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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산산성(塔山山城)

 
  • 구분유적
  • 시대고구려
  • 문서번호S000887
  • 위치(출토지)遼寧省 深陽市 蘇家屯區 陳相屯
  • 지역심양(瀋陽市)
  • 유형성곽>산성
  • 형태사항성벽 둘레는 1,000m(馮永謙, 1986; 馮季昌․孫進己․馮永謙, 1987; 孫進己․馮永謙, 1989; 沈陽市文物管理辦公室, 1993; 李殿福, 1994; 陳大爲, 1995; 李殿福, 1998; 여호규, 1999; 王禹浪·王宏北, 2007; 國家文物局, 2009), 1,200m(王綿厚, 2002), 1,290m(三上次男, 1990), 1,300m(東潮․田中俊明, 1995), 1,500m(王綿厚, 1994; 魏存成, 2002), 2㎞ 이상(陳大爲, 1988)이라는 기록이 있음.│성벽의 규모는 잔고 1m, 기본 너비 3~4m(王綿厚, 2002)라는 기록, 잔고 1m, 너비 3m라는 기록(沈陽市文物管理辦公室, 1993; 王禹浪·王宏北, 2007), 잔고 1m, 너비 3~5m라는 기록(國家文物局, 2009)이 있음. 11점 
 

출토지

 

요녕성 심양시 소가둔구 진상둔(遼寧省 深陽市 蘇家屯區 陳相屯)

 

조사내용

 

 
:1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44삼상차남, 삼지조사랑, 도변삼삼, 와전리평, 전중요웅
(三上次男, 三枝朝四郞, 渡邊三三, 窪田利平, 田中堯雄)
5월 28일, 무순 북쪽에 있는 고이산성을 조사한 다음, 평소에 전해 들었다던 탑산산성에 대한 조사를 실시함. 三上次男, 1990, 『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 으로 발표됨.
1985 2월 심양시 인민정부가 시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함.
1988 12월 요녕성 인민정부가 성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함.
1990왕면후
(王綿厚)
 
1992임직수 등
(林直樹 等)
5월, 남문 부근에서 붉은색 기와편을 발견함.
林直樹, 1994, 「중국동북부의고구려산성(中國東北部の高句麗山城)」『靑丘學術論集』5 로 발표됨.
2002왕면후
(王綿厚)
 
1920년대팔문장삼랑
(八木奘三郞)
불탑만 확인하고, “심양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탑산에 산성이 있다”는 『성경통지(盛京通志)』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음(八木奘三郞, 1926).
1960년대이문신
(李文信)
李文信, 1962, 『요녕사적자료(遼寧史迹資料)』으로 발표됨.

 

구조특징

 

성이 위치한 탑산은 평원에 우뚝 솟아 있는데, 동북~서남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음. 북면 중간의 산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전체적으로 북쪽과 서쪽이 높고, 남쪽과 동쪽이 낮으며, 중간은 산골짜기임. 성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구릉에서 중간이 움푹 패인 곳의 경사면을 골라 축조됨. 즉 중앙의 작은 분지를 적당한 크기의 산릉이 둘러싸고 있는 듯한 지형임.
북문이 북쪽 끝이 되는 북벽 바깥은 언덕을 이루고, 산기슭 가까이에는 강이 흐르고 있음. 평원에 성벽을 노출시킨 이 부분을 위해서 해자가 있음.
산성 북쪽(뒷편) 정상부에 6각 7층의 전탑(塼塔)이 있음. 이 전탑으로 말미암아 ‘탑산’이라는 산 이름이 유래하였고(沈陽市文物管理辦公室, 1993), 산이름을 따라 산성을 탑산산성이라고 부름.
산성은 산골짜기를 포함하고 있는 포곡식 산성임이고, 산성 평면은 불규칙형임. 산성의 가장 낮은 곳과 가장 높은 곳의 차이는 약 50m임(沈陽市文物管理辦公室, 1993).
성안 도로의 흔적으로 보면, 남문에서 북문으로 빠져나가는 길이 주 도로임. 중앙 사원의 배후에서 동남문과 서문으로 넘어가는 도로와 북쪽 방향의 주 도로에서 나뉘어져 동남문쪽으로 향하는 도로가 있음.
성벽, 성문, 건물지, 우물, 샘 등이 남아 있고, 유물로는 기와편 등이 출토됨.
성벽은 남문에서 좌우로 퍼져 나가 북쪽으로 꺾인 후 산의 능선을 타고 올라가 북문에 도달해 다시 합류함. 성 동남모서리에 성벽이 잘 남아 있음.
성벽 축조방법에 있어서는 기초는 돌로 쌓아서 만들고 성벽은 황토를 다져서 축조하였다는 기록(三上次男, 1990; 王禹浪·王宏北, 2007)과 토축이라는 기록(孫進己·馮永謙, 1989; 沈陽市文物管理辦公室, 1993; 李殿福, 1994; 陳大爲, 1995; 馮永謙, 1997; 李殿福, 1998; 魏存成, 2002)이 있음. 성벽 가운데 동남모서리 부근이 가장 잘 남아 있음(沈陽市文物管理辦公室, 1993).
성문의 개수와 관련하여 2개(陳大爲, 1995), 동남문·동북문·서문·북문 등 4개(東潮·田中俊明, 1995), 동남문·동북문·서문·남문·북문 등 5개(三上次男, 1990; 林直樹, 1994; 여호규, 1999)라는 기록이 있음. 성문 가운데 중심문(主門)에 대하여 동남문(東潮·田中俊明, 1995; 王綿厚, 2002), 남문(三上次男, 1990; 여호규, 1999)이라는 견해가 있음.
남문, 북문, 동남문, 동북문에 고구려 기와가 흩어져 있다고 하면서, 문루가 존재하였다고 추정하기도 함(林直樹, 1994).

 

역사적 의미

 

탑산산성은 요동평원과 천산산맥 경계지대 서북쪽에 자리 잡은 요동평원 한복판의 산상에 위치함. 서남쪽에는 요동성이 위치한 요양시, 동북쪽에는 신성으로 비정되는 무순 고이산성이 있음. 서북쪽으로는 가장 북쪽의 요하 도하로(遼河 渡河路)인 신민(新民) 고대산~번양로(高臺山~潘陽路), 동남쪽으로는 가장 위쪽의 요동평원~압록강로인 본계~봉성로 등으로 이어짐. 탑산산성은 요동평원을 가로지르는 교통로 및 요하~요동평원~압록강을 잇는 교통로의 중간 거점인 것임(여호규, 1999).
개모성으로 비정되는 탑산산성의 전략적 위상은 645년 당군의 진군로를 통해 파악할 수 있음. 당 이세동(李世動)이 이끌던 당군은 통정진(通定津)에서 요하를 도하한 다음(신민 고대산~번양로), 현토성과 신성을 공격하다가 여의치 않자, 개모성·요동성·백암성을 차례로 함락시킨 다음, 안시성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하고 퇴각함. 이러한 당군의 진군로는 요동평원에서 압록강 일대로 향하는 교통로와 거의 일치함.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 일대로 향하는 교통로는 크게 본계~봉성로(細河~草河路), 해성~수암로(沙鐵河~大洋河路), 개주~장하로(大淸河~碧流河路) 등 세 루트가 있음. 이 가운데 탑산산성은 요동평원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가장 위쪽 루트인 본계~봉성로의 북쪽 진입로를 봉쇄하고 있음. 한편 본계~봉성로는 심양의 남쪽인 요동성에서도 진입할 수 있는데, 백암성이 길목에 자리잡고 있음. 그리고 해성 영성자산성(안시성)은 해성~수암로(海城~岫巖路), 개주 고려성산성(건안성)은 개주~장하로(蓋州~莊河路)의 입구에 각각 위치하고 있음. 따라서 645년 당군이 개모성(탑산산성)에 이어 요동성과 백암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는 것은 요동평원~압록강의 진입로를 차례로 공략하는 전술을 구사하였음을 반영함. 당이 이러한 전략을 구사한 것은 고구려가 요동평원~압록강 교통로상에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하였기 때문임. 만약 당군이 어느 성을 건너뛰고 다른 성을 공격하거나, 진입로 입구에 위치한 성을 함락시키지 않고 곧바로 압록강 일대로 진격할 경우, 보급로를 차단당하거나 배후에서 기습공격을 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했음(여호규, 1999).
산성 안 중앙부 및 성벽 부근에 계단형태의 대지가 다수 관찰되는데, 각 대지에는 건축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됨. 이로 볼 때, 탑산산성은 단순히 전쟁시의 일시적 거점이 아니었고, 성 안에 상당한 규모의 저택을 지은 상주자가 있었던 것이 확실함(三上次男, 1990). 즉 탑산산성도 다른 고구려산성처럼 군사방어뿐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 기능하였던 것임. 특히 645년 당군이 개모성을 함락하고 1만명 이상을 노획하고 만석의 식량을 확득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지방거점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구당서』권199 고려전(高麗傳)에는 고구려 후기의 지방통치형태를 전하면서 “밖으로는 주현(州縣) 육십여 성을 두었다. 큰 성에는 욕살(褥薩) 한 명을 두었는데, 이는 도독(都督)과 비견된다. 제성(諸城)에는 도사(道使)를 두었는데, 이는 자사(刺史)에 비견된다. 그 밑에는 각각 요좌(僚佐)가 있어서 조사(曹事)를 분담한다”라는 기사가 있음. 『삼국사기』권37 잡지리지(雜志地理)의 항목에는 고구려 주군현(州郡縣)으로 164개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음(삼상차남은 『구당서』의 ‘60여 성’, 『구당서』권120 고려전의 ‘주현(州縣) 60’이라는 기록은 160여 성의 잘못된 표기로 추정하기도 함(三上次男, 1990 앞의 책)).
탑산산성은 이 가운데 현성(縣城)에 해당되는 성으로 추정됨. 이로 볼 때, 현의 통치자인 도사(『신당서』고려전에는 ‘나머지 성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를 둔다. 이를 또한 도사라고 부르고, 자사에 비견된다’는 기록이 있음)의 거주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三上次男, 1990). 고구려시대의 지방지배자는 봉건영주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여하튼 그들은 일족으로 이루어진 귀족임. 그렇다면 성안의 저택은 그들의 것으로 추정됨. 즉, 일족의 통령(統領; 동시에 도사) 저택이나 그것에 부속된 관위(官位)를 중심으로 동족(同族), 집의 종복, 부하의 저택이 신분이나 임무의 성격에 따라 적당하게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그들은 통치자·귀족·전사로서 성 안에 거주하면서 성 밖에 사는 다수의 부민과 노비를 부리며 지배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임(三上次男, 1990).
고구려의 산성은 전쟁시에 이용되었고, 평상시에는 거주지로서 평지성을 세웠다는 견해에 대해, 이 경우는 특수한 케이스이고 일반적이지 않다는 견해가 있음. 평지와 접하고 내부에 충분한 거주시설을 갖추고 있는 탑산산성에서는 또 다른 평지성을 축조할 이유가 없다는 것임. 이것은 고이산성이나 백암성도 마찬가지였다고 함. 산성 이외에 평지성이 축조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특수한 정치적 사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수도였던 집안의 국내성이나 평양의 평양성과 같은 경우), 시대적으로도 선후관계가 있어서 산성에서 평지성으로 차츰 옮겨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함(三上次男, 1990).
李殿福(1995)은 탑산산성의 성벽을 흙으로만 축조한 것으로 파악하여, 이렇게 흙으로만 성벽을 축조하는 방법은 고구려가 요동을 점유한 후에 비로소 시작한 것으로 보았고, 고구려 후기(5세기 중엽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함.
여호규(1999)는 탑산산성이 요동평원상의 전략적 거점이면서 본계~봉성로 봉쇄하던 군사중진이었다고 함. 그리고 요동성과 백암성이 본계~봉성로의 남쪽 진입로를 봉쇄하였다면, 탑산산성은 동남쪽 15㎞에 위치한 변우산성과 함께 북쪽 진입로를 봉쇄하였다고 추정함. 탑산산성은 요동평원~압록강에 구축된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구성한 군사방어성이었음. 따라서 백암성이 6세기 중반에 개축된 사실을 고려하면, 탑산산성은 늦어도 6세기 초에는 축조되었다고 추정함.
王綿厚(2002)는 산성 안의 유적과 출토유물을 보아 고구려 중후기의 산성으로 추정함.
지명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李文信(1962), 馮季昌·孫進己·馮永謙(1987), 孫進己·馮永謙(1989), 沈陽市文物管理辦公室(1993), 東潮·田中俊明(1995), 陳大爲(1995), 馮永謙(1997), 王綿厚(2002), 魏存成(2002)는 고구려 개모성(蓋牟城)으로 비정함.
李文信(1962)은 고구려 개모성과 당대 요동 개모주(蓋牟州)로 추정함.
馮季昌·孫進己·馮永謙(1987)은 『신당서』권143 지리지 당(唐) 가탐(賈耽) 『도리기(道里記)』에는 ‘도호부(요성주(遼城州); 현 요양시) 동북쪽으로 고개모·신성(古蓋牟·新城; 무순 고이산성)을 거쳐, 발해의 장령부(長嶺府; 현 淸原英額門 일대)를 지나 1500리를 지나면 발해의 왕성(발해 상경용천부; 현 黑龍江 寧安縣 世环鎭)이다’라는 기록이 있음. 탑산은 요양 동북에 있고, 무순 또한 탑산 동북에 있음. 이로 볼 때, 탑산산성은 개모성으로 추정할 수 있음. 645년 당태종이 요동을 정벌할 때, 4월 임자일(壬子日)에 이적(李勣)과 강하왕 도종(江夏王 道宗)이 개모성을 공격하여 11일 동안 머물렀는데, “계해(癸亥)에 이적 등이 개모성을 점령하고 2만여구와 식량 10만석을 획득”하였고, “6월 기해년(己亥年) 개모성을 개주로 삼았다”는 기록(『자치통감』권198)이 있음. 이 첫번째 원정에서 당태종은 안시성전투에서 불리했기 때문에 서쪽으로 퇴각하면서 개·요(蓋·遼) 두 주(州)를 점령하고 들어갔음(『신당서』권43 『도리기(道里記)』). 668년 이적이 다시 동쪽으로 원정하면서 다시 개모주를 설치함. 다만 100여년이 지난 후, 가탐(賈耽)이 『도리기(道里記)』를 편찬할 때, 주(州)의 건치(建置)가 이미 없어져서 “고개모(古蓋牟)”라고 썼다고 할 수 있음.
沈陽市文物管理辦公室(1993)은 『신당서』권43에 “自都護府(현 요양)東北經古蓋牟·新城 …… 至渤海王都.”라는 기록이 있는데, 탑산산성은 바로 요양과 무순 고이산성의 사이에 위치함. 645년(정관 19년) 당태종은 요동원정에 나서는데, 4월 이적이 개모성을 공취하였고, 6월 기해(己亥)에 개모성을 개주로 삼았음(『자치통감』권198).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670년 정월에 요동지역에 주현을 설치하면서 다시 개모주가 설치됨. 여러 정황을 보았을 때, 탑산산성을 고구려가 요동을 점유할 때의 개모성으로 볼 수 있음. 또한 개모성은 당대 이적과 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를 정벌한 후 설치한 개모주인데,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서 관할한 42주 가운데 하나임.
林直樹(1994)는 『구당서』와 『신당서』에 의하면, 안동도호부(요양)에서 신성(무순)에 이르는 길에 고구려의 개모성이 있다고 함. 그리고 개모성을 함락시킨 후, 요동성을 공격하였다는 기사를 통해 탑산산성을 개모성이라 볼 수 있음.
東潮·田中俊明(1995)는 『구당서』위정전(韋挺傳)에 따르면, ‘위정(韋挺)은 개모성을 치고 그곳에 주둔할 것을 명 받았는데, 신성과 인접한 곳에 있어 온종일 전투소리가 들렸고, 이에 두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함. 『신당서』지리지 가탐 도리기에는 ‘안동도호부에서 동북으로 개모·신성을 지나고, 발해의 장령부(長嶺府)를 지나 1500리를 지나면 발해의 왕성’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개모는 안동도호부에 속한 요양에서 동북쪽으로 신성에 이르는 길 도중에 있었고, 신성과는 아주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음. 이로 볼 때, 탑산산성이 개모성으로 가장 유력하다고 여겨짐. 한편 산성 남쪽에 흐르는 사하(沙河)를 따라 10㎞ 내려가면, 소가둔구 사하포향 위가루사방대(蘇家屯區 沙河鋪鄕 魏家樓四方隊)가 나오는데, 그 곳에 위가루자고성(魏家樓子古城)이 있음. 이 성은 1972년에 발견되었는데, 평면이 방형이고, 한 변의 길이가 200m를 넘지 않음. 본래 요동군의 현성으로 파악되는데, 현토군의 서개마현(西蓋馬縣)이 이동하였을 가능성이 있음. 개모(蓋牟)라는 이름이 서개마(西蓋馬)에서 왔다고 하는 견해를 볼 때, 개모성과 서개마현이 서로 가까이 있어야 함. 고구려가 이 현성을 탈취한 것과 개모성의 축조가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있음.
馮永謙(1997)은 『구당서』강하왕(江夏王) 도종전(道宗傳)에는 “大軍討高麗, 今道宗與李靖爲前鋒, 濟遼水, 克蓋牟城.”이라는 기록, 『자치통감』권197 당기전(唐紀傳) 정관(貞觀) 19년조에는 “李世勣·江夏王道宗攻高麗蓋牟城. …… 癸亥, 李世勣等拔蓋牟城, 获二萬余口, 粮十余萬石.”이라는 기록, 『新唐書』地理志에는 “自都護府東北經古蓋牟·新城.”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으로 볼 때, 개모성은 요하 동쪽에 있고, 안동도호부(현 요양시)와 신성(현 무순시 북쪽 고이산성)의 사이에 있음. 이로 볼 때, 탑산산성이 고구려 개모성으로 추정됨.
王綿厚(2002)는 탑산산성의 위치와 당 가탐(唐 贾耽)의 『도리기』에 기록된 교통노선을 볼 때, 개모성이라고 추정함. 개모성은 『舊唐書』에 처음 등장함. 『구당서』권77 위정전(韋挻傳)에는 “(貞觀)十九年將有事于遼東 …… 仍今 白衣散從, 及前軍破蓋牟城, 詔挺統兵士鎮蓋牟, 示漸用之也. 挺城守去大軍懸遠, 與高麗新城鄰接, 日夜戰斗, 鼓噪之聲不絕.”이라는 기록이 있음. 그리고 『新唐書』卷43 地理志 引唐贾耽의 『道理記』에는 “自(安東)都護府東北, 經古蓋牟·新城, 又經渤海長岭府, 一千五百里至渤海王城.”이라는 기록이 있음. 『舊唐書』와 『新唐書』에 기록된 “蓋牟”가 “安東(현 요양)”과 “新城” 사이에 위치한다는 점을 볼 때, 고구려 개모성이 위치한 지점은 “안동도호(요양)”에서 동북쪽으로 “신성”으로 가는 교통로임. 그렇다면 탑산산성은 개모성이라고 할 수 있음.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탑산산성을 개모성으로 추정하고 있고, 당대 이적(李勣)과 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요동군을 수복한 뒤 설치한 개모주치(蓋牟州治)로서, 요동도호부에서 관할한 42주의 하나로 추정하고 있음. 후대에 이곳은 요성주(遼城州)로부터 발해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가 됨.

 

자연환경

 

심양시에서 남쪽으로 30㎞ 떨어진 소가둔구 진상둔의 동(북)쪽에 있는 해발 125m의 탑산(塔山)에 위치함.
탑산 기슭에 하묘자촌(下廟子村)이 있는데, 신도비(神道碑)가 남아 있음. 비에는 “皇朝浩奉光禄大夫正藍旗漢軍都統趙公諱夢豸神道·康熙二十六年歲次丁卯孟夏吉旦立”이라는 명문 2열이 새겨져 있음. 부근에 청대 정남기 한군도통 조씨(淸代 正藍旗 漢軍都統 趙氏)의 고향이 있는 등 상당한 규모의 촌이었다고 할 수 있음.
산성 남서쪽으로 약 3㎞ 떨어진 지점에 심단철로(沈丹鐵路)의 진상둔역(陳相屯驛)이 있음. 서쪽으로 5㎞ 떨어진 지점에 위가루자촌 한성(魏家樓子村 漢城)이 있음. 사하(沙河)를 거슬러 15㎞ 정도 가면 본계 변우산성(邊牛山城)이 있음.
탑산은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 산간지대로 진입하는 길목에 있음. 서북 뱡향으로는 요동평원이 펼쳐져 있고, 동남쪽으로는 10~20㎞ 정도 평지가 전개되다가 천산산맥의 지맥들이 나타남. 이들 천산산맥 지맥들은 소하 남안·북안을 따라 동남에서 서북뱡향으로 뻗어 있으며, 그 사이로 천산산맥 산간지대로 진입하는 교통로가 발달되어 있음. 탑산은 요동평원과 천산산맥 경계지대의 서북쪽에 위치하여, 요동평원을 가로지르는 교통로의 중간지점이자,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 산간지대로 진입하는 교통로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음.
산성 남쪽으로는 동서로 흐르는 사하(태자하의 지류)가 접해 있음. 사하가 산성과 진상둔역 사이를 통과함.

 

유물정보

 

철제 부이(鐵制斧頤) 1점, 토기 손잡이(把手) 1점, 기와편(瓦片) 3점,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 1점, 귀면와(鬼面瓦) 1점, 석함(石函) 1점, 석비(石碑) 3점

 

참고문헌

 

· 八木奘三郞, 「陳相屯驛の塔山と佛塔」『滿洲舊蹟志』 下篇,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26
· 馮季昌·孫進己·馮永謙, 「古城址」『東北歷史地理論著匯編』, 1987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初探」『中國考古學會第五次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988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三上次男, 「東滿風土雜記」『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 1990
· 沈陽市文物管理办公室, 『沈陽市文物志』, 沈陽出版社, 1993
· 林直樹, 「中國東北部の高句麗山城」『靑丘學術論集』 5, 1994
· 孫力, 「遼寧的高句麗山城及其意義」『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4
· 辛占山,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王禹浪, 「中國東北地區古城文化遺跡概述」『黑龍江民族叢刊』 1995-4,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李殿福, 「高句麗山城硏究」『北方文物』 1998-4, 1998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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