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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성산성; 청석령산성; 청석관산성; 석성산산성(高麗城山城; 靑石嶺山城, 靑石關山城; 石城山山城)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818
  • 위치(출토지)
    遼寧省 蓋州市 靑石嶺鎭(駐腰岭子村) 靑石關堡鎭 高麗城子村
  • 지역
    영구(營口市)
  • 유형
    성곽>산성
  • 형태사항
    남북 길이 1,300m, 동서 길이 1,500m, 전체 둘레 약 5㎞(島田好는 6㎞라고 기록함. 孫進己·馮永謙(1989), 孫力(1994), 陳大爲(1995), 崔艳茹·馮永謙·催德文(1996), 馮永謙(1997) 등은 10里라고 기록함. 馮季昌·孫進己·馮永謙(1987)은 둘레 10여里, 동서 직경 3里, 남북 약 2里 반으로 기록함), 면적 195만㎡  , 16점 
출토지
요녕성 개주시 청석령진(주요령자촌) 청석관보진 고려성자촌(遼寧省 蓋州市 靑石嶺鎭(駐腰岭子村) 靑石關堡鎭 高麗城子村)
구조특징
明淸代에 편찬된 『遼東志』, 『全遼志』, 『蓋平縣志』등에서는 ‘石城’으로 기록함. 『蓋平縣志』에 따르면 청대 주민들은 ‘고려성(高麗城)’이라고 불렀다고 함. 이 외에도 청석령산성(靑石岭山城), 석성산산성(石城山山城) 등으로 불림.
산성은 포곡식(簸箕型)산성으로 평면은 불규칙한 장방형임. 성벽, 성문, 요망대, 치, 수구문, 토패(土坝), 저수지, 우물, 샘 등이 남아있음.
성벽은 산세를 따라 산등성이나 바깥쪽 비탈에 축조하였는데, 험준한 절벽에는 성벽을 축조하지 않고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음. 성벽은 지형에 따라 토축, 토석혼축, 석축 등으로 축조함. 성벽은 불규칙한 장방형의 깬돌로 쌓았는데, 돌은 일반적으로 길이 60㎝, 너비 40㎝, 두께 20㎝임. 작은 돌은 길이 50㎝, 너비 30㎝, 두께 20㎝임. 성돌은 泥片巖계로(林直樹, 1994(王禹浪·王海波(2009)는 석질이 풍화석으로 위패산성에서 보이는 화강암과 다르고, 철광을 포함하고 있어서 홍색이 나타난다고 기록함)), 주변에서 구했는데, 현재 서남문 바깥에는 채석장이 있음. 성돌 사이는 황토와 깬돌로 틈을 메웠음(王禹浪·王海波, 2009). 비교적 보존이 양호한 벽면은 잔고 1.6~1.7m, 기단부 너비 4.25~4.5m, 정상부 너비 1.5~2.3m임. 성벽은 대부분 바깥이 높고 안쪽이 낮으며, 일부 험준한 곳에는 안측에 벽을 쌓음.
동벽은 주로 남·북 양쪽의 높은 산에서 뻗어 나온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함. 산등성이 위에 돌로 성벽 바닥을 만들고, 그 돌 위에 흙을 다져서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한 층은 황토, 한 층은 깬돌 혹은 깬돌이 들어간 황토를 다져서 층층이 축조함. 다져진 층은 6~7㎝인데 다만 토질은 불순함. 동벽 남단은 산의 험준함을 이용하면서 성벽을 축조하지 않음.
서벽 가운데에서 남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있는 높이 100m의 작은 산이 서벽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음. 이 산봉우리는 험준하고, 토층은 비교적 얕으며, 들풀들이 무성하고, 나무가 없어서, 오르기가 쉽지 않음. 서벽 南段에서 남쪽으로 뻗어 나온 산등성이와 북쪽으로 뻗어 나온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을 축조함. 서벽 남단~중부의 산봉우리 구간은 작은 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등성이와 남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나간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됨. 대부분 돌로 쌓았는데, 성돌 사이의 틈은 황토나 깬돌로 채워 넣었으며, 성벽은 들여쌓음. 성돌은 화강암이 아닌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돌인데, 색깔은 약간 홍색을 띠고 있음. 이 구간은 성벽을 산등성이 위에 축조하지 않고, 산등성이 바깥 비탈에 축조함. 이 구간에서는 두 곳에 성벽이 잘 남아 있는데, 성벽의 윗너비는 3m정도이고, 잔고는 2~4m 정도임. 성벽 바깥에는 성돌이 많이 흘러 내린 모습을 볼 수 있음. 서부의 작은 산의 남북 양측 모두 산정상부를 이용해서 환호를 축조하였는데, 환호 바깥에는 가공하지 않은 돌을 쌓아서 방어를 강화하고자 함. 성벽 위에는 1.3~2m 간격으로 기둥구멍이 있는데, 기둥구멍은 41×36㎝의 방형이고, 깊이는 30~40㎝임. 두 구간의 석벽 남측에서는 지세가 점차 낮아지는 모습이 보이는데, 동벽과 마찬가지로 낮은 산등성이 위에 황토와 깬돌을 다져서 성벽을 축조함. 중부의 산봉우리~북단 구간은 지세가 가장 낮은 곳이기 때문에, 성안의 샘이 모여 형성된 시내가 이곳에서 밖으로 흘러나감. 성벽은 많이 보이지는 않는데, 북산(北山)과 서장고산(西墻孤山)을 연결하는 거대한 토축성벽을 볼 수 있음. 높이는 10m에 가까움. 단층에서는 다져진 층이 명확한데, 다져진 층의 두께는 10~15㎝임. 서쪽 골짜기 입구에는 점토질이 혼합된 황갈색 사질토를 9㎝ 전후로 층층히 다지면서 쌓아 올렸는데, 허물어진 단면에는 횡으로 결을 이루는 성벽 층위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음. 성벽은 아랫 너비 60~100m, 높이 20~30m임.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좌우 산등성이와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산등성이와 성벽을 쉽게 구별하기 어려움. 서문이나 수구문 부근 성벽 아래쪽에 돌과 자갈이 흩어져 있고, 특히 서문 바깥쪽 성벽 아래에 할석을 2m 정도 겹겹이 쌓아 올린 것을 볼 때, 토축성벽을 구축하기 전에 자갈, 돌, 할석 등으로 성벽 기초를 다졌을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북벽은 비교적 평평하고 곧은 산등성이에 축조함. 대부분 깬돌로 축조한 석축석벽이며, 북벽 서단에 토축성벽을 확인할 수 있음(林直樹, 1994)(辛占山(1994)은 남북 산등성이 모두 장방형 성돌로 축조하였고, 잔고는 3m, 기단부 너비는 5m라고 기록함).
남벽은 대부분 돌로 축조하였는데, 남벽 동단은 수직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거나 일부 정상부를 따라 석축 성벽을 축조함. 산비탈을 깎은 공법이 보이는데, 외벽만 돌을 쌓고 내벽은 돌을 쌓지 않았음. 노청산(老靑山)~남문의 남벽 서단은 흙으로 성벽을 축조. 남문 부근 성벽 단면에는 9㎝ 전후의 두께로 층층이 다져 쌓은 토벽 층위가 남아 있음.
성벽 중앙의 언덕산 북측 서단과 북쪽 산등성이 기슭 사이에 길이 30m, 너비 10m 정도의 차단벽을 구축함(여호규, 1999). 성 내부 도로에 의해 차단벽 중앙부가 절단됨. 북측 단면은 점토질이 섞인 황토를 층층이 다져 둥글게 쌓아 올리고 바깥쪽 하단에 돌을 깔아 기초를 다진 다음, 그 위에 자갈이나 할석이 섞인 흙을 성토함. 남측 단면은 깬돌과 자갈이 섞인 황갈색 사질토를 성토하였는데, 중간 부분에 자갈을 12㎝ 두께로 두 겹 쌓았음.
성문의 수와 관련하여 동문 1개, 서문 2개 등 3개(馮季昌·孫進己·馮永謙, 1987; 孫力, 1994; 李殿福, 1994; 崔艳茹·馮永謙·催德文, 1996; 馮永謙, 1997; 王綿厚, 2002; 魏存成, 2002; 王禹浪·王宏北, 2007; 王禹浪·王文轶, 2008; 國家文物局, 2009; 王禹浪·王海波, 2009; 崔艳茹, 2009; 王禹浪·王文轶, 2011), 동문 1개, 서문 3개 등 4개(辛占山, 1994), 서벽 2개, 남문 2개, 동문 1개 등 5개(林直樹, 1994; 여호규, 1999)라는 기록이 있음. 각 성문에는 흙을 다져서 축조한 성벽이 이어져 있음.
출토 유물로는 등자·가래·수레바퀴 줏대축·갑편·솥·단지·화살촉 등 철기를 비롯해서 기와 토기, 절구 등이 있음.
역사적 의미
개주 고려성산성은 건안성(建安城)과 안시성(安市城)으로 비정됨.
八木奘三郞, 李文信(1962), 辛占山(1994), 王綿厚(1994, 2002), 李殿福(1994), 東潮·田中俊明(1995), 陳大爲(1995), 孫進己·馮永謙(1989), 李文信(『遼寧省文物保護檔安』)은 건안성(建安城)으로 비정함. 八木奘三郞이 처음으로 건안성(建安城)으로 비정함.
東潮·田中俊明(1995)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新唐書』地理志 『道里記』에는 ‘건안성(建安城)이 요양(遼陽)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서 서쪽으로 300리 떨어져 있고, 원래는 평곽현(平郭縣)에 해당한다’는 기록이 있음. 『翰苑』주에 인용된 『高麗記』에도 ‘평곽성(平郭城)은 지금의 건안성(建安城)이고, 나라의 서쪽에 있다. 이전의 한(漢)의 평곽성(平郭城)이다’라는 기록이 있음. 그런데 개주시가(蓋州市街)의 구개현현성(舊蓋縣縣城) 하층에서 한대 고성(漢代 古城) 발견되었는데, 평곽현 성지(平郭縣 城址)로 추정됨. 한편 645년 6월 태종(太宗)은 ‘안시성(安市城
)이 견고하여 공격하기 어려우니, 건안성(建安城)을 먼저 치자’고 했으나, 이적(李勣)은 안시성을 건너 건안성을 공격하면 보급로가 끊긴다고 하여 반대하였음. 이로 볼 때, 건안성은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해성 영성자산성(海城 英城子山城) 남쪽에 있다고 할 수 있음. 이런 점들을 고려해 봤을 때, 개주 고려성산성(蓋州 高麗城山城)이 건안성으로 추정됨.
馮永謙(1997)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新唐書』張亮傳에는 ‘張亮 “引兵自東萊浮海, 襲破沙卑城, 進至建安”’, 『新唐書』地理志에는 ‘安東都護府 “故漢襄平城也, …… 西(南)至建安城三百里”’, 『資治通鑑』卷 197 『唐紀』에는 ‘貞觀十九年 “營州都督張儉, 將胡兵為前鋒, 進渡遼水, 趨建安城, 破高麗兵, 斬首數千級.” 秋七月, “張亮軍過建安城下, 壁壘未固, 士卒多出樵牧, 高麗兵奄至, 軍中駭擾. 亮素怯, 踞胡床, 直視不言, 將士見之, 更以為勇, 總管張金樹等, 鳴鼓勒兵擊高麗, 破之” 又說 “建安在南, 安市在北”’이라는 기록이 있음. 기사에서 사비성(沙卑城)은 현재 대련의 대흑산산성(大連 大黑山山城), 한 양평(漢 襄平)은 지금의 요양시 구성(遼陽市 舊城), 안시성은 현재 해성 영성자산성(海城 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됨. 안시성의 지리적 위치를 볼 때, 요양성(遼陽城) 서남 300리, 해성 영성자산성(海城 英城子山城)의 남쪽,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의 북쪽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개주 고려성산성(蓋州 高麗城山城)이 건안성으로 추정됨.
王綿厚(2002)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건안성은 漢魏시대에는 요동군 “평곽현”(遼東郡 “平郭縣”)이었다고 함. 평곽현(平郭縣)은 지금 요남(遼南
) 옛 개주현성(蓋州縣城)이므로, 그곳에 있는 개현 고려성산성(蓋縣 高麗城山城)을 건안성으로 볼 수 있음. 고구려는 한대 고성(漢代 古城)을 차용하였던 것임. 『新唐書』高麗傳의 ‘貞觀十九年唐軍功安市·建安二城. 太宗對李勣說 建安恃險絶, 粟多而士少, 若出其不意攻之, 不相救矣. 建安得, 則安市在吾腹中’이라는 기사, 『新唐書』의 ‘建安在南, 括 安市于 腹中.’ 唐 賈耽의 『道里記』의 ‘建安在 “遼東城” 南三百里’ 라는 기사를 통해 거리를 추측해 보고, 『翰苑』卷三十引 『高麗記』에서 ‘平郭城, 今名建安城.’이라는 기사를 볼 때, 건안성은 개주 고려성산성이라고 추정함.
王禹浪·王海波(2009)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각종 문헌에는 “建安恃險絶”이라고 기록되어 있음. 그러나 개주 고려성산성은 영구시(營口市)에 있는 다른 고구려산성과 비교해 볼 때, 산등성이가 비교적 평평하고 완만함. 또한 건안성을 두고, 당 태종은 “粟多而士小”라고 하였음. 반면 개주 고려성산성의 규모는 요동반도지구의 고구려산성 가운데, 대형 산성에 속함. 이로 볼 때 건안성을 개주 고려성산성으로 보기 어려움. 안시성이 갖추고 있는 특징을 살펴보면, 첫번째 주필산(駐蹕山) 서북 唐代 里수로 8리에 위치함. 두번째, 遼河 하구와의 거리가 멀지 않음. 세번째, 한 안시현(漢 安市縣)과 탕지현(湯池縣) 부근에 있음. 네번째, 규모는 적어도 3~4만의 군대가 주둔할 수 있음. 다섯번째, 매우 풍부한 수원을 갖추고 있음. 여섯번째, 성 동남쪽에 토산(土山)이 있음. 다만 당군(唐軍)이 철수한 후, 고구려군이 토산을 없앴는지 그 여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토산(土山)의 존재는 일종의 가능성임. 일곱번째, 당 태종은 동남면과 서면 두 노선을 선택하여 안시성을 공격하였는데, 이는 성의 서면과 동남면이 가장 공격이 쉽고 수비가 어렵다는 점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성의 서면에 응당 성벽과 각루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음. 이러한 안시성의 특징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산성은 개주 고려성산성임. 그러므로 개주 고려성산성이 안시성으로 추정됨.
축조시기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馮季昌·孫進己·馮永謙(1987), 李殿福(1994)는 6세기 초 혹은 그보다 빠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함.
辛占山(1994)은 개주 고려성산성을 건안성으로 추정하며,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후(410년)에 세운 성이므로, 5세기 전후로 추정함.
林直樹(1994)는 지리적, 구조적으로 가까운 해성 영성자산성(海城 英城子山城)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5세기대로 추정함.
崔艳茹(2009)는 404년 광개토대왕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요동(遼東)공략을 시도하는데, 모용씨(慕容氏)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결국 요동을 확보하였고, 이 때 고구려는 요동지역에 방어적 성격의 산성을 대거 축조하였다고 함. 영구(營口)지구에 위치한 산성들은 404년 이후 광개토대왕이 요동지역을 장악하면서 세운 것으로, 고구려 중기 혹은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함.
魏存成(2011)은 4~5세기 이후로 추정함.
특징은 다음과 같음. 요하 하구(遼河 河口)에서 남쪽으로 복주하·복주만(復州河·復州灣)까지 비교적 큰 규모의 산성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산성이 개주 고려성산성임. 이 일대는 연해·연하(沿海·沿河)지역이어서, 교통이 편리하고, 평원 토질이 비옥하여 농업재배에 적합함. 한편 영구(營口)지구 산지에는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면서, 발해와 遼代에 철주(鐵州)가 설치되기도 함. 고려성산성이 위치한 곳은 요하 하구 좌안의 산지와 바다에 접한 평원이 서로 만나는 부분임. 이곳에서 진격해 들어가면 요동만을 따라 요하 하구까지 바로 도달할 수 있음. 또한 하천을 거슬러서 바로 요동성까지 도달할 수 있음. 퇴각시에는 동남쪽 산기슭을 따라 단전을 지나 산세가 험한 천산산맥으로 들어갈 수 있음.
개주 고려성산성은 요동평원과 요동반도 경계지대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함. 즉 요동평원에서 요동반도 혹은 요동반도에서 요동평원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고려성산성을 거쳐야 했음.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 일대로 향하는 교통로는 鳳城路(細河~草河路), 海城~岫巖路(沙鐵河~大洋河路), 蓋州~庄河路(大淸河~碧流河路) 등 세 루트가 있는데, 고려성산성은 가장 아래쪽 루트인 개주~장하로(대청하~벽류하로)의 길목에 위치함. 고려성산성은 군사전략상으로 요동평원과 요동반도의 경계지대이면서 요동평원~압록강일대 루트의 길목이라는 이중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음. 따라서 고려성산성은 해성 영성자산성(海城 英城子山城)이나 등탑 백암성(燈塔 白巖城)과 같은 비슷한 위치의 고구려산성보다 군사적으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추정됨. 더욱이 이들 각 루트에 위치한 성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고려성산성은 군사전략적으로 요하 남부지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추정됨(여호규, 1999). 또한 고구려는 발해로 유입하는 하구 근처 산에 모두 산성을 배치시켜 해상의 습격을 막고자 하였음.
한대 평곽현(漢代 平郭縣)에 ‘철관(鐵官)’, ‘염관(鹽官)’이 설치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려성산성은 지방지배라는 측면에서 주변의 다른 산성보다 중요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이와 관련하여 총 둘레가 5㎞를 넘는 초대형 산성이면서 내부에 평지가 넓게 펼쳐진 점과 산성 바로 앞쪽에 요하 하구(遼河 河口)가 위치한 점이 주목됨.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건안성으로 비정되는 개주 고려성산성은 고구려시기에도 한대 평곽현(漢代 平郭縣)처럼 철산지와 소금산지 혹은 주변 일대의 소금과 철을 총괄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추정됨. 따라서 건안성은 요동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 중진이자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이었다고 파악됨. 唐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안시성에는 안시주(安市州)라는 기미주(羈縻州)를 설치한 반면, 건안성에는 요성주도독부(遼城州都督府)를 설치한 요동성(遼東城)과 함께 그보다 한 등급 위인 ‘건안주도독부(建安州都督府)’라는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한 것은 바로 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음. 건안성은 고구려시기에 최소한 처간근지급(處間近支級) 이상이 파견된 주요 지방거점성이었다고 추정됨(여호규, 1999).
자연환경
개주시 동북 7.5㎞(馮李昌·孫進己·馮永謙(1987)과 馮永謙(1997) 등은 15리로 기록함) 떨어진 청석령진(주요령자촌) 청석관보진 고려성자촌의 동쪽 산에 위치함. 동쪽 산은 석성산(石城山) 또는 고려성산(高麗城山)이라고도 부름. 산과 촌락의 이름은 모두 성에서 유래함. 산성 서문 밖은 고려성자촌(高麗城子村), 동문 밖은 단전향(團甸鄕)인데, 촌과 산성과의 거리는 약 3㎞임. 성 남쪽의 산 아래는 곽가둔촌(郭家屯村)임. 산성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개주(蓋州)에서 대석교(大石橋)로 가는 202국도가 있고, 6㎞ 떨어진 지점에 심대(沈大) 고속도로가 있음. 산성에서 서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지점에는 영구시(營口市), 남쪽으로 7.5㎞ 떨어진 지점에는 개주시(蓋州市), 서쪽으로 12㎞ 떨어진 지점에는 발해만(渤海灣), 서북쪽으로 31㎞ 떨어진 지점에는 요하구(遼河口), 동남쪽으로 5㎞ 떨어진 지점에는 대청하(大淸河), 동쪽으로 31㎞ 떨어진 지점에는 대석교시 해룡천 고구려산성(大石橋市 海龍川 高句麗山城), 남쪽으로 42㎞ 떨어진 지점에는 적산산성(赤山山城), 북쪽으로 110㎞ 떨어진 지점에 요양(遼陽)이 있음. 날씨가 좋을 때 높은 산의 성벽 위에 서면 서남쪽으로는 개주시(蓋州市), 서쪽으로는 발해만(渤海灣), 동남쪽으로는 대청하(大淸河), 서북쪽으로는 요하(遼河) 하구와 영구시(營口市)를 볼 수 있음. 성 바깥 고려성자촌(高麗城子村) 서쪽 1.5㎞ 떨어진 천안구촌(泉眼溝村)에 고분군이 있음. 서남쪽으로 2.5㎞ 떨어진 지점에 明代의 개현청석관보유지(蓋縣靑石關堡遺址)가 있음.
서쪽 골짜기를 통해 성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데, 골짜기 입구 남북 양측에 300m 전후의 노청산(老靑山; 남쪽)과 노경산(老慶山; 북쪽)이 있음. 두 산에서 동쪽으로 기다랗게 뻗은 산줄기가 남북 양쪽에서 타원형을 이루며 산성을 감싸다가 골짜기 입구 맞은편인 동남쪽에서 약간 낮은 고개를 이루며 만남. 노경산(老慶山)에서 뻗은 북쪽 산줄기는 일직선으로 그다지 험준하지 않은 반면, 노청산(老靑山)에서 뻗은 남쪽 산줄기는 암벽으로 이루어져 매우 험준함. 고려성산성(高麗城山城)은 골짜기를 제외한 사방이 산등성이로 둘러싸여 있고, 내부에는 평지가 넓게 펼쳐진 천혜의 요새임.
산성 동벽의 남단은 산성 남부의 산맥과 서로 접해 있는데, 그 결합 부분에는 크고 높은 산구(山丘)가 있음. 동벽 꼭대기에 서서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이 산구가 성 안쪽 깊숙이 위치해 있고, 성 안쪽으로 기울여져 있는 지세임을 알 수 있음. 서남 산봉우리는 해발 300m이고, 산세는 매우 험준함. 산성에 있는 산들은 천산산맥(千山山脈) 서부의 지맥(支脈)에 속함. 성내 지세는 동남이 높고, 서북이 낮음. 성내에는 민가가 있고, 대부분의 토지는 과수원으로 경작됨. 서벽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산성 중앙에 있는 금전산(金殿山) 후방이 산요(山坳)이고, 두 줄기의 산등성이가 남북 양익(兩翼)으로 뻗고 있음을 볼 수 있음. 산성 동남쪽에는 대청하(大淸河)와 개평하(蓋平河)가 있음.
유물정보
철제 등자(鐵鐙子) 1점, 철제 가래 1점, 철제 수레바퀴 줏대축 1점, 철제 솥(鐵釜) 1점, 철제 단지 1점, 철제 화살촉(鐵鏃) 1점, 철갑편(鐵札甲片) 1점, 기와편(瓦片) 2점, 절구(臼) 1점, 승문벽돌(塼) 1점, 단지(盆) 1점, 단지편 1점, 동제 고리(銅環) 1점
참고문헌
· 馮李昌·孫進己·馮永謙, 「古城址」『東北歷史地理論著匯編』, 1987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初探」『中國考古學會第五次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988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陳大爲, 「遼寧境內高句麗遺跡」『遼海文物學刊』 1989-2, 1989
· 林直樹, 「中國東北部の高句麗山城」『靑丘學術論集』 5, 1994
· 辛占山,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孫力, 「遼寧的高句麗山城及其意義」『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崔艶茹·馮永謙·催德文, 『營口市文物志』, 遼寧民族出版社,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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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성산성; 청석령산성; 청석관산성; 석성산산성(高麗城山城; 靑石嶺山城, 靑石關山城; 石城山山城) 자료번호 : ku.d_0001_0110_001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