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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

 
  • 구분유적
  • 시대고구려
  • 문서번호S000921
  • 위치(출토지)遼寧省 新賓縣 永陵鎭
  • 지역무순(撫順市)
  • 유형성곽>평지성
  • 형태사항남벽 남은 길이 215m, 동벽 남은 길이 455m, 서벽 남은 길이 375m(1979년·1983년 조사; 徐家國, 1989)│동벽 남은 길이 83.5m, 남벽 길이 108m, 서벽 남은 길이 151m(2004년 조사; 呂學明, 2005)│동서 너비 136m, 남북 길이 166m, 동벽 남은 길이 80.5m, 남벽 남은 길이 136m, 서벽 남은 길이 166m(2005년 조사; 李新全·李龍彬, 2006) 51점 
 

출토지

 

요녕성 신빈현 영릉진(遼寧省 新賓縣 永陵鎭)

 

연대

 

한대(漢代)

 

조사내용

 

 
:1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39도엽암길
(稻葉巖吉)
가을에 성이 발견됨.
1941고교광사랑, 도변삼삼
(高橋匡四郞, 渡邊三三)
성의 전체 윤곽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북쪽 일부만 조사함. 남북 길이 150m, 동서 길이 110m이라고 실측함. 동측 붕괴면의 높이는 약 3m임. 한대 와전(漢式 瓦塼)을 발견함.
高橋匡四郞, 1941,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其報』2, 建國大學硏究院 으로 발표함.
1944삼상차남
(三上次男)
6월 2일에 성의 북쪽뿐만 아니라 남쪽까지 확대 조사하여 성의 전체적인 면모를 파악함. 남성(南城)·북성(·北城) 두 개의 성이 있다고 파악함.
三上次男, 1990, 「東滿風土雜記」『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 으로 발표함.
1979무순시박물관
(撫順市博物館)
9월 27일~10월 7일까지 안양고고(安阳考古) 시굴공과 함께 전면적인 시굴을 진행함. 남·북 2개의 성이 있다고 기록함.
徐家國, 1984, 「漢玄菟郡二遷址考略」『社會科學輯刊』1984-3 으로 발표함.
1983무순시박물관(서가국, 장정암, 동달 등)
(撫順市博物館(徐家國, 張正巖, 佟達 等))
4월에 문지와 성벽 일부를 시굴조사하여 성의 범위와 형태를 밝혀냄. 1979년 시굴과 동일한 결과를 얻었음.
2004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신빈현혁도아랍성문물관리소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新賓縣赫圖阿拉城文物管理所)
10월~11월에 성에 대한 실측과 탐사 외에, 동벽 남북 양단에 대한 절개를 실시함.
2005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9월~11월에 1,500㎡ 정도 발굴을 진행함. 주요 성벽에 대한 조사와 절개를 진행함. 동벽 북쪽 끝에 동서방향의 트렌치를 파고 동벽에 대해 절개를 진행함. 동북부 발굴을 통해 성내 지층퇴적, 유적, 유물의 정황을 이해할 수 있었음.
2006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무순시박물관, 신빈현혁도아랍성문물관리소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撫順市博物館, 新賓縣赫圖阿拉城文物管理所)
5월~11월에 영릉진고성의 범위, 분포, 성내 문화내용, 연대와 성질, 고구려현과 한(漢)정권과의 관계, 한문화와 고구려문화와의 관계 등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대규모 발굴을 진행함. 성내부에 5×5m의 피트 98개를 설치하였고, 발굴면적은 2,450㎡임.
2007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5월~11월에 영릉진고성 동북부에 있는 대형 건축지의 범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한 발굴을 진행함. 발굴면적은 400㎡임. 발굴을 통해 건축기단부, 주거지, 회갱(灰坑) 등의 중요건물과 대량의 암키와, 수키와, 와당, 생활유물들을 발견함.
2008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신빈현혁도아랍성문물관리소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新賓縣赫圖阿拉城文物管理所)
4월9일~4월12일 간의 발굴을 통해 성의 배치, 구조, 시축연대, 폐기연대의 문제를 해결함. 동문과 서문을 발견함.
. 성급문물보호단위(省級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됨
1975년 이후무순시박물관
(撫順市博物館)
1975년 이래로 여러 차례 조사를 실시함. 발굴을 통해 유물을 발견하고 성벽에 대한 자료를 획득함.

 

구조특징

 

고성 내부가 경작지로 개간되면서 중앙 부분이 210m 정도 절단되었음. 이 같은 모습 때문에 1944년 조사 때에는 북쪽의 작은 토성과 남쪽의 큰 토성 2개의 성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음. 당시 조사결과를 보면, ‘북쪽 작은 토성은 한 변의 길이가 120m인 방형으로 방위는 거의 남북향이다. 북벽 대부분은 이도하(二道河)로 인해 유실되었는데, 보존이 양호한 성벽의 높이는 약 3m 정도이다. 서벽 중앙에만 성문터가 남아 있다. 내부는 콩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는데, 한대(漢代) 기와, 고구려시기 기와와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고 북벽의 무너진 단면에도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북쪽 작은 토성에서 논을 사이에 두고 남쪽 300~400m 지점에 규모가 훨씬 큰 한대 토성이 있다. 남쪽 큰 토성은 낮은 대지에 있는데, 평면은 조금 불규칙한 방형이고 방향은 동남쪽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북벽은 길이 약 350m, 높이 1.5m이다. 바깥에 작은 개울이 있는데, 해자로 볼 수 있다. 동벽은 지형을 따라 동남이 약간 확대되면서 불규칙하고, 길이는 북벽과 마찬가지로 약 350m이다. 북벽 동쪽 모서리에서 약 130m 변지점에 낮은 지대가 있고, 동벽에서 남쪽 100m 변지점에 돌출한 네모난 평대가 있는데 양자 모두 성문터로 추정된다. 성 내에는 한식(漢式) 기와 및 토기 등의 파편이 고구려의 적색 기와편과 섞여서 흩어져 있는데, 북부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출토되었고 일부는 밭 한 쪽에 높게 쌓여져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음(三上次男, 1990).
1979년 발굴결과를 기록한 보고서에서도 남·북 두 개의 토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당시 조사결과를 보면, ‘북쪽 작은 토성은 밭으로 개간되고 흙을 파내면서 파괴되었지만 성지의 윤곽은 명확히 볼 수 있다. 평면은 방형이고 성의 방향은 남동 20°이다. 길이는 남벽 104m, 동벽 200m, 서벽 147m이다. 성벽은 기단부 너비 10m, 윗너비 3m, 높이 1~2m이다. 남벽 중앙의 트인 곳은 성문터로 추정되고, 너비는 8m이다. 성에서는 배면 승문·내면 격자문인 한식(漢式) 암키와와 수키와, 고구려 특유의 옅은 홍색 승문 암키와편, 한대 토기, 한대 오수전 등이 출토되었다. 성지 서쪽은 불도저에 의해 흙무더기가 쌓였던 적이 있다. 성지에서 밭을 갈 때 많은 토기편들이 있었는데, 파종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북쪽 성벽 바깥쪽 있는 강에 버려졌기 때문에 현재 지표면에 남아있는 토기편은 많지 않다. 수해를 입어 드러난 북벽의 한대 문화층(漢代 文化層)은 두께가 30㎝이다. 남쪽 큰 토성은 북쪽 작은 토성과 210m 떨어져 있다. 벽돌공장이 흙을 채취해 가면서 파괴가 심하다. 동벽 남은 길이는 345m, 서벽 남은 길이는 75m, 북벽 남은 길이는 315m이다. 남벽은 파괴되어 측정할 수 없다. 평면은 대략 장방형이고 방향은 남북향이다. 성에서는 한식(漢式) 승문 수키와, 암키와, 권운문 와당, 한식(漢式) 토기편, 한대 오수전, 철기편, 건축 강돌(建筑卵石), 소토(紅燒土) 등이 발견되었다. 성의 출토유물·형태·규모 등을 분석해 볼 때, 두성 모두 한대성(漢代城)임은 명확한데, 북쪽 작은 토성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견고하게 축조하였으며 질서정연하게 분포된 것으로 보아 현치(縣治)소재지로 추정된다. 반면 남쪽 큰 토성은 규모가 크고 유물은 기종이 다양하고 모두 다수 출토되었으며, 특히 와당과 비교적 보존이 양호한 수키와가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제2현토군 군치(郡治)로 추정된다’라고 기록하였음.
그런데 1979년과 1983년의 고고조사 결과를 종합하면서 영릉진고성은 2개의 성이 아닌 하나의 성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음. 즉 성터가 경작지로 개간되는 과정에서 중앙 부분이 210m 정도 절단되었기 때문에 남북 2개의 성으로 보였다는 것임(徐家國, 1989). 이 견해에 대해서 북쪽부분과 남쪽부분의 동서 너비가 너무 달라서 양자를 연결하기 어렵고 남벽의 개구부(開口部)가 북벽에 보이는 낮은 지대를 가리킨다고 하면, 성벽의 위치 전체에 대한 이해가 어긋나게 된다는 의문을 갖고, 소성(小城)과 대성(大城)이 별도로 존재했을 가능성, 소성(小城)이 확장되어 대성(大城)이 되었을 가능성도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음(田中俊明, 1994).
성은 지면보다 1~2m 높은 대지 위에 위치함. 고성의 방향에 대해 동쪽에서 약간 치우친 남향으로 140〫 라는 기록(徐家國, 1989), 남쪽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방향으로 2°라는 기록(呂學明, 2005), 북쪽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방향으로 5°라는 기록(李新全·李龍彬, 2006)이 있음.
남벽, 동벽, 서벽 모두 곧은 직선 형태임. 북벽은 이도하자의 수환(水患)으로 훼손되었음. 만약 북벽도 곧은 직선형태라면 성의 평면은 남북이 동서보다 약간 넓은 장방형일 것임(徐家國, 1989). 성 남반부는 벽돌공장에서 흙을 채취해 가면서 파괴되었고, 남·동·서벽의 기단부도 절단되어 있었음.
1979년과 1983년 조사 때 고성의 지층은 모두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기록함. 제1층은 갈황색의 경토층(耕土層)임. 토질은 비교적 부드러움. 두께는 25~30㎝임. 현대 기와편이 출토되었음. 제2층은 갈색토임. 토질은 단단함. 두께는 30~35㎝임. 고구려시기의 붉은색 승문 수키와와 암키와가 출토되었음. 제3층은 회갈색임. 토질은 단단함. 두께는 30~37㎝임. 회색승문의 암키와와 수키와, 무늬가 없는 회색토기편, 운문(雲文)와당, 강돌(卵石) 등이 출토됨. 한대(漢代)문화층은 30㎝ 정도임.
2004년 성 내부 북쪽 200㎡에 대해 발굴을 진행하였는데 퇴적두께는 1~1.6m이고 4층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함. 1층은 황갈색 경토층(耕土層)이고, 두께는 0.3㎝이며, 가는 모래(細沙)를 많이 포함하고 있고, 근현대 유물이 포함되어 있음. 2층은 흑회색 토층이고, 두께는 0.2~0.4m이며, 토양이 푸석푸석하고, 요금시기 벽돌 및 기와와 한대 기와편이 출토됨. 3층은 회황색 토질이고 두께는 0.2~0.5m이며 비교적 단단하고 많은 한대 기와편(漢代 瓦礫)을 포함하고 있음. 제4층은 회갈색 토층이고 두께는 0.4m이며 토질은 단단하고 출토유물은 비교적 적음. 그 아래는 생토층임.
2005년 조사 때 문화퇴적은 모두 3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1시기는 한대(漢代), 2시기는 고구려시기, 3시기는 요금(遼金)시기라고 함.
성벽은 갈색토를 판축하여 쌓았음(여호규, 1999; 徐家國, 1989). 1941년 조사 당시 동측 붕괴면의 성벽 높이는 약 3m였다고 함(高橋匡四郞, 1941). 1944년 조사 당시 북벽의 높이는 1.5m였다고 함(三上次男, 1990). 1979년 조사 때 성벽은 기단부 너비 10m, 윗너비 3m, 높이 1~2m였다고 함(徐家國, 1984).
1979년과 1983년 조사 때에는 성 북반부의 동·서 양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음. 성원(城垣)은 지면보다 약간 높음. 비록 적지 않은 구간이 결실되었지만 지하에 성 기단부가 남아 있음. 성 북부 동벽의 남은 길이는 100m, 서벽의 남은 길이는 147m임. 동·서벽은 지면에서 1.7~2.3m 정도 융기되어 있음. 기단은 남은 너비 6m, 윗너비는 3m임.
2004년 동벽 양단에 대한 절개를 실시하였는데 성벽의 기단부 너비는 15m, 정상부 너비는 11m, 높이는 4.4m임. 단면을 분석해 볼 때 성벽은 두 차례에 걸쳐 축조됨(呂學明,2005).
2005년 조사 때, 동벽 북쪽 끝에 동서방향의 트렌치를 파고 동벽에 대해 절개를 진행함. 성벽은 하단 너비 18m, 상단 너비 9.7m, 남은 높이 4.3m임. 단면은 전제적으로 제형(梯形)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세 종류의 다른 토질·토색의 다져진 흙이 있었음. 흙이 다져진 방식, 토질, 토색, 다져진 흙 안에 포함된 유물을 볼 때, 3차례에 걸쳐 보축된 것으로 보임.
첫 번째 다져진 성벽은 가장 내측에 있음. 바닥의 남은 너비는 6.5m, 정상부 남은 너비는 1.8m, 남은 높이는 3.3m임. 순수한 황사토(黃沙土)와 황색 점토를 번갈아가며 쌓았고 간혹 깬돌이 혼입되어 있음. 상부 다져진 층은 명확하고 고름. 두께는 일반적으로 5~10㎝이며, 부분적으로 다져진 흔적이 보임. 때려서 다져진 토질은 밀도가 높고 견고함. 하부의 토질은 상부와 같음. 다져진 두께는 비교적 두꺼운데 일반적으로 10~20㎝ 정도임. 성벽 기단부는 직접 하사석(河沙石) 위에 축조되었음. 홈를 파서 기초를 한 흔적은 보이지 않음. 다져진 흙 내에서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음.
두 번째 다져진 성벽은 첫 번째 성벽 외측에 있음. 기단부 너비는 3.5m, 상단부 너비는 2.8m, 남은 높이는 4m임. 외측은 경사진 구릉모양으로 보축한 것으로 추정됨. 첫 번째 성벽과 긴밀하게 결합됨. 토질에는 비교적 큰 황사토(黃沙土)가 포함되어 있음. 다져진 층은 명확한데, 두께는 10~20㎝이고, 간혹 다져진 흔적이 보임. 첫 번째 성벽의 다져진 흙에 비해 약간 굵음. 다져진 층은 비교적 순수한데 다만 소량의 니질 승문기와편과 목탄이 포함되어 있음.
세 번째 다져진 성벽은 두 번째 성벽 외측에 있음. 기단부 너비는 8m, 윗 너비는 5m, 남은 높이는 4m임. 외측 상부는 2단 계단형이고, 하부는 완만한 구릉모양임. 다져진 흙은 황갈색 사토(沙土)이고, 흑갈색 진흙이 포함되어 있음. 다져진 흙층은 두 번째 성벽보다 굵고 단단하지 않음. 그 안에는 비교적 많은 유물이 포함되어 있는데 주로 기와편과 철기편임.
성 내부에서 한대 및 고구려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특히 1944년 조사 때, 남쪽 큰 토성의 북쪽에 기와편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일대에 중요한 건물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함(여호규, 1999).
2006년 조사에서 제3층 아래에서 대형건물지와 그 주위에 용로(勇路)로 조성된 고대(高臺)건축지를 발견하였는데, 모두 제4층을 파괴함. 용로는 모두 6구간이 발견됨. 5구간은 강자갈을 깔아서 만들었고, 나머지 한 곳은 깬 기와를 세워서 제작함. 너비는 최대 60~70㎝임. 모두 황토에 박혀 있고 양 가장자리는 편평하고 잘 다듬은 돌 혹은 깨진 기와로 둘렀음. 노면은 평평하고 정연하게 깔아져 있음.
성내 동남부 제2층 아래 유적에는 건물지와 회갱(灰坑)이 있음. 건물지는 온돌 설치방법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음. 첫 번째는 석판을 세워 연도(烟道)를 만들었고, 연도는 2줄 혹은 3줄로 설치함. 이러한 종류의 온돌은 6개가 발견되었는데 주로 성 내부 동남쪽에 분포함. 두번째는 토갱연도(土炕烟道)로, 지면에 구(溝槽)를 파서 설치하였고 연도는 2줄이 설치됨. 건물지 평면은 장방형이고, 반지하식건축물임. 북갱(北炕) 혹은 동갱(東炕)이 설치되어 있음. 이러한 형태의 건물지는 주로 성내 동남부에 분포하고 있음. 그 외 북부에도 약간 분포함. 판석을 세워서 만든 연도를 갖춘 건물지가 토갱식 연도(土炕式 烟道)를 가진 건물지보다 이른 것으로 추정됨(熊增瓏, 2007). 회갱(灰坑)은 12기가 발견됨. 평면은 원각방형(圓角方形), 원형, 타원형 등이 있음.
2007년의 성내 건축지 발굴양상은 위진(魏晉)시기의 건축배치를 이해하는데 중요함. 즉 관서(官署)건물은 성내의 서북부에 분포되어 있고, 생활건축은 성내의 동남부에 분포함.
1941년 이래 한대 토기편, 와당, 기와편을 비롯하여 고구려시기의 붉은색 기와편이 많이 발견되었음.
1944년 조사 때에는 기와편이나 토기편을 쌓아 놓은 더미가 성 내부에서 확인되었는데, 남쪽 큰 토성 북쪽에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었고 일부는 밭 귀퉁이에 높이 퇴적되어 있었음.
1979년 4월, 벽돌공장에서 성 남부 양측의 흙을 파서 가져갈 때 많은 암·수키와 잔편, 운문와당, 무늬가 없는 회색의 호(罐)·발(钵)·분(盆)·시루(甑)·솥(鼎)·두형토기(豆)편, 소토(紅烧土), 목탄(木炭), 건축강자갈(建築卵石), 오수전(五銖錢) 잔편, 부식이 심한 철기편 등이 출토됨.
성 안에서 출토된 토기는 물레로 제작함. 대부분 회색이고 니질로 제작함. 소성온도는 높음. 동체부(腹部)가 둥그스럼하고 바닥이 평평한 형태의 토기가 가장 많이 출토됨.
한식(漢式)-고구려계의 기와가 출토됨. 북벽 바깥에서 이도하자(二道河子)의 수해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옅은 홍색 승문 암·수키와편이 출토되었음. 와당은 복선(複線)을 육출(六出)했던 집안과 평양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연화문와당과 차이가 있는 등 한식(漢式)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음(高橋匡四郞, 1941).
2004년 조사 때 건축자재와 생활용구가 주로 출토됨. 건축자재로는 암키와, 수키와, 와당이 출토됨. 수키와는 정면에 대부분 압인운뇌문(壓印雲雷文), 능형문이 있고 배면에는 대부분 승문이 있음. 수키와는 정면이 승문이고 배면에는 포문이 펼쳐져 있음. 와당은 비교적 적게 출토되었는데 연화문과 수면문이 있음. 토기로는 호(壺), 분(盆), 시루(甑), 호(罐), 구(球) 등이 출토됨. 출토된 장경호는 부여문화의 호(壺)와 일치하고 있음(呂學明, 2005).
2006년 조사 때 제3층에서 출토된 유물이 비교적 풍부한데 기와·토기·철기·동기 등이 출토됨. 동기로는 동전범(銅錢范)이 출토됨.
출토된 와당은 주로 채색된 사계격연화문와당(四界格連花纹瓦當)이고, 그 외에 권운문 와당, ‘千秋萬歲’명 와당이 발견됨. 암키와는 주로 니질의 홍색·회색임. 수키와는 대부분 니질의 회색임.
2008년 조사 때에는 연화문 와당, ‘千秋萬歲’명 와당, 토기, 철기 이외에 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됨.
청동기시대의 유물로는 주로 모래혼입 홍갈색토기가 출토됨. 기형에는 구연이 삼각형이고 횡교이(横橋耳)가 있는 격(鬲), 횡교이사직복가권족(横橋耳斜直腹假圈足)의 호(罐), 가권족(假圈足)의 절복관(折腹罐) 등이 있음. 이러한 토기들은 무순지구에 청동기문화의 특징들을 갖추고 있음.
철기로는 주로 생산도구가 출토되었는데, 보습(犁铧)·철제 자귀(锛), 철제 가래(鍤), 철제 낫 등이 있음. 아울러 철분교장(鐵锛窖藏)을 발견함.
동기로는 철연동촉(鐵鋋銅镞)이 주로 출토되었고, 일부 동경(銅鏡) 잔편이 출토됨.
한대(漢代)토기는 분(盆), 시루(甑)가 주를 이루고 있음. 토기 구연부에는 승문, 동체부 상부에는 와능문(瓦楞文), 동체부 하부와 저부에는 승문이 있음. 와당은 주로 운문이 있는 반와당(半瓦當)임.
전한(前漢)시기의 오수전(五銖錢)과 왕망(王莽)시기의 화폐도 출토됨.
‘高句驪丞’이라고 적힌 것이라고 추정되는 봉니(封泥)가 발견됨.

 

역사적 의미

 

고구려의 발상지인 환인과 소자하 사이의 교통로는 육도하(六道河) - 횡도하자 애구(橫道河子 隘口) - 차로구(岔路溝)의 환인 서북로와 부이강(富爾江) - 소자하(蘇子河) 상류의 환인 동북로 등을 설정할 수 있는데, 두 갈래의 교통로는 영릉진(永陵鎭) 일대에서 합쳐져서 소자하 하류를 거쳐 요동평원으로 나아가게 됨. 즉 영릉진 일대는 고구려의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일대의 서북방면에 위치해 있으면서 소자하 연안 전체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것임. 전략적 요충지인 영릉진 일대에 위치한 영릉진고성의 문화층을 분석해 볼 때, 영릉진고성은 한(漢)이 축조하였고 고구려가 장기간 재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영릉진고성은 한대의 평지성으로서 방어상 상당한 취약점을 안고 있었음. 특히 제2현토군이 혼하방면으로 쫓겨난 다음 중국의 군현세력은 혼하 남안의 제3현토군을 출발하여 혼하·소자하 연안로를 따라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이 때 고구려 중심부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해당하는 소자河 연안이 주요 격전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3세기 중반 위 관구검(魏 毋丘儉) 침공시나 4세기 중반 전연 모용황(前燕 慕容皩) 침공시의 전황은 이를 잘 보여줌. 고구려 말기의 당군도 혼하 북안의 신성(撫順市 高爾山城)을 출발하여 남소성(南蘇城), 목저성(木底城), 창암성(蒼巖城) 등 소자하 연안의 고구려 성을 공격하였던 것으로 파악됨. 따라서 고구려는 1세기 말~2세기 초경 제2현토군을 혼하방면으로 구축한 뒤 군치(郡治)였던 영릉진고성을 소자하 연안의 거점성으로 계속 사용하는 한편 방어상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수립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당시 고구려와 대적하던 중국측 세력은 주로 서북방면에서 소자하를 거슬러 고구려를 공격하였음. 그런데 영릉진고성은 소자하 남안에 위치하여 소자하를 서북방면에서 침공하던 적군을 저지하는 천연해자로 이용할 수 있었지만, 이도하자의 경우에는 동쪽에 위치하여 천연해자로 활용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방어상 불리한 측면을 제공하였음. 이러한 점에서 영릉진고성 동남쪽 이도하자 동안에 위치한 비아랍성(費阿拉城)이 주목됨. 즉 고구려는 제2현토군의 군치였던 영릉진고성을 점령한 다음 방어상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왕도였던 졸본지역이나 국내지역에서처럼 평지성·산성의 방어체계를 구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됨. 또한 영릉진고성 북쪽인 초창하구(草蒼河溝)의 나가보산성(羅家堡山城)과 두도립자산성(頭道砬子山城), 협하구(夾河溝)의 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서쪽인 연통산(煙筒山) 북사면에 위치한 온가요산성(溫家窯山城)과 아화락촌산성(阿伙洛村山城) 등은 영릉진고성에서 불과 5~10㎞ 정도 거리일 뿐 아니라 둘레가 200m 안팎인 소형산성이라는 점에서 영릉진고성 또는 비아랍성의 위성산성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축조연대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徐家國(1989)는 성에서 출토된 유물로 한성지(漢城址)로 추정함. 한편 북벽에서 발견된 화판문 와당과 옅은 홍색 승문 암·수키와를 볼 때, 위진남북조시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됨.
여호규(1999)는 영릉진고성을 제2현토군 치소로 추정하였는데, 현토군의 변천과정을 고려하면, 영릉진고성은 제1현토군이 구려(句驪)의 서북방면 곧 영릉진 일대로 쫓겨난 시점인 기원전 75년경에 제2현토군의 치소로 축조되어, 1세기 말~2세기 초경 제2현토군이 혼하방면으로 쫓겨날 때까지 사용되다가 2세기 이후에는 고구려가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함.
呂學明(2005)은 전한시기에 축조되어 고구려 혹은 그 이후에 보축되었다고 봄. 성내에서 전한, 고구려, 요대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성이 장기간 사용된 것으로 추정함.
위치비정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高橋匡四郞(1941)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문헌을 살펴볼 때 현토군 고구려현 치소는 흥경노성(興京老城) 부근으로 비정할 수 있음. 한편 무순현의 한 언덕에서 한대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제3현토군의 치소로 추정하고 있음. 이로 볼 때, 무순현 오른쪽에 있는 어느 평지성을 제2현토군 치소로 상정해 볼 수 있음. 영릉진고성에서 나온 유물을 살펴보면, 한식(漢式)과 고구려계의 벽돌과 기와가 나옴. 출토된 와당은 한식 와당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고, 집안과 평양에서 출토된 복선(複線)을 육출(六出)했던 고구려의 연화문 와당과 명확한 차이가 있음. 벽돌은 한식(漢式)과 같은 계열로 볼 수 있음. 평기와는 표면이 매끈하고 내면에는 석문(席文)이 펼쳐져 있는 등 집안과 무순 등지의 산성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고구려 계열로 볼 수 있음. 위와 같이 영릉진고성은 한대 토성임이 확연히 드러나지만 한대 뿐만 아니라 고구려도 이용하였던 것으로 봉 수 있음. 그러므로 한의 제2현토군, 즉 고구려현치로 비정할 수 있음. 한편 무순(고구려 신성과 제3현토성이 있음)방면에서 고구려의 본거지인 환인·집안방면으로 나가려면 자연 지세를 이용해서, 즉 하천에서 하천으로 이동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합리적임. 그렇다고 하면 혼하유역을 소행(遡行)하여 소자하로 나가서 소자하 유역을 소행(遡行)하는 흥경로성 방면으로 나오는 길, 즉 구흥경가도(舊興京街道)를 먼저 상정할 수 있음. 그런데 노성(老城)에서 어느 루트를 이용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루트을 생각할 수 있음. 첫 번째는 흥경노성에서 이도하를 소행하여 합산대(哈山臺)를 넘어 대이하(大二河) 유역으로 나와 환인에 이르는 길임. 이 길은 지금도 환인방면으로 나가는 길임. 다른 하나는 청태조(淸太祖)대에 조선의 사신 신충일(申忠一)이 지나간 길, 즉 부이강 상류로 따라 내려가서 영이강구(甯爾江口)에서 혼강을 넘은 후, 신개하(新開河)를 소행하여, 대판차령(大板忿嶺) 바로 옆인 모구검 단비(断碑)가 나온 소판차령(小板忿嶺)을 넘어 집안으로 이르는 길임. 이상의 두 길은 지리자연에 적합함. 모구검은 바로 길을 선택한 것으로 추정됨. 모구검 열전(列傳)에 ‘구려왕 궁(句驪王 宮)이 보기(步騎) 2만명을 이끌고 비류수로 진군하여 양구(梁口)에 싸웠는데, 궁은 패하여 도망을 갔고, 검(儉)은 말을 묶고 수레를 매달아 환도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음. 이 기록에서 양구는 지금의 부이강구로 추정되므로 모구검비문이 나왔던 소판차령을 통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임. 이상의 두 길은 지리자연에 적합함. 두 길은 아마도 함께 이용된 것으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어느 한쪽을 선택된 것이 분명함. 제2현토군에 있었던 고구려현과 관련된 문헌기사 가운데 지리지 고구려현조(地理志 고구려현조)에는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고, 서남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南蘇水)가 서북으로 새외(塞外)를 경유한다’라는 기록이 있고, 『수경주(水經注)』권14 대요수조(大遼水條)에는 ‘현토고구려현에 요산(遼山)이 있고, 소요수(小遼水)가 나온다’라는 기록이 있음. 대요수(大遼水)는 지금의 요하이고, 요수·소요수는 지금의 혼하이므로 고구려현은 지금의 흥경현 경내(興京縣 境内)에서 찾을 수 있음. 노성(老城) 부근은 교통의 요충지점이고, 동현내(同縣內)에서 가장 탁트인 곳임. 그러므로 여기를 고구려현치에 비정하는 것이 합리적임. 현토군이 이곳으로 이동해 왔음은 『후한서』동이열전 예조(濊條)의 ‘소제시원(昭帝始元) 5년에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토에 합방하였다. 현토는 다시 구려로 옮겼고, 단단대령(單單大領) 동쪽의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라는 기록과 『한서』소제 기원원봉(昭帝 紀元元鳳) 6년 춘정월조의 ‘군국(郡國)의 죄수를 모아 요동현토성을 쌓았다’라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음. 전자의 ‘현토는 다시 구려로 옮겼다’라는 기록과 후자의 ‘요동현토성을 쌓았다’라는 기록은 서로 연관이 있음. 그렇다고 하면 현토군은 적어도 원봉(元鳳) 6년(기원전 75년) 전후에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음. 한편 『삼국지』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한무 원봉이년(漢武 元鳳二年) 조선을 정벌하고, 만(滿)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였다.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沃沮城)으로 현토군을 삼았다. 후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을 서북쪽으로 옮겼는데, 지금은 소위 현토고부(玄菟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라는 기록이 있음. 제1현토군은 옥저성, 즉 지금의 함경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 위대(魏代)의 제2현토군을 ‘현토고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거기에서도 이미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음. 그 이동했던 시기는 후한 중기로 추정되고 있음. 여하튼 영릉진고성 제2현토군 치소, 즉 고구려현치지라고 단정할 수 있음.
徐家國(1989)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후한서』동이전 동옥저조에는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지(沃沮地)를 현토군으로 삼았다. 이후 이맥이 침략해오자 군(郡)을 고구려 서북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음. 현재 영릉진고성이 바로 고구려 서북에 위치하고 있음. 영릉진고성은 규모가 크고, 온전한 와당과 수키와 등 출토된 유물의 종류·수량이 많음. 이로 볼 때 영릉진고성은 대형 성지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군치소재지로 추정됨. 이로 볼 때. 영릉진고성이 고구려 서북으로 옮겨진 한 현토군의 군치로 추정됨.
三上次男(1990)은 영릉진고성을 남·북 2개의 성으로 파악하면서 남쪽 큰 토성을 제2현토군 치소, 북쪽 작은 토성을 제2현토군 설치 이전이나 제3현토군으로 옮긴 뒤의 현치로 추정함. 田中俊明(1994)은 제2현토군치의 고구려현성으로 추정함. 여호규(1999)은 제2현토군 치소로 추정함.

 

자연환경

 

요녕성 신빈현에서 서쪽으로 23㎞ 떨어진 영릉진 동남쪽 1㎞(田中俊明은 500m(田中俊明, 1994), 國家文物局은 1.5㎞라고 기록함(國家文物局, 2009))의 하곡평지에 위치함. 소자하 남안에서 500~600m 떨어진 평탄한 대지에 자리 잡고 있음.
고성이 위치한 영릉진 일대는 소자하 연안 교통로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 이곳에서 소자하 하류를 따라 내려가면 혼하를 거쳐 요동평원에 도달할 수 있고, 소자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부이강(富爾江)·나고하(喇咕河)를 거쳐 환인이나 통화 일대로 나아갈 수 있음. 또한 남쪽으로는 이도하(二道河)를 거슬러 횡도하자 관애(橫道河子 關隘)를 통과하여 환인으로 진입할 수 있고, 이도하의 유수(楡樹)에서는 태자하 상류로 나아가는 산간로가 갈라짐. 영릉진 일대는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소자하~혼하를 통해 요동평원으로 나아갈 때 또는 요동지역에서 압록강 중류일대로 진입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음.
고성 북쪽으로는 소자하 북안을 따라 신빈~심양 도로가 동서로 길게 뻗어 있고 영릉진 시가지가 도로를 따라 길게 펼쳐져 있음. 고성 서쪽에는 환인~영릉진 도로가 지나가고 있음. 고성 남쪽에는 이도하자 골짜기를 따라 환인~영릉진 도로가 지나가고 있음. 고성 동쪽 이도하자 건너편에 청대(淸代) 초기 도성이었던 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노성;老城))이 있음. 성 남쪽으로 3.5㎞ 떨어진 지점에 후금(後金)의 비아랍성(費阿拉城)이 있음. 성 서쪽으로 2㎞ 떨어진 지점에 후금의 영릉(永陵)이 있음.
영릉진고성이 위치한 영릉진 일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소자하 량안에는 좁고 기다란 충적평지가 펼쳐져 있음. 고성 동쪽에는 이도하자가 북류하다가 동벽 북단 부근에서 서쪽으로 흘러 서북단을 지난 다음 소자하로 유입되고 있음. 고성 북쪽으로 이도하자 건너편에 소자하가 서쪽으로 흐르고 있고, 소자하 건너편 북쪽에는 신빈현과 청원현의 분수령에서 발원한 초창북구(草蒼北溝)와 협하구(夾河溝)가 남류하여 소자하로 흘러들고 있음. 이처럼 고성이 위치한 영릉진일대는 소자하와 그 지류들이 만나면서 비교적 넓은 충적평지를 이루고 있음. 고성 서쪽 환인~영릉진 도로 서쪽으로 연돌산(煙突山) 산줄기가 동서로 길게 가로놓여 있음. 성 북쪽은 소자하와 이도하의 합류지점임.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산은 기복이 있음. 북변과 동변은 이도하에 접해 있음.

 

유물정보

 

호(罐) 2점, 옹(瓮) 2점, 반(盤) 1점, 운문반와당(雲文半瓦當) 12점, 운문와당(雲文瓦當) 5점, 화판문와당(花瓣文瓦當) 6점, 문자와당(文字瓦當) 1점, 수키와(筒瓦) 1점, 암키와(板瓦) 10점, 벽돌(磚) 3점,

 

참고문헌

 

· 稲葉岩吉, 「興京二道河子舊老城」『滿洲史學』 3-2, 1939
· 高橋匡四郞,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期報』 2, 建國大學硏究院, 1941
· 徐家國, 「漢玄菟郡二遷址考略」『社會科學輯刊』 1984-3, 1984
· 徐家國, 「遼寧新賓縣永陵鎭漢城址調査」『考古』 1989-11, 1989
· 三上次男, 「東滿風土雜記」『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 1990
· 田中俊明, 「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朝鮮文化硏究』 1, 東京大學文學部朝鮮文化硏究室, 1994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呂學明, 「新賓縣永陵漢代城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2005
· 李新全·李龍彬, 「新賓縣永陵漢城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2006
· 熊增瓏, 「新賓永陵南城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2007
· 李新全·蘇鵬力, 「新賓縣永陵南城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2008
· 李新全·蘇鵬力, 「撫順市新賓永陵南城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2009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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