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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적산산성(赤山山城)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830
  • 위치(출토지)
    遼寧省 蓋州市 萬福鎭(羅屯鎭) 貴子溝村(櫃子溝村)
  • 지역
    영구(營口市)
  • 유형
    성곽>산성
  • 형태사항
    둘레 3,520m(崔艳茹·馮永謙·催德文, 1996; 王禹浪·王文軼, 2008; 王禹浪·王文轶, 2010; 王禹浪·王文轶, 2011); 2,389m(國家文物局, 2009); 5,000m(王綿厚, 1994; 王綿厚, 2002; 王禹浪·王宏北, 2007), 8華里(陳大爲, 1995); 10里(孫進己·馮永謙, 1989; 馮永謙, 1997)라는 기록이 있음.│동벽의 전체길이 500여m, 잔존 성벽의 내측 성벽 높이 2~3m, 외측 성벽의 높이 5~6m, 너비 약 3m│남벽의 전체 길이 1,300m│서벽의 길이 약 450m 
출토지
요녕성 개주시 만복진(나둔진) 귀자구촌(궤자구촌)(遼寧省 蓋州市 萬福鎭(羅屯鎭) 貴子溝村(櫃子溝村))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2007왕우랑, 왕문일, 유술흔, 손군
(王禹浪, 王文軼, 劉述昕, 孫軍)
10월 24일에 조사함.
王禹浪, 王文軼, 2010, 「營口地區蓋州市万福鎭貴子溝村赤山山城考察報告」『黑龍江民族叢刊』 2010-4 에 발표함.
2009왕우랑, 왕문일
(王禹浪, 王文軼)
6월, 국가교육부 인문사회과학항목과제의 보고업무를 완성하기 위해 적산산성에 대해 선행조사를 진행함. 조사를 통해 적산산성의 지리적 위치, 고찰노선, 형태와 구조, 지리환경 등이 더욱 명확해짐. 아울러 적산산성과 문헌과의 결합을 시도하면서 정리 및 고증을 진행함. 2007년도의 조사내용과 대조확인 작업을 진행하면서 2007년도의 조사기록이 믿을 수 있음을 확인함.
. 시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
구조특징
포곡식 산성으로 전체적으로는 불규칙한 장방형임. 성벽, 성문, 치, 건물지, 고대유지(高臺遺址), 저수지, 샘 등이 남아 있음.
산성 북쪽은 5기의 산봉우리가 천연장벽을 이루고, 산 아래는 벽류하(碧流河) 지류가 있는 등 매우 험준한 곳이므로 성벽이 축조되어 있지 않음. 성벽은 주로 동·서·남쪽에 있는데, 동·서·남쪽의 성벽은 산등성이의 지세를 따라 둥그렇게 굽어져 있고, 기복이 심함. 성벽은 쐐기형 돌을 어긋나게 중첩해서 축조함.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일반적으로 너비는 2.5~4.5m이고, 외측 성벽에 남아 있는 최고 높이는 4.6m에 달함. 일부 구간은 성벽이 파괴되어, 돌들이 전부 흩어져 있지만 성벽 흔적은 아직도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음.
동벽은 적산 제1좌 고봉인 삼청봉(三淸峰)에서 시작함. 성벽 아래에는 성벽이 붕괴되어 흘러내려온 성돌이 흩어져 있으나,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음. 성돌은 대부분 청석(靑石)을 사용함. 동벽 위에 서면 산성 밖의 여러 산들로 둘러싸인 옥석댐(玉石水庫)을 볼 수 있음.
산성 남벽은 성벽이 있는 6개의 산봉우리 위에 5개의 초대(哨臺)가 있음.
서벽은 5개의 작은 산봉우리를 공유함. 서문에도 성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성문에서 하천을 따라 서쪽으로 약 50m 정도 가면 대량의 청색·회색 깬돌이 있는데, 석재는 강돌과 편상암(片狀巖)이고, 띠형태로 배열되어 있음. 성문 남단 가까이에 있는 산기슭 아래에는 깬돌로 쌓은 대지(臺地)가 있는데, 대지 앞에는 여러 줄의 작은 묘목이 심어져 있음. 하천 정가운데에는 촌민이 큰 자연석으로 쌓은 마당이 있는데, 벽을 쌓는데 사용한 돌이 성돌로 추정됨. 이로 볼 때, 이 하곡에 비교적 긴 성벽 구간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음. 벽을 쌓는데 사용된 석재는 근처에서 조달하였는데 강돌과 산 양측의 편상암을 충분히 이용하였음.
성문의 수와 관련하여 동·서문 2개라는 기록(陳大爲, 1995; 馮永謙, 1997; 魏存成, 2002; 國家文物局, 2009), 동·서·남문 3개라는 기록(王綿厚, 2002; 王禹浪·王宏北, 2007; 崔艳茹, 2009; 王禹浪·王文轶, 2010; 王禹浪·王文轶, 2011)이 있음.
역사적 의미
산성 근처에 있는 벽류하(碧流河)는 원래 이름이 필리해(苾里海)였으나, 물이 벽록(碧綠)처럼 맑다고 하여 고쳐진 이름임. “필리(苾里)”는 만주어 혹은 여진어의 발음으로, 한어(漢語)로는 “하(河)”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음. 만주어의 발음으로는 일반적으로 “필랍(必拉)”, “필랍(毕拉)”이라 하고, “해(海)”는 “하(河)”와 같은 발음임. 그렇다면 필리해(苾里海)의 실제 의미는 “하하(河河)”임. 이렇게 지명이 중첩된 현상이 일어난 까닭은 만주어 발음과 한족의 발음이 복합되어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음. ‘벽류하(碧流河)’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발음과 하천 색깔의 특징에 의거하여 한자로 바꾸면서 형성된 것임. 벽류하(碧流河) 유역을 따라가면 대련 보란점시 성대진 외패산성(大連 普蘭店市 星臺鎭 巍覇山城), 대련 보란점시 성대진 외패산성 묵반진 마둔촌 서단산성(大連 普蘭店市 星臺鎭 巍覇山城 墨盤鎭 馬屯村 西山山城), 대련 장하시 하화산진 마령촌 북대성산후석성산성(大連 庄河市 荷花山鎭 馬岭村 北大城山後石城山城), 대련 장하시 성산진 사하촌 만덕둔 성산산성(大連 庄河市 城山鎭 沙河村 萬德屯 城山山城), 대련 보란점시 쌍탑진 대성자촌산성(大連 普蘭店市 雙塔鎭 大城子村山城), 영구 개주시 십자가진 전둔 고력성산산성(營口 蓋州市 什字街鎭 田屯村 高力城山山城) 등 7개소의 고구려산성이 분포하고 있는데, 7개소의 산성과 적산산성(赤山山城)은 공동으로 벽류하(碧流河)유역의 종심방어체계(縱深防禦體系)를 구축하고 있음. 요동반도지구에서 주변 길이가 3,000m가 넘는 고구려산성은 11개소인데, 벽류하유역에만 적산산성(赤山山城), 외패산성(巍覇山城), 서산산성(西山山城), 후석성산성(後石城山城), 성산산성(城山山城) 등 5개소가 있음. 고구려가 벽류하유역 방어전선에 대하여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음. 상술한 5개소의 산성과 적산산성은 지세가 매우 험준하여 방어가 쉽고 적군이 공격하기는 어려우며, 수로 및 육로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음. 적산산성 서측, 벽류하 좌안에 305국도가 있음. 남쪽으로 대련 장하시(大連 庄河市)에서 북쪽으로 영구시(營口市)까지 연결되는데, 영구시와 장하시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임. 특히 개주시 만복진(蓋州市 萬福鎭)에서 장하시 계운화진(庄河市 桂雲花鎭)에 이르는 간선도로는 서측으로 벽류하와 접해 있고, 동측으로는 여러 산과 인접해 있음. 즉 만복진(萬福鎭)에서 남하하여 대련시(大連市)로 들어가고, 계운화진(桂雲花鎭)에서 북상하여 영구시(營口市) 경내에 들어가는데 꼭 거쳐서 가야 하는 요충지에 적산산성이 위치하고 있음. 이로 볼 때 적산산성은 고구려가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축조한 중요한 방어용 성임을 알 수 있음. 벽류하의 방향을 고려해서 판단해 볼 때, 적산산성과 상술한 산성 7개소의 주요 방어방향은 황해방향으로부터 오는 군사위협임. 또한 북쪽 요하 하구 근처에 있는 개주 고력성산성(蓋州市 高力城山山城)과 함께 수직적으로 남북으로 호응하는 황해-발해 방어체계를 형성함. 벽류하 상류 요충지에 있는 적산산성(赤山山城)과 벽류하 하류의 고력성산산성(高力城山山城)은 서로 바라보며 호응하고 있음.
崔艳茹(2009)의 축조시기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404년 광개토대왕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요동공략을 시도하였는데, 모용씨(慕容氏)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결국 요동을 확보함. 이 때 고구려는 요동지역에 방어적 성격의 산성을 대거 축조함. 영구(營口)지구에 위치한 산성들은 404년 이후 광개토대왕이 요동지역을 장악하면서 세운 것으로, 고구려 중기 혹은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할 수 있음.
魏存成(2011)은 4~5세기 이후로 추정함.
지명비정에 있어서 王禹浪·王宏北(2008)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당 태종은 645년 안시성에 도착함. 그는 고구려의 15만 지원군을 저지하기 위해서 적의 원군을 둘러싸서 공격하는 전략을 구사했고 결국 승리함. 이 때 당 태종이 올랐던 산을 주필산(駐蹕山)이라고 고쳐 불렀음. 현재 적산은 요하 하구까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주필산(駐蹕山)이라고는 할 수 없음. 적산산성이 고구려의 어느 산성인지는 아직 연구를 기다려 보아야 함. 다만 산성 북쪽의 요동성(遼東城)과의 거리는 150㎞인데, 역사문헌에 고구려 요동성(遼東城)과 건안성(建安城)과의 거리가 당리(唐里) 300리였다는 기록과 부합함. 그리고 건안성은 병사가 적었기 때문에 험준함에 의지하여 지켰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적산산성이 요동반도 지역의 고구려산성 가운데 가장 험준한 성임. 지형이 매우 복잡하고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대부분 ‘일부당관만부막개(一夫當關萬夫莫開)’라고 말할 만큼 심산협곡(深山峽谷)이므로, 적산산성이 고구려의 건안성일 가능성을 의심할 수 있음.
王綿厚(1994)은 평곽성(平郭城)으로 추정함.
자연환경
개주시 남부 만복진(나둔진) 귀자구촌(궤자구촌)에서 동쪽으로 2.5㎞(馮永謙(1997)은 5里라고 기록함) 떨어진 적산(赤山)에 위치함. 적산(赤山)이란 이름은 산 위의 바위가 대부분 적색이기 때문에 붙여짐. 적산은 해발 889.1m로 영구(營口)지구에서 높은 산 가운데 하나임. 요동(遼東)의 명산 가운데 하나로, 淸代에는 요남도교명산(遼南道敎名山)이었음. 적산은 기이한 봉우리와 바위, 동굴, 맑은 샘, 오래된 사원 등으로 유명함. 산성은 적산의 남쪽 기슭에 축조되어 있는데, 전체 성은 16좌의 산봉우리를 점유함. 산성이 위치한 지점은 개주시 만복진(나둔진)과 광동구진(礦洞溝鎭)의 경계지점임. 산의 서쪽 계속 입구에 만복진(나둔진) 귀자구촌이 있음. 적산산성 서측, 벽류하(碧流河) 좌안에 305국도가 있음. 남쪽의 대련 장하시(大連 庄河市)에서 북쪽으로 영구시(營口市)까지 연결되는데, 영구시(營口市)와 장하시(庄河市)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임. 서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지점에 개주성(蓋州城)이 있음. 영구시(營口市)와는 약 75㎞ 떨어져 있음.
적산(赤山)은 20여 ㎢를 점유하고 있고, 삼청봉(三淸峰), 오동봉(五洞峰), 선문봉(旋門峰), 천교봉(天橋峰), 천지봉(天池峰)으로 나눌 수 있음. 그 중 삼청봉(三淸峰)이 제일 높으며, 해발 891m임. 적산은 개주시 동남부 천산산맥(千山山脈)의 여맥(餘脈)에 속하는데, 개주시 경내의 낮은 산구(山區)에 속함. 적산산성의 동북부는 기복이 있는 여러 산들이 이어지고 있어 비교적 높지만 평탄한 지세를 보이기도 함. 적산 동측으로 산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는데, 평균해발은 약 200m이고, 동남쪽은 해발이 1,130m임. 옛부터 요남(遼南)의 제1봉으로 알려진 해발 1,130m의 보운산(步雲山)과 멀리서 서로 마주함. 적산은 서쪽으로 갈수록 지세가 저산구(低山區), 악릉지구(岳陵地區; 평균해발 48m), 평원지구(19m), 연해지구산지(沿海地區山地; 해발 5m) 순으로 계단식처럼 낮아지는데, 동쪽에서 서쪽으로 발해(渤海)방향으로 경사짐. 적산 동측의 대련 장하시(大連 庄河市) 경내 지세도 이와 대체로 유사함. 다만 서쪽에서 동쪽으로 황해방향으로 경사짐. 이렇게 중간이 높고 동서가 낮은 지세는 요동반도지구 주요 지세의 특징임. 이러한 주요 이유는 요동반도지구의 중앙부가 기본적으로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천산산맥에서 나온 여맥으로, 요동반도가 중간이 높고 동서 양측으로 갈수록 해발이 낮아지면서 각각 황해·발해 두 바다에 접해지는 지세의 특징 때문임. 이로 인해 요동반도의 주요 하천이 중부 산구(山區)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황해로 혹은 서쪽으로 흘러 발해로 유입되는 것임. 하류는 대부분 산골짜기 혹은 평원지구에 흐르기 때문에 시대와 관계없이 교통로가 되었는데, 하천을 따라감으로써 산봉우리의 장애물을 피할 수 있었음. 고구려인은 축조할 산성 입지를 정할 때 이러한 특징을 충분히 고려함. 적산 북쪽으로는 벽류하(碧流河) 상류의 지류와 접해 있고, 서쪽으로 벽류하 상류 간류와는 약 10㎞ 떨어져 있는 등 벽류하(碧流河) 상류 근처에 위치함. 벽류하는 개주시(蓋州市)의 기반산(棋盤山) 남쪽 기슭에서 발원하는데, 그 위치는 북위 39°24′~40°20′, 동경 122°10′~122°31′사이이고, 하천원(河天源)의 해발은 1,047m임. 남쪽으로 대련 장하(大連 庄河), 보란점(普蘭店) 경내로 흐르고, 보란점시 성자탄진 사가둔(普蘭店市 城子坦鎭 謝家屯) 부근에서 황해로 유입됨. 벽류하 간류(碧流河 干流)의 전체 길이는 156㎞이고, 유역면적은 2,814㎡로, 대련시(大連市) 경내에서는 가장 큰 하천임. 성 서쪽은 좁고 구불구불해서 앞으로 지나가기가 매우 어려움. 남면도 협곡으로 가볍게 지나가기는 어려움. 동면은 비록 약간 개활하지만 산비탈이 비교적 가파라서 오르기가 쉽지 않음. 전체적으로 매우 험준함. 성 가운데는 평탄한 분지임.
참고문헌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初探」『中國考古學會第五次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988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辛占山,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崔艶茹·馮永謙·催德文, 『營口市文物志』, 遼寧民族出版社,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王禹浪·王文軼, 『遼東半島地區的高句麗山城』, 哈爾濱出版社, 2008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崔艶茹, 「營口地區山城調査與檢討」『東北史地』 2009-3, 2009
· 王禹浪·王文軼, 「營口地區蓋州市万福鎭貴子溝村赤山山城考察報告」『黑龍江民族叢刊』 2010-4, 2010
· 王禹浪·王文軼·王宏北, 「遼東半島高句麗山城槪述」『黑龍江民族叢刊』 2010-2, 2010
· 王禹浪·王文軼, 「營口地區的高句麗山城」『哈爾濱學院學報』 2011-9, 2011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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