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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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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관전현(寬甸縣)

    • 사평가고분(四平街古墳)

    • 조가보자고분(趙家堡子古墳)

    • 포자연고분(泡子沿古墳)

    • 고령지 고분군(高嶺地 古墳群)

    • 노고립자고분(老古砬子古墳)

    • 대고령지후강연 고분군(大高嶺地後江沿 古墳群)

    • 소고령지북 고분군(小高嶺地北 古墳群)

    • 대청 고분군(大靑 古墳群)

    • 고대보산성; 고력성산산성; 관수산성 (高臺堡山城; 高力城山山城; 灌水山城)

    • 노고산산성(老孤山山城)

    • 리스트여닫기 소성자산성; 성정산산성(小城子山城; 城頂山山城) 출토지 요녕성 단동시 관전만족자치현 우미오진 소성자촌(遼寧省 丹東市 寬甸滿族自治縣 牛尾塢鎭 小城子村)구조특징 관전 소성자산성은 포곡식임. 산정은 매우 평탄하며, 성곽의 평면은 키(簸箕) 모양임(國家文物局 主編, 2009 『中國文物地圖集』遼寧分冊 下). 남쪽 성문 양측에 암석이 벽처럼 서있으며 성내로 진입하면 평탄한 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음. 서문의 성벽 남쪽 입구(溝口)는 수구문(水口門)으로 추정됨(國家文物局 主編, 2009 『中國文物地圖集』遼寧分冊 下). 성벽은 우각(牛角)모양의 석괴를 쌓아 축조하였는데(國家文物局 主編, 2009 『中國文物地圖集』遼寧分冊 下; 성벽은 쐐기형돌을 쌓아 축조하였음) 벽체는 상당부분 파괴되었고 이끼가 잔뜩 끼어있음. 성문은 남문과 서문 확인, 남문 양측에는 암벽이 서 있음. 서문에서 북쪽으로 완연하게 옛 성벽 길이 나 있는데 길이는 약 수 백 미터임. 현재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음. 성내에서 건물지, “점장대”, “거주지” 및 여러 곳에 토벽(土墻)으로 가로막았음(國家文物局 主編, 2009 『中國文物地圖集』遼寧分冊 下). 성내 동남쪽에 원형석을 쌓아 만든 우물(水井)과 저수지가 있음. 산성내에 병영(營盤)유적이 여러 곳 있는데, 모두 계단모양의 대지(臺地)상에 분포해 있음. 성정산의 옛 성에 올라 남문에서 진입하면 즉 옛 병영의 중심 구역인데, 점장대와 장군부(將軍府) 등이 모두 여기에 설치되어 있음. 옛 회곽도(馬道)를 따라 서쪽을 향해 가면 이희묘(二姬墓), 효모방(孝母房), 둔병영(屯兵營) 등 옛 유적이 많음.역사적 의미 성정산산성(城頂山山城)은 동산산성과 함께 혼강 하류 일대를 공제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군사 전략상 그 의의가 큼. 소성자산성은 환인 오녀산성의 남쪽 38㎞에 위치한 것을 근거로 오녀산성의 위성으로 추정하기도 함(國家文物局 主編, 2009 『中國文物地圖集』遼寧分冊 下).자연환경 요녕성 단동시 관전만족자치현 우미오진 소성자촌 성정산(遼寧省 丹東市 寬甸滿族自治縣 牛尾塢鎭 小城子村 城頂山)의 산정(山頂)에 위치. 동남쪽으로 서평초(西平哨)댐과 15㎞ 떨어져 있음. 환인 오녀산성의 남쪽 38㎞에 위치(國家文物局 主編, 2009 『中國文物地圖集』遼寧分冊 下; 소성자산성). 성정산산성이 자리한 곳은 혼강 하류.참고문헌 ·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釋文匯編』 東北卷, 中央民族學院出版社, 1988 · 孫進己·馮永謙 等,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陳大爲, 「遼寧境內高句麗遺跡」『遼海文物學刊』 1989-2, 1989 · 孫力, 「遼寧的高句麗山城及其意義」, 遼寧省博物館出版社, 1990 · 中國考古學會, 『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1993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王連春, 「丹東市區的高句麗山城」『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遼寧省地方志編纂委員會辦公室, 『遼寧省志』 (文物志), 遼寧人民出版社, 2001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文軼, 『遼東半島地區的高句麗山城』, 哈爾濱出版社, 2008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王禹浪·王文軼, 「丹東地區的高句麗山城」『哈爾濱學院學報』 2012-3, 2012

    • 동산산성(東山山城)

    • 리스트여닫기 호산산성; 호산유지(虎山山城; 虎山遺址) 출토지 요녕성 단동시 관전만족자치현 호산진 호산촌(遼寧省 丹東市 寬甸滿族自治縣 虎山鎭 虎山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90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단동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丹東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10월~12월 하순 조사 진행.1차 발굴. 장성의 동단기점의 대지(臺址; 편호 1호 대지)와 그것과 연접한 호산의 남쪽기슭으로 뻗어있는 산상의 장성 벽체에 대한 발굴을 진행하였음. 그 뿐만 아니라 또 1호대지 뒤의 아래쪽에서 거대한 석축 우물을 발견하였음. 우물의 규모가 거대하여서 이 발굴은 12월 하순까지 진행되었으나 호산 남쪽 기슭, 압록강변의 기온이 비교적 높은 특수한 지리환경임에도 땅이 얼고, 발굴 작업이 매우 거대하여 발견된 잔존 우물벽에 대한 정리로 그치고, 재차 발굴을 진행을 하지 못하였음.1991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단동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丹東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9월~12월 31일 조사 진행.2차 발굴. 이번 2차 발굴에서 호산의 북면까지 뻗어있는 각 구간의 장성의 벽체와 봉화대 등에 대한 발굴은 제외되었음. 작년(1990년) 발견한 잔존 우물벽에 대해 발굴을 진행하지 못한 부분과 거대 우물의 발굴을 진행함. 우물 내부에 함몰된 흙을 정리하느라고 실제적인 발굴은 11월에 진행됨. 이 시기는 기후가 이미 한랭해져 땅이 얼고 지표의 토층에 얼음이 얼어서, (잔존 우물벽은 이미 지표하 12m에 위치함) 흙벼랑 가장자리가 항시 돌 혹은 흙덩이가 무너지거나 또 깊이를 약간만 파고 들어가도 토층이 분열되어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발굴 조건아래서, 발굴을 진행하였음. 우물내 잠수층, 즉 지하수위가 겨울철에는 비교적 낮아 쉽게 발굴할 수 있어 잠수층에 대한 발굴을 먼저 진행하였는데, 발굴 결과 우물은 규모가 거대하고 깊은 유물임이 증명됨. 우물의 내벽 직경은 4.4m, 우물 바닥은 지표에서 깊이가 23m에 달함. 우물 내에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그전에는 발견하지 못한, 보존상태가 완전한 중요한 유물을 발견하였음(출토유물 부분 참조).1992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단동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丹東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9월 중순~12월 하순 조사 진행.3차 발굴. 주요 발굴 대상은 우물의 구조임. 이번 발굴에서 제거한 흙의 양은 매우 많았는데, 그 범위는 동서 길이 50m, 남북 너비 20m 정도였음. 우물 입구는 두께가 12m에 달하는 토층을 전부 제거한 후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우물 뒷 부분(後部)의 윗 방향(上方)에, 원형의 돌을 쌓은 정대(井臺)가 드러남. 이는 당시 우물을 사용하던 시기의 원래 지표임. 그 북쪽에 호산상의 물을 차단하고 흙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쐐기형 돌을 사용하여 긴 벽(長墻)을 축조하였으며, 우물 둘레를 돌로 쌓아 반원형의 배수구(排水溝)를 둘렀으며, 또 물을 길어 산위로 왕래하기 위해 2개의 석대(石臺) 계단 등을 축조하였음. 우물 내구(內口)의 직경은 4.4m, 그 바깥 부분에 돌로 타원형의 우물벽을 쌓았음. 우물 내구(內口)의 가장자리에서 외위 가장자리까지의 두께는 남쪽이 12m. 동쪽이 17m, 서쪽은 13m인데 전체 우물의 직경은 동서 길이가 35m에 달함. 우물 벽의 외연(外緣)은 쐐기형 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는데 가지런하고 견고함. 그 밖에 우물벽 외연(外緣)을 너비 2m인 구조(溝槽)로 한 줄 둘렀는데, 조(槽) 가운데는 가는 모래와 강자갈로 채웠음. 이는 물의 여과층임. 우물의 규모는 아주 거대한데, 우물 통내(筒內) 직경, 우물벽의 두터운 정도, 우물의 깊이 이 모든 것이 보기 드문 경우이고, 아울러 기타 건축시설을 깔아 구조가 복잡함. 공정이 정밀하고 돌로 쌓은 각각의 덩어리도 모두 평범하지 않으며, 서로 맞물려있고 엉성하지 않음. 축조 당시 왕성한 지하수를 극복하고 이 정도로 축조하였다는 것은 그 건축기술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음. 이 우물은 지금까지 보존상태가 완전하여,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최대 우물임. 과거에는 알지 못했던 거형 고정(巨型 古井)은 잘 다듬은 규정적인 쐐기형돌로 우물벽과 관련 건축물을 축조하였으며 출토유물이 드러내는 특징으로 보아, 모두가 고구려가 남겨놓은 흔적임을 설명해줌.1993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단동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丹東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10월 상순~12월 중순 조사 진행.4차 발굴. 주요 발굴 목적은 호산에 고구려성터의 유무 문제를 해결하고 게시하는 것이었음. 호산위와 아래 남쪽에서 압록강변의 평지까지, 성벽 유적을 찾아 그 범위에 일반적인 트렌치를 파는 것임. 그 분포는 산위와 아래에 종횡으로 너비 1m, 길이 10m에서 100m로 같지 않게 교란(錯落)해 있었음. 깊이는 모두 토층상에 1m에서 3m 정도 고르지 않았음. 트렌치는 사실상 호산상에 혹은 산아래 평지에 성벽 유적 혹은 성내 건물지가 존재하는 곳에만 합리적으로 배열했음.발굴결과, 산 정상부와 산아래 평지에서 모두 건물지와 유물이 발견되었음. 호산상의 북면 정부(頂部) 가장자리(변연)에, 무성한 초목의 토층하부에서 동일한 쐐기형 돌로 구성된 석축성벽을 발견하였음. 산상의 석벽은 산세를 따라 축조하였는데 벽체는 현재 단속적으로 남아있음. 산 둘레의 반바퀴 길이는 600m에 달함. 어떤 구간의 성벽은 상당할 정도로 완전한데, 제 6구간의 성벽은 너비가 3.5m, 잔고 1.75m, 제7구간의 성벽은 매우 뚜렷함.호산산성의 구조와 성돌의 특징에 근거해 고구려산성임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으며, 성벽내외 양면은 모두 정밀하게 다듬은 쐐기형 돌로 축조하였고 벽체 내부는 자연석괴로 채웠는데 이러한 종류의 쐐기형 돌은 고구려의 성곽 축조에 보이는 특징임. 이런 이유로 호산산성의 시기 등을 확정할 수 있음.호산 정상의 남부 가장자리에서는 발굴결과 성벽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음. 호산의 동단, 그 아래는 압록강에 잇닿아 있고 가파르며 암석 석벽이 서 있는 산 입구에 석벽을 축조하였는데, 그 나머지는 모두 산의 험요함을 이용해 성벽을 축조하지 않았음. 호산 남쪽의 평지상에, 비교적 광활하고 평탄한 곳에 트렌치를 설치하고, 토층을 자세히 관찰한 결과, 성벽은 발견되지 않았음. 특별히 남부에는 성벽이 있을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한 덩어리의 성돌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완전히 진흙토층이었음. 북부에 가까운 산 아래에 석괴가 있으나 성벽이 아니며 거주 유적의 잔존 현상으로 이해됨.발굴을 통해 호산 정상 북면 가장자리에서 성벽을 발견한 것을 제외하면, 산상의 남면 가장자리에는 성벽이 축조되지 않았으며, 이는 호산 정상에 완전한 형태의 산성을 축조하지 않았음을 설명해줌. 이러한 형태는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호산은 동서방향의 독립적으로 돌출해 있는 협착한 한 줄기 산등성이여서 비교적 넓은 산정은 없으며, 또 광활한 산골짜기도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거주하고 활동할 공간을 제공해 주지 못함. 이 때문에 산상에 산정을 둘러 감싸는 성벽을 축조할 수가 없음. 그러므로 그 남쪽의 성벽은 반드시 남쪽의 산 아래 평지상에 축조할 수 밖에 없음. 무슨 목적으로 이런 고려를 하였을까? 석축의 거대 우물을 남쪽의 산 아래 평지상에 축조한 까닭은, 만일 남쪽의 성벽을 산아래 평지상에 축조하지 않았다면, 우물은 곧 성내에 포괄될 수 없으며, 이는 곧 성내에 용수를 제공하려는 것이 본래의 의도이기 때문임. 이는 호산 자체의 크기를 고려해, 성내 공간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임. 성벽을 남쪽의 평지상에 축조하면 앞쪽에는 수심이 깊고 광활한 압록강이 위치하게 되고, 호산 자체가 천험의 요지인 이곳에 성을 축조하는 것이 되어 주요 충적지를 공제하기 좋으므로 군사방어상 가장 선봉적인 지리위치임.1990-1993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단동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丹東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단동시의 압록강 관광 자원을 개발에 부응해 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연구원 馮永謙)는 단동시문물관리위원회 판공실(주임 任鴻魁)과 고고팀을 구성해, 1990~1993년 4년 연속 호산산성에 대한 조사와 고고발굴을 진행하였음.명대 만리장성 동단 기점 유적을 발견, 유적의 하부에서 대규모의 고구려 유적을 발견, 대량의 유물을 출토하였음. 풍영겸·임홍괴(馮永謙·任鴻魁)가 1993년 「寬甸虎山獲重大發現」『中國文物報』을 발표함.세부 발굴 경위는 풍영겸(馮永謙)의 1997년 「高句麗泊汋城址的發現與考證」『北方史地硏究』을 통해 알 수 있음.1990년부터 고고조사팀은 명대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 유적을 발견한 뒤, 국가문물국의 비준을 얻어 필자(馮永謙)의 영도하에 4년 연속 관전현 호산산성에 대한 고고발굴을 진행하였음. 그 결과 명대 장성의 동단기점의 구체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또 고구려 유적을 발견하여, 산 정상의 산성 1기에 대한 발굴을 진행하였음. 이 산성에 대하여 발굴현장의 관찰과 분석 비판 및 문헌기재와 결합하여 연구를 진행한 결과 이는 고구려산성인 박작성인 것으로 추정됨.구조특징 호산의 북면 정상부 가장자리에, 초목이 무성하고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데, 그 토층 하부에서 쐐기형돌(楔形石)을 사용하여 구축한 석축성벽이 발견되었음. 성벽은 산세를 따라 구불구불 축조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벽체는 끊어진 부분도 있어 산 둘레의 반바퀴 정도로서 길이는 600여 m임. 어떤 구간은 성벽이 상당히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음. 이에 근거해 호산 산성의 둘레는 약 1,200m로 할 수 있음(王綿厚, 1994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 『遼海文物學刊』1994-2; 수천미터). 성벽의 안팎 양면 모두 정밀하게 가공한 삼각형의 쐐기형돌(계형석)을 쌓아 축조하였으며, 벽체의 내부는 거칠게 다듬은 자연 형태의 석괴를 쌓아 채운 특징을 보이므로 고구려산성으로 판단됨. 호산 정상부에 각 시대의 유물, 유적이 매우 많음. 조사와 발굴 과정에서 청동시대, 漢 대, 고구려, 요, 금, 명대 등 서로 다른 시기의 역사 유적과 각종 유물을 풍부하게 발굴함. 남문의 양측에 석벽이 남아 있는데 쐐기형돌(楔形石)으로 축조한 문 기초 아래에 수도(水道)와 수정(水井)이 있음(王綿厚, 1994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 『遼海文物學刊』1994-2). 명대의 토축성벽은 호산 남쪽 기슭, 압록강변에서 山水의 충돌과 퇴적으로 인해 가려져있던 토층 아래에서 명대의 1호 대지(臺址)를 발굴하였음. 대지는 흙을 다져 축조하였는데, 가장자리 길이 36m, 잔고 4m. 대지의 동면에 석축성벽이 접속해 있는데, 굽이 굽이 이어져 호산과 연결되어 있음. 현재 성벽은 비록 많이 무너졌으나 토층 아래에 단속적이나마 석벽의 기초가 남아있는데 가장 높은 곳은 1m에 달함. 어떤 곳은 잔고 2m, 너비 5m가 남아있는 구간(地段)도 있음. 성벽 내 남면에서 산상까지 축조, 또 북쪽 비탈 아래의 산을 지나 비교적 낮은 산언덕까지 축조하였고 그 뒤로 완연하게 북쪽으로 이어져 북부의 관전과 봉성의 경계선까지 이어져있음. 토축성벽의 길이는 560m에 달하며, 2기의 전대지(戰臺址)와 3기 봉화대 및 차단벽(攔馬墻)이 있음. 고구려시기 석축성벽은 제4차 발굴과정에 토축성벽중에서 석축성벽을 발견함. 호산을 둘러싼 1,000m 길이의 발굴 구역중에서 석축벽체 500여m가 드러남. 성벽내외 양측 벽면 모두 고구려의 특징적인 쐐기형돌로 쌓아 축조하였고 가지런하고 정연하며, 중간은 자연석괴로 채워쌓았음.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벽체 너비는 3.5m, 잔고 1.75m. 청동기 시대, 한대(漢代), 고구려, 요, 금, 명대의 유물이 출토됨. 우물 내 출토유물은 길이 약 3.7m에 달하는 목선(木船)과 목제노(木槳), 삿대(鐵頭木篙), 통(木桶), 구유(木槽), 목제완(木碗), 자작나무통(樺樹皮桶), 널빤지(木揷板), 목제받침막대(木座杆), 바가지(葫芦瓢), 갈대자리(葦席), 철제저울추(鐵錘), 철제갈고리(鐵二齒鉤), 회색단지(灰陶罐), 손잡이 2개 달린 큰항아리(雙橫耳大陶罐) 및 각종 규격이 동일하지 않은 새끼줄(繩索) 등이 있음. 고구려시기 석축성벽 출토 유물은 찰갑편(鐵甲片), 화살촉(鐵镞), 투겁창(鐵矛), 쇠단지(環耳鐵罐), 솥(直口鐵鍋), 거울(鐵鏡), 가래날(鐵揷), 도끼(鐵斧), 저울추(鐵錘), 철천(鐵穿), 낫(鐵鐮), 삿대(鐵篙頭), 철제량(鐵提梁), 허리띠 걸쇠(鐵帶卡) 열쇠(鐵钥匙) 등과 같은 각종 철기류들이 있음.역사적 의미 산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음. 첫째, 압록강 하구 방어의 중심성인 고구려 박작성설임(馮永謙, 1997 「高句麗泊汋城址的發現與考證」『北方史地硏究』). 호산 고구려산성은 이전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한 곳이었지만 문헌 기재에 근거해 이 곳 성지는 오랫동안 확실한 지점을 알지 못했던 고구려 역사상에 저명한 산성인 박작성으로 추정됨. 이 성은 애하(靉河)와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돌출된 독립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음. 애하첨고성과 함께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형태를 보임.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호산산성은 박작성으로 비정됨. 박작성은 가탐(賈眈)이 남긴 『道里記』에도 압록강 연안의 중요 지명으로 등장하고 있음. 박작성의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가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차지한 것은 3세기경임. 그런데 서안평현성은 현재의 애하첨고성(靉河尖古城)이고, 박작성인 호산산성의 축조는 후대일 것임. 호산산성은 압록강 하구에 위치하여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길목을 통제하는 요충성임. 강 건너편이 의주이고, 의주의 통군정이 바로 보임. 의주의 백마산성과 함께 압록강 방어의 중심성으로 기능하였음. 둘째, 명대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설임(馮永謙, 1992 「明萬里長城東端起點的發現與硏究」『歷史地理』10, 上海人民出版社). 호산의 북쪽은 명대의 장성이 시작하고 있는데, 호산 정상을 통과하는 장성의 장대 기단은 고구려산성의 성벽을 이용한 것이 확인되었음. 고구려 호산산성은 호산의 남쪽의 사면에 자리잡고 있는데,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전모를 알 수 없음. 648년에 당 태종이 설만철(薛萬徹)과 배행방(裴行方)으로 하여금 군사 3만여 명과 누선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공격하였음. 이들은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음.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배행방(裴行方)의 공격으로 패퇴하였음. 당군이 박작성을 포위하였으나, 지형이 험준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였음. 고구려의 장수 고문(高文)은 오골성과 안시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는데, 설만철(薛萬徹)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여 무너졌음. 호산산성의 우물에서는 고구려 유일의 배가 출토된 바가 있음.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는 우물을 메워버리고, 고구려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함. 그 대신 호산산성을 명나라 천리장성 동쪽 끝 기점으로 보고, 여기에 최근 중국식 장성을 세워서 관광지로 만들고 있음. 현재 호산산성의 북쪽에 중국 명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성벽 일부가 복원되어 있음.자연환경 요녕성 단동시 관전만족자치현 호산진 호산촌 호산(遼寧省 丹東市 寬甸滿族自治縣 虎山鎭 虎山村 虎山)의 정상에 위치. 단동시 동북 10㎞ 거리로서 애하(靉河)와 압록강이 합쳐지는 곳의 호산에 위치. 호산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가까이 있고, 서쪽으로는 애하(靉河), 북쪽으로 호산진(虎山鎭)과 접하며, 서쪽으로 단동시와 15㎞ 떨어져 있음. 이 곳은 평지에서 돌출한 독립 구릉(孤山)이어서 멀리서 바라볼 때 산의 형태가 범 모양인데다 평지상에 누워 업드려 있는 한 마리의 맹호와 같아서 호산(虎山)이라는 명칭이 생겼음. 호산진(虎山鎭), 호산촌(虎山村)의 명칭도 이로 인해 생겨난 것임. 호산은 해발 146.3m. 동서 길이 1,000m, 남북 너비 500m. 호산을 둘러싼 사면은 가파르고, 꼭대기 부분은 비교적 평탄함.유물정보 목선(木船) 1점, 목제노(木槳) 1점, 삿대(鐵頭木篙) 1점, 통(木桶) 1점, 구유(木槽) 1점, 목제완(木碗) 1점, 자작나무통(樺樹皮桶) 1점, 널빤지(木揷板) 1점, 목제받침막대(木座杆) 1점, 바가지(葫芦瓢) 1점, 갈대자리(葦席) 1점, 철추(鐵錘) 2점, 철제갈고리(鐵二齒鉤) 1점, 회도관(灰陶罐) 1점, 쌍횡이대도관(雙橫耳大陶罐) 1점, 새끼줄(繩索) 1점, 철갑편(鐵甲片) 1점, 철촉(鐵镞) 1점, 철모(鐵矛) 1점, 쇠단지(環耳鐵罐) 1점, 직구철솥(直口鐵鍋) 1점, 철경(鐵鏡) 1점, 철삽(鐵揷) 1점, 철부(鐵斧) 1점, 철천(鐵穿) 1점, 철겸(鐵鐮) 1점, 삿대(鐵篙頭) 1점, 철제량(鐵提梁) 1점, 허리띠걸쇠(鐵帶卡) 1점, 열쇠(鐵钥匙) 1점참고문헌 ·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釋文匯編』 東北卷, 中央民族學院出版社, 1988 · 馮永謙, 「丹東虎山高句麗遺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1992 · 馮永謙, 「明萬里長城東端起點的發現與硏究」『歷史地理』 10, 上海人民出版社, 1992 · 馮永謙·任鴻魁, 「寬甸虎山獲重大發現」『中國文物報』, 1993 · 袁輝, 「泊汋口位置考」『北方文物』 1993-2, 1993 · 任鴻魁, 「泊汋城方位考述」『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馮永謙, 「高句麗泊汋城址的發現與考證」『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7 · 遼寧省地方志編纂委員會辦公室, 『遼寧省志』 (文物志), 遼寧人民出版社, 2001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합이빈출판사, 2002 · 王禹浪·王文軼, 『遼東半島地區的高句麗山城』, 哈爾濱出版社, 2008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王禹浪·王文軼·王宏北, 「遼東半島高句麗山城槪述」『黑龍江民族叢刊』 2010-2, 2010 · 王禹浪·王文軼, 「丹東地區的高句麗山城」『哈爾濱學院學報』 2012-3, 2012 · 王連春, 「丹東市區的高句麗山城」『中國考古集成』 東北卷 兩晉至隨唐(二), 北京出版社,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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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가보 5호묘(胡家堡 5號墓)

    • 리스트여닫기 봉황산산성; 옥골성; 오골성(鳳凰山山城; 屋骨城; 烏骨城) 출토지 요녕성 봉성시 봉성진 고성리(遼寧省 鳳城市 鳳城鎭 古城里)연대 4세기 말~5세기 초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5 1985년 봉황성산성에 대한 1차 전면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그 후 몇 년 사이에 또 보충 조사를 실시하였음. 최옥관(崔玉寬)이 1994년 「鳳凰山山城調査簡報」『遼海文物學刊』1994-2에 발표함.2006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요녕성고구려유적보호공정항목(遼寧省高句麗遺跡保護工程項目)의 하나로 처음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함. 산성 북벽에 연결되어 있는 망대, 1호 문지, 2호 문지, 치, 초소, 돌구멍(石洞) 등을 조사함.이용빈(李龍彬)이 2007년 「遼寧丹東鳳凰山山城首次發掘取得重大收穫」『中國文物報』2007-3에 발표함.2007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봉성시문물관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鳳城市文物管理所)발굴면적은 약 500㎡. 2007년에는 산성 주변의 고구려 고분 183기 및 성내의 2호 요망대 및 대형 건물지 등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음.2010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제3호 문지, 제4호 문지에 대한 발굴조사 실시. 아직 보고서가 발표되지 않았음. 발굴 조사 내용은 요녕성 문물고고연구소 홈페이지(http://www.lnwwkg.com/index.asp)에서 참조할 수 있음.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구조특징 봉성 봉황산산성은 포곡식으로 연대는 고구려가 요동으로 진출한 4세기 말~5세기 초로 비정됨. 성곽의 규모는 전체 둘레 15,955m 약 16㎞로 요녕성에서 최대 규모임. 남, 북, 동 3곳에 성문이 있고 점장대, 초소(哨臺), 기간좌(旗杆座), 우물과 채석장, 적석묘, 요지(窯址) 유적 등이 발견되었음. 산성에는 옹문, 성가퀴(女墻)가 있음. 성내에서 고구려 시기의 토기 잔편, 연화문 와당 등 기와편이 출토됨. 성벽 중 완전한 성벽구간. 석축 성벽의 전체 길이는 7,525m. 보존 상태가 비교적 완전한 성벽은 2,355m로 총 31구간인데, 그 중 5개 구간이 가장 완전하고 특징이 명료하여 오골성의 성벽 규모와 구조를 가장 잘 보여줌. 흑구(黑溝) 구간. 북문을 지나 산능선을 따라서 무너진 성벽 동쪽으로 100m쯤 가면 완전한 성벽을 볼 수 있는데, 산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굽어서 흑구의 입구까지 일직선으로 총 길이는 1,000m임. 그 중에 150m 와 310m 길이의 양 구간은 특별히 완전한 원래 성벽인데 그 높이는 5-7m 이고, 윗 너비는 3-4m, 아랫 너비 4-5m, 성벽 꼭대기에 성가퀴(垛口)가 설치되지 않아 윗면 전체가 평평함. 성벽 외벽은 아주 가지런하게 쌓았는데 전부 쐐기형 돌(楔形石)을 사용하여 층층이 열을 지어 쌓았음. 쌓은 층은 25-30층 이며, 쐐기형 돌(楔形石)의 머리부분을 바깥으로 향하게하여 아주 가지런하게 하였고 매우 견고하게 만들었음. 성벽의 내벽은 일반적으로 가지런하지 않은데, 산비탈에 기대어 쌓은 경우 안측 성벽은 항상 가지런하지 않고 계곡을 횡단하여 쌓은 경우 내벽을 개 이빨이 교차하는 것처럼 쌓았는데, 다만 소수의 내벽만 가지런함. 성벽외벽이 무너진 곳과 성벽 단면상에서 성벽의 축조 방식을 간취할 수 있음. 다듬은 쐐기형 돌(楔形石)의 큰 머리쪽이 바깥으로 향하게 하고, 대체로 가공을 하지 않은 작은 머리 부분이 안쪽으로 향하도록 했는데, 성돌 길이는 50-70㎝이며, 두께는 균일하지 않음. 석면의 길이 30-40㎝, 너비 20-25㎝임. 벽심은 전부 불규칙한 석조나 할석을 층층이 쌓아 올렸는데 전부 “간체법(干砌法)”을 채용하였으며, 백회를 사용하지 않았고 층층이 맞물려 쌓아 성벽은 매우 견고함. 천년이 지나도록 비와 바람에도 의연히 버틸 정도로 견고함. 묘구(廟溝) 구간. 성의 중부 서측, 찬운봉(攢雲峰) 남측 860m 되는 곳의 큰 능선상에 위치함. 성벽내측은 홍석립구(紅石砬溝), 외측은 묘구(廟溝)임. 이 구간 성벽의 총 길이는 400m, 가장 완전한 부분은 100m. 이 100m 성벽은 산능선에서 떨어진 곳에 치우쳐 있는데 절벽아래의 가파른 비탈에 기대여 축조하였음. 그 높이는 6m, 아랫 너비 3-4m, 성벽의 윗 면이 절벽 아래의 산비탈과 수평을 이루는 모양으로 절벽 아래에 한 변의 너비가 15-20m에 달하는 평탄한 성벽 정상부를 형성하였음. 이 곳의 해발은 약 600m로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볼 수 있으므로 묘구(廟溝) 입구(山口)를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 병력을 집결할 수도 있음. 산성 서남부의가장 주요한 입구(山口)와 방어지대를 이룸. 봉황산 입구(山口) 구간. 찬운봉(攢雲峰)내 절벽 동북측 산비탈 구간으로, 봉황산 입구를 횡단하는 곳임. 이 산구를 중심으로 하여 성벽 서쪽은 찬운봉과 접하고, 동쪽은 동쪽 산봉우리와 이어지는데, 계곡을 가로질러 산봉우리로 이어지는 400m 길이의 성벽을 축조하였음. 대부분의 성벽은 보존상태가 완전 함. 특히 봉황산의 동쪽산의 성벽은 산등성이가 아니라 산등성이 바깥쪽의 평균 너비 100m인 산비탈에 축조하였음. 봉황산 동쪽 산의 한쪽에 골짜기 입구가 비교적 많고, 산비탈이 비교적 완만하여 인마(人馬)가 대량으로 집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임. 그리하여 산비탈상에 성벽을 축조하여 성내에 충분한 공제지대를 남겨두어 병영을 안치시키고 요새를 구축할 수 있고, 병력을 집결할 수 있어서, 방어와 출격에 유리하기 때문임. 필마구(匹馬溝) 구간. 산성 서북모서리 전환점의 필마구(匹馬溝) 입구(山口)에 위치. 산성 서북부의 방어 중점지구임. 이 입구(山口)의 현존 완전한 성벽은 60m. 동묘(東廟)구간. 산성의 동남모서리의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하고 북쪽으로 흑로석(黑老石) 입구(山口)와 이어져 있음. 이 산봉우리 꼭대기는 봉황산산성 동쪽 끝에 위치하고 시야가 특별히 아득하고 광활함. 산봉우리 등성이가 돌아가는 지점에는 아직도 40m의 성벽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20m는 비교적 완전한데 높이는 2m, 너비는 3m임. 그 축조 특징은 뚜렷한데 사용한 석괴는 비교적 크고 길이는 평균 90㎝ 정도. 석면은 길이 46, 너비 36㎝. 이러한 장대석으로 축조한 비교적 큰 성벽은 봉황산산성에서 많이 보이지 않지만 이 곳과 남문 서측 산등성이에 한 구간이 짧게 남아있음. 무너진 성벽 부분. 무너진 성벽 총 길이는 5,170m로 55구간으로 구성됨. 무너진 성벽은 곧 주요 벽체가 무너졌지만 벽 기초는 아직 남아 있고 많은 성돌 심지어 성돌 전부가 벽 기초 양측에 무너져 있는 상태를 가리킴. 이것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음. 먼저 다석형(多石型)임. 전부 혹은 대부분의 성돌이 남아있는 성벽. 이런 유형은 주로 성의 북, 동, 서쪽 지역에 남아있음. 이런 종류의 성벽은 대부분 완연히 긴 산등성이 상에 축조하였고 구간은 매우 많음. 주요 3개 구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음. 북문 구간은 북문을 기점으로 서쪽을 향해 뻗어 있는데, 610m 길이의 무너진 성벽이 있음. 구불구불하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없는 산등성이임. 성벽은 비록 무너졌으나 성벽의 기초는 아직 남아있어 성벽의 기초 위를 다닐 수 있고 성돌이 산성의 바깥 산비탈에 무너져 있음. 산성의 바깥 산비탈은 비교적 가팔라서 험준한 감이 있으며, 성벽 기초를 따라 구간 구간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벽체를 볼 수 있음.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보면 이 구간의 성벽 유적은 구불구불함. 대근채구(大芹菜溝) 구간은 북문에서 출발하여 성벽 기초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흑구(黑溝) 구간을 넘어 근채구(芹菜溝) 구간을 지나 곧장 동대정자초소(東大頂子哨所)로 일직선으로 가면 성벽이 끊어졌다 이어졌다하는 단속구간을 볼 수 있는데 성돌이 산등성이에 가득 쌓였음. 이 선은 산봉우리가 잇따라 이어지고 거대한 절벽이 끊어짐이 없으며, 크고 작은 입구(산구)가 끊임없이 나타나 밀림 중의 성벽이 갑자기 숨었다가 나타났다가 하는데, 이 구간의 잔존 성벽의 길이는 1,050m임. 봉황산 구간은 산성 서북모서리 입구(山口)에서 시작하여 입자구(砬子溝)와 봉황산 동산(東山) 구역에 들어가면 일직선으로 찬운봉에 도달하는데, 무너진 성벽은 끊임이 없이 연속해, 총 길이 1,000m임. 성돌은 성벽의 기초 양측에 퇴적되어 있음. 이 구간의 성벽은 대부분 완만한 산비탈에 축조하였지만 해발은 비교적 높아 모두 600m이상임. 다음으로 소석형(少石型)임. 대부분 성돌이 이미 남아있지 않은 성벽을 가리킴. 이런 유형은 주로 공로(公路)와 주거 구역에 가까운 산성의 남쪽 구역, 즉 남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뻗은 길이 2,000m 구간임. 이 구간의 성벽의 특징은 대부분 성돌이 사람들이 운반해 가고 다만 성벽 기초와 일부분의 성돌이 남아있음. 더욱이 남문의 양측 각각 500m 이내의 성벽은 일찌기 아주 심하게 파괴되었음. 천연성벽 부분. 봉황산산성은 인공적으로 수축한 높고 큰 성벽과 깎아지른 듯한 천연 절벽이 이어져서 구성되었음. 고구려인은 깎아지른듯 한 천연 절벽사이에 한 구간 한 구간씩 성벽을 축조하여 한 기의 완전한 산성을 구성하였음. 봉황산산성의 천연 성벽 부분은 대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음 먼저 대유형(大類型)임. 길이가 50m 이상의 천연성벽을 가리킴. 총 34개 구간. 그 중에서 200m를 초과하는 것이 12개 구간이고 400m를 초과하는 것이 9개 구간임. 가장 긴 천연성벽은 묘구(廟溝) 입구(山口)의 거대 천연성벽인데 전체 길이 800m. 가장 높은 천연성벽은 찬운봉의 깍아지른 듯한 절벽인데 전체 길이는 450m. 동대정자(東大頂子)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필마구(匹馬溝) 구간의 깎아지른 듯한 장벽은 해발 고도가 모두 700m이상임. 다음으로 소유형(小類型)임. 50m 이하의 거대 암반은 모두 53개 구간. 그 중 20m 이하는 44개 구간이 있고, 10m이하는 18개 구간이 있음. 이러한 종류의 천연 성벽은 모두 성벽 라인을 따라 이어진 크기가 같지않은 자연 암석임. 그것은 지면에서 모두 10m 이상의 높이이며 표면은 반질반질 윤이 나서 사람이 넘어가기 어려움. 그러므로 천연성벽이라 간주할 수 있음. 인공으로 축조한 성벽은 단지 이런 거대 암석에 연접하기만 하면 되며, 이러한 거대 암석은 모두 성벽보다 높아 사람이 그 위로 올라가면 시야가 탁 트임. 북문에서 동쪽으로 600m 가면 거대 암석을 만나는데 즉 성벽이 끝나는 지점으로, 내측의 거대 암석 위에 발 디딜 곳이 보이는데, 이것은 당시 축성할 때 남겨놓은 것임. 성곽시설로는 성문, 계곡입구 시설, 점장대, 요망대, 기간좌(旗杆座)등이 있음.역사적 의미 산성의 성격은 크게 네 가지 정도 말할 수 있음. 첫째, 요동반도의 병사 양성 및 전력 축적 근거지. 봉황산에 쌓은 오골성은 요동반도 동남부의 교통 중심지에 자리함. 오골성은 서쪽으로 낭낭산성을 비롯한 수암 지역의 여러 산성을 거쳐 안시성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백암성을 지나 요동성과 이어지며, 동쪽으로 압록강 의 물길을 따라 “박작성”을 지나 중상류에 있는 고구려의 내지로 직통할 수 있음. 명나라 때의 『遼東志』에 오골성은 “성은 산을 따라 쌓았으며, 10만의 무리를 수용할 수 있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이러한 설명은 실제 사실과 부합. 오골성의 전체 성곽이 높고 험하며 둘레가 16㎞에 이름. 오골성은 고구려 산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산성이며 현재 남아있는 보존 상태도 가장 좋음. 오골성이 위치한 곳은 전쟁이 빈번한 요하 일선에서 비교적 멂. 그러나 고구려 역사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음이 뚜렷하며, 특히 고구려 말기에 그러한 역할은 두드러짐. 612년 수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원정할 때, 우문술, 설세웅, 우중문 등의 대장군이 병사들을 이끌고 이 산성을 지나갔던 적이 있으며, 645년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군대가 백암성을 공격하자 “백암성의 청병 요청에 의해 오골성에서 군사를 보내 도왔음(『자치통감』권179 648년 당나라 설만철(薛萬徹)이” 병사들이 쳐들어가 박작성을 포위하자.......(중략).... 고구려는 장군 고문(高文)을 보내 오골성과 안시성 같은 여러 성의 군사 3만 여 명을 이끌고 와서 도왔다 “(『구당서』薛萬徹傳)”. 이처럼 오골성이 그 당시에 주위의 크고 작은 성들의 구원에 응하여 지원했던 것을 보면 이곳이 군사를 양성하고 전력을 축적하는 근거지 역할을 하였음. 둘째, 요동에서 평양으로 가는 관문. 오골성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였을 때도 중요한 공격 대상으로 등장함. 당 태종이 안시성을 수없이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자 당 태종에게 항복한 고연수, 고혜진이 “오골성 욕살은 늙어서 성을 굳게 지키지 못할 것이니 그 성의 군수 물자와 양곡을 빼앗아 평양으로 전진하자”고 건의함. 그러나 건안성과 신성에 있는 10만 병력과 안시성의 병력이 퇴로를 막고 뒤를 칠까 두려워 오골성을 치지 못하고 결국 안시성에서 패하고 돌아감. 여기서 오골성은 요동반도에서 평양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임을 쉽게 알 수 있음. 셋째, 봉황성은 안시성이 아님. 채희국, 전준현 같은 북한학자들은 봉황산성은 곧 환도산성이라고 주장함. 삼국사기의 산상왕 13년(209)에 “왕은 도읍을 환도로 옮겼다”고 하였는데, 이 환도가 바로 봉황산성이라는 것임. 후에 수도를 현재의 평양으로 옮긴 뒤에도 봉황성을 부수도로 삼고 전쟁이 나면 국왕이 직접 이 성으로 나아가 지휘했으며, 관구검이나 모용황이 쳐들어왔던 환도성도 바로 이 봉황성이라는 주장임.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에 “안시성은 옛날 안시홀, 혹은 환도성이라고 불렀다”고 되어 있고, 『삼국유사』 왕력에 “임인 8월에 안시성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곧 환도성이다”라고 한 기록을 바탕으로 환도, 즉 안시성이 한 때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환도, 안시는 곧 지금의 봉황성이라는 논리도 추가됨. 봉황성이 안시성이라는 주장은 홍대용의 『담헌서』와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나오지만 230여 년 전 이곳을 지나던 연암은 해박한 역사지식을 이용하여 봉황성은 안시성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음.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 이라고 함. 『당서』에 안시성은 평양에서 500리요, 봉황성은 또한 왐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는데, 「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 하니 무엇을 이름하는 것인지 모르겠음. 또 「地志」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懸) 동북 70리에 있다고 했으니, 대체로 개평현에서 동쪽으로 수암하(水巖河)까지가 300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쪽으로 2백리 가면 봉황성임. 만일 봉황성을 옛 평양이라고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00리란 말과 서로 부합됨. 『당서』의 기록 때문에 잘 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같은 『당서』에서도 지리를 전문으로 다룬 「地志」에서 안시성이 개평현 부근에 있다고 봉황성에서 서쪽으로 500리를 가면 안시성이 있으니 봉황성이 안시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음. 넷째, 요동의 중심성으로 최고 지방관인 욕살(褥薩)이 파견된 대성(大城)의 하나임.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한 뒤인 5세기 경에 처음 축성된 것으로 추정됨. 서쪽으로 낭낭산성을 거쳐 안시성에 이르고, 서북으로 백암성을 지나 요동성과 통하며, 동남쪽으로는 압록강가의 박작성을 지나 평양이나 국내성과 이어지는 요동반도 동남부의 교통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임. 이 산성은 서쪽으로 봉황산의 줄기와 동쪽으로 고려성자산(高麗城子山)이라는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이 이어지는 험준한 산세를 자연 성벽으로 삼고, 산봉우리 사이의 낮은 지대에는 성벽을 쌓음. 성의 규모는 둘레 15,955m로 현존하는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큶. 86구간의 석축 성벽과 87구간의 천연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총 길이만 7,525m에 이름. 성 내부는 평탄한 지대가 펼쳐져 있는데, 명나라 때 편찬된 『요동지』에는 “오골성에 10만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함.자연환경 요녕성 봉성시의 동남쪽 5㎞ 지점, 봉황산(鳳凰山)에 위치. 요녕성 봉성진 고성리에 있는 봉황산(鳳凰山)에 위치. 애하(靉河) 좌안(左岸). 봉황산의 최고봉인 찬운봉(攢雲峰)은 해발 836.4m. 봉황산산성 성곽의 사면은 높고 험준한데, 내부는 거대한 분지 모양을 띰. 봉황산의 최고봉인 찬운봉(攢雲峰)(해발 836.4m)과 맞은편에 있는 동대정자(東大頂子; 해발 약 800m)는 오골성의 동, 서 최고점을 이루며, 산성을 따라서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거대 절벽들이 이어져 있어 험준한 지형을 이룸. 산성이 위치한 자연 환경은 바로 천연적인 험산준령(險山峻嶺)으로 이어진 환형 대분지(環形 大盆地)임.유물정보 철제 화살촉(鐵箭镞) 1점, 철조(鐵條) 1점, 동전(銅錢) 1점, 석제절구(石臼) 3점, 토기편(土器片) 1점, 기와편(瓦片) 1점,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 1점참고문헌 ·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釋文匯編』 東北卷, 中央民族學院出版社, 1988 · 李煉, 「鳳凰山山城」『遼寧大學學報』 1989-5, 1989 · 陳大爲, 「遼寧境內高句麗遺跡」『遼海文物學刊』 1989-2, 1989 · 孫力, 「遼寧的高句麗山城及其意義」, 遼寧省博物館出版社, 1990 · 中國考古學會, 『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1993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崔雙來, 「丹東地區高句麗山城及其墓葬考察紀要」『中國考古集成』 東北卷 兩晉至隋(二), 北京出版社, 1996 · 王連春, 「丹東市區的高句麗山城」『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4 · 王連春, 「丹東市區的高句麗山城」『中國考古集成』 東北卷 兩晉至隨唐(二), 北京出版社, 1996 · 崔玉寬, 「鳳凰山山城調査簡報」『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崔玉寬·張慶賀, 「烏骨城考」『高句麗渤海硏究集成』 1, 哈爾濱出版社, 1997 · 王連春, 「丹東市區的高句麗山城」『中國考古集成』 東北卷 兩晉至隨唐(二), 北京出版社, 1996 · 崔雙來, 「丹東地區高句麗山城及其墓葬考察紀要」『中國考古集成』 東北卷 兩晉至隋(二), 北京出版社,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遼寧省地方志編纂委員會辦公室, 『遼寧省志』 (文物志), 遼寧人民出版社, 2001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官晓峰, 「現存最大的高句麗山城-鳳凰山山城」『蘭台世界』 2004-2, 遼寧省檔案局, 2004 · 李龍彬, 「遼寧丹東鳳凰山山城首次發掘取得重大收穫」『中國文物報』 2007-3, 2007 · 李龍彬·司偉偉, 「鳳城市高句麗鳳凰山山城」『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2008 · 王禹浪·王文軼, 『遼東半島地區的高句麗山城』, 哈爾濱出版社, 2008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王禹浪·王文軼·王宏北, 「遼東半島高句麗山城槪述」『黑龍江民族叢刊』 2010-2, 2010 · 王禹浪·王文軼, 「丹東地區的高句麗山城」『哈爾濱學院學報』 2012-3, 2012

    • 산념산성(山䧔山城)

    • 첨립산성; 첨립자산성(尖砬山城; 尖砬子山城)

    • 첨산산성(尖山山城)

    • 동대정산성(東大頂山城)

    • 단결산성(團結山城)

    • 성산산성(城山山城)

    • 이도구산성(二道溝山城)

    • 리스트여닫기 양둔산성; 대자산산성(楊屯山城; 臺子山山城) 출토지 요녕성 봉성시 남기진 남기촌(遼寧省 鳳城市 藍旗鎭 藍旗村)구조특징 성터는 산상에 위치. 산성은 산세를 따라 축조하였음. 북쪽은 높이 20m 이상의 낭떠러지이고, 남쪽은 험준한 절벽이며, 동·서 양측은 완만한 산비탈임. 평면은 대체로 삼각형을 띰. 남벽은 쐐기형 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음. 남아있는 성벽의 길이 30m, 높이 2m. 호구(濠溝)는 깊이 1m, 너비 2m임.자연환경 요녕성 봉성시 남기진 남기촌 양둔후둔(遼寧省 鳳城市 藍旗鎭 藍旗村 楊屯後屯) 북쪽 1㎞의 산상(臺子山)에 위치.참고문헌 · 崔玉寬, 『鳳城市文物志』, 遼寧民族出版社, 1996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리스트여닫기 산성구산성; 산성구촌산성(山城溝山城; 山城溝村山城) 출토지 요녕성 봉성시 통원보진 산성구촌(遼寧省 鳳城市 通遠堡鎭 山城溝村)구조특징 산성은 산세를 따라 축조하였음. 평면은 대체로 삼각형을 띰. 세 성의 모서리에 모두 작은 대(臺)가 있음. 성벽은 중앙에 석축열을 축조한 다음 흙으로 구축하였음(석심토축; 石心土築). 기초 너비 약 3m. 동서 양쪽의 성벽 외면은 절벽을 이용하였으며 내측에 1.5m 높이의 토벽을 쌓았음. 남면은 골짜기 입구로, 성문을 설치하였음. 성내 중부에 건물지가 있으며 승문기와편 등이 산견됨.자연환경 요녕성 봉성시(遼寧省 鳳城市) 서북부 통원보진 산성구촌(通遠堡鎭 山城溝村) 북쪽 1.5㎞ 산상에 위치.유물정보 승문와편(繩文瓦片) 1점참고문헌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王禹浪·王文軼, 『遼東半島地區的高句麗山城』, 哈爾濱出版社, 2008 · 王禹浪·王文軼, 「丹東地區的高句麗山城」『哈爾濱學院學報』 2012-3, 2012

    • 마포자산성(馬跑子山城)

    • 리스트여닫기 연산산성; 고려성산산성; 연정자산산성(鉛山山城; 高麗城山山城; 鉛頂子山山城) 출토지 요녕성 봉성시 청성자진(遼寧省 鳳城市 靑城子鎭)구조특징 산정의 지세는 평탄하며 T형태를 띰. 남쪽과 동쪽의 비탈은 완만하고 평탄하며, 서쪽과 북쪽의 비탈은 산세가 험준함. 산정에 성곽이 있는데, 산세의 자연지형을 따라 축조하였으며, 돌과 벽돌 성벽이 결합된 구조임. 산성의 평면은 장방형임. 성벽의 하단은 납작한 방형의 불규칙한 석괴로 축조하였으며, 성벽의 정상부는 푸른 벽돌(靑磚)을 깔아서 쌓았음. 산성의 서벽과 북벽은 자연산세의 험준함을 이용해 천연의 벽체를 삼았음.역사적 의미 연산산성 서남쪽 약 30㎞ 거리에 수암현 황화전진 진가보촌 남구산성(岫岩縣 黃花甸鎭 陳家堡村 南溝山城)이 위치함. 산성의 동남쪽 약 50㎞ 거리에 봉황성(鳳凰城)이 있음. 산성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초자하(哨子河)와 애하(靉河)의 발원지로, 두 강의 분수령인데, 이 산성은 두 강을 봉쇄할 수 있는 교통 요충지임. 초자하(哨子河)와 애하(靉河), 두 강 중의 하나의 하류를 통과해서 다른 하나의 강의 하류로 진입해오는 적들을 방어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연산산성은 중요한 전략적 의의를 지닌 산성임. 이 성은 고구려시대에 처음 축조되었으며, 명대(明代)를 지나면서 연용후 장방형으로 개축이 이루어졌음.자연환경 요녕성 봉성시 청성자진 연산(遼寧省 鳳城市 靑城子鎭 鉛山) 정상에 위치. 연산(鉛山)은 납의 매장량이 아주 풍부해서 얻은 이름이며, 원래의 이름은 서산(西山)임. 현지인들은 속칭 고려성산(高麗城山), 또 연정자산(鉛頂子山)이라고 부름. 연산(鉛山)은 해발 445.8m, 청성자진(靑城子鎭)의 서단에 위치.참고문헌 · 崔雙來, 「丹東地區最高的明代山城」『丹東史志』 1991-1, 丹東印刷, 1991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王禹浪·王文軼, 『遼東半島地區的高句麗山城』, 哈爾濱出版社, 2008 · 王禹浪·王文軼, 「丹東地區的高句麗山城」『哈爾濱學院學報』 2012-3, 2012

    • 청성산산성(靑城山山城)

    • 반정산성(胖頂山城)

    • 대가보산성(戴家堡山城)

  • 리스트여닫기 진안구(振安區)

  • 리스트여닫기 진흥구(振興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