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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보산성; 최진보관음각산성(催陣堡山城; 催陣堡觀音閣山城)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864
  • 위치(출토지)
    遼寧省 鐵嶺市 鐵嶺縣 李千戶鄕西催村(催陣堡鄕)
  • 지역
    철령(鐵嶺市)
  • 유형
    성곽>산성
  • 형태사항
    동서 길이 2㎞, 남북 너비 1.5㎞, 전체 길이 5,032m(조계림, 왕철군 1994)│직선거리로 동서 길이 1,500m, 남북 너비 1,100m, 성벽의 전체 길이 5,202m(주향영, 왕조화 1996) 
출토지
요녕성 철령시 철령현 이천호향서최촌(최진보향)(遼寧省 鐵嶺市 鐵嶺縣 李千戶鄕西催村(催陣堡鄕))
연대
4세기 중반 전후(여호규, 1999)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83철령시박물관
(鐵嶺市博物館)
여러 차례 지표조사를 실시하였음. 『요녕문물』에 발표함. (曹桂林·裵躍軍, 1983, 「鐵嶺東南部的兩座古代城址」, 『遼寧文物』, 1983-4)
1985철령시박물관
(鐵嶺市博物館)
1985년 7월 15일 철령시 문물보호단위(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 12월 20일 요녕성 문물보호단위로 공포됨.
1992~1003 주향영(周向永), 왕조화(王兆華)에 의해 여러 차례 조사를 진행, 기존 발굴 작업의 기초위에서 비교적 비중있는 유적을 새로 발견하였음. 발표는 1996년에 이루어짐(周向永·王兆華, 1996, 「遼寧鐵嶺市催陣堡山城調査」, 『考古』1996-7).
구조특징
포곡식 산성임.
조계림(曹桂林), 왕철군(王鐵軍)의 1994년의 조사내용에 따르면, 성벽은 구불구불하여 해발 260m의 산골짜기 둘레의 산등성이에 있음. 지세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음.
평면형은 불규칙한 장방형임. 산성의 성벽은 산맥의 가파른 절벽을 충분히 이용하여 산세를 따라 돌을 쌓아 수축하였음. 지세가 낮을수록 성벽은 높아짐. 성벽은 산등성이 바깥에 지세가 좀 낮아진 곳에 쌓고 산세의 기복에 따라 축조하였음. 축조재료는 부근의 산돌을 이용하여 수축하였는데 성돌의 크기는 같지 않으며 틈을 눌러 쌓는 방법을 채용하고 일부분은 표면을 가공하였음. 성벽 기초는 가장 넓은 것은 약 3m이고 잔고 약 5m임.
성의 내측에 5~8m 너비의 마도(馬道)가 벽을 따라 돌고 네 모퉁이 야간 높은 곳에 흙을 쌓은 것이 있는데 그 당시 망대시설로 추정됨. 성문은 남쪽과 북쪽에 2개가 수축되었음. 북문은 북쪽 산마루 서측에 위치하고 남문은 산골짜기 서부에 위치함.
문의 동측은 성내에서 지세가 제일 낮은 곳으로써 여기에 인공으로 수축한 높이 약 12m, 길이 약 40여m의 토벽이 골짜기에 가로놓여 있어 현지 사람들은 “관문산(關門山)”이라고 칭함.
성내의 두도구(頭道溝), 이도구(二道溝)의 양지쪽 비탈과 산마루에 방형, 과저형(鍋底形)의 큰 흙구덩이들이 많이 있음. 구덩이 직경 5~10m로 같지 않고 깊이 약 1m임. 현지 사람들은 보통 “고려갱(高麗坑)”이라고 칭하며, 이는 군사 용도의 반지혈식 건축유적으로 추정됨.
조향영, 왕조화의 1996년도 조사에 따르면, 최진보산성은 불규칙한 장방형으로 엄지손가락을 편 손바닥 모양과 흡사함. 산성의 지세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음. 성문 2곳(남문과 북문), 방수 제방(攔水堤壩)과 배수구(洩水口), 굴(石洞), 저수지, 각대 8개, 건물지 및 성벽 바깥의 참호와 석벽 등 보조 방어시설이 부분적으로 조성되어 있음. 성내에 남문과 북문을 연결하는 길(通道)이 있어 이 길을 경계로 동부와 서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며, 양 측에 산언덕(山岡)이 동서 대칭 분포한 모양을 띰. 성내에 샘물(水泉)이 여러 곳 있으며, 모두 언덕(골짜기) 사이의 웅덩이(洼地)에서 발원하여 저수지를 경유, 배수구(洩水口)를 지나 남쪽으로 범하(汎河)에 유입됨. 성내 중앙부의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 청대(淸代)의 “관음각” 이 있음. 이런 연고로 이 성을 “관음각산성”이라고도 부름.
성벽은 토축 성벽과 석축 성벽 두 종류가 있음. 토축 성벽 구간은 산성의 남쪽에 대부분 분포해 있으며, 대체로 성벽 유적이 뚜렷하게 잘 남아있음. 석축 성벽 구간은 오로지 북벽의 보존 상태가 좋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허물어졌음. 북벽 외측, 일부 성벽 구간에서 석괴더미가 흩어져 있는 것이 산견되며, 석괴 돌더미와 돌을 사용하여 쌓은 석벽은 성돌의 규격이 서로 유사하고, 원래 벽체가 허물어진 곳이기 때문에, 성벽 바깥의 치(馬面) 흔적일 것으로 추정됨. 다만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은 성벽 구간 아래에서 이러한 흔적이 보임. 성벽은 모두 산등성이 바깥측에 축조하였으며 성벽 꼭대기의 높이가 산등성이와 같거나(平齊) 혹은 산등성이보다 약간 높음. 토축 성벽은 대체로 완만한 비탈이나 혹은 비교적 낮은 산정에 다져 축조하였음. 석벽은 비교적 가파르고 험준한 산등성이에 쌓아올렸음. 실측에 따르면 성벽의 전체 길이는 5,202m임.
성벽의 남벽은 모두 토축임. 서쪽 기점 해발 182.2m부터 동쪽으로 해발 193m까지에 이름. 남벽의 남쪽은 험준하고 가파른 벼랑(山崖)에 닿아있으며, 벼랑 아래는 범하인데, 현존 높이(存高)와 너비는 평균 1m 정도임. 남쪽이 범하(汎河)와 닿아있는 까닭에 맞은편의 강 연안은 개활한 지대이며, 또 전체 성곽에서 가장 낮은 곳에 속함. 남문과 암문, 배수구(洩水口)등 중요한 유적이 이 구간의 성벽상에 분포해 있음.
동벽의 전체 길이는 1,600m임. 남쪽의 해발 193m 지점에서부터 북쪽으로 해발 229.8m 지점까지, 다시 북으로 200m 더 간 모퉁이(轉角)까지가 동벽에 해당됨. 동벽에서 다만 남쪽 100m 길이의 성벽 구간은 토축 성벽이며, 나머지는 모두 돌을 쌓아올린 석벽임. 산세의 기복이 심하고 구불구불하여, 벽체의 뻗어나간 모양 역시 율동적인데, 이러한 산세의 원인으로 동벽의 중부 벽체 구간은 동쪽 해발 344.7m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 뻗어있고 또 이곳 봉우리에서 북쪽으로 꺾여서 성벽이 삼각형의 돌출(凸) 부분을 형성케 하였음. 동벽의 축조방식은 다음과 같음. 이 구간의 성벽의 무너진 단면상에서, 석벽 표면이 비교적 장방형이거나 혹은 머리 부분이 크고 꼬리부분은 작은 쐐기형(楔形石)의 돌을 쌓아올린 것을 볼 수 있으며, 일부 표석(表石)이 떨어져나간 성벽 구간은 속(墻芯)이 드러나 있고, 벽체 내벽은 산의 몸체를 의지하였으며, 내외 벽체 사이에는 규격이 동일하지 않은 산돌(山石)을 채워 넣었으며, 간삽(干揷)방식을 채용하여 석벽의 겉과 안이 일체 되었음. 해발 251-313.1m 사이의 길이 300m 성벽 구간에는 산세가 가파르고 험해서 벽체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석벽 중간에 길쭉한 납결석(拉結石)을 끼워 넣었음. 5m정도 간격으로 설치하였는데, 납결석과 벽체의 각도는 90도이며, 벽체 기단부터 꼭대기까지 켜켜이 쌓았음(分層放置). 북문에서 1,311m 떨어진 곳의 동벽 북쪽 구간에서, 성벽내 석구(石溝)유적이 보임. 구덩이는 성벽과 회곽도[마도(馬道);반도(盤道)] 사이에 굴착되어 있으며, 회곽도[마도; 반도] 가장자리(邊緣)에 기대여 있음. 성벽과 평행되게 뻗어있음. 석구는 명백히 인공적으로 다듬어 수정을 거치지 않았으며, 자연암석으로 벽(溝壁)을 만들었음. 커다란 암석을 만나서 뛰어넘어 다시 가면, 석구가 간헐적으로(단속적으로) 있음. 산등성이가 비교적 좁아서 혹은 암석이 들쭉날쭉하여 구덩이(溝)를 다듬기 어려워 성벽내측 가까이에 구덩이(溝)를 만들었음 이 구덩이 구간에서 가장 긴 구간 하나는 43.5m, 가장 넓은 곳 1.7m, 깊이는 0.5~0.8m 사이임. 석구는 동벽 북단의 끝점에서 성 바깥으로 뚫고 나와, 성벽에 트인 곳(豁口)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종류의 형태가 동벽 두 곳에서 모두 발견되었음. 이 밖에, 동벽 중간 구간에서 역시 트인 곳(활구)이 3곳 보이는데 트인 곳의 너비는 5-8m, 트인 곳 바깥 양측에 석괴 더미가 흩어져 있음. 해발 344.7m와 251.3m 봉우리 사이 석벽 바깥측에서 한 길의 외호(外壕)유적(석벽 바깥측의 참호)이 발견됨. 해발 313.1m 고점 서측 성벽 트인 곳에 돌을 쌓아 만든 건물지 한 곳이 있음(J3).
북벽은 동쪽으로 산성의 동북 모퉁이에서 서쪽으로 해발 316.4m의 각대(角臺)까지로, 북문을 기점으로 동서 두 구간임. 보존상태 : 북벽 서단은 보존상태가 좋으며, 현존 성벽의 높이 8m임. 북문 가까이 한 구간의 성벽은 겉면에는 돌을 쌓아 올렸고, 안에는 흙을 채워넣은 축조방식임. 북문에서 180m 떨어진 서단의 성벽 내측에 석축 건물지(J2)가 있으며, 서북각대 바깥측에서 참호(外壕) 유적이 발견됨. 회곽도[마도;반도] : 북벽내 서북 각대에서 J2 건물지까지 한 구간에 회곽도[마도;반도] 유적이 특히 뚜렷함. 동단 중부 성벽 꼭대기에 돌구멍(石柱洞) 하나가 남아있음. 길이는(邊長) 0.4m, 깊이는 0.5m임.
서벽은 해발 316.4-182.2m 두개의 산봉우리 사이의 성벽 구간이고 전체 길이는 700m임. 석축 성벽 구간이 대부분이며, 성벽이 허물어진 정황이 비교적 심함. 성벽의 기초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산발적으로 남아있는 잔돌(碎石) 띠로 보아 서벽 방향임을 판단할 수 있음. 남단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한 구간은 길이 130m, 현존 높이 1.2m, 너비 1m임. 무너져 흩어져있는 성돌로 보아 산등성이의 낮은 오목한 곳에는 원래 석벽을 비교적 높게 쌓았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하므로써 양측의 성벽의 높이가 같도록 하였음. 서남 각대에서 북쪽 100m 되는 곳에 성벽이 트인 곳(豁口)이 하나 있음. 트인 곳(豁口)의 바깥으로 각대의 참호(溝壕)가 접해 있고, 안으로는 회곽도와 접해 있음. 이 구간의 성벽 남단 외측에 한 구간의 석벽 유적이 발견됨.
산성 성벽내외에서 모두 3곳의 건물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석축으로, J1~J3으로 편호하였음.
서벽의 남쪽 구간과 중간 구간의 성벽 바깥에 또 참호(外壕)와 석벽 유적이 발견됨. 참호(外壕)는 서남 각대 바깥 비탈에서 시작해서 각대를 둘러싸면서 산세를 따라 북쪽으로 뻗어나가다가 臺 아래 북측의 성벽 트인 곳(豁口)에 성문 회곽도[마도;반도]와 서로 접해 있음. 이 구간의 참호(外壕) 길이는 82m, 너비 1.2m, 깊이 1~1.5m임. 유사한 참호(外壕)가 북벽 서쪽 구간에 있으며, 동벽 중간 구간의 성벽 바깥에서도 발견됨. 북벽 바깥의 참호(外壕) 길이 50여 m, 동벽 바깥의 참호(外壕) 길이 200m, 너비 약 1m 정도임. 산성 바깥 석벽은 서벽 남쪽 구간의 벽체 바깥 300m 지점에서 발견되며, 이 구간의 석벽 가운데에 빈틈(間空)이 있는데, 동서 두 구간으로 갈라짐. 동쪽 구간의 석벽은 벽체 아래의 골짜기(溝谷) 방향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데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偏東北) 방향임. 서쪽 구간의 벽체는 동서 방향으로 축조하였음. 서쪽 구간의 석벽의 중부 북측에 원형의 대지(臺址)가 하나 있음. 대면(臺面)은 다져 정리하였으며 특별히 평평한데(平坦), 골짜기(谷口)의 병졸이 주둔하는 基址를 수호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석벽 유적(外墻)과 참호(外壕)는 골짜기(溝谷)의 양측에 위치해 있는데 이러한 종류의 분포 상태는 골짜기(溝谷)에서 성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역사적 의미
유적의 시기에 관해서는 고구려 조기에 해당한다는 의견,(진대위, 1995), 고이산성 직후에 축조하였다는 의견,(왕면후, 1999), 고구려 4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기의 유적이라는 의견(여호규, 1999) 등이 있음.
유적의 규모에 관해서는 동서 길이 2㎞, 남북 너비 1.5㎞, 전체 길이 5,032m라는 보고(曹桂林, 王鐵軍 1994)와 직선거리로 동서 길이 1,500m, 남북 너비 1,100m, 성벽의 전체 길이 5,202m(周向永, 王兆華 1996)라는 수치가 있음.
최진보산성에 대한 이름(城名) 고증에 관하여, 이미 발표한 자료 중에, 왕면후(王綿厚)의 남소성설(南蘇城說)이 있음. 남소성은 고구려의 중요 성지로 여러 차례 목저성(木抵城), 창암성(蒼巖城)과 함께 나란히 사서에 보이며, 그 위치가 목저성, 창암성 두 성과 비교적 지근 거리에 있는 성으로 역사가들은 대체로 남소성을 지금의 소자하(蘇子河)와 혼하(渾河)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했다고 생각하여, 이 설을 따름(왕면후, 1990).
고구려 금산성(金山城)설이 있음. 『신당서』 계필하력전(契苾何力傳)에 “乾封初, 高麗泉男生內附, 遣將軍龐同善, 高侃往慰納, 弟男建率國人拒弗納, 乃詔仁貴率師援送同善. 至新城, 夜爲虜襲, 仁貴擊之, 斬數百級. 同善進次金山, 虜不敢前, 高麗乘勝進, 仁貴擊虜斷爲二, 衆卽潰, 斬首五千, 拔南蘇, 木底, 蒼巖三城, 遂會男生軍. 手詔勞勉。仁貴負銳, 提卒二千進攻扶餘城”(건봉 초에, 고구려 천남생이 내부를 청하자, 장군 방동선, 고간을 파견하여 위로하고 받아들이려하였다. 동생 남건이 국인을 거느리고 와서 항거하였다. 이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인귀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동선을 지원하게 하였는데 신성에 이르러 밤에 적의 기습을 받아 인귀가 격돌하여 (고구려군) 수백급의 머리를 참수하였다. 동선이 다음으로 금산으로 나아가자 적이 감히 나아오지 못하였다. 고구려가 승리의 기세를 틈타 나아오자 인귀가 적과 부딪쳐 적의 대열을 두동강 내자, 대열이 곧 무너져 (고구려군) 5천급의 머리를 참수하였다. 남소, 목저, 참암 3개의 성을 함락하였다. 마침내 남생의 군대와 만나 황제의 조서를 건네주고 노고를 위무하였다. 인귀가 날랜병사와 이천명의 병졸을 이끌고 부여성으로 진공하였다.) 이라는 기사가 있음. 이 전쟁에서 쌍방이 진격하고 퇴각한 노선을 분석하면, 금산성은 당과 고구려가 교전한 주요 전장으로, 그 위치는 신성(무순 고이산산성)의 북쪽이다. 최진보산성은 규모가 크고, 또 신성 북쪽에 있는 제일 큰 대성이므로, 관련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최진보산성은 고구려의 금산성일 것으로 이해됨.
주향영, 왕조화도 금산성설을 주장함. 당나라 군대는 신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는데, 방동선(龐同善), 고간(高侃)이 남아 주둔하면서 지키고 있었음. 천남건이 밤에 신성을 기습하였으나 전후(展後)의 설인귀에게 격파되었음. 동선(同善), 고간(高侃)은 또 다음으로 금산으로 진격하였음. 설명하자면 밤에 신성을 기습한 적은 금산에서 왔고 또 금산으로 도망갔음. 龐同善 등은 북쪽의 금산에서 패하여, 신성으로 도망갔으며, 고구려는 승리의 기세를 타고 깊이 추격하였는데, 신성에 남아 주둔하고 있던 설인귀가 적의 측면을 둘러쌌을 때, 옆에서 공격하는 전술로써 “擊虜斷爲二, 衆卽潰”(적과 격돌, 적의 대열을 두동강이 내자 무리(적)가 곧 무너졌다)를 시전함. 그런 다음에 승리의 기세를 타고 남소, 목저, 창암성 3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내부한 천남생의 군대와 만나 哥勿城으로 돌아갔음. 금산성에서의 전투이후, 당나라 군내는 또 부여성을 함락시켰는데, 부여성의 위치는 지금의 서풍 성자산산성임. 산성의 북쪽에 있는 고구려산성중에서 발견된 대형 고구려산성은 둘인데, 모두 지금의 철령시 경내에 있음. 하나는 서풍 성자산산성이고 다른 하나는 철령 최진보산성임. 『삼국사기』에 기재되어 있는 “薛仁貴旣破我軍于金山, 乘勝將三千人, 將攻夫餘城” (설인귀가 이미 우리 군대를 금산에서 깨트리고, 승리의 기세를 타고 삼천명을 이끌고 부여성을 공격하였다) 기사도 부산성과 부여성을 이와 입술관계에 있는 성(脣齒之城)으로 설명하였음. 부산성은 부여성의 남쪽, 신성의 북쪽에 있음. 당나라 군대는 동남쪽 방향의 평양으로 나아가는 것이 목적이지만, 이곳에 도달한 주요 목적이 곧 군대가 나아가는 노정상에 있는 고구려 점거성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를 반드시 선행해야 했기 때문임. 그렇게 하지 못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다가 필시 앞과 뒤에서 협공을 받을 수 있음. 당나라 군대는 소량의 병력으로써 부여성을 깨트리는 것이 재능이므로, 부산성을 아래에 두고, 부여성의 남문이 크게 열려 있다는 것은, 이는 부산성이 신성의 북쪽에 있음을 말해줌. 그러므로 금산성은 지금의 철령 최진보산성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지리 위치의 조망과도 합치되므로 철령 최진보산성은 고구려 금산성이라는 추정 논리와 부합됨(주향영, 1994 ; 주향영·왕조화, 1996).
방어용 산성설이 있음. 최진보산성의 성격을 서남 5㎞에 위치한 청룡산산성과 관련하여 검토되기도 함. 최진보산성은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어 건물을 짓기에 불편할 뿐 아니라 생활도구도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방어용 산성으로 추정하는 반면, 청룡산고성은 내부가 평탄하고 기와편이 성내에 산포해있어 평지성의 면모가 강하도고 함. 즉 두 성은 방어용 산성과 주거용 평지성의 관례로 봄(조계림·배약군, 1983).
주향영과 왕조화의 1996년도 의견 역시 마찬가지임. 최진보산성 내에서는 다른 산성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기와 등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음. 그러나 최진보산성 서쪽 5㎞ 지점에 한 개의 소형 고구려산성 유적이 있는데 산성내에서 기와가 다수 발견됨. 이는 최진보산성이 이 곳의 소형산성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반영하는 것임. 최진보산성은 군사방어 성격이 드러나므로 이 곳은 전시에 주요 방어 지점이었을 것임. 그러나 부근의 소성은 평상시에는 생산과 생활에 주력하다가 전시에는 최진보산성의 외위성으로서 방어를 담당하거나 혹은 작전에 맞춰 전략적 작용을 하던 곳일 것임. 한편, 조선 평안남도 순천(順川)에서 일찍이 요동성 벽화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 그림에 묘사되어 나타난 “요동성” 성 바깥 동북, 서북 방향에 각각 방형의 소성이 그려져 있음. 이는 요동성의 외위 거점일 것으로 이해됨. 최진보산성 부근에 역시 장루자(張樓子)소형산성이 보이는데, 그 배치 구조가 순천 요동성 무덤 벽화에 그려진 것과 유사하므로, 이는 고구려가 중요 성지(城池)에 대하여 특수 방어를 시행한 분포(입지) 특징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줌(주향영·왕조화, 1996).
군사방어 및 지방거점성이라는 설이 있음. 최진보산성은 청룡산산성처럼 내부가 평탄하고 넓을 뿐 아니라 건축자재인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평상시 거점 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 반면 청룡산산성도 언덕산으로 둘러싸여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산성으로 분류됨. 더욱이 두 성의 규모와 입지조건을 고려하면, 최진보산성이 주성(主城)이고, 청룡산산성은 최진보산성의 군사방어상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축조한 보조성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 즉 최진보산성을 먼저 구축한 다음 청룡산산성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높음. 입지조건과 축성법에 있어서 최진보산성이 압록강 중류일대의 초기 산성과 깊이 관련된 반면, 청룡산산성은 요하 상류일대의 다른 성과 유사하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고 여겨짐. 최진보산성은 범하 연안의 충적평지와 송요(松遼)대평원의 접경지대 안쪽에 위치하였음. 송요대평원에서 범하 연안으로 진입하든가 범하 연안에서 송요대평원으로 나아갈 경우, 반드시 거쳐야하는 전략적 요충지임. 최진보산성에서 범하를 거슬러 길림합달령을 넘어가면 혼하 상류의 청원(淸原) 남잡목(南雜木)이 나오는데, 남잡목에서는 소자하 및 혼하상류~휘발하(輝發河)를 거쳐 압록강 중류일대로 나아갈 수 있음. 반대로 범하 하류를 따라 내려가면 송요대평원을 거쳐 요동평원을 비롯하여 요서지역, 송화강 유역 등 각 방면으로 통함. 한편, 남쪽으로 나아가면 고구려의 신성으로 비정되는 무순 고이산성이 나오며, 동북방면으로도 요하 상류의 지류연안에 위치한 고구려 성들과 통함. 최진보산성이 위치한 범하·자하(紫河) 하류의 철령지역은 요하 중상류 일대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임. 요하 상류의 유로(流路)를 보면 철령 북방에서는 동남류하다가 철령 서쪽에서 방향을 꺾어 서남쪽으로 흘러가는데, 마치 철령을 중심으로 휘어진 활모양을 이루고 있음. 더욱이 길림합달령에서 서남으로 뻗어내린 여러 지맥가운데 철령 부근의 산줄기는 다른 산줄기와 달리 요하 직전까지 뻗어있음. 이러한 지형조건으로 인해 철령일대는 요하 동안의 송요대평원 가운데 일종의 병목구간으로서 요동평원과 그 북쪽의 자연경계를 이루게 되었음. 한대 요동지역의 군현가운데 가장 북쪽의 망평현이 철령 지역에 비정되고, 연진한대의 요동장성이 맞은편 법주시 일대를 통과한다는 사실 등은 이러한 지형조건과 관련되어 있음. 따라서 한대까지 철령 일대는 요동평원의 중국 군현지역과 남쪽으로는 요동평원, 북쪽으로는 요하 상류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을뿐 아니라, 서쪽으로는 요하를 건너 법고(法庫)를 거쳐 대릉하 중상류나 서요하 일대로 나아갈 수도 있음. 한편 최진보산성은 둘레 5㎞ 이상으로 대형산성으로 분류됨. 더욱이 성내부에는 주거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평탄한 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고 곳곳에서 샘물이 솟아나 수원도 풍부함. 현재 성 내부에서는 반지하식 주거지로 추정되는 대형 원형구덩이가 다수 발견되었고 붉은색 기와편 등 고구려 시기의 건축자재도 출토되었음. 따라서 최진보산성은 다른 고구려산성처럼 군사방어뿐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기능도 수행하였다고 추정됨. 최진보산성은 송요대평원에서 범하 연안으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는 군사중진이면서 버마 연안일대를 지배하기 위한 지방거점성이었음(여호규, 1999).
자연환경
요녕성 철령시에서 동남 17㎞(남쪽 20㎞) 정도 떨어진 철령현 이천호향서최촌(최진보향, 정부 소재지)에서 북쪽 1.5㎞에 위치함. 최진보향 범하(汎河) 북안의 관음구(觀音溝) 골짜기에 위치함. 범하(汎河)의 북안에 동서 방향으로 뻗어있는 청운산(靑雲山)산맥 중부에 위치함. 남쪽 무순시(撫順市) 고이산(高爾山)산성과 36㎞ 떨어져 있음. 서남쪽 5㎞ 거리에 언덕산에 들러싸인 청룡산고성(靑龍山古城)이 있는데, 범하(汎河) 연안의 충적평지를 사이에 두고 최진보산성과 서로 마주보고 있음.
자연환경에 관해 먼저 범하는 길림합달령(合達嶺)산맥 서남단의 철령·요원(遼源) 경계지역에서 발원함. 청운산의 남쪽 지세는 개활하며, 충적 평지가 매우 넓게 펼쳐져 있음. 관음구 골짜기는 단지처럼 생겼는데, 관음각이라는 사찰에서 골짜기 이름이 유래하였음. 골짜기는 범하 북안에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에 자리잡고 있는데, 남북 방향의 중앙 계곡과 그 좌우 계곡 등 3개로 이루어져 있음. 계곡 곳곳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있으며, 이들이 골짜기 입구에서 모여 작은 물줄기를 이룬 다음 남쪽으로 흘러 범하로 흘러듬. 산성 남쪽으로는 범하 연안의 넓은 충적평지가 동서 방향으로 길게 펼쳐져 있으며, 북쪽에도 범하 지류 연안의 좁고 기다란 평지가 펼쳐져 있음. 동쪽과 서쪽으로는 범하 북안의 험준한 산줄기가 이어지고 있음. 특히 산줄기의 남쪽 사면은 험준한 절벽이며, 절벽 아래로 범하가 서쪽으로 흐르고 있는데 마치 천연 해자와 같음. 북쪽 사면도 경사가 아주 가파른 편임. 최진보산성은 사방이 험준한 요새지에 자리잡고 있음.
유물정보
붉은색방격문(方格文)수키와잔편 1점, 니질붉은색토기편(泥質紅色陶片) 1점, 토기손잡이(陶器器耳) 1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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