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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五女山城)

 
  • 구분유적
  • 시대고구려 초기
  • 문서번호S000174
  • 위치(출토지)遼寧省 桓仁滿族自治縣 桓仁縣城 동북 8.5㎞의 오녀산에 위치. 산성의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5°23'44", 북위 41°14'36"임.
  • 지역본계(本溪市)
  • 유형성곽>산성
  • 형태사항오녀산 동남쪽은 큰 골짜기를 끼고 있고, 서·북·동쪽은 약간 낮은 곳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수십m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이며, 산의 정상은 넓은 평탄지로서 천혜의 요새지이며, 산성은 정상의 평탄지와 완만하게 경사진 동쪽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음.│동서 양쪽은 중부지역보다 다소 높으며 지세는 대체로 평탄하고 북쪽 끝에는 약간 높고 평평한 산등성이가 있는데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펼쳐져 있으며, 동남쪽 끝의 “點將臺”라 불리는 곳이 산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임.│평면상 대체로 불규칙한 長方形으로 신발 모양에 가까운데 남북 양 끝 쪽은 동부를 향하여 돌출되고(凸), 동부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있으며, 면적 약 60만㎡로서 남북길이 1,540m, 동서너비 약 350-550m, 전체 둘레 4,754m의 규모임.│산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은 낮은 형세로, 서부와 서남부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동부지역은 경사진 산기슭임, 산성은 산 위와 아래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주요 부분은 산 정상에 위치하고 산 정상부는 약 10만㎡로서 남북길이 600m, 동서너비 110-220m, 평면은 狹長한 橢圓形임, 오녀산 주봉에 해당하며, 산성의 서부와 서남부에 위치하고, 해발 고도 평균 800여m로 산 정상 서남부는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고 넓으며, 주위는 깎아지른 절벽인데, 1-3호 대형 건물지, 군사 유적지, 초소, 거주지, 저수지, 전망대, 서문, 산 위 동북쪽 골짜기 1,2호 성벽 등 유적은 대부분이 이곳에 분포해 있음, 산의 아랫부분은 다시 산성의 동부, 북부, 동남부로 나눌 수 있고 대부분은 평탄하고 완만한 산기슭이지만 유적은 비교적 적으며 주요 유적으로 남벽과 남문, 동벽과 동문, 초소 유적지 등이 있음. 664점 
 

출토지

 

요령성 환인만족자치현 환인현성 동북 8.5㎞의 오녀산에 위치. 산성의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5°23'44", 북위 41°14'36"임. (遼寧省 桓仁滿族自治縣 桓仁縣城 東北 8.5㎞ 五女山 位置. 山城中心座標 東京 125°23'44", 北緯 41°14'36".)

 

연대

 

고구려 초기에 축조되어 遼, 金 때 까지 사용됨.

 

조사내용

 

 
:1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05조거룡장
(鳥居龍藏)
日人 鳥居龍藏이 환인 일대 답사 및 1910년대 일본인이 촬영한 사진 원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다수 소장.
1944삼상차남
(三上次男)
日人 三上次男이 五女山城 답사.
1961환인현인민위원회
(桓仁縣人民委員會)
縣級 문물보호단위로 지정.
1961본계시인민위원회
(本溪市人民委員會)
市級 문물보호단위로 지정
1963요령성인민위원회
(遼寧省人民委員會)
省級 문물보호단위로 지정.
1964중조연합고고대
(中朝聯合考古隊)
4일간 오녀산성 등 조사했고, 북한 김일성대학의 박시형 교수 등 9명, 중국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의 이전복 등 참여.
1974요령성문화국문물조사조
(遼寧省文化局文物調査組)
오녀산성의 보호 상황 조사.
1978길림대학 역사계
(吉林大學歷史科)
학생 100여 명이 위존성 교수의 인솔 아래 오녀산성과 하고성자고성 등을 3일간 조사.
1986환인현문화국
(桓仁縣文化局)
‘환인현 문물관리소 오녀산성 보호 책임제’ 발표.
1986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 환인현연합발굴대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本溪市, 桓仁縣聯合發掘隊)
1,000㎡ 발굴. 정상부 서부에서 건물지 발견
1987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요령성박물관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遼寧省博物館)
吉林省 문물고고연구소 이건재, 遼寧省博物館 부관장 왕명후 등 개인적으로 고고조사 진행.
1996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
(遼寧省文物古考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
산성에 대한 전면조사 실시해서 Ⅰ·Ⅱ구역과 산 정상에 있는 2개의 초소 발굴했고 산 정상의 돌계단, 동북 골짜기의 1호-2호벽, 서문에 대한 부분 조사도 실시함
발굴 총면적은 1700여㎡로 발굴 결과 주거지 15, 대형 건물지 1곳(1호), 재구덩이 11곳 발굴함.
1997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
(遼寧省文物古考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
點將臺 서쪽의 Ⅲ구역 중점 발굴의 일환으로 5×5m 트렌치 67개(일련번호 97 HWT 70-T136)설치 및 Ⅱ구역에서 5×5m 트렌치 10개 발굴(일련번호 97HW T56-T65) 또 2호 대형건물지 기초조사, 동문-남문 발굴, 산성 측량함, 발굴 면적은 총 1,638㎡로 발굴 결과 주거지 22곳, 대형 건물지 1곳(2호) 발굴함.
1998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
(遼寧省文物古考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
서문 동쪽의 Ⅳ구역 중점 발굴의 일환으로 트렌치 15개(일련번호 98HWT401-T415)설치해서 사방 45㎡ 발굴했고, 옥황관(옥황묘, 옥황각) 부근에서 14×1m, 24×1m, 6×1m 등 3개의 도랑[溝] 발굴(일련번호 98HWG1-G3)한 한편 동벽, 남벽의 기단부와 성벽 윗면에 대한 발굴도 진행, 발굴 면적은 1,015㎡로 발굴결과 주거지 12곳 추가로 확인함.
2002왕면후, 신점산, 이신전
(王綿厚, 辛占山, 李新全)
王綿厚가 辛占山, 李新全 등과 함께 개인적으로 조사하여 산성 중부에서 7개 초석 건물지와 다량의 유물 발견.
1999 및 2003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심양시문물고고연구소, 금주시문물고고연구소, 환인현문물관리소
(遼寧省文物古考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沈陽市文物古考硏究所, 錦州市文物古考硏究所, 桓仁縣文物管理所)
-1999년 : 동벽에 대한 추가 측량, 무너진 성벽에 대한 발굴과 해부작업
-2003년 : 총면적 1,300㎡, Ⅱ구역 트렌치 5×5㎡ 3개(일련번호2003HWT66-T68), Ⅳ구역 트렌치 12개(일련번호 2003HWT416-T427), Ⅴ구역 트렌치 9개(일련번호 2003HWT501-509), 사방 3㎡, Ⅲ구역 추가 조사해서 3호 대형건물지 발굴, 2호 대형건물지 추가 발굴, 산 아래 초소 유적 발굴, 저수지 발굴, 서문과 바깥 도로 발굴

 

구조특징

 

성벽은 산 정상부 및 그 동부 산기슭에 자리하고, 산 정상부의 사방은 높이 100m가 넘는 수직 절벽이 둘러싸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낭떠러지와 산봉우리가 연이어져 있음. 북부 산등성이의 바깥쪽도 수직절벽으로 이런 험준한 자연 山勢를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음. 깎아지른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은 서·남·북면에는 인공성벽을 축조하지 않았고 특히 서면과 남면은 높이 100-200m의 깎아지른 수직 절벽임. 인공성벽 길이 565m로 전체 성벽의 12%에 불과하며 지세가 험준하지 않은 동쪽과 동남쪽 산비탈과 골짜기 입구에 축조.
인공성벽은 모두 돌로 축조한 석축성벽인데 벽체의 외벽은 보통 장대석[大石條]을 기단으로 하고 그 위에 쐐기형 돌(契形石)을 맞물리도록 층을 교차해 쌓아 마무리하였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들여쌓았음. 안채움부는 북꼴돌로 교차해 첩첩이 눌러 쌓고 이와 병행해 외벽의 쐐기형 돌(契形石)을 서로 어긋나게 교차해 서로 맞물린 모양을 띠고 빈틈은 잔돌을 채워 넣어 평평하고 견고하게 했으며 내벽의 벽면은 불규칙한 돌덩이(石條) 혹은 판석[石板]을 눌러 맞물리도록 첩첩이 쌓았음
동벽 제5구간, 산 위 동북 골짜기 1호 성벽의 외벽은 보통 산기슭 아래부터 쌓기 시작하였고, 내벽은 산기슭 위에서부터 쌓기 시작했음. 외벽은 일정한 높이까지 쌓고 내벽의 기단부와 높이가 비슷해지면 내외벽을 동시에 쌓기 시작했는데 기단부는 산세에 따라 축성했고 이로 인해 밖이 높고 안이 낮은 體城[벽체]이 만들어짐. 경사가 가파른 산기슭의 경우에는 內托式으로 외벽을 쌓고, 외벽과 산기슭 사이에 북꼴돌을 쌓아 채워 넣었음. 이로 인해 외벽만 있고 내벽은 없는 외면쌓기가 되고, 상부에는 일반적으로 키가 낮은 성가퀴를 쌓았음.
동벽 제2, 3구간의 외벽과 서문 북측의 석벽은 외벽의 경우 일반적으로 장대석을 1-5단 쌓아 올린 다음, 쐐기형 돌을 꽉 맞물리도록 평평하게 쌓았음. 이러한 축성법은 서문 북측 석벽에서도 발견되는데, 다만 기단석 크기는 약간 작음.
내벽의 경우 대부분 판석과 괴석으로 쌓아 올렸고 벽면은 가지런하지만 횡으로 가지런하지는 않음. 성벽 하단에는 보통 흙을 북돋아 보호하였고, 동벽 제5-6구간, 남단 제4구간과 같이 내벽을 흙으로 반쯤 덮은 경우도 있음. 또한 서문 북단 석벽과, 남단 제4구간과 같이 내벽과 성벽 윗부분까지 흙이나 돌을 덮은 경우도 있음.
안채움부[墻芯]는 북꼴돌을 정교한 규칙에 따라 서로 맞물리도록 쌓았는데, 외벽의 벽면을 쐐기형 돌로 1단 쌓은 다음, 그 안쪽 안채움부에 쐐기형돌과 맞물리도록 북꼴돌을 쌓아 올렸음. 쐐기형 돌의 머리가 바깥을 향하고 뾰족한 꼬리는 안을 향하도록 쌓았기 때문에 내부는 자연히 삼각형의 빈틈이 생기게 됨. 북꼴돌을 그 사이에 끼워서 맞물리도록 하여 빈틈이 없이 꽉 들어맞도록 쌓았음. 쐐기형 돌을 따라 꽉 맞물리게 평평하게 쌓아 상층 꼬리 부분은 다시 아래층 북꼴돌의 뾰족한 가장자리 위를 누르게 되고 북꼴돌의 뾰족한 부분은 아래층 쐐기형 돌의 꼬리부분을 누르게 됨. 이렇게 쌓아올리기를 반복하여 층층이 교대로 눌러 쌓으면 벽체의 견고성이 증가하고, 바깥으로 향하려는 장력(張力)은 감소하게 됨. 이런 종류의 성벽 축조방식은, 일정한 역학 원리를 갖고 있음. 이런 축조방식에 부합되도록 하기 위해 성돌 모양을 쐐기형 돌과 북꼴돌로 가공한 것임.
성벽 윗부분의 바깥쪽에는 대부분 성가퀴[女墻}를 설치하였고, 성가퀴 기단을 따라서 안쪽에 네모난 돌 구멍[石洞]을 쌓았음.
성벽은 주지했듯 인공성벽과 천연성벽 두 종류로 구분가능한데 천연성벽은 가파른 절벽 혹은 돌출한 산등성이를 성벽으로 삼는 것으로 인공작업이 가해지지 않았음. 형태에 따라 가파른 절벽 성벽(峭壁墻) 및 산등성이 벽(山背墻) 등 2종류로 구분됨. 인공 성벽은 인공으로 수축한 성벽으로 오녀산성의 성벽은 모두 석축이며 일부 무너진 성벽과 꼭대기는 흙으로 되어 있고 산세가 완만한 남쪽의 동단과 동쪽에만 축조했음. 성벽 규모 : 천연성벽 4,189m, 인공성벽 565m로 총 길이 4,754m.
남벽은 정상부 동남 모서리에서 산 아래의 남문 동쪽 구간까지로 천연성벽 2구간과 인공성벽 2구간으로 구성되며 평면은 대체로 굽은 자 모양(折尺形)으로 길이는 424m임.
동벽은 남문 동쪽에서 북부 절벽까지 구간으로 천연성벽 6구간, 인공성벽 6구간으로 구성되며 인공성벽은 주로 가파른 산기슭과 골짜기 입구에 축조됐고, 천연성벽은 모두 수직 낭떠러지임, 전체 길이 1,847m.
북벽은 전체 길이 475m, 모두 천연성벽으로 안으로 휜 활모양이며 동벽 북단에서 시작해 절벽을 따라 서북방향으로 꺾어짐. 산등성이 바깥은 가파르고 안은 완만하며. 바깥쪽 50-100m 지점에 서북과 동남 방향으로 향하는 절벽이 하나 있음.
서벽은 정상부 북단에서 서남 모서리 구간까지로 서문 부근의 인공성벽을 제외하면 모두 천연성벽이며 불규칙한 鈍角形임, 전체길이 2,008m.

 

역사적 의미

 

오녀산은 桓仁盆地 일대에서 가장 험준하며 웅장한 산으로 산 정상부에 올라서면 혼강 연안의 환인분지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며, 멀리 서쪽으로 환인 마안산성, 동쪽으로 집안 패왕조산성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고, 수륙 교통을 제어하는 요충지일 뿐 아니라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지에 위치하고 있음, 더욱이 오녀산은 환인분지 어디에서 보더라도 웅장하고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데, 이로 인해 성스러운 이미지도 생성되었을 것으로 보임.
오녀산성은 일찍이 國內城으로 비정되기도 했지만(『東史綱目』, 鳥居龍藏), 1980년대 이래 고구려 초기 도성이었던 紇升骨城(王承禮)이나 卒本城(魏存成, 李殿福 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 특히 중국학자들은 1996년 이래 五女山城을 집중 발굴한 다음, 고구려 초기 도성인 紇升骨城으로 비정하고 있음.
이들에 따르면 오녀산성의 제3기 문화층은 고구려 건국 초기에 해당하는데, 이 문화층에서 발견된 1호 대형건물지는 궁전 유적일 가능성이 높으며, 고구려 초기에 오녀산에 도성을 세운 것과 직접 관련된다고 하고, 더욱이 제3기 문화층은 기존에 발굴된 고구려 초기 산성 가운데 오직 오녀산성에서만 보이는데, 이것도 오녀산성이 고구려 초기 도성인 증거라고 함.
또한 현존하는 고구려 초기 산성 가운데 오녀산성의 성벽 구조는 상대적으로 시원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데, 성가퀴 안쪽의 돌구멍은 초기 산성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것이며, 기단부를 장대석으로 쌓은 축성법이나 내벽의 벽면을 괴석과 판석으로 쌓은 축성법 등은 쐐기형 성돌만으로 내외벽을 쌓은 중후기의 축성법보다 앞선 초기적 형태라고 추정됨.
고구려 초기에 해당하는 제3기층 아래의 제2기 문화층은 청동기시대 말기로서 전국시대 후기에 해당하는데, 고구려 건국 이전부터 오녀산에 인간이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제4기 문화층은 국내성 천도 이후의 중기 유적인데, 다른 산성에 비해 성곽시설이 매우 많은 것으로 보아 이는 국내성 천도 이후에도 오녀산성의 역할이 여전히 컸음을 말해주는 것임.
오녀산 주위에도 고구려 초기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하고성자성은 서남쪽 10여㎞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평지토성으로 고구려 건국 초기 평지도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 그밖에 혼강 연안에는 고분군이 많이 분포해 있는데, 특히 高麗墓子 고분군은 오녀산성과 渾江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음, 현재 대다수는 환인댐에 수몰되었지만, 최근 발굴 자료에 따르면 M201의 잔(雙耳陶杯)은 초기 철기시대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M201과 M19의 호(陶罐)는 漢代의 좁은목 항아리와 거의 일치하며, M8에서 출토된 호(陶壺)도 오녀산성 제3기층 토기와 비슷한 양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력묘자 고분군은 고구려 초기 오녀산 일대에 모여 살던 사람들과 깊이 연관된 것으로 보임.
더욱이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시조 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한 다음, “沸流谷 忽本 서쪽 城山上에 도성을 세웠다”고 하며, 이규보의 『東明王篇』에 인용된 『舊三國史』에도 고구려 초기 왕도가 산 위에 세워졌음을 기록하고 있고, 『三國史記』고구려본기에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있음으로 봐서 상기와 같은 제반 사실로 보아 오녀산성은 고구려 초기 도성인 흘승골성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파악됨.
다만 오녀산성을 발굴한 이후에도 일부 중국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근거로 오녀산성을 흘승골성으로 비정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데, 먼저 오녀산성은 지세가 험준해 교통이 불편하므로 도성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있음, 오녀산 정상은 해발 806m 이상으로 차를 타고 오르기도 힘든데, 2000년 전 초목이 무성한 산을 오르는 것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고, 『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고구려가 紇升骨城을 수도로 한 것은 주몽왕과 유리명왕으로 이때는 부근의 소국, 부락을 정복하던 시기인데, 오녀산 정상에 도읍했다면, 오부의 수장과 국가의 전반적인 계획이나 책략을 상의하기 힘들었음 것임.
또 오녀산성은 물자보급이 힘든 고립무원 지역으로 전략상으로도 수도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고 정상부는 공간이 협소하여 도성으로 적합하지 않음, 정상부 평탄지는 남북길이 약 500m, 동서 너비 100m이지만, 저수지, 절벽 등을 활동 공간은 매우 좁고, 발견된 건물지와 기타 설치물에서 볼 때 산위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100여명을 넘길 수 없어 오녀산성을 紇升骨城으로 비정하기는 힘들다는 것임[耿鐵華].
그렇지만 『광개토왕릉비』나 『東明王篇』에 따르면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알려진 紇升骨城이 산 위에 위치한 것은 명확한데, 초기 도성인 졸본지역을 지금의 환인일대로 상정한다면, 紇升骨城은 이 지역에서 가장 웅장하면서 신비로운 느낌까지 주는 오녀산성으로 비정하는 것이 가장 타당함.
초기도성으로서의 오녀산성의 성격과 관련하여 주몽의 정착·건도지역이 『三國史記』에는 ‘수상’ 곧 沸流水 연안의 충적평원으로 기재되어있고, 광개토왕비에는 ‘산상’ 곧 忽本(卒本) 서쪽 산 위로 각각 다르게 서술된 사실이 주목됨, 「東明王篇」에 따르면, 주몽은 沸流水유역에 정착하여 松讓國의 항복을 받는 등 일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 鶻嶺에 성곽을 축조했다고 하는데 이로 본다면, ‘水上’은 최초의 정착지역, ‘산상’은 맹주로 등장한 이후의 건도지역으로 구분할 수도 있음.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해발 820m인 오녀산은 군사방어거점으로는 천혜의 요새지이지만, 일상적으로 거주하기 위한 도성으로는 주변 배후지와 지나치게 격리되어 있어서 『三國史記』의 ‘수상’을 최초의 정착지역, 광개토왕비의 ‘산상’을 맹주로 등장한 이후의 도성으로 구분하기는 적합하지 않음.
환인일대는 수도의 입지조건인 생산활동과 군사방어에 적합한 자연지형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데 ‘수상’과 ‘산상’은 이러한 입지조건을 기능에 따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水上’은 생산활동에 적합한 지형, ‘山上’은 군사요충지 나아가 聖所로서의 면모를 각기 반영한다고 생각됨, 즉 도성이 기능에 따라 분리되어 평상시에는 충적평원 곧 ‘水上’에 거주하다가, 비상시에는 ‘山上’으로 대피하여 방어거점으로 삼았고 의례를 거행할 때에도 山上을 聖所로 활용했던 것으로 추정됨.
광개토왕비 서두에서 ‘忽本’은 건도하였다는 ‘산상’이나 주몽이 승천하였다는 ‘東罡’의 위치를 나타내는 기준점으로 특히 ‘忽’이라는 고구려어는 ‘성’을 뜻하므로 忽本은 ‘성곽이 축조된 지역’을 지칭함, 주몽의 정착지역인 忽本 곧 卒本에 성곽이 축조되었다면, 이는 ‘산상’의 성곽에 대비되는 평상시의 중심지였을 것이기에 卒本지역에는 ‘수상’과 ‘산상’으로 상징되는 평지성과 산성의 도성방어체계가 구축되어 있었음, 따라서 五女山城은 고구려 초기 도성의 군사방어 및 의례용 성곽으로 활용되었다고 생각되고, 평상시에 거주하는 도성은 아니었지만, 초기 도성의 일부를 구성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음.
한편 산상 성곽의 동쪽에 위치했다는 평상시 도성인 卒本은 오녀산 동쪽의 환인댐 수몰지구 일대로 추정하며, 오녀산성의 평지성 곧 卒本城을 환인 下古城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하고성은 오녀산성의 동쪽이 아닌 서남쪽에 위치하였으므로 광개토왕비의 서술과 상충됨, 현재까지 알려진 환인댐 수몰지구의 평지성으로는 환인 喇哈城址가 유일하지만, 卒本城으로 비정할 만한 명확한 근거는 없기에 卒本城의 위치는 보다 면밀한 고고조사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비정할 필요가 있음.[余昊奎].
최근에는 卒本城을 富爾江이 渾江과 합류하는 나합성 일대나 나합성으로 비정한 다음, 오녀산성을 유리왕 3년에 천도했다는 國內 尉那巖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어 주목되며(盧泰敦, 王從安·紀飛, Mark E. Byington) 또 고구려 후기 哥勿城으로 비정하기도 함(梁志龍., 張正岩·王平魯).

 

자연환경

 

환인은 산이 많은 지역이며 산봉우리가 밀집해 있고,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오녀산은 老嶺山脈의 지류에 속함.
五女山 아래를 지나는 渾江은 吉林省 江源縣 老嶺山脈에서 발원하여 通化와 桓仁을 거쳐 寬甸에서 압록강에 유입되며, 전체 길이 445㎞로서 환인 지역의 流路는 150㎞로 환인현 관내의 富爾江, 雅河, 六道河는 渾江에서 규모가 가장 큰 3대 지류이며 혼강 본류와 지류 연안에는 너비 500m 전후의 하곡평지가 기다랗게 펼쳐져 있음, 하곡평지 주변에는 고구려인들이 거주했던 흔적인 초기의 적석묘 고분군이 많이 분포해 있음.
오녀산은 해발 806.32(王綿厚 820, 耿鐵華 806, 梁志龍 804)m로서 가파르게 수직으로 솟아있는 험준한 형세로 정상부에는 평평한 평탄지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 서면 桓仁縣城 시가지와 환인댐의 푸른 물결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 산들이 연이어져 있으며, 서남쪽으로 환인분지가 넓게 펼쳐져 있음.
원래 渾江은 오녀산 동쪽에서 南流하다가 오녀산 남쪽에서 서쪽으로 流路를 꺾어 桓仁縣城을 감싸고 돌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南流했는데, 현재 산 아래의 渾江은 댐공사로 수몰되어 유유히 굽이쳐 흐르던 모습을 잃어버렸음.
지역내의 渾江 양안과 산간 골짜기에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띠 모양의 평원이 분포해 있으며 桓仁縣城 및 그 주위 지역에는 渾江, 六道河, 哈達河를 따라 충적평지가 많이 발달해 있고 이러한 충적평지는 여러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형성하고 있음.

 

유물정보

 

토기, 철기, 석기, 청동기류 등

 

참고문헌

 

· 鳥居龍藏, 「丸都城及び國內城の位置について」『史學雜誌』 25-7, 1914
· 주영헌, 『중국 동북지방의 고구려 및 발해유적답사 보고』, 사회과학원, 1966
· 劉永智, 「訪高句麗早期遺址五女山城」『朝鮮史通訊』 1981-3, 1981
· 魏存成, 「高句麗初中期的都城」『北方文物』 1985-3, 1985
· 郭俊武, 「紇升骨城初探」『遼寧省本溪丹東地區考古學術討論會文集』, 1985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8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李殿福·孫玉良, 『高句麗都城考』 1990-1,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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