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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산성자산성궁전지(山城子山城宮殿址)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후기
  • 위치
  • 유물번호
    S000588
  • 위치(출토지)
    中國 吉林省 集安市
  • 지역
    집안(集安市)
  • 유형
    왕궁
  • 형태사항
    (2004년 보고서 조사내용)│부속시설 포함 전체규모 남북길이 95.5m, 동서너비 86.5m, 총면적 8,260.75㎡│담장 길이 동벽 91m, 서벽 96m, 북벽 75m, 남벽 70m, 전체 둘레 332m  , 220점 
출토지
중국 길림성 집안시
궁전지 북쪽의 지리좌표 북위 41˚09'02", 동경 126˚09'26.2"(中國 吉林省 集安市)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05조거용장
(鳥居龍藏)
산성에 대한 개괄적인 조사.
鳥居龍藏, 1910, 「鴨綠江畔に於ける高句麗の遺跡」『東洋時報』137·140;鳥居龍藏,1914, 「丸道城及國?城の位置について」『史學雜誌』25-7 를 발표함.
1913관야정, 곡정·금서 문학사, 율산 공학사 등
(關野貞, 谷井·今西文學士, 栗山工學士 等)
조선총독부의 촉탁을 받아서 성벽 실측 및 조사.
關野貞 「滿州集安縣及び平壤附近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遺跡(1·2)」『考古學雜誌』5-3·4 를 발표함.
1936지내굉, 흑전원차, 소천현부, 삼상차남, 수야청일 등
(池內宏, 黑田源次, 小泉顯夫, 三上次男, 水野淸一 等)
성벽 및 성내의 주요 유적 실측.
池內宏, 梅原末治, 1938, 『通溝』上, 日滿文化協會 를 발표함.
1962길림성봑물관 길림고고대
(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
궁전지의 전체현황과 초석의 배치상황 조사.
李殿福, 1982, 「高句麗丸都山城」『文物』1982-6 ; 1982, 「集安高句麗山城子山城考略」『求是學刊』1982-1;1994, 『東北考古硏究』(2), 中州古籍出版社 를 발표함.
1982길림성박물관(이전복)
(吉林省博物館(李殿福))
고구려의 환도산성(=위나암성)으로 비정함.
李殿福, 1982, 「高句麗丸都山城」『文物』1982-6 ; 1982, 「集安高句麗山城子山城考略」『求是學刊』1982-1;1994, 『東北考古硏究』(2), 中州古籍出版社를 발표함.
제2급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
2001-2003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의 金旭東(팀장), 李光日(집행팀장), 谷德平, 賈瑩, 王昭, 張玉春, 趙昕, 于立群, 劉慶彬. 집안시박물관의 王鵬勇, 林世賢, 董峰, 四平市文物管理委員會協公室 趙殿坤, 德惠市文物保護所 孫東文, 九臺市文物保護所 姚啓龍, 中國人民解放軍 總裝備部勘探測繪總院 楊林春, 吉林大學 文學院考古學系在校硏究生 唐淼, 張小輝, 李蜀蕾, 王樂, 華陽, 金君麗, 何景成 등 그 중 金旭東, 李光日, 王鵬勇, 唐淼, 趙殿坤, 孫東文, 姚啓龍 등은 환도산성의 조사, 발굴 및 자료의 정리 작업에 참여함.
산성에 대한 전면적인 측량 및 조사와 발굴을 시행함. 궁전지, 장대(전망대), 저수지, 1호문지(남옹문), 2호문지, 3호문지에 대한 전면 발굴을 시행함. 2003년도에는 성내 일부유적에 대한 보수작업을 진행함.
2001년 발굴시 각 층계상 대지의 경계선은 불분명하였고, 대다수 대형 초석은 지표에 노출되어 있었음. 2001년 4-11월에는 1호와 2호 대지 및 서쪽과 북쪽 담장을 발굴함. 2002년 6-9월에는 3호와 4호 대지 및 남쪽 담장을 발굴함. 2003년 5-6월에는 동쪽 담장과 그 외곽의 배수구를 발굴함. 발굴 면적은 10m×10m 트렌치 91개로 총면적은 9,100㎡임.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編著, 2004, 『丸都山城-2001~2003年集安丸都山城調査試掘報告』, 文物出版社 를 발표함.
제2급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
구조특징
鳥居龍藏(1905년)의 조사 당시, 궁전은 성의 오른편 즉 동측에 조영되어 있는데, 石段을 축조한 흔적이 잘 남아 있었고, 석단 부근에는 기와나 기타 출토물이 흩어져 있었음.
關野井(1913년)의 조사 당시, 건물지에 대해 성내에는 원래 창고 등의 흔적으로 보이는 곳이 있으며, 붉은색의 기와편이 산재해 있었음. 대다수가 수키와와 암키와의 파편으로, 제작 수법이나 문양은 통구 및 동대자유적의 출토품과 거의 같으며 고구려 말기의 것으로 보임.
池內宏(1936년)의 조사 당시, 장대에서 동북으로 4-5町 거리에 동벽으로 이어지는 경사지의 중턱에 상당히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2단 대지가 있는데, 기와편이 흩어져 있고 그 사이로 크고 작은 초석이 여러 개 남아있었음. 초석의 배열 상태로 보아 궁전지로 볼 만한 유적임. 아래쪽 대지(前段) 중앙부의 초석은 거대하며, 그 수는 20여개임. 좌우에 배열된 초석은 비교적 작은 것으로 수량이 매우 많음. 대체로 중앙이 正殿이고 그 좌우에 翼廡[翼廊]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위쪽 대지에도 그와 병행한 여러 열의 초석이 가로 방향으로 기다랗게 분포되어 있음. 이것도 궁전의 일부를 구성하는 건물의 흔적으로 보임. 다만 시간 관계상 실측하지는 못함.
吉林省博物館 集安考古隊(1962년)의 조사 당시 궁전지의 면적은 길이 95.5m, 너비 76m로 기다랗고 좁은 3층의 층계상 대지[階地]를 조영했는데, 층계 높이는 각각 1m 내외임. 제1층계상 대지(階地)는 비교적 협소함. 제2층계상 대지(階地)는 비교적 넓음. 제3층계상 대지(階地)는 협소함. 각 층계상 대지에는 크고 작은 초석이 수십 개 분포되어 있는데, 남북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었음. 제2층계상 대지(階地)의 초석이 약 50여개로 가장 많음. 제1층과 제3층 층계상 대지(階地)의 초석은 비교적 적음. 각 층계상 대지(階地)는 모두 길쭉한 돌을 쌓아올려 축대를 조성함.
李殿福(1982)의 조사 당시, 남북 길이 92m, 동서 너비 62m 범위에 3층 층계식 臺地를 조성했는데, 각 층의 높이는 1m 정도임. 제1층과 제3층 대지의 폭은 비교적 좁고 제2층 대지의 폭은 상대적으로 넓음. 각 층 대지에는 크고 작은 초석 수십 개가 남북방향으로 열지어 있음. 제2층 대지에 약 50여 개로 가장 많으며, 제1층과 제3층 대지에는 초석이 비교적 적음. 각 층계상 대지에는 길쭉한 돌로 축대를 쌓았음. 전체를 발굴하지 않아 건물의 구조와 형태를 파악할 수 없음. 대체로 건물지가 산을 등지고 있고, 대지가 남편서 60도 정도인 것으로 보아 서향이었다고 추정됨.
2004년 보고서에서는 궁전지의 전체규모, 지층현황, 담장, 배수체계, 각 건물지에 대해 전면적인 재조사를 시행하였고 이를 통해 궁전지의 전체현황을 새롭게 파악함.
전체규모를 보면, 산세에 따라 지었는데 동고서저로 낙차는 13m 정도임. 서향한 동쪽에 자리를 잡았으며, 방위각은 234도임. 지세로 인해 평면 형태는 불규칙함. 동·서 두 담장은 비교적 평평하고 곧지만, 남·북 담장은 기울어져 있음. 막돌로 담장을 축조하였는데, 현재는 겨우 기초가 남아 있음.
지층은 모두 6개의 층위로 구성됨.
제1층은 현대 경작층, 황갈색토로 토질은 부드럽고 두께는 0.15~0.3m임. 대량의 고구려 붉은색 기와편과 소량의 현대 도자기편이 포함되어 있음.
제2층은 진흙층, 황갈색으로 토질이 비교적 단단함. 잔돌과 모래가 많이 섞여 있으며 두께는 0.05~0.06m임. 이 층에서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음. 주로 궁전지 북부와 동북부에서 보이며, 서북부 및 궁전지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분포하지 않음.
제3층은 흑색 가루 상태의 흙이고 잿더미(灰燼)와 숯찌꺼기(灰屑)가 섞여 있음. 두께는 0.1~0.35m이며, 대량의 붉은색 기와편, 와당 및 건축자재가 보임. 이 층의 범주는 궁전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음. 유물도 가장 풍부하게 출토되었음.
제4층은 황갈색토이고 토질은 부드러우며 알갱이는 비교적 굵음. 불에 탄 흙덩이가 상당량 섞여 있음. 두께는 0.05~0.2m로 주로 2-4호 대지의 중남부에 분포되어 있으며, 1호 대지에도 부분적으로 발견되지만 불연속적임. 지층의 두께는 비교적 얇지만, 유물은 비교적 풍부함. 대량의 홍색 잔와, 귀면문 와당, 철제 못(鐵釘)등이 출토됨. 그 밖에 불탄 나무 기둥 흔적도 발견됨.
제5층은 담황색의 점토층이고 비교적 깨끗하며 세밀함. 두께는 약 0.15m이고, 인공적으로 흙을 다졌으며 토질은 단단함. 이 층의 범위는 궁전지를 복개 정돈하였고, 어떤 유물도 발견되지 않음.
제6층은 생토층이고 황갈색토임. 대량의 잔돌(碎石) 및 괴석이 섞여있음. 토질이 비교적 단단함.
1층은 근현대 경작으로 형성된 현대 문화층임. 제2층은 홍수로 형성된 충적층임. 동쪽 언덕이 궁전지 남부 구역을 둘러싸는 병풍의 역할을 해줌으로써 홍수의 영향을 적게 받았으며, 북부의 평평하고 완만한 대지는 홍수의 주로 통로임. 이로 인해 북부의 제2층 퇴적층은 중부에 비해 비교적 두껍게 형성되었고, 2호와 3호 대지의 건물 북부의 구조물이 많이 훼손되었을 뿐 아니라, 배수고와 기초벽(基墻)의 위치까지 이동하도록 만들어 전체적으로 심하게 훼손되었음. 제3층과 제4층은 궁전지가 두 차례 폐기된 과정을 반영함. 이 층의 포함물을 분석하여 궁전지가 대화재를 입었음을 확인할 수 있음. 제4층은 궁전지 건축이 아직 전면적으로 훼손되기 전에 화재로 불타 형성된 퇴적층임. 퇴적은 비교적 얕으며, 또 대량의 홍소토를 함유함. 제3층은 궁전지내 건축의 큰 면적이 훼손되어 형성된 제2창 폐기 퇴적임. 재 찌꺼기층이 두터우며, 유물도 풍부함. 1-4호 대지와 광장 등에서 모두 확인되는 제5층은 궁전지의 건축물과 대지를 조영하기 위해 땅을 다져서 조성한 인공지층임.
건물대지의 전체 현황을 보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1~4호의 4층 인공대지를 조성. 각 대지는 장방형이며, 서·남·북 삼면에는 막돌로 축대를 쌓았음. 너비는 일정하지 않으며, 2호가 약간 넓고, 1호가 가장 협소함. 1~4호 대지상에 11동의 건축물을 조영한 것으로 추정됨. 1호와 2호 대지 사이에 장방형 광장이 있는데, 북측에 정면과 측면이 2칸인 건물이 있음. 유사한 건물이 2호·4호 대지 북부에도 있음.
1호 대지는 비교적 평탄하고 평면은 장방형임. 길이 89m, 폭 9.5m, 면적 854.5㎡임. 남, 서, 북 3면에 돌로 축대를 조성했고, 동측에 막돌로 쌓은 배수구가 하나 있음. 건물 유적은 많이 파괴되었음. 초석 혹은 초석 구덩이만 겨우 남아있음. 건물지 2동이 분포했을 것으로 추정됨. 6호 건물지는 북측 건물지로 정면 8칸, 측면 2칸, 편남에 문길이 있음. 7호 건물지는 남측 건물지로 정면 17칸, 측면 2칸임.
2호 대지는 비교적 높음. 광장과 떨어져 있고, 상대 고도는 3.3m임. 대지 표면은 비교적 평탄하며, 북쪽은 협소하고 남쪽은 넓음. 남, 서, 북 3면에 돌로 축대를 축조했음. 축대는 서측이 비교적 높고, 남과 북 양측은 동고서저의 형상으로 높이 차이가 있음. 전체 길이 87.5m, 북부의 길이 50m·너비 12.5m, 남부의 길이 37.5m·너비 17.5m임. 대지 동측 및 남부 팔각형 건물지 주변에 배수구가 있음. 축대는 많이 파괴되었음. 북단의 축대는 벽체가 이동되었고, 남단도 대부분 파괴된 상태임. 현재 대지상의 초석은 축대 가까이 위치한 것의 위치가 일부 이동한 현상을 제외하면, 대부분 보존 상태가 좋음. 총 4동의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4호 건물지는 북단 가까이에 위치하며 정면과 측면 모두 2칸임. 8호 건물지는 측면 3칸, 정면 10칸임. 2호와 3호 건물지는 남단에 위치한 두 동의 팔각형 건물로 북에서 남으로 2호와 3호 건물지로 편호함.
3호 대지는 평탄하고 완만함. 2호와 4호 대지 사이의 완만한 비탈에 위치함. 서, 북, 남 3면에 축대를 조성하였고 동측에는 배수구를 축조함. 장방형으로 길이 82m, 너비 7m임. 전체 구조는 파손이 심하며, 배수구는 대부분 변형되었고, 일부 석축 구조는 남아있지 않음. 남북 축대는 조금 남아있는데, 대체적인 외형을 판단할 수 있음. 대지상의 건물은 모두 파괴됨. 초석의 위치도 이동되었고 파손현상이 심함. 1개의 회랑식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9호 건물지는 회랑식 건물로 축대 중부에 석축 층계가 있음.
4호 대지는 궁전지 가장 위쪽에 위치함. 3호 대지와의 상대 고도는 2m임. 서, 남, 북 3면에 축대를 쌓고 동쪽에 배수구를 조성함. 장방형으로 길이 85.5m, 너비 11.8m임. 자연적인 요인과 인위적 요인으로 인해 파괴가 심함. 건축물은 남아있지 않으며, 서측 축대는 모두 파괴되었고, 북측 축대의 일부가 남아 있음. 초석의 배열상태로 3동의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 5호 건물지는 북단에 위치하며 정면과 측면 모두 2칸임. 10호 건물지는 규모가 작고 측면 2칸, 정면 4칸임. 11호 건물지는 4호 대지의 주건물로 측면 2칸, 정면 15칸임.
궁전지는 서쪽 담장에 궁문 2곳이 남아있음.
1호 궁문지(정문)은 서쪽 담장 중앙에 위치함. 3호 대지의 석축 층계 등 각 건물 대지의 석축 층계와 함께 궁전지의 정중앙 축선에 위치함.
2호 궁문지는 정문에서 북쪽으로 17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함. 6호 건물지의 문길과 마주보고 있음.
배수시설은 비교적 체계적인데, 인공과 자연 배수시설로 나뉨. 각 층 대지에는 모두 인공적으로 축조한 배수구가 있음. 남·북 담장과 1-4호 대지 사이에는 지세를 이용한 자연 배수시설이 있음. 인공 배수구는 모두 각 건물대지 동측에 조성되었고, 남·북의 축대와 일체를 이룸. 배수구를 통과한 물은 대지와 담장 사이의 자연 배수시설로 모여듦. 일부는 남단의 지세가 비교적 낮은 담장 아래를 통해 배출됨. 남측 담장의 북부와 중부의 벽체 아래에서 소형 배수구 두 곳을 발견했는데 모양이 모두 규정적이지 않음.
궁전지 바깥에서 부속유적 두 곳을 발견했음. 하나는 동벽 바깥에서 1.5㎞ 떨어진 지점의 5호 배수구로 위치하며, 그 구조는 궁전지의 인공 배수구와 기본적으로 일치함. 5호 배수구의 양 끝에 있는 배수구는 약간 활 모양으로 굽어져 있어 구별되는데, 배수구의 물이 지세로 인해 남북 양측 담장의 바깥으로 배수됨. 서측 담장 바깥의 북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서 막돌로 쌓아올린 건축시설이 하나 발견되었음. 깃발(王旗)을 세우던 시설로 추정됨.
궁전지의 각종 시설과 건물지 현황을 보면,
담장은 산세를 따라 축조했는데, 평면은 불규칙한 평행사변형이며, 동북에서 서남향으로 경사짐. 남북 길이 91-96m, 동서 너비 70-75m임. 막돌로 쌓아 축조했는데, 대부분 화강암이며, 석회암과 강돌이 섞여 있음. 대부분 가공을 거치지 않았음. 산성자산성의 성벽이나 장대, 성문의 축조방식과는 구별됨. 기초부는 생토층 위에 직접 조성했고, 끼워 넣으면 층층이 포개거나 내리누르는 방식으로 축조했음. 동측 담장의 틈새에서 석회 잔흔을 발견하였음.
궁문은 서측 담장에서 궁문지를 두 곳 발견함. 1호와 2호 궁문지로 편호.
대지와 축대를 보면 궁전지는 동고서저로 고도 차이는 13m에 달함. 인공적으로 조성한 대지는 모두 4곳이며, 서에서 동으로 1-4호 대지로 편호하였음. 지세에 따라 조성했는데, 각 대지의 높은 곳을 삭평하여 낮은 곳을 메워 고도차를 낮추어 수평상태를 이루고, 아래쪽에 축대를 쌓아 대지의 구조를 견고하게 함. 북, 서, 남 3면에 축대를 쌓았는데, 서측 축대가 가장 높음. 3면의 축대와 동부의 인공 배수구가 합쳐져 장방형 대지를 이룸. 각 층의 대지에는 황색 점토를 깐 지면이 있음.
궁전지 내부의 도로체계는 비교적 간단함. 층계 및 층계와 관련된 문길이 궁전지의 도로 체계를 구성하고 있음. 층계 2곳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대지의 중부에 위치함. 궁전의 정문과 동일한 축선상에 위치하며 궁전지의 중축선을 형성함. 그 밖에 4호 대지의 중부에 1, 2호 층계와 서로 대응하는 서측 축대상에도 비교적 잘 다듬은 괴석을 쌓아 올린 것이 발견되었고, 너비는 1호 층계와 비슷함. 4호 대지상에도 비슷한 층계가 있음.
배수시설은 비교적 체계적임. 동측의 둥근 언덕은 궁전지의 남측에 수해를 입지 않도록 만든 것임. 궁전지의 면적은 비교적 넓게 조성했는데, 이는 강우의 피해를 충분히 고려한 것임. 각 대지의 외측에 배수구를 조성함. 동시에 자연지세를 활용해 대지 양측에 자연 배수구를 설치해였음.
궁전지 내에서 건물지 11동을 발견함. 기능적인 차이로 인해 건물지의 구조는 서로 같이 않음.
궁전지 바깥에서 부속 건물 2곳이 발견되었음. 유적은 파괴가 심한 상태이며 유물의 부재로 건물지의 성격을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움.
2003년 조사 당시 산성 내부에서 총 38기의 무덤을 확인함. 주로 남부의 대지와 산 아래의 평탄하고 완만한 지대에 분포함. 지연 골짜기를 경계로 4구역으로 구분한 지역에 모두 분포해 있는데 그 중 Ⅰ구역의 동부와 Ⅲ구역의 동부에 비교적 밀집 분포해 있음. 모두 고구려 시기에 속함. 적석묘, 방단적석묘, 봉토묘 등 3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적석묘 30기, 방단적석묘 6기 봉토묘 2기임. 상세한 사항은 〈산성하고분군의 산성자산성 내부의 고분군〉 항목 참조.
출토유물을 보면,
關野井(1913년) 조사 당시 성내에는 원래 창고 등의 흔적으로 보이는 곳이 있는데 붉은 색의 기와편이 산재해 있었음. 대다수가 와당(巴瓦) 및 평기와(平瓦)의 파편으로, 수법문양은 통구 및 동대자에서 나온 것과 같으며 고구려 말기의 것으로 보임.
池內宏(1983년) 조사 당시 성문터, 병영터, 궁전터 등에 고구려시기의 붉은색 기와편이 산재되어 있었음. 성 내부의 현지 주민으로부터 八瓣연화문와당, 귀면문와당, 사선문평기와, 젖망울무늬평기와 등의 기와를 구입함. 1935년 이 산성을 조사했던 기타 일행이 장대 아래에 거주하는 현지 주민으로부터 고구려기와를 다수 구입했는데, 궁전지에서 출토되었을 것임.
李殿福(1982년) 조사시, 궁전지에는 고구려 시대의 기와편이 널려 있었음.
집안현 문물지(1984년)에서 각종 철촉이 보고됨.
〈高句麗 兵器硏究〉에서 철모가 보고됨.
2004년 보고서에서 보고된 출토유물은 철기, 동기, 도기 등 비교적 풍부함. 건축 자재가 대부분이며, 거마구, 무기 및 생활용기가 소량 포함됨.
유금동기는 19건 출토되었고 모두 같은 종류의 금을 입힌 치레걸이 동기임. 유물의 몸체 표면은 금을 입혔는데 대부분 탈락되었음. 유물의 몸체는 허리(亞腰)형의 棒 모양 부재와 하부가 筒形인 부재를 결합시켜 만든 榫卯구조로, 양자 사이에 연화모양의 잎 6개를 장식하였음. 출토할 때 유물의 대부분이 파손되었음.
꽃잎 모양 치레걸이는 5점 출토되었음.
철기는 모두 333건 발견됨. 못(釘), 고리(環), 環鼻, 받침 조각(墊片), 테(箍), 굽은(꺾인) 잎사귀, 갈고리모양(낚시바늘모양) 그릇(釣形器), 모양이 다른 못(別釘), 釘履, 편자(馬掌), 편자못(馬掌釘), 거마구(車馬具), 가죽띠(革帶), 허리띠걸쇠(帶拘), 걸개(挂件), 꾸미개(飾件), 儀仗器), 화살촉 등임.
철제못은 255점으로 길이가 긴 것, 중간 것, 짧은 것 및 특수형태의 철제 못 4가지로 분류됨. 긴 못(長釘)은 26건으로 일반적으로 전체길이 10-18.5㎝이고 釘身 단면의 변 길이는 0.6-0.8㎝임. 단측 釘帽, 釘身의 단면은 방형임. 중간길이 못(中長釘)은 일반적으로 전체 길이 6-10㎝, 釘身 단면의 변 길이는 0.3-0.6㎝로 나뉨. 정모의 차이에 따라 A형과 B형으로 나뉨. A형은 단측 釘帽의 형태로 42점임. B형은 정모가 납작하고 둥근 형태로 15점임. 짧은 못은 일반적으로 전체 길이 3-6㎝, 釘身 단면의 변 길이는 0.2-0.5㎝임 정모의 차이에 따라 A, B, C형으로 분류됨. A형은 69점으로 정모 직경이 0.8~1.5㎝이고 丘形 정모임. B형은 34점으로 정모 직경이 0.5~1.4㎝이고 편원정모임. C형은 53점으로 단측 정모이고 釘身단면은 방형임.
쐐기형 못(楔形釘)은 4점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납작하고 얇음. 평면은 쐐기 모양이고 넓은 쪽의 끌끝이 변해서 정모가 되었음.
창이 둥근 못(環帽釘)은 5점으로 둥근 모양(環型)의 정모임. 釘身의 한쪽 끝은 예리하며, 한쪽은 만곡되어 廢合環形을 이루어, 정모를 만듦.
쇠로 동인 못(거멀못, 鋦釘)은 6점으로 몸체는 ‘U’자 모양에 가깝다. 양끝은 예리하며, 단면의 변 길이는 방형임.
철제 고리(鐵環)은 3점으로 環體단면원형임. 環體는 環鼻를 통과해 180도 자유선회가 가능함. 環鼻의 목 부분에 좁고 단단한 목판을 이용해 이중으로 얇은 철편을 통과시켜 環鼻의 뾰족한 끝은 別釘 모양을 띰.
고리 못(環鼻)은 4점으로 단면 혹은 양끝이 예리하고 가는 鐵條가 중부에서 만곡을 이루어 고리가 만들어졌음. 環體는 단면 원형이고 나머지 부분의 단면은 방형임. 양측이 한데 합쳐져 있음. 이중의 얇은 철편이 통과해 예리한 끝에 이르러 別釘을 고정시켰음.
받침 조각(墊片)은 얇은 철편으로써 만들어졌음. 모양은 규칙적이며, 위쪽에 작은 구멍이 있음. 못을 통과시켜서 목판의 위쪽에 고정시켰음. 모양의 차이에 따라 A, B, C, D형으로 나눌 수 있음. A형은 4점으로 장방형의 받침 조각(墊片)임. B형은 2점으로 원형의 받침 조각임. C형은 2점으로 舌形의 받침 조각임. D형은 1점으로 모서리가 굽은(꺾인) 받침 조각임.
철제 테(鐵箍)은 4점으로 長條形의 얇은 철편으로 만들어져 있음. 장방형을 띰. 위쪽에 작은 구멍이 있으며, 못을 통과시켜 목기를 고정시켰음.
경첩(折葉)은 7점으로 두 개의 얇은 철편을 마주 대하여 꺽여서 이루어짐. 철편 사이는 못이 통과해 고정되어 있는데 90도 회전이 가능함. 절엽 위쪽에 작은 구멍이 있고, 못이 통과해 고정되어 있음.
철제 못 신발(鐵釘履)는 5점으로 형태 차이에 따라 A, B형으로 양분됨. A형은 3점으로 몸체는 이어진 ‘U’형임. 발판면(踏面)과 신발 못(履釘) 단면은 모두 방형임. B형은 2점으로 몸체는 말굽형을 띰.
편자(馬掌)는 4점으로 말굽형임. 위쪽에 납작하고 원형인 작은 구멍이 있음. 편자 못(馬掌釘)은 3점으로 체형은 비교적 작음. 못의 몸체는 납작하고 얇음. 모자 부분은 정면에서 볼 때 삼각형이며, 못의 몸체 및 창 부분의 단면은 모두 장방형을 띰.
혁대는 5점으로 구멍 직경이 3㎝임. 4조각이 舌形의 얇은 철편으로 만들어져 있고 4개의 철편에 못이 꽂혀 서로 연결되어 있음. 4개의 철편에 못이 통과해 서로 연결되어 있고 각각의 조각 위에는 원형의 작은 구멍이 3개 나 있음. 각 2개의 철편이 일조가 되어 중간에서 피혁을 좁혀 철제 못을 고정시킴.
허리띠걸쇠(帶拘)는 4점으로 형태는 모두 다름.
철촉(鐵鏃)은 8점으로 형태의 차이에 따라 3유형으로 분류됨. A형은 세모서리형(三棱形鏃)임. B형은 쌍날개형(雙翼鏃)임. C형은 마름모형(菱形鏃)임.
궁전지에서 출토된 생활용 토기의 수량은 비교적 적은 12건임. 호(罐), 소반(盤), 盆), 충(盅;술잔) 및 토기 구연부, 손잡이(器耳), 바닥(器底) 등.
와당은 수면문, 연화문, 인동문 와당 3종류가 있음.
수면문 와당은 모두 고부조식으로 이빨 부분의 차이에 따라 A, B, C형으로 분류됨. A형은 이빨이 10개인 수면문 와당으로 9점임. 수면선이 짙고 힘이 있음. 장방형의 큰 입, 가운데 구슬모양의 작은 혀가 있음. 눈동자는 원형이며, 눈알(안구)이 크고 바깥으로 볼록하며, 두 줄의 凸弦形을 시문하였음. 상부에 각각 속눈썹이 있는데 불꽃 모양임. 콧구멍은 둥글고 크며 바깥으로 들려 있으며, 콧등이 있는 곳에 구슬 모양의 凸起가 하나 있음. 콧등에서 이마쪽으로 차례대로 3겹의 人字가 시문됨. 눈썹, 수염 모두 짧고 위로 말려 올라가 있음. 외연에 양각선문(凸弦文)을 한 줄 시문하였음. B형은 이빨이 12개인 와당으로 27점임. 혀 부분의 차이에 따라 두 종류로 분류됨. Ba형은 혀가 있음. 獸面線은 섬세하고 둥글며 윤이 남. 장방형의 큰 입 가운데 ‘一’자형의 있음. 눈동자는 대체로 마름도형이며, 각이 셋 있어 송곳 모양을 만들어 위로 말려 올라감. 눈알은 돌출되고, 음각선문(凹弦文) 한 줄을 시문함. 콧구멍은 둥글고 크며, 코 윗부분에 3겹의 齒堆文이 있음. 눈썹, 수염은 모두 위로 말려올라간 모양이며, 이마에 화염문을 시문하였음. 외연에 한 줄의 양각선문을 시문하였음. Bb형은 3점으로 당면은 비교적 크다 獸面線은 둥글며 윤이 남. 장방형의 큰 입임. 입가는 위로 말아 올렸음. 눈동자는 마름모형, 눈알(안구)은 볼록하게 돌출해 있음. 콧구멍은 둥글고 크며, 콧등 위에 두 겹의 반월형 퇴문이 거꾸로 배치되어 있음. 이마 정 가운데에 유돌이 하나 있음. 얼굴면 주위에 수염을 말아올려 장식하였는데 양측이 대칭 분포이며 각각 6개임. C형은 이빨이 13개인 와당으로 4점임. 혀가 없고 당면은 비교적 큼. 문양선은 히미 있고 모서리각이 분명함. 장방형의 큰 입이고, 입가는 위로 말아 올렸음. 눈동자는 마름모형, 눈알(안구)은 볼록하게 돌출해 있음. 콘구멍은 둥글고 크며 바깥으로 드러나 있음. 눈알은 크고 돌출해 있으며, 눈동자는 원형임. 콧등이 있는 곳에 3겹의 반월형 퇴문을 거꾸로 배치했음. 눈동자 상부, 이마에 각각 화염문을 장식하였음. 얼굴면 네 둘레에 乳釘文을 장식하였음. 외연은 양각선문을 한 줄 둘렀음.
연화문 와당은 16점으로 모두 고부조식임. 문양의 차이에 따라 A, B, C형으로 분류됨. A형은 6판연화문와당으로 1점임. 문양은 고부조식 6판연화문으로 화판 사이에 삼각형 凸文을 시문하였음. 중심은 유돌임. 외연에 양각선문을 한 줄 시문하였음. B형은 8판연화문와당으로 2점임. 화판 사이에 삼각형 철문을 시문하였음. 유돌 외연에 양각선문을 한 줄 시문하였음. C형은 9판연화문와당으로 13점임. 화판 사이에 삼각형 철문을 시문하였음. 중심은 유돌임. 주연 내측, 화판 및 유돌 외연에 양각선문을 한 줄 돌려 분별하였음.
인동문 와당은 14점으로 얕은 부조식임. 8가지 인동문 도안을 한 줄 두르고, 바깥은 양각선문을 시문하였음. 중심의 돌출부에 작은 유돌을 시문하였음.
암키와(板瓦)는 출토 수량이 비교적 많음. 그 중 2점은 복원 가능함. 대부분 사다리형이고 단면은 약간 활 모양임. 전체에 시문하였고 문양은 격자문, 능형문, 席文 등임. 소량의 암키와 상에 음각문 부호를 시문하였으며 주로 붉은색임.
수키와(筒瓦)는 출토수량이 비교적 많음. 11점이 복원 가능함. 앞은 좁고 뒤는 넓으며 전체는 사다리형임. 대부분은 무문임. 부분적으로 음각문 부호 혹은 문자를 시문하였음. 대부분 붉은색 혹은 담홍색임.
舌形기와는 3점으로 앞쪽 끝은 비교적 좁고, 꼬리끝은 비교적 활 모양임. 정면에서 볼 때 혀 모양임. ‘혀(舌)’의 뾰족한 끝은 약간 위로 말렸으며 횡으로 자른 면은 활모양임.
명문기와(刻劃文)는 대량의 문자 혹은 명쿤 각획문 부호가 시문된 잔와가 출토됨. 수키와에 많이 보이며, 소량의 암키오에서도 발견됨. 주요 시문 방법은 각획, 模印, 抹壓 등임. 각획 부호의 종류는 비교적 많으며 동물 문양과 상형 부호도 포함도니. 문자는 대체로 규범적이지 않음. 부분적으로 識讀이 가능함. 각획문(각획부호, 帶有文字) 수키와 잔편, 명문기와, 竪書 ‘小兄’기와, 竪書 ‘大用’ 명문기와, ‘九’자형 명문기와, ‘鳥’자 명문기와 등이 있음. 그 밖에 또 일부 인식되지 않는 문자가 있으며, 그 중 문자가 가장 많은 것은 6글자에 달함. 부호기와(刻劃 符號瓦)는 鳥頭文瓦, ‘井’자문 부호와, ‘+’자문 부호와, 파선문 부호와를 포괄함. 조두문와는 163건으로 각획과 模印 두 종류가 있음. 부호문기와( ‘井’자문 부호와)는 각획과 模印 두 종류가 있음. 그 밖에 또 일부 수량이 비교적 적고 형태가 특수한 각획문 기와가 출토되었음.
암키와 잔편은 195편으로 주로 각획과 抹壓 부호이며, 소량의 模印文도 있음. 명문기와와 각획 부호를 시문한 기와 두 종류가 있음. 명문기와는 10점으로 ‘中’, ‘天’ 두 종류가 식별 가능함.
역사적 의미
남쪽 2.5㎞에 고구려의 평지 도성인 국내성지가 위치함. 통구하와 마선구 연안 등 집안분지 일대에 고구려 시기의 적석묘와 봉토석실묘 등 1만2천여기의 고분이 분포함. 그 밖에 집안분지에는 광개토왕릉비, 동대자 유적 등을 비롯하여 고구려 시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함.
궁전지가 위치한 산성자산성 남쪽 2.6㎞에 고구려의 평지도성인 국내성지가 위치해 있음. 궁전지는 산성자산성 남부의 평탄하고 완만한 대지 상에 위치해 있으며 궁전지의 동쪽은 약간 낮은 완만한 구릉으로 2003년 당시 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었고, 궁전지의 서쪽은 평탄한 신기슭임. 작은 길을 따라 남문에 이를 수 있는데, 양자의 거리는 460m임. 궁전지 주변은 유적이 가장 밀집된 지역임. 병사주거지, 장대, 저수지 등이 궁전지 서남쪽 300-320m 거리에 분포함. 골짜기 맞은편 남쪽 대지상에서도 일찍이 철촉이 발견되었음. 궁전지 서남쪽 모서리에는 고구려시기의 봉토묘가 있는데, 발굴자는 궁전지 폐기 이후에 조영했을 것으로 추정했음.
사성자산성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를 보면.
첫째, 산성 내부에서 채집한 각종 유물을 고구려 시기로 편년하고, 고구려시대의 고성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제시됨(池內宏, 1938).
둘째, 고구려 시대에 축조한 것으로서 역사상의 소위 위나암성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시됨(關野貞, 1914). 처음에는 기원 3년(유리왕 22년) 위나암성으로 축조된 다음, 198년(산상왕 13) 성곽을 대대적으로 개축한 다음 환도성으로 불렀다는 견해가 제기됨(李殿福, 1982).
산성자산성의 평지도성인 국내성의 국사방어성이었다는 데에는 거의 모든 연구자가 동의하고 있음. 다만 초축시기에 대해서는 유리왕 22년 국내 위나암성 축조기사에 주목하여 기원전 3년으로 파악하는 견해와 산상왕 13년 환도성 축조기사에 근거하여 서리 198년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음.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대대적인 발굴조사(특히 2001-2003)에서 4세기 이전의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아 성곽을 처음 축조한 연대를 명확히 파악하기 힘든 상태임.
다만 문헌자료에 따르면 198년 환도성을 축조한 다음 3세기 전반 공손씨와 조위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50여년간 임시 왕성으로 사용하다가 246년 조위군에게 함락되었으며, 342년에도 전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리한 다음 임시 왕서으로 사용했으나 역시 함락됨. 종전에는 거의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342년 환도성 함락 이후 또는 427년 평양천도 이후 산성자산성이 쇠락하거나 폐기되었을 것으로 파악했음. 그렇지만 각 성문을 비롯하여 궁전지 등에서 5-6세기의 연화문 와당이 대량으로 출토됨에 따라 평양천도 이후에도 산성자산성이 계속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파악됨.
산성자산성 내부에 위치한 궁전지는 그 규모와 출토유물에 근거하여 20세기 전반부터 거의 모든 조사자와 연구자가 궁전지로 추정해 왔음. 특히 2001-2003년 대대적인 조사와 발굴을 통해 4층으로 조성된 인공대지에서 총 11기의 건물지로 이루어진 대규모 건물군을 확인했으며, 각종 기와와 와당 등 고급 건축자재를 출토했음. 특히 ‘小兄’이라는 고구려 관등이 새겨진 명문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는 小兄 관등을 가진 인물이 궁전지의 조성에 관여했음을 보여줌. 따라서 산성자산성의 궁전지는 종전에 파악한 대로 고구려시기의 궁전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파악함.
종래 중국학자들은 342년 전연에 의해 환도성이 함락된 기사를 근거로 산성자산성이 342년 이후 또는 427년 평양천도 이후 쇠락하거나 폐기되었을 것으로 파악했음. 이러한 견해에 따른다면 궁전지도 342년이나 427년 이후에는 쇠락했다고 보아야 하며, 현존하는 궁전지의 조영시기는 342년 이전으로 파악해야 함. 실제 2004년 보고서에서는 궁전지를 비롯한 산성자산성의 현존하는 성곽시설이나 건물지가 342년 전연의 침공에 의해 훼소되었다고 파악했음. 즉 현존하는 궁전지가 342년 이전에 조영되었다는 것임.
2004년 보고서에 따르면 궁전지는 생토층을 제외하면 모두 5개 층위로 이루어졌다고 함. 이 가운데 생토층 위에 위치한 ⑤층은 궁전지를 조성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다진 층위이며, ①층과 ②층은 궁전지가 완전히 폐기된 이후에 형성된 퇴적층과 경작층이라고 함. 결국 ③층과 ④층이 궁전지의 조영과 폐기과정을 보여주는데, 두 층위의 색깔이 선명하게 구별되고, 양자 모두 고구려시기의 기와편과 와당 등을 대량으로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현재의 궁전지는 크게 두 체차에 걸쳐 조영되고 폐기되었다고 파악됨.
그런데 궁전지의 ③층과 ④층에서 와당이 대량으로 출토되었지만, 4-5세기에 유행한 권운문와당이나 분할선이 있는 연화문와당은 출토되지 않았음. 연화문와당은 모두 6세기 초에 출현한 분할선이 없는 것이었음. 이로 보아 현재의 궁전지가 보고서의 기술대로 생토층 위에 처음 조성된 것이라면 그 초축 시기를 5세기 말 이전으로 소급하기는 힘듦. 즉 산성자산성은 3-4세기에 임시 왕성으로 사용된 바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왕궁이 조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현재의 궁전지를 국내성기에 축조했다고 보기는 어려움. 오히려 연화문와당의 출토양상으로 보아 현재의 궁전지는 평양천도 이후 그것도 6세기경에 조영했을 가능서이 높음. 산성자산성(환도성)은 평양천도 이후 폐기되거나 쇠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대형 건축물을 조영할 정도로 활발하게 사용되었을 것임. 이와 관련하여 평양천도 이후에도 국내성이 별도로서 도성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녔다는 사실이 주목됨. 즉 현존하는 궁전지는 평양천도 이후 별도에 조영한 행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됨.
자연환경
통구분지의 산성자산성 남부의 평탄하고 완만한 대지상에 위치함. 해발 254m.
산성의 남부에는 경사가 완만한 평탄지와 산비탈이 많이 형성되어 있는데, 대체로 해발 310m 이하로서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음. 2002년 5월 조사시 유적의 분포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남부 대지를 크게 4구역으로 구획함.
서쪽 기슭 전체를 Ⅰ구역으로 설정. 동쪽 기슭은 자연 계곡을 경계로 3구역으로 구획하였는데, 남벽 부근 대지는 Ⅱ구역, 궁전지 주위는 Ⅲ구역, 장대 및 저수지 부근은 Ⅳ구역으로 설정함. 이 가운데 궁전지는 적석묘, 봉토묘 등과 함께 Ⅲ구역에 위치함.
궁전지의 동쪽은 약간 낮은 완만한 구릉으로 2003년 현재 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었고, 궁전지의 서쪽은 평탄한 산기슭임. 작은 길을 따라 남문에 이를 수 있는데, 양자의 거리는 460m임.
궁전지 남북 양측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골짜기인데 북쪽 골짜기는 비교적 얕아서 2003년 현재 동벽으로 가는 오솔길로 사용되고 있었음. 남쪽 골짜기는 비교적 깊은데 바닥에 샘이 있어서 항상 물이 솟아나며 산간의 계곡물과 합쳐져서 남문을 경유해 통구하로 흘러듬.
궁전지 주변은 유적이 가장 밀집된 지역임. 병사주거지, 장대, 저수지 등이 궁전지 서남쪽 300~320m 거리에 분포함. 골짜기 맞은편 남쪽 대지상에서도 일찍이 철촉이 발견되었음. 궁전지 서남쪽 모서리에는 고구려 시기의 봉토묘가 있는데 발굴자는 궁전지 폐기 이후에 조영했을 것으로 추정했음.
유물정보
鐵鏃 26점, 鐵鏈接 2점 외 鐵器 68점, 金銅器 10점, 罐 1점, 盤 1점, 盆 1점, 盅 1점 외 土器 4점, 瓦當 47점, 瓦 97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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