호남리 사신총으로 바꾸어 불렀듯이 토포리 6호 또한 출토유물을 의식하여 금사총으로 이름을 바꾸어 보고서에 기재하였다.
토포리 6호, 즉 금사총에 대한 발굴조사는 1916년 10월 31일에 개시된 것으로 확인되는데 구리야마[栗山]가 인부 1명을 동원하여 먼저 외형을 실측하였다. 11월 1일에는 굴착작업을 개시하여 오전 중에 연도 입구를 발견하였고, 같은 날 오후부터는 구리야마와 노모리[野守]가 금사총의 굴착작업을 감독하였으며, 동원된 인부는 7명이다. 11월 2일은 인부 5명을 시켜 연도 안에 차 있던 흙과 돌을 현실로 출입이 가능한 범위까지 걷어내고, 오후 3시경에 현실 내부로 들어가 바닥을 조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분의 이름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순금제 금사(金絲)를 발견하였다. 토포리 6호의 현실 실측도는 11월 4일에 노모리 겐이 인부 2명의 보조를 받으면서 작성하였다. 즉 고분 분구도는 구리야마가 그렸고 현실 실측도는 노모리가 작성한 것이 된다. 11월 5일은 쉬고 6일에 실측작업이 속개되었으며, 비로 인해 7일 하루를 쉰 다음 8일까지 실측작업이 이어졌다. 다음 날인 9일에는 작업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8일에 실측작업이 끝난 것으로 보인다.
현장에서의 발굴작업이 대충 마무리된 11월 11일 오전 8시경에 세키노와 야쓰이, 구리야마가 평양으로 먼저 출발하였지만 오바, 오가와, 노모리는 현지에 남아서 토포리 6호에서 출토된 유물과 실측도를 정리하였다. 그 다음 날인 12일에 호남리 사신총의 복구작업까지 끝내고 13일 오전에 현장을 떠나 평양으로 향했다.
호남리 금사총 역시 벽화가 없었기 때문에 세키노가 1917년에 『국화』에 실은 논문에는 그 조사내용이 언급되지 않았다. 대신 다이쇼 5년도(1916) 보고서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게재되어 있다.
호남리 사신총의 남남동에 있다. 봉토가 흘려내려 약간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현실 저면에서 분정까지는 높이가 597cm정도이다. 현실은 남쪽으로 면하는데 그 넓이는 동벽에서 310cm, 305cm, 전벽은 267cm, 후벽은 265cm의 크기이다. 높이는 252cm이고 연도는 길이 336cm에 폭이 147cm, 높이는 뒤쪽이 180cm이다. 이 고분은 이미 도굴의 피해를 입어 산란하는 약간의 골편과 철정, 금동, 금구 단편과 금사를 발견했을 뿐이다. 이 고분을 금사총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 출토품에 기인한다.
 
구리야마가 작성한 도면의 봉분 외형을 보면 기저의 평면형태는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이며 상부로 가면서도 그 형태를 유지한다. 고분의 장축방향은 남북이나, 그 중심축이 약간 서쪽으로 틀어졌다. 남쪽으로 달린 연도부는 발굴 전에 이미 도굴로 인한 함몰부가 형성되어 있었다. 작업일지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발굴조사는 봉분의 남쪽을 굴착하여 연도를 확인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내의 폐쇄석 상부를 걷어내고 현실 내부로 인부를 들여보내 정리를 시킨 다음 유물을 확인하고 바로 실측작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연도부 바닥은 두껍게 회다짐이 되었으며 양 벽은 막돌을 쌓아올린 후, 그 위에 넓고 두꺼운 판석을 올려 천장으로 삼았다. 그런 다음 연도 벽면과 천장을 깔끔하게 석회로 미장한 것으로 보인다.
圖 81_호남리 금사총 분구도(구리야마 작도)
圖 82_호남리 금사총 석실 실측도(노모리 작도)
圖 83_호남리 금사총 조사 전 전경
圖 84_모줄임부 상태
圖 85_출토된 금사와 금공품
圖 86_연도부 노출 상태
圖 87_출토된 각종 철제 못
圖 88_금사총 봉토 출토 기와
圖 89_2006년의 금사총(필자 촬영)
圖 90_현재 위성으로 본 호남리 고분군(Google earth)
현실은 벽면과 모줄임면, 천장 등이 모두 석회로 깨끗하게 미장되어 있기 때문에 축조방법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벽면에 석회가 두껍게 발린 다른 고구려 고분을 참고하면 금사총도 큼직큼직한 막돌에 회를 먹여 가면서 벽을 쌓은 후, 그 상부를 모줄임하고 그 위에 천장석을 덮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다음 천장과 벽면 전체에 석회 미장을 한 것이다. 사진을 통해 보면 조사 당시에는 천장과 모줄임면에 미장회가 양호하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사와 장식금구, 원형의 수하식, 다수의 철제 못이 현실에서 출토되었으며 봉토에서는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봉토에서 발견된 기와는 와통에 점토띠를 붙여서 만든 것으로 외면에는 승문타날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중간에 횡으로 돌려진 찰문이 있고 단부에는 깎기흔이 남아 있다. 내면에는 와통에 씌우는 통보를 종방향으로 맞추어 실로 꿰맨 자국이 관찰된다. 즉 형태와 제작기법으로 보아 전형적인 고구려 평와이므로, 색조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아마도 적색일 가능성이 높다.
호남리 고분군의 남쪽 평야지대에도 여러 기의 고분이 분포하는데, 모두 고구려 고분이다. 1916년의 조사보고에는 이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으며 원경 사진이 1장 실려 있을 뿐이다. 2006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연구자들은 이 고분 등을 2002년경에 발굴했다고 하였다. 그 중 가장 남쪽에 있는 고분은 호남리 사신총과 마찬가지로 방형의 구획석과 보도석이 깔려 있었다고 하나 아직 보고서가 제출되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순천군 북창면 천왕지신총

순천군에 고구려 고분이 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14년 무렵이다. 당시 현지인이 이 고분을 도굴하여 출토된 유물을 안주(安州)에 가져가서 팔았다는 소문이 있어 군수인 박상준이 총독부의 내무부장에게 조사를 간청하자, 내무부장이 세키노에게 부탁하여 1916년에 조사가 이루어졌다(關野貞, 1925, 早乙女, 2008). 한편 1917년에 간행된 『국화』에 실린 세키노의 보고문에는 조선총독부 기사인 에비노에게 고분 이야기를 들었다고 적혀 있다. 즉 세키노는 여러 경로를 통해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의 정보를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1916년의 고구려 고분 조사에서 가장 먼저 조사된 것은 순천군의 고분으로 검산동 1호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북창면 송계동의 천왕지신총을 조사하였다(關野貞 資料). 『고구려시대의 유적』에 실린 용암리 고분의 실측도는 1917년에 작성된 것으로 세키노의 필적과는 차이가 있다.
세키노가 1916년도 10월에 작성한 야장(부록 참조)을 참고하면, 10월 24일경에는 대동강면 남안의 낙랑 고분에 대한 발굴작업이 마무리 되었으며, 그 후 26일에는 순천군으로 출발할 계획이었으나 두통과 발열로 포기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다음 날인 27일 오전 6시 40분에는 평양을 떠나 오후 1시 30분에 순천에 도착하였으며, 곧바로 검산동 제1호분을 조사하고 저녁에는 일본인 여관에서 숙박하였다. 10월 28일은 위에서 살핀 것처럼 장수원에서 고구려 고분에 대한 발굴이 시작된 날이다. 이날 세키노는 야쓰이를 데리고 오전 9시에 말을 타고 송계동으로 가서 지신총을 조사하였다. 조사 과정에서는 간단한 메모와 스케치가 이루어졌다. 다음 해에 오바 쓰네키치[小場恒吉]와 오오타 후쿠조[太田]를 보내 도면과 벽화 모사를 추가로 작성할 계획을 세웠다. 조사가 마무리되자 출입문을 설치하고 울타리를 쳐서 보존에 신경을 쓸 것을 권고하였다고 한다.
송계동의 고분은 현실구조가 특이한데다 벽화도 발견된 터라 특별히 세키노의 관심을 끌었다. 그의 야장에 따르면 1916년 이래로 1925년에도 현장을 방문하여 고분을 답사하고 1928년에도 다시 답사하여 고분의 상태를 살핀 사실이 확인된다. 일제강점기의 고적조사에서 세키노가 3번씩이나 현장 조사를 실시한 유적은 손에 꼽을 정도이기에 그가 얼마나 송계동 고분에 주목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17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국화』에는 세키노가 적은 천왕지신총의 조사내용이 간단하게 실려 있으므로 이를 번역해서 요약 소개한다.
이 고분은 북창면의 서방 약 1리, 평야 가운데 고립되어 있는 소총(小塚)으로 다이쇼 3년(1914) 토민(土民)이 그것을 발굴하여 전실의 천장 일부를 훼손하고 현실 내부로 들어갔다.
그 후 수리를 하지 않고 토민이 계속 출입하는 것을 방치하여 벽화가 크게 훼손되었는데 작년 10월 조선총독부의 산림과 기수인 에비노 하라[海老原] 씨에게 이 고분의 이야기를 듣고 (현장에)가서 그것을 조사하고 곧바로 면장에게 명하여 그 입구를 폐쇄하게 하고, 1917년도에 실측도와 벽화 모사를 작성하고 또 완전하게 수리할 것을 총독부에 건의하였다.
무덤의 내부는 현실과 전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면에 연도가 있다. 그 천장의 구조가 기묘한 것은 전혀 (따로) 본 적이 없다. 현실은 장방형으로 동서 278cm, 남북 311cm의 넓이다. 벽의 상부를 팔각형으로 하여 네 모서리에는 일종의 양막을 인접시키는 벽면에서 돌출시켜서 팔각형의 모서리를 만들었다. 상부의 벽을 지탱하는 그 팔각형의 부분은 위로 올라가면서 내만하고 사복상(蛇腹狀)을 띤다. 각 모서리에 두(斗) 및 촌목(寸木)을 내어서 그 위에도 내만하는 사복(蛇腹)을 만들었다. 그 촌목의 아래에는 만장을 그려서 촌목을 받치게 하였다.
상부의 내만상 사복은 그 아래가 팔각형이고 그 위가 다시 방형이 되는데 그 위에는 (고구려 고분에서) 일반적인 모서리에 평삼각상의 모줄임석을 겹친 다음 천장에 중심석을 걸쳐서 마무리했다. 기형의 모줄임을 사면의 사복에서 나오게 하여 그 정점에 두를 올려서 천장 중심석을 받치고 있다. 그 의장이 복잡하고 기발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한다.
사면의 벽에는 귀갑모양을 그려 넣고 각각 깃털 부채와 같은 연화문을 그렸다. 그 수법이 이전에 밝힌 통구의 산성자에 있는 귀갑총과 같다. 후벽에는 주인공 부부(夫妻)를 그렸으나, 심하게 훼손되었다.
제1내만상 사복 안에는 수사 한쌍, 수수조, 봉황, 사슴, 뱀 등을 표현하고 묘출된 복만 안에는 연화운문을 그려 두었다. 제2내만상 사복과 그 위의 천장면에는 日像, 月像 및 星像을 그려 놓았다. 그리고 천장 중심석을 받치는 모줄임 및 상하 내만상 사복의 아래에 걸린 부분에는 기고한 문양을 만들었다.
전실은 좌우로 긴 장방형으로 동서 645cm, 남북 158cm, 그것을 전후해서 걸린 양(梁)을 이용하여 6개의 구획으로 나누고 가운데의 4구는 홍면의 상부를 내만하게 하여 그것으로 좁고 긴 천장을 받치게 하였다. 양(梁)의 위에는 합장을 만들어 그 정부에 두(斗)를 걸쳐 천장을 받치게 하는 형상이다. 게다가 서쪽 단부에는 4면에서 모줄임을 하고 4층으로 만든 다음 천장석을 덮어서 마무리하였다. 동쪽 단부의 구는 교호하는 모서리의 삼각형 모줄임을 만들어 4층을 이루면서 천장석에 이른다. 이러한 벽면 양천장 등에는 회화를 그려 두었지만 지금은 거의 박락되었다. 가옥 같은 것과 용 같은 것을 그려둔 것이 보일 뿐이다.
내가 이 고분을 조사했을 때 일정이 급하여 나중에 완전한 실측도와 모사를 작성할 것을 예상하고 충분하게 정세한 연구를 하지 못했다. 때문에 정확하고 상세한 기술을 할 수 없음이 유감이다. 벽화와 천장에 그려진 도안은 형식으로 판단한다면 북위(北魏) 풍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것으로 약 1,400년 전을 내려오지는 않을 것이다.
 
圖 91_천왕지신총 분구도와 단면도
圖 92_천왕지신총 전실 및 현실 투시도(오바 작도)
圖 93_천왕지신총 실측도
圖 94_천왕지신총 남면(조사 전)
圖 95_천왕지신총 전실
圖 96_천왕지신총 현실 천장 1
圖 97_천왕지신총 현실 천장 2
圖 98_천왕지신총 현실 천장 3
圖 99_천왕지신총 현실 천장 일부
圖 100_천왕지신총 현실 동면 및 동북면 상부 벽화 모사도
圖 101_천왕지신총 현실 동면 및 동북면 상부 벽화 2
圖 102_천왕지신총 현실 동면 상부 벽화
圖 103_천왕지신총 현실 동면 및 동남북면 상부 벽화
圖 104_천왕지신총 현실 모퉁이
圖 105_천왕지신총 현실 북면 벽화
圖 106_천왕지신총 현실 서면 상부 벽화 모사도
圖 107_천왕지신총 현실 서면 상부 벽화 2
圖 108_천왕지신총 현실 서면 상부 벽화 3
圖 109_천왕지신총 현실 서면 상부 벽화 3의 모사도
圖 110_천왕지신총 현실 북면 상부 천왕도
圖 111_천왕지신총 현실 북면 상부 천왕도의 모사도
圖 112_천왕지신총 현실 벽면 문양 1
圖 113_천왕지신총 현실 벽면 문양 모사도
圖 114_천왕지신총 현실 상부 벽화 모사도
圖 115_천왕지신총 현실 상부 문양 모사도
圖 116_천왕지신총 현실 북면 상부 모사도
圖 117_천왕지신총 현실 후면 벽화 모사도
圖 118_천왕지신총 현실 후면 벽화 모사도
圖 119_천왕지신총 현실 북면 상부 벽화 복희여와도
圖 120_세키노의 약측도 1(세키노컬렉션, 동경대학 건축학연구실 소장)
圖 122_세키노의 약측도 3(세키노컬렉션, 동경대학 건축학연구실 소장)
圖 121_세키노의 약측도 2(세키노컬렉션, 동경대학 건축학연구실 소장)
圖 123_세키노의 약측도 4(세키노컬렉션, 동경대학 건축학연구실 소장)
圖 124_조사 후 복원된 천왕지신총
고분의 이름이 최종적으로 천왕지신총이 된 것은 벽화에 천왕(天王)이라고 적힌 귀조를 탄 인물상과 지신(地神)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916년 조사 후 1917년에는 세키노가 계획한대로 오바 쓰네키치가 현장을 다시 찾아 고분의 외형 측량과 석실 실측도를 작성하였다. 『고구려시대의 유적』에 실린 도면이 이때 오바가 그린 도면이다.
‘세키노컬렉션’에도 천왕지신총 관련 자료가 있는데, 1916년도에 세키노가 현지에서 작성한 약측도와 고분 현황에 대한 설명, 그리고 1925년도에 다시 현장을 찾아 작성한 원고 등이다. 즉위에서도 밝힌 것처럼 세키노는 1928년에도 현장을 찾아 고분의 천장을 약측한 것이 분명하다.

선소면 검산동 제1호

선소면 검산동(劍山洞) 1호는 세키노가 1916년에 가장 먼저 현지 조사한 고구려 고분이다. 벽화가 발견된 것이 아니어서 1917년의 발표문에서는 제외되었지만 다이쇼[大正] 5년도(1916년)의 보고에 간단한 기록과 사진 2장이 실려 있다. 보고를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순천의 동남 약 1리에 위치하는 검산 위에 있다. 봉토가 훼손되어 석곽이 노출되고 연도는 입이 열려 있다. 내부는 현실과 전실로 이루어지는데 그 앞에 연도가 있다. 현실은 방형으로 폭이 355cm, 길이 367cm이며, 현실 하방은 흙으로 매몰되어 현재 천장까지 높이는 약 300cm정도이다. 4벽은 모두 막돌을 이용하여 쌓았는데 그 위에 4층의 모줄임석을 내어쌓고 모서리에 삼각으로 혹은 평행하게 모줄임석을 얹었으며 정석(頂石)으로 덮어서 마무리했다. 보통 고구려 고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전실은 장방형이고 폭은 344cm이며 전후 길이는 189cm이다. 그리고 벽의 상부는 비스듬히 안으로 기울여 대석으로 씌웠다. 천장의 높이는 (잔존) 약 182cm, 연도는 길이 197cm이다. 그리고 커다란 돌로 천장을 만들었는데, 현실·전실 및 연도의 벽과 천장의 경우 옛날(축조 당시)에는 모두 석회로 면을 발랐으나 지금은 모두 떨어져 나갔다.
 
圖 125_검산고분 분구도와 단면도
圖 126_검산고분 석실 실측도
圖 127_검산고분 조사 전 전경(세키노컬렉션, 동경대학 건축학 연구실 소장)
圖 128_검산고분 석실 내부(세키노컬렉션, 동경대학 건축학 연구실 소장)
圖 129_세키노 다다시가 그린 검산고분 천장도(세키노컬렉션, 동경대학 건축학 연구실 소장)
圖 130_세키노 다다시가 그린 검산고분 측면도(세키노컬렉션, 동경대학 건축학 연구실 소장)
보고서에 실린 검산동 1호의 사진에는 석실의 상부가 노출된 것과 그 위에 동네 아이들 20여명이 놀러와 사진촬영과 조사현장을 지켜보는 장면이 찍혔으며, 다른 한 장에는 현실 내부의 벽면이 찍혀 있다. 세키노의 표현처럼 표면의 석회가 모두 떨어져나가 부분적으로 석회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는 평양 일원의 석회로 미장한 석실분의 축조방법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준다. 즉 벽석을 쌓는 방법은 호남리 사신총과 같이 두께가 비슷하게 가공된 돌들을 층층이 쌓아 올렸으며, 천장의 모줄임도 정연하게 가공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하게 두께를 맞춘 두꺼운 판석을 이용한 정황이 확인된다.
1917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도면을 참고하면 우선 검산동 제1호분은 장축 방향이 서쪽으로 틀어져서 연도가 서남쪽에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실시된 2차 조사에서도 현실 바닥과 연도부의 토사를 모두 제거하지 않았음을 도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분은 현실과 전실로 이루어진 이실묘로 현실은 거의 방형에 가깝고 전실은 좌우로 긴 장방형이다.
현재 고분의 정확한 위치는 파악할 수 없다.

황산남록 삼실총

장수원역 부근의 고구려 고분에 대한 발굴을 마무리한 세키노는 1916년 11월 13일에 평양으로 돌아와 하루를 쉬고 14일에 진지동으로 출발하여 도보로 용강군을 거쳐 온정리 부근에 도착하여 발굴할 고분을 물색하였다. 그리고 조사단원인 야쓰이, 오바, 오가와, 노모리, 구리야마는 14일 오전 11시에 평양을 출발하여 용강군을 거쳐 저녁 무렵에 온정리에 도착하여 세키노와 합류하였다. 세키노 조사단은 11월 15일부터 낙랑시기의 단장목곽묘인 갈성리 갑분(甲墳)의 발굴과 황산남록의 고구려 고분군에 대한 실측·발굴 작업에 착수한 정황이 확인된다.
삼실총(三室塚)은 노모리의 도움으로 오바가 외형을 실측하였으며, 11월 16일에는 구리야마의 감독하에 인부 5명을 동원하여 발굴과 실측을 동시에 실시하였다. 17일에는 오바가 현장을 맡아 인부를 8명으로 늘려 굴착하였으며, 18일에도 계속해서 현실의 토사를 걷어내는 작업을 하였다. 19일에는 인부를 2명으로 줄여 현실 내의 토사를 계속 제거하였다. 한편 실측 작업도 진행했는데, 주로 오바가 담당했다. 『고구려시대의 유적』에 실린 황산남록 삼실총 도면의 필체로 보아 오바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바에 의한 삼실총 실측은 그 후로도 24일까지 계속되는데, 석실의 내부를 찍은 사진을 보면 실측을 위한 수평선과 수직선이 백묵으로 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성산성에서의 발굴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석실 실측법과 거의 유사한 방법이 동원되었음을 시사한다.
圖 131_삼실총의 분구도(좌부터 서실·중실·동실)
圖 132_삼실총 서실 실측도
圖 133_삼실총 발굴 전 상태
圖 134_삼실총 발굴 모습
圖 135_삼실총 서실 현문 노출 상태
圖 136_서실 모줄임부 상태
圖 137_현실 내부의 시상과 인골
다이쇼 5년도 보고서에는 황산남록의 고분과 삼실총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평안남도 용강읍의 서서북 약 2리에 있는 청룡산은 서서북으로 (줄기가) 이어지는데 황산이라고 칭한다. 황산남록 일대의 땅에는 수백기의 고분군이 산재하는데, 그곳은 용강군 해운면에 속하지만 일부는 서화면에 걸친다. 그 고분은 봉토가 비교적 완존하는 것도 존재하지만 이미 석곽이 노출되어 있는 것이 열 중에서 여덟, 아홉이다.
석곽의 천장 구조는 대별해서 2종으로 나눌 수 있는데,
甲) 천장이 평석 한 장으로 된 것
乙) 천장이 모줄임 된 것
즉 甲은 현실 4벽도 1매석으로 된 것이 보통이지만 乙은 천차만별이다. 또한
1) 현실 4벽이 1매석으로 된 것
2) 현실 4벽이 할석으로 축조된 것
으로 대별되는데 그 천장의 모줄임은
아) 4벽에서 2층 내외의 평행들여쌓기를 하고 모서리 삼각을 두고 그 위에 평삼각을 덮은 다음 천장석을 덮는 것
이) 4벽에서 2층 내외의 모줄임을 내고 삼각의 모줄임을 둔 다음 바로 천장석을 덮는 것
으로 대별된다. 아)는 거의 그 규모가 크고, 이)는 거의 규모가 작으며, 또한 현실 4벽이 1매석으로 된 것은 한 봉토 내에 2곽, 3곽, 많게는 7곽에 이르는 것도 있다.
그러한 종류의 것은 그 구조가 엉성하기 때문에 파괴되기 쉬운데, 4벽이 남은 것, 전·후벽 만이 남은 것, 혹은 전벽만이 혹은 후벽만이, 혹은 모줄임만이 남아 소위 장석(掌石)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것도 적지 않다. 그들의 고분 석곽은 주로 부근의 산에서 재료를 가지고 온 것인데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것이 많다.
 
또 삼실총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황산남록 고분군의 동남단에 있는데 하나의 봉토 중에 3기의 석실이 병열해서 남면한다. 봉토 기저는 동서 약 150cm, 남북 약 120cm의 타원형인데 경사지에 있기 때문에 높이는 후방에서 273cm, 전방에서 364cm, 현실 저면에서 분정까지의 245cm이다.
석실은 삼실이 병렬하는데 남면한다. 서(西) 석실은 현실 넓이가 종 동벽이 191cm이고 서벽은 203cm, 후벽은 121cm, 전벽은 167cm이다. 중석실은 넓이 종동벽에서 194cm, 서벽에서 198cm, 횡 후벽에서 126cm, 전벽에서 138cm, 높이 145cm이다. 동(東) 석실은 현실 넓이가 종동벽에서 206cm이고 서벽은 208cm, 횡후벽은 127cm, 전벽은 167cm이다. 연도는 모두 폭이 좁고 짧은데 높이도 낮고 파괴되어 그 길이는 분명하지 않다. 현실 내에는 부장품이 유존하지 않고 약간의 골편만이 출토되었다.
 
圖 138_삼실총 동실 실측도
圖 139_동실 현실 입구
圖 140_동실 모줄임부 상태
다이쇼 5년 보고와 『고구려시대의 유적』에 실린 사진과 도면을 참고하면 우선 삼실총은 봉분이 동서로 장타원형임을 알 수 있다. 발굴에 착수할 당시 이미 봉분의 석실 천장에 도굴갱이 뚫려 있었다. 발굴조사는 도굴갱을 통해 먼저 연도의 방향을 찾는 작업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봉분의 남쪽을 굴착해서 연도를 확인한 후 개별 석실을 조사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삼실총은 이름 그대로 한 봉분 아래에 3개의 석실이 나란히 배치된 구조인데, 이는 시차를 두고 석실을 추가한 결과가 아니라 처음 축조 시에 석실 3기를 동시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가장 서쪽에 만들어진 석실은 『고구려시대의 유적』에는 명기된 사진이 없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편집과정에서 주기를 잘못한 결과로 여겨진다. 즉 도면과 사진을 면밀히 대조하면 도판 632~634는 삼실총의 중실(中室)이 아니고 가장 서쪽에 축조된 서실(西室)이 분명하다.
작성된 도면과 사진을 검토하면 석실은 전벽(前壁)의 폭이 넓고 후벽이 좁은 평면 형태를 띤다. 석실 벽의 서쪽에 붙여 바닥보다 높게 시상대(관대)가 설치된 것으로 강서대묘나 강서중묘와 같이 비교적 큰 석재를 3~4장 가공해서 깔아 만든 것이다. 시상대 위에는 2개체의 인골이 머리를 남쪽으로 두고 출토되었다. 목관을 놓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토포리에서 석침이 발견된 사례를 참고하면 시신을 시상대 위에 바로 안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벽면은 비교적 깨끗하게 면을 조정한 석재를 조립해서 만들었으며 이음 부위에는 석회를 사용한 것이 관찰된다. 네 벽은 위로 올라갈수록 약간 안으로 경사지는 특징이 있다. 천장은 3단에 걸쳐 평행 모줄임되었는데 모줄임석 사이에도 석회를 먹인 정황이 관찰된다. 천장석은 도면과 사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사 전에 이미 도굴당하여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출입구의 양쪽에 문주석이 서 있고 판석으로 된 문지방석이 설치되었다. 출입구 연도부의 벽도 판석을 가공하여 만들었으나 도괴되어 축조시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도면은 중앙 연도식으로 그려졌으나 사진을 자세히 살피면 우편재에 가깝다. 현문 위에는 두꺼운 판석이 덮여져 있다.
圖 141_삼실총 중실 실측도
圖 142_삼실총 중실 입구
圖 143_삼실총 중실의 현실 상태
圖 144_삼실총 중실 모줄임부 상태
중앙부의 석실도 서실(西室)과 유사한 구조이다. 발굴은 연도와 현문을 확인해서 석실을 정리하는 순으로 진행되었다. 현문에는 판석을 세워 만든 문지방이 있고 1매의 판석을 세워서 만든 문주석이 현문의 양쪽에 잘 남아 있다. 현문은 우측으로 약간 편재되었으며 두꺼운 판석을 가공해서 문미석으로 삼았다. 석실 내부는 후벽(後壁)이 좁고 전벽(前壁)이 넓은 구조이며 바닥에는 깨끗하게 가공한 넓직한 판석을 2~3매 눕혀서 시상대(관대)로 삼았는데 그 위에서 인골편이 출토되었다. 벽석은 각각의 벽을 커다란 판석 한 매씩을 가공하여 위가 안으로 약간 기울어지게 결구시킨 다음, 3단 정도 평행모줄임을 하고 뚜껑돌을 덮었다. 석실을 결구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석회가 사용된 정황이 확인된다. 조사 당시 천장석은 도굴로 훼손된 상태였다.
동쪽의 석실 역시 후벽이 좁고 전벽이 넓은 것으로 연도는 중앙에 달렸다. 바닥에 돌을 깔았던 정황은 도면과 사진을 통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며 관대를 놓았던 흔적도 없다. 석곽의 사방벽은 면이 가공된 큰 판석을 한 매씩 조립해서 만들었는데 상하가 직선적이다. 천장은 우선 3단 정도 평행모줄임을 하고 삼각모줄임을 하지 않은 채 바로 천장석을 덮은 구조로 나머지 석실과 동일하다. 현문에 턱은 없으나 판석으로 된 얇은 문주석이 있고 두꺼운 석재로 된 문미석을 덮었다. 출토 유물은 없다.
삼실총의 서쪽 석실에서 2개체 분의 인골이 나온 것으로 보아 석실 하나에 피장자 한 명씩을 묻기 위해 고안된 고분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나의 봉토를 사용하지만 석실 하나 하나가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매장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소형 석실분이지만 중·대형의 고구려 석실의 축조방법이 비교적 충실하게 반영되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최근 임진강 유역에서 중소형의 고구려 봉토 석실분의 보고 사례가 늘고 있지만 정작 구조적으로 고구려 석실임을 입증할 근거가 부족한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산남록 삼실총의 구조는 크게 참고가 된다.

황산남록 이실총

이실총(二室塚)은 석실이라기 보다는 짧은 연도가 달린 석곽 2개를 병렬시켜 축조한 것이다. 이실총에 대해서는 조사일지에 별다른 기록이 없다. 소형 파괴분이기 때문에 작업에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1월 25일에 오바가 실측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실측 당일 간단하게 굴착해서 석실 내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조사를 끝낸 것으로 추측된다.
다이쇼 5년도 보고서에는 이실총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삼실총의 서서남에 접근해 있는데 현실의 천장은 낙하해서 겨우 4벽의 판석이 남아 있을 뿐이다. 2실이 상접해 있는데 격벽은 공통으로 사용하는 1장의 판석으로 이루어진다. 동방의 현실 내에서는 목관에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철못이 발견되었다.
 
圖 145_황산남록 이실총 실측도
圖 146_황산남록 이실총 노출 상태
圖 147_황산남록 이실총 노출 상태
즉 이실총은 삼실총과 달리 격벽을 공통으로 사용하는 두 개의 석곽이 연접하는 구조인데 석실이라기보다는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석곽에 가깝다. 석곽의 바닥에는 어느 정도 면이 있는 판석과 막돌을 조합하여 깔았고 벽은 몇 장의 판석을 겹쳐서 조립하였다.
서곽은 바닥 시설이 분명하지 않으나 서쪽에서 구획된 석렬(石列)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관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쪽 바닥면에 경사지게 누워 있는 판석은 원래 서벽으로 사용된 판석이 쓰러진 것으로 추측된다. 후벽은 남아 있지 않으며, 전벽은 얇은 판석을 세워서 만들었다. 중앙 격벽 쪽으로 약간 치우치게 판석을 양쪽으로 세워서 입구를 달아냈는데, 짧게 달리는 것을 참고하면 횡혈식이 아니고 횡구식 석곽으로 분류할 수 있을 듯하다.
동곽 역시 판석을 세워서 곽을 만들었다. 서곽과 달리 후벽이 남아 있고 동벽에도 여러 장의 판석을 세워 공간을 만들었다. 남쪽으로 달린 전벽(前壁)은 격벽(隔璧)에 붙여 만든 한 장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동벽과의 연장선과 격벽에 가까운 곳에 판석을 세워 달아서 입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현문도 판석으로 폐쇄했다.

황산남록 칠보총(칠실총)

칠보총(七寶塚)은 석곽 7기가 한 봉토 내에 열을 지어 축조된 것이라 붙인 이름인데, 조사일지에는 칠실총이라고 적혀 있다.
1916년에 실시된 황산남록의 고구려 고분 발굴조사에서 가장 먼저 발굴된 고분이 칠보총이다. 조사일정을 살피면 11월 14일에 온정리에 도착한 다음 15일에 낙랑 목관묘인 갈성리 갑분의 조사에 착수하는 것과 동시에 칠보총 발굴을 실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조사단을 나눈 것이다.
일단 11월 15일에 구리야마가 고분의 외형에 대한 측량을 실시하였고, 16일에는 인부 5명을 동원하여 발굴을 진행시키면서 동시에 실측작업을 했다고 기록되었다. 17일에는 인부를 8명으로 늘려 굴착하고 18일에는 각 현실에서 흙을 들어내면서 한편으로는 실측작업을 하였다. 조사 중에 동쪽으로 5번째 석곽에서 토기가 발견되었고 이를 구리야마가 수습한 것으로 확인된다. 19일에는 인부를 4명으로 줄여 현실 내부의 흙 제거작업을 계속하면서 한편으로는 실측작업을 하였다. 20일에는 현실 내부에 대한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는지 인부 1명만을 데리고 실측한 정황이 확인되는데 이는 21일까지 이어진다.
22일에는 구리야마가 남부지역의 조사를 위해 먼저 현장을 떠나는 바람에 노모리가 남아서 실측작업을 마무리했다. 순천지역을 답사하던 세키노가 황산남록의 발굴 현장에 도착하는 것도 이 날이다. 23일에도 계속된 노모리의 칠보총 실측작업은 24일 오전이 되어서야 마무리된다. 그리고 25일에는 황산남록의 굴착된 고분을 전부 복구하는 작업을 실시하는데 이날 동원된 조선인 인부는 39명이나 된다.
황산남록의 칠보총에 대하여 다이쇼 5년도 보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산남록 삼실총의 서서북에 있다. 현재 봉토의 크기는 동서 19m 70cm, 남북 10m 60cm, 현실의 바닥에서 분정까지 약 106cm, 현실 천장은 없어지고 4벽의 정부가 노출되어 있다. 하나의 봉토 안에 7개의 석곽이 있다. 오른쪽 3개의 석곽은 격벽을 공유하고 있다. 중앙의 석곽은 독립된 1실로 좌측의 3석곽은 서로 격벽을 공유하고 있다. 현실의 넓이는 아래에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
제1실(가장 오른쪽):종-197cm, 횡-112cm
제2실:204cm, 143cm
제3실:220cm, 100cm
제4실:211cm, 137cm
제5실:200cm, 132cm
제6실:188cm, 136cm
제7실:189cm, 111cm
제3실에서는 철정, 단경호, 청동제 금구가 발견되었다.
 
칠보총은 동서로 긴 타원형의 분구에 7개의 석곽이 나란히 병렬한 고분이다. 언뜻 7개의 석곽이 한꺼번에 조영된 것 같기도 하지만 다이쇼 5년(1916년)의 보고에서 이미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 서쪽에 있는 3기의 석곽이 2장의 격벽을 사이에 두고 같이 만들어졌으며, 동쪽에도 2장의 격벽을 사이에 두고 3개의 석곽이 동시에 만들어져 있다. 동·서 양단의 3곽 사이에는 1개의 단곽이 따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들 모두는 남쪽으로 출입구가 달리면서 일렬로 늘어선 상태이다.
圖 148_칠실총 분구도
圖 149_칠실총 석실 실측도
圖 150_황산남록 칠실총 남면
圖 151_황산남록 칠실총 서남면
圖 152_황산남록 칠실총 제1곽부터 제4곽 정면
圖 153_황산남록 칠실총 제1곽부터 제4곽 좌측면
圖 154_황산남록 칠실총 제1곽 정면
圖 155_황산남록 칠실총 제2곽 정면
圖 156_황산남록 칠실총 제3곽 정면
圖 157_황산남록 칠실총 제4곽 정면
圖 158_황산남록 칠실총 제3곽 출토 단경호
圖 159_황산남록 칠실총 제3곽 단경호 출토 광경
圖 160_황산남록 칠실총 제5곽부터 제7곽 우측면
圖 161_황산남록 칠실총 제5곽부터 제7곽 정면
圖 162_황산남록 칠실총 제5곽 정면
圖 163_황산남록 칠실총 제5곽 출토 철경
圖 164_황산남록 칠실총 제5곽 출토 청동 식금구와 기타유물
圖 165_황산남록 칠실총 제5곽 출토 철편 3개
圖 166_황산남록 칠실총 제6곽 정면
圖 167_황산남록 칠실총 제7곽 정면
이 7개의 석곽이 동시에 축조된 것인지 아니면, 3곽, 1곽, 3곽이 추가로 만들어지면서 최종적으로 하나의 봉토를 이루게 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중앙곽이 서쪽으로 치우친 상황으로 보아 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는 보고문과 마찬가지로 가장 동쪽에 있는 석곽부터 1호 석곽이라고 한다. 1호 석곽은 2호와 격벽을 공유한다. 판석으로 벽을 만들고 출입구를 오른쪽 벽에 치우쳐서 만든 횡구식 석곽의 구조이다. 격벽에 판석을 횡으로 대고 그 바깥에 돌을 쌓아서 출입구로 삼았다. 바닥에는 서쪽으로 붙여서 돌을 쌓아 시상을 만들었다.
2호곽은 바닥 전면에 평평한 돌을 깔았고 판석을 세워서 벽을 만들었다. 현문에는 1호와 마찬가지로 턱이 없고 문미석 등도 남아 있지 않다. 출입구 역시 1호와 마찬가지로 오른쪽으로 치우쳐 달렸다. 3호 역시 1, 2호와 마찬가지 구조의 횡구식 석곽인데 1호와 마찬가지로 서벽에 붙여서 시상대를 만들어 둔 것이 특징이다.
이들 석곽은 그 크기로 보아 석곽 1기에 한 사람씩 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나 인골이 출토되지 않아 분명하지 않다. 중앙의 단독 석곽 즉 제4호분 역시 그 구조는 거의 유사한데 다만 시상대가 따로 마련되지 않고 2호와 마찬가지로 바닥 전면에 상면을 평평하게 손질한 돌을 깔았다.
5, 6, 7호곽은 역시 2장의 격벽을 공유하면서 3곽이 같이 축조된 것이다. 다만 1∼4호와는 달리 출입구 시설이 남아 있지 않다. 서벽에 붙여서 부정형이지만 상면을 평평하게 다듬은 돌을 깔아서 시상으로 삼았다. 이 중 5호곽에서는 평저 단경호가 출토되었는데 기형은 물론 소성도나 태토의 성격 모두가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이다.

황산남록 제4호분

황산남록의 삼실총, 이실총, 칠보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는 제4호라고 불렀던 고분과 석총이라고 현장에서 명명했던 고분을 같이 발굴했었던 기록이 일지에 남아 있다.
황산남록 4호는 11월 16일에 노모리가 인부 1명을 동원하여 발굴하였으며, 17일에는 인부를 5명으로 늘려 조사했으나 18일이 되어 고분의 파괴 정도가 심한 것이 확인되어 발굴을 중지했다고 한다.

황산남록 석총

11월 19일에는 석총(石塚)이라고 불리는 고분을 발굴하였다. 노모리는 우선 인부를 데리고 실측을 시도했으며 20일과 21일까지 발굴을 계속하였다. 인부 1명을 데리고 실측을 했다는 기록은 22일까지만 적혔을 뿐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한 기술은 없다.
다이쇼 5년도 고적 보고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었다.
황산남록 고분군의 중동부의 북방 즉 산허리에 있다. 화강암의 거대한 판석으로 현실을 만들었다. 분묘의 봉토는 흘러내려 석곽이 노출된 것이다. 지금 좌우의 측벽은 완존하는데 천장석을 덮어 소위 장석의 형태를 띤다. 좌우의 측벽을 구성하는 돌의 길이는 212cm, 높이는 139cm 정도이고 두께는 45cm이다. 좌우측벽 내면의 간격은 91cm 천장석의 길이는 297cm, 폭은 221cm이고 두께는 50cm이다. 부장품 등은 잔존하지 않는다.
 
황산남총의 석총에 대해서는 『고구려시대의 유적』에 사진과 도면이 수록되지 않았다. 반면 다이쇼 5년도 보고에는 몇 장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이를 장석이라고 한 것을 보면 지석묘와 유사한 성격의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두꺼운 천장석을 바로 받치고 있던 측벽만이 남고 양단벽의 석제가 빠져 나가서 생긴 결과이다. 사진을 통해 보면 굴착한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고용된 인부에게 갈퀴로 청소를 시킨 다음 도면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시족면과 황산의 고분에 대한 조사내용을 기술한 후 세키노는 복명서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양 고분은 모두 고구려시대의 것으로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한 후, 멀지 않은 시대부터 조영하기 시작하여 특히 호남리 사신총과 토포리 대총과 같은 것은 당시 유력자의 대표적인 능묘가 된다. 또 벽화가 있는 호남리 사신총과 노산리 개마총과 같이 그 벽화에 의해서 분묘의 조영연대를 정할 수 있기 때문에, 대성산성과 전 안학궁지의 연대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황산 남쪽의 고분군은 대체로 장수왕의 천도 후에 고구려의 멸망까지 24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되는데 분묘 각종의 구조를 특징지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세키노조사단의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3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