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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백암성; 연주성, 암주성, 석성산산성(白巖城; 燕州城, 巖州城, 石城山山城) 출토지 요녕성 등탑시(遼寧省 燈塔市)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41 10월 18일~21일, 삼상차남(三上次男), 소산부사부(小山冨士夫), 재등국태랑(齋藤菊太郞), 판본만칠(坂本萬七), 전중요웅(田中堯雄), 재등무일(齋藤武一), 도전정랑(島田正郞)등에 의해 무순(撫順)의 고구려유적 조사를 마치고, 백암성 및 강관둔(江官屯)의 유적조사에 나섰음. 三上次男, 1990 『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을 통해 발표됨.1981 염만장(阎萬章)이 조사함.1993 5월에 林直樹에 의해 조사됨. 林直樹, 1994 「中國東北部の高句麗山城」『靑丘學術論集』5로 발표함.2009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7월 중순에서 11월 중순 기간동안 조사됨.서·남 절벽 사이 결구(缺口) 북단은 남쪽으로 태자하와 접해 있고, 성내로 진입하는 도로가 통과하고 있는데, 총 900㎡에 달하는 면적의 발굴조사를 통해, 고구려시기 성벽과 치, 요금시기의 문지(옹성) 등 중요유적이 발견되었음. 아울러 고구려~요금시기의 도기, 철기, 동기, 석기 등의 유물이 출토됨. 발굴조사를 통해 백암성의 구조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자료를 얻음. 또한 성문구조의 변화를 통해 각 시기별 성의 지위와 기능을 파악할 수 있었음.2010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5월에서 12월까지 조사됨.동벽 북단의 1호 치 근처에서 문지 1곳, 서북벽에서 치 4곳을 발견함. 아울러 1호 문지, 치 5개, 회곽도 1개, 배수시설 등을 발굴함. 발굴과정에서 고구려~요금시기에 제작된 도기, 자기, 석기, 동기, 골기 등 3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됨. 발굴을 통해 백암성의 성문, 치, 회곽도, 배수시설의 위치와 수, 성문, 치, 회곽도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고, 산성 방어체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음.. 요녕성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구조특징 성의 명칭에 대해 국내에서는 백암성(白巖城)으로 부르는 반면, 중국에서는 연주성(燕州城)으로 통칭되고 있음. 당이 점령한 이후에는 암주성(巖州城)이라고 불림. 『盛京通志』에는 석성산(石城山), 『中國歷史地圖集』에는 석성자(石城子)라고 부르고 있음. 평면은 가지런하지 않은 원각방형임. 孫力(1994)은 원형에 가깝다고 기록함. 성벽, 성문, 치, 석대(石臺), 점장대, 성가퀴, 배수시설, 토척(土脊), 건물지, 봉화대, 수원시설 등이 남아 있음. 유물로는 모래혼입 홍색 토기편, 돌어망추, 홍색 방격문 기와, 金元시기의 자뢰(瓷雷), 포문 기와편, 백유갈화자반, 원주형요도구(圓柱形陶窑具), 철갑편 등이 출토됨. 성벽은 산허리에 축조함. 성벽은 산세를 따라 산등성이 약간 바깥쪽에 축조함.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살펴보면, 첫 번째, 산등성이에서 채석을 하여 성벽을 축조할 수 있으므로 운반거리를 줄일 수 있음. 두 번째, 채석한 후의 산등성이가 성내의 평탄한 통로로 변하면서 병력이 성을 따라 움직이는데 유리함. 세 번째, 성벽 밖은 가팔라서 수비가 쉬운 반면, 성 안은 평탄해져서 방어도구 및 무기를 운반하기 편함(李鴻業, 1999). 성벽을 돌로 축조함. 벽석은 모두 청회색의 수성암(水成巖; 林直樹(1994)는 기반층을 이루는 점판암을 이용했고, 성내에 채석흔적이 남아 있다고 함. 李鴻業(1999)은 백회색의 석회암으로 기록함. 아울러 백암산은 캄브리아기시기에 형성된 석회암으로 절리와 층리가 발달하여, 조석(条石)에서 떼내 성전(城砖)으로 제작하기에 용이하다고 기록하고 있음.)으로, 네모지고 정연하게 다듬었음. 성돌의 크기와 관련해서, 외벽의 큰 석재는 30×60×40㎝, 작은 석재는 20×35×25㎝라는 기록(王綿厚, 2002)과 큰 돌 길이 1.8m, 너비 0.7m, 두께 0.4m, 일반적으로는 길이 0.29m, 너비 0.2m, 두께 0.15m이라는 기록(陳大爲, 1995)이 있음. 내측 벽석은 대부분 판형태의 능방형 돌임. 요동지구 산성 가운데 성벽이 가장 양호하게 남아 있음. 성벽을 축조한 방법을 살펴보면, 뾰족하게 다듬은 돌을 서로 맞물리게 쌓아 벽심을 축조하였고, 바깥쪽에는 정연하게 다듬은 돌로 벽면을 쌓았음. 돌이 서로 맞물려 결합하면서 생긴 인장력(拉力) 때문에, 진흙 혹은 석회 등을 이용하지 않음(반면 李鴻業(1999)은 돌 사이에 하얀 석회가 가득 차 있다고 하면서 산해관(山海關)과 다르다고 기록함. 또한 안에 가는 모래가 첨가되어 있지 않았다고 기록함). 현재 벽면은 아직도 정연하고 견고함. 석재의 장축방향은 성벽 방향과 수직을 이루며, 기다란 성돌의 단면이 성벽의 벽면을 이루기 때문에, 성벽면은 견고하고 쉽게 떨어지지 않음(李鴻業, 1999). 동, 남벽 모두 안쪽이 낮고(높이는 0.8~1.9m라는 기록(陳大爲, 1995)과 0.8~3m라는 기록(王綿厚, 2002)이 있음. 쌓은 돌 4-8층), 바깥쪽이 높음(높이 5.5m, 쌓은 돌 17~20층, 정상부 너비 2.35m라는 기록(陳大爲, 1995)과 높이 3~5m, 쌓은 층 15~20층이라는 기록이 있음). 성 기단부의 견고성은 축성자가 중시한 부분임. 먼저 성벽 기단부는 기반암과 접하도록 하였는데, 기단석의 하단 모양은 지반의 곡선과 일치하고 있음. 기단부 위에 성벽을 쌓을 때, 성돌은 수평을 유지하면서 약간씩 뒤로 물려 기단부와 예각을 이루도록 함(李鴻業, 1999). 동벽은 동남모서리를 기준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짐. 동남모서리에서부터 서남쪽으로 뻗어진 성벽은 서남쪽으로 갈수록 산세를 따라 점차 낮아짐. 이 성벽에서 약 170m 가면 태자하 절벽에 이르게 됨. 동남모서리에서 북쪽으로 300m 지점까지 이어진 성벽은 비교적 곧게 축조되어 있음. 동벽은 비록 견고하게 세워져 있지만, 치가 축조되어 있지 않고, 높이·너비 모두 서북벽에 비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음. 아마도 절벽이 있어 적이 쳐들어 왔을 때, 그 위험이 적기 때문이라고 추정됨(三上次男, 1990). 축성자들은 성벽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성벽 아래의 토양을 침식하여 성벽이 붕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음. 동벽에는 성벽 밑바닥에 물이 흘러나갈 수 있는 석조(石槽)를 구축함. 석조를 구축함으로써 성벽 밑바닥의 흙이나 돌들이 유실되어 기단부 아래에 틈이 조성되는 것을 방지됨(李鴻業, 1999). 남면은 태자하의 가파른 절벽(길이 300~400m)을 천연성벽으로 삼고 성벽을 축조하지 않음. 서벽은 완만한 구릉과 연결되어 있음. 서벽 북단에 성벽 기단부가 남아 있음. 서벽은 완만한 구릉과 연결되는 낮은 지대이기 때문에 높은 성벽을 구축하였는데, 높이 10m, 아랫너비 8m, 윗너비 4m임(李鴻業, 1999). 북벽의 평면은 바깥쪽으로 휜 활모양임. 북벽은 경사진 산비탈을 따라 내려오면서 축조함. 성벽의 길이는 약 500m임.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기 때문에 성벽 축조방법이 동벽과 같지 않은데, 안쪽으로는 산등성이가 위치해 있고, 바깥에 성벽을 축조함. 북벽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지만 산비탈이 비교적 평평하기 때문에 성벽을 축조함. 외벽에 대해서는 높이 7m, 쌓은 돌 30~40층이라는 기록(王綿厚, 2002)과 높이 7.8m, 쌓은 돌 35~37층이라는 기록(陳大爲, 1995)이 있음. 내벽에 대해서는 높이 5m, 정상부 너비 4m라는 기록(王綿厚, 2002)과 높이 5.3m, 정상부 너비 4.4m라는 기록(陳大爲, 1995)이 있음. 기단부에는 계단식 기단부(階梯墻基)가 축조되어 있는데, 대략 3~9층 정도 퇴물림쌓기를 하였음(여호규, 1999). 측각(側角)이 남아 있고, 성벽이 돌아가는 부분(轉角)은 모두 둥그스름하게 다듬었음. 동북쪽을 바라보면 눈앞의 저지대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점점 높아지다가 결국은 성벽과 닿음. 이 부분은 성에서 가장 방비가 약한 측면이기 때문에 거대하고 견고한 성벽을 축조했을 것으로 추정됨. 백암성이 당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이적(李勣)이 서남의 남문을 공격했고, 태종이 서북면을 공격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음(三上次男, 1990). 산성에서 제일 높은 지점인 동남모서리에는 방형에 가까운 내성(內城)이 있음. 내성은 남북 길이 45m, 동서 너비 35m임. 높이에 대해서는 1.7~2.7m라는 기록(陳大爲, 1995)과 1~3m라는 기록(王綿厚, 2002), 6m라는 기록(李鴻業, 1999)이 있음. 쌓은 층은 10~18층, 정상부 너비는 2.7~3m임((이홍업, 1999)은 2m라고 기록함). 내성 북벽과 성곽 전체의 북벽은 서로 평행하게 위치해 있는데, 두 성벽 간의 간격은 약 10m임.역사적 의미 위치 비정에 대한 연구로는 孫進己·馮永謙(1989), 王綿厚(1994, 2002), 馮永謙(1997), 여호규(1999), 魏存成(2002), 陳大爲(1995)는 백암성(白巖城)으로 비정함. 孫進己·馮永謙(1989)은 『三國史記』권19에 “陽原王三年(547) 七月, 改築白巖城葺新城”, “陽原王七年(551)秋九月, 突厥來圍城, 不克, 移攻白巖城.”이라는 기록이 있음. 돌궐이 신성(新城)을 이기지 못하고 백암성으로 이동해서 공격하였다는 점에서 백암성은 고구려의 서북경에 있고 신성(무순 고이산성)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음. 東潮·田中俊明(1995)은, 백암(白巖)은 白崖, 栢崖, 百石으로도 표기됨. 고구려에 창암성(蒼巖城)이란 이름을 가진 성이 보이는데, 암반에 위치하는 산성의 특징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으로 추정됨(林直樹(1994)는 백암(白巖)과 백애(白崖)가 점판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기록함). 馮永謙(1997)의 위치비정은 다음의 기록에 근거함. 『舊唐書』卷100 高麗傳에는 “順次白崖城, 命攻之, …… 其城因山臨水, 四面險絶.”이라는 기록, 『資治通鑑』卷198 唐紀에는 “李世勣攻白巖城西南, 上临其西北. 城主孙代音潜遣腹心请降, …… 以白巖城爲巖州, 以孙代音爲刺史.”라는 기록, 『盛京通志』에는 “巖州城, 在遼陽東北五十七里石城山上, 周四里, 門一.”이라는 기록이 있음. 이로 볼 때, 연주성이 고구려의 백암성이라고 할 수 있음. 王綿厚(2002)는 백암성은 요동성(遼東城)과 개모성(蓋牟城) 사이에 있고, 산을 등지고 강과 접해져 있으며, 네 면이 험준한 지세라고 함. 요녕지구에 있는 대형 고구려 산성들을 살펴보았을 때, 연주성(燕州城)이 백암성이라고 추정됨. 성이 등지고 있다는 산은 연주성산(燕州城山; 石城山)이고, 접해 있다는 강은 태자하(太子河)라고 할 수 있음. 그 산돌도 비교적 백색으로 지명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음. 三上次男(1990)은 백암성(白巖城)의 이름은 『舊唐書』· 『新唐書』 高麗傳에 나오는데, 『唐書』卷2 太宗本紀· 『唐書』卷74 薛萬備傳· 『資治通鑑』卷197에는 백애성(白崖城)이라고 적혀 있음. 백암성의 축조연대는 적어도 고구려 중기 이후, 즉 요동을 확보한 이후일 것임. 4세기 전반에서 5세기 전반에 걸쳐 고구려는 요동을 영유했던 전연, 전진, 후연, 북연 등과 각축을 벌였음. 특히 전연의 모용씨는 남북 양로를 통해 왕성을 유린하기까지 하였는데, 북로는 혼하-소자하-부이강(渾河-蘇子河-富爾江) 유역을 따라 압록강 중류에 이르는 길, 남로는 태자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길로 추정됨. 이 때 고구려의 첫번째 방어성인 북로의 신성(新城; 현재 무순)과 남로의 목저성(木底城, 태자하 상류의 목기(木寄))이란 이름은 보이지만 백암성이라는 이름은 사료에 나오지 않음. 백암성은 태자하로의 최고 요충지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에 백암성이 축조되어 있었다면 반드시 쟁탈하려는 표적이 되었을 것임. 그러므로 백암성이란 명칭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시에는 아직 성이 축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음. 한편 고구려 장수왕 24년 북연이 북위에 의해 멸망하고 북연왕 풍씨가 고구려에 투항하면서, 요동은 자연스럽게 고구려에 넘어 갔고, 요동성(지금의 요양)은 고구려군의 거점이 되었음. 이 당시 태자하로는 여전히 옛 수도인 집안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要路)이였기 때문에, 요충지를 골라 백암성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이로 볼 때, 백암성은 고구려 후기, 요동 점유 이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다만 한, 위, 진 시대부터 고구려에 대비하기 위한 어떤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음. 孫進己·馮永謙(1989)의 연구에 따르면, 『三國史記』卷19에 “陽原王三年(547) 七月, 改築白巖城, 葺新城”이라는 기록이 있음. 이로 볼 때, 북조시기에는 이미 백암성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음. 성이름을 계속 좆으면서 개축되었다는 점에서, 처음 백암성이 축조된 시기는 응당 그 이전시기임. 東潮·田中俊明(1995)의 연구에 따르면 백암성은 중국 사서에서는 『隋書』에 처음 보임. 『三國史記』에는 547년에 개축하고 551년에 돌궐이 침범하였다는 기사가 있음. 고구려가 요동군치를 차지한 후, 배후의 수비를 위해 축성하였다고 여겨지므로,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여호규(1999)에 따르면, 547년(양원왕3년) 신성을 보수할 때 백암성이 개축됨. 551년에는 돌궐이 백암성을 공략함. 613년에는 곡사정(斛斯政)이 백애성(栢崖城) 곧 백암성으로 피신하여 고구려로 망명함. 645년에는 손대음(孫代音)의 투항으로 일시적이지만 당의 ‘암주(巖州)’가 설치되었음. 이러한 문헌기록으로 보아 백암성은 늦어도 6세기 전반에는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됨. 李鴻業(1999)은 백암성의 축조시기는 중국의 대혼란시기였던 남북조시대라고 추정함.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첫 번째, 백암성은 당태종이 의해 요동성을 공략당한 직후 새로 축성된 것인데, 이러한 성은 채석부터 축성까지 수년의 시간이 필요함. 또한 건축의 정교함을 볼 때, 촉박하게 지어진 것이 아님. 다만 요동성과 암주 간의 거리는 매우 가까워서 당군이 요동성을 점령한 후 매우 빠른 시간에 연주성으로 도달할 수 있었음. 두 번째, 당시 고구려 상황을 살펴보면 요동성을 수중에 얻을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서쪽 전선이 아니라 동쪽 전선에 이러한 방어적인 성을 축조함. 그렇기 때문에 이 성의 축조시기는 요동성이 아직 고구려 수중에 떨어지지 않은 시기라고 할 수 있음. 또한 이 성의 축조목적은 기회를 틈타 요동성과 요하의 비옥한 영토를 얻는 것이었고, 동시에 고구려 점령지를 방어하기 위함이었음. 고구려가 요동성의 바로 아래에 성을 축조할 수 있었던 것은 축성시기가 중국의 국세가 약화되던 남북조시대였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음. 백암성은 고구려가 요동성을 다시 얻을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축조된 것인데 요동성을 재차 점령한 이후로는 2차 방어선이 되어 수당의 100만 대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후방 지원군 및 군사의 정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음. 백암성의 역사적 특징으로, 백암성은 고구려인이 처음 축조하였다고 볼 수 있음. 그 근거로는 첫 번째, 전략적인 측면에서 보면 고구려의 영토확장때에 이 곳에 축성하면서 용이하게 영토를 방어할 수 있었음. 두 번째, 漢魏晋 시기 고구려의 영토는 압록강 부근에 있어서 중국의 입장에서는 요동성 부근에 따로 초소를 축조할 필요가 없었음. 세 번째, 한인(漢人)은 성을 축조할 때 백성들의 성내 거주를 고려하는데, 백암성은 군사와 백성이 격리되고 있음. 네 번째, 축성기술은 오랜 시간동안 여러 민족 간에 관련 경험이 축적되는데, 백암성은 독특한 산성 풍격을 지니고 있음(李鴻業, 1999). 백암성은 수당이 요동을 수복하기 위한 전쟁수행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資治通鑑』등 고대문헌에서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음(李鴻業, 1999). 백암성의 이름이 역사에 장식된 것은 당태종 정관 19년에 있었던 고구려 원정 때임. 당시 태종은 친히 군을 통솔해서 요동의 각 성들을 공격하였는데, 5월 27일에 고구려의 최대거점인 요동성(요양)을 빼앗고, 5월 29일에는 백암성을 포위 공격함. 6월 1일 당태종은 스스로 군을 이끌고 서북쪽을 공격함. 총사 이적(總師 李勣)은 서남에서 당거(撞車)를 이용해서 남문을 두드리고 돌과 활을 성안으로 비처럼 퍼부었음. 결국 성을 지키던 고구려 장군 손대음은 성을 버리고 당군에 항복함. 긴 세월에 걸쳐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지로 이름을 날리던 백암성은 이때 당의 손에 넘어갔는데, 태종은 이곳을 암주라고 칭하고 손대음을 암주자사(巖州刺史)로 임명했음. 요대에는 동경도(東京道) 소속의 암주(또는 연주)였고(심주(沈州) 예속의 “암주백암거(巖州白巖軍)”으로 불렀다고도 함(鄭常雲, 1987)), 금·원시기에는 동경의 석성현(石城縣)에 속했으며, 원·명대에는 “석성(石城)”으로 개칭됨. 어느 시대든 석·암(石·巖)을 떠나서 산성의 모습과 이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음. 축성재료가 백회색의 석회암이었을 뿐만 아니라 축성지도 암석이 노출된 산 위였기 때문임. 백암성의 전략적 위상은 7세기 전반 수당의 침공로를 통해 알 수 있음. 수나라 군대는 612년과 613년 모두 회원진(懷遠鎭) 곧 태안 손성자(孫城子)~안산(鞍山) 루트를 통해 요하를 건넌 다음, 요동성으로 향하였음. 그리고 수양제의 주력군은 요동성을 공격하는 한편, 별동대를 편성하여 오골성→압연수(鴨緣水)를 거쳐 평양성으로 진공하는 작전을 구사함. 한편 613년 곡사정이 백암성으로 피신하여 고구려로 망명한 사실을 보면 수의 별동대는 요동성에서 백암성을 거쳐 오골성으로 진공하였다고 추정됨. 수의 별동대는 요양~본계로(遼陽~本溪路)로 진입해서 본계~봉성로(本溪~鳳城路)를 통해 천산산맥을 넘은 다음,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으로 나아감으로서, 요동성에서 평양성으로 나아가는 최단코스를 선택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백암성은 이 코스의 진입로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임. 한편 당의 고구려원정 당시, 이세동이 이끌던 당군은 통정진(通定津)에서 요하를 도하한 다음(신민 고대산~번양로(新民 高臺山~藩陽路)), 현도성과 신성(무순 고이산성)을 공격하다가 여의치 않자 개모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킴. 이세적 군대는 대안 손성자~안산(大安 孫城子~鞍山 루트를 통해 요하를 도하한 당태종 군대와 합류하여 요동성을 함락시킨 다음, 백암성을 점령함. 그리고 당군은 안시성(해성 영성자산성) 공략에 나섰으나 실패함. 당군의 진군로는 요동평원~압록강 사이의 교통로와 거의 일치함.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 일대로 향하는 교통로에는 본계~봉성로(細河~草河路), 해성~수암로(沙鐵河~大洋河路), 개주~장하로(大淸河~碧流河路) 등 세 루트가 있음. 이 가운데 가장 위쪽의 본계~봉성로는 번양(藩陽)과 요양(遼陽 두 방면에서 접근할 수 있음. 백암성은 요동성에서 시작되는 남쪽 진입로의 길목에 위치하였고, 심양에서 시작되는 북쪽 진입로에는 번양 탑산산성(개모성)과 본계 변우산성이 있음. 그리고 해성~수암로(岫巖路) 입구에는 해성 영성자산성(안시성), 개주(蓋州)~장하로(莊河路) 입구에는 개주 고려성산성(건안성)이 위치하고 있음. 이렇듯, 고구려는 요동평원~압록강 교통로의 전략적 요충지에 성을 축조하여 물샐틈없는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함. 이 때문에 645년 당군은 개모성(탑산산성)에 이어 요동성과 백암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을 공격하는 등 요동평원-압록강의 진입로를 차례로 공략하는 전술을 구사함. 만약 당군이 각 성을 차례로 함락시키지 않고 곧바로 압록강 알대로 전격할 경우에는 보급로를 차단당하거나 배후에서 기습공격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임. 이처럼 백암섬은 본계~봉성로의 남쪽 진입로를 봉쇄하던 군사중진으로서 요동평원~압록강로에 구축된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구성함(여호규, 1999). 백암성은 둘레 2㎞ 전후이고, 성 내부에는 주거용 공간이 비교적 넓은 편임. 성벽 안쪽의 경사면에는 계단상 대지가 조성되어 있고, 성문구촌(城門口村)이 자리잡은 곳에서는 건물 초석과 함께 고구려 시기의 붉은색 기와편이 많이 발견되고 있음. 이로 보아 백암성은 군사방어뿐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 기능하였다고 추정됨. 특히 645년 당군이 백암성을 함락하고 남녀 1만명 이상과 병사 2천4백명을 노획하였다는 것은 이를 반영함. 다만 645년 당군이 요동성을 함락한 다음 노획한 인구에 비해 규모가 적다는 점에서 요동성보다 한 등급 낮은 지방중심지로 추정됨(여호규, 1999)(李鴻業(1999)은 성내 면적이 2만㎡에 불과하고, 성 안에 시초(柴草), 양식, 마굿간, 차량(车辆) 등이 있어서, 5000인 이상의 군사가 주둔할 수 없다고 보고, 행정중심지로서의 기능은 부정함. 그리고 고구려가 평지 대신 면적이 좁은 산에 성을 축조하는 것에 대하여, 성을 축조한 지역에 고구려인이 매우 적거나 아예 없기 때문에 거주민을 고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서술함).자연환경 요양시(遼陽市)에서 30㎞ 떨어진 등탑시(燈塔市 동남부 서대요향(진)(西大窑鄕(鎭)) 관둔촌(官屯村) 관할 성문구촌(城門口村)의 동쪽 산 정상부에 위치함. 산은 석성산(石城山), 백암산(白巖山)이라고도 불림. 해발은 197m임. 이 지역은 요금시대에 가마터가 있던 강관둔(江官屯)으로 널리 알려져 있음. 요양 동남 태자하 남안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목창(木廠), 아방(鵝房), 아미장(峨嵋莊), 고성자소둔(高城子小屯), 쌍묘자(雙廟子), 매가령(梅家岭), 용봉사(龍鳳寺), 영수보자(英守堡子)를 경유하게 되고, 강관둔(江官屯) 동북쪽 및 근처 촌락에 서로 맞닿게 됨. 태자하 북안(우안)의 홀로 솟은 산봉우리에 축조된 산성이 백암성임. 본계호(本溪湖)를 지나 서쪽의 요양으로 향하는 태자하는 도중에 기복 있는 산구(山丘)의 방해를 받아 계속 굴곡을 이룸. 동북으로 향하던 흐름이 커다란 암반에 막히면서 급하게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 암반 위에 우뚝 솟은 산성이 백암성임. 산성 남쪽 태자하 건너편에는 고가자(孤家子)가 있고, 서남에는 강관둔(江官屯)이 있음. 태자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 요동평원 한복판에 자리 잡은 요양시가 나오고,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에 이르는 최단코스인 본계~봉성로(本溪~鳳城路)의 출발점인 본계시(本溪市)가 나옴. 백암성은 요동평원과 천산산맥의 접경지대로서 태자하를 거슬러 본계를 거쳐 천산산맥으로 진입할 경우 거쳐야 하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음. 산성 동쪽으로는 천산산맥을 등지고 있고, 서부는 혼하, 태자하, 북사하(渾河, 太子河, 北沙河)의 충적평원을 향하고 있음. 북쪽으로는 화자진(铧子鎭)과 가까움. 남부는 대청산(大靑山)과 서로 마주하고 있고, 두 산 사이로 태자하가 흐름. 성 안의 중심은 남문의 내부 분지임. 1944년 조사때는 계단형태로 농가가 집락을 이루고 있었다고 함(三上次男, 1990). 산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동남모서리인데, 여기에 올라서 주위를 둘러 보면, 동·남·서 세 면을 선명하게 볼 수 있음. 산성 아래 해발 48m 지점에 도랑이 있었다고 함(李鴻業, 1999).유물정보 기와편(瓦片) 4점, 토기편(土器片) 1점, 원주형도요구(圓柱形陶窑具) 1점, 철갑편(鐵甲片) 1점, 어망추(漁網錘) 1점, 석비두(石碑首) 1점, 완(碗) 1점, 돌로 만들어진 네모난 통(槽) 1점참고문헌 · 鄭常雲, 「燕州城初探」『地名叢刊』 1987-4, 1987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初探」『中國考古學會第五次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988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林直樹, 「中國東北部の高句麗山城」『靑丘學術論集』 5, 1994 · 孫力, 「遼寧的高句麗山城及其意義」『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4 · 辛占山,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陳大爲, 「遼陽岩州城山城」『遼海文物學刊』 1995-1, 1995 · 三上次男, 「東滿風土雜記」『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 1997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李鴻業, 「遼寧省巖州古城考」『博物館研究』 1999-3, 1999 · 魏存成,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蘇鵬力, 「燈塔市燕州城城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2012 ·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홈페이지(http://www.lnwwkg.com) 田野考古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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